쉴레의 친구 오젠은 무대에서 기괴한 제스처로 연기했는데 

 
쉴레는 비엔나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는 1910년 여름을 친구 에르빈 도미닉 오젠과 그의 애인 모아(예명이다)와 함께 크루마우에서 보냈는데 오늘날 체코슬로바키아의 체스키 크룸로브를 말한다.

크루마우는 쉴레 어머니의 고향으로 어머니는 종종 그곳 친척집에 묵다 오곤 했다.
쉴레가 비엔나를 떠나기 전 페슈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는데 그는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난 비엔나를 꼳 떠나기 바란다네.
이곳은 얼마나 고약한가!
모든 사람이 날 시기하고 모함하네.
대학 동창들이 사악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네.
비엔나에는 그늘이 있어.
도시는 어둡고 모든 것이 천편일률적인 것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지.
난 홀로 있기를 바래.
난 보헤미안 숲으로 가고 싶어. 5, 6, 7, 8, 9, 10월.
난 새로운 것들을 보고 연구해야만 하네.
난 깊은 물과 우지직우지직거리는 나무와 회오리바람을 맛보고 싶다네."

쉴레의 친구 오젠은 무대에서 기괴한 제스처로 연기했는데 성적 제스처에도 관심이 많았다.
무대에서의 그의 다양한 연기가 쉴레에게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쉴레는 평범한 인간의 행위보다는 무대에서의 연기처럼 어떤 목적을 갖고 강렬하게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에 관심이 있었다.

친구 오젠을 그린 <에르빈 오젠 Erwin Osen>(1910), <마임 반 오젠 Mime van Osen>(1910), <펠트모자를 쓴 남자(에르빈 오젠) Man in a Felt Hat>(1910), 그리고 오젠의 애인을 그린 <댄서 모아 Dancer Moa>(1911)를 보더라도 쉴레는 깡마르고 뼈마디가 불쑥 튀어나온 모델을 선호했는데 그런 육체에서는 강렬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오젠은 화가이자 배우로서 모아와 함께 공연하곤 했다.
쉴레는 <페트모자를 쓴 남자>에서 오젠의 몸을 생략하고 모자를 쓴 얼굴과 뒤틀린 왼손만 묘사했다.
그는 이듬해 오젠의 파트너 <댄서 모아>를 무대의상을 입은 채 돌아 서서 뒤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무대에서의 퍼포먼스 장면을 스냅 사진 찍듯 표현한 것들이다.

클림트도 무대 연기자들을 통해 다양한 제스처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 있었으며,
코코슈카는 서커스에 등장하는 인물과 광대들로부터 제스처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는데 쉴레는 좀 더 파격적인 제스처를 통해 표현의 강렬함을 고조시키려고 했다.
 연기자 오젠과의 교류가 쉴레로 하여금 독특한 회화를 발견하게 했다.
오젠은 1913년에 비엔나 스타인호프 정신이상자 보호소에서 환자들의 행위들을 연구하여 자신의 병적 연기에 활용했는데 그의 연구가 쉴레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쉴레의 자화상과 초상화에 나타난 병적 제스처는 잠재의식의 표현으로 1910년부터 이런 그림을 그렸는데 모델은 정상적인 사람들이지만 그런 제스처를 취하게 했고,
모델들 중 일부는 거의 미친 사람의 제스처를 취했다.
그가 1910년에 그린 초상화는 열서너 점 가량이다.
그는 주로 배경을 여백으로 열어놓고 모델의 표정, 손짓, 몸짓으로 표현을 두드러지게 했다.
<서 있는 소녀>와 <팔을 엇갈리게 한 누드 소녀>는 여동생 게르티를 모델로 한 것들이고 <손을 들고 무릎을 꿇은 남자 누드>와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남자 누드, 뒷모습>은 자신을 모델로 한 것들이다.

쉴레는 초상화를 통해 비정상적인 태도로 관람자들을 바라보았고 관람자 또한 그의 모델을 통해 쉴레의 비정상적인 정신세계를 들여다보았다.
<막스 오펜하이머의 초상>에서는 마귀와도 같은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모델에 대한 다양한 포즈의 주문은 배우들에 대한 연출자의 요구와도 같아 퍼포먼스의 일면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 자신이 거울 앞에서 갖가지 제스처를 취한 데서 이미 퍼포먼스를 예고하고 있었는데 무대 위에서 행하지 않았을 뿐 캔버스를 통해 퍼포먼스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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