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의 작업실을 처음 방문하던 날 

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에곤 쉴레가 오스트리아의 대가 클림트를 만난 것은 향후 비엔나 화단에서의 입지를 만들어가는 데 주요한 사건으로 작용했다.
쉴레는 그때 불과 17살이었고 클림트는 45살로 28살이나 많았다.
28해의 짧은 인생을 산 쉴레가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고 유일하게 존경과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클림트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쉴레가 클림트를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07년 어느 날 카페에서 만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엔나의 카페에서 클림트를 만나기는 쉬운 일이었다.
유럽의 예술은 부분적으로 카페에서 형성되었으며 파리의 카페미학은 인상주의를 태동시켰다.
카페에는 국내외의 신문과 잡지가 있어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예술가들이 새벽까지 기염을 토하며 토론을 할 수 있었으며,
당구대가 있어 무료함을 달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약속 없이도 예술가들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어느 카페에 가면 누가 있고 어느 카페의 단골이 누구라는 것은 예술가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었다.
아카데미는 지리멸렬한 전통으로 예술가들을 억눌렀지만 모든 실험이 가능한 카페의 자유방임주의 미학은 그들의 사고의 폭을 한없이 확장시켜주었다.
그리고 외상 술을 마시고 나중에 한꺼번에 갚아도 되는 경제적 아량도 있었다.
술을 좋아하고 당구를 좋아하던 쉴레가 카페에서 클림트를 만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클림트와의 만남은 쉴레에게만 감동이었던 것이 아니라 클림트에게도 감동이었다.
클림트의 작업실을 처음 방문하던 날 쉴레는 드로잉 몇 점을 갖고 가서 대가의 솔직한 고견을 듣고 싶어 했다.
클림트는 "음, 좋아. 매우 좋아!"라고 칭찬했다.
과분한 칭찬에 부끄러워하며 쉴레는 자신의 드로잉 몇 점을 줄 테니 클림트의 드로잉 한 점을 달라고 제의하자 클림트는 "왜 내 것과 바꾸려고 하느냐? 자네가 나보다 더 잘 그리는데 ..."라고 하면 기꺼이 드로잉을 교환했으며 그를 경제적으로 도울 겸 몇 점을 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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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제발 누구에게도 내가 너의 선생이라고 말하지 말려므나!"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1906년 10월 쉴레는 비엔나의 미술학교로 진학했는데 클림트가 졸업한 응용미술학교와 라이벌이 되는 학교였다.
쉴레는 미리 정해진 주제들만을 학생들에게 그리도록 강요하는 아카데미 교육에 매우 실망했다.
1874년에 부임한 쉴레의 담임교사 크리스티안 그리펜케를은 엄격한 보수주의자로 역사화, 벽화 등 고전의 모사와 실물 데생을 통해 기교를 익히는 전통주의 방법으로 가르쳤다.
쉴레에게 이런 교수법이 여간 갑갑한 노릇이 아니었다.
교사와 학생으로서의 그리펜케를과 쉴레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그리펜케를은 쉴레에게는 "사탄이 너를 나의 클래스에 토해 놓았구나!"라고 소리치는가 하면 "제발 누구에게도 내가 너의 선생이라고 말하지 말려므나!"라고 했다.

그리펜케를과의 불화로 결국 쉴레는 아카데미를 자퇴했다.
3학년을 마친 1909년 4월 아카데미를 자퇴했다.
그리펜케를의 가르침을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몇몇 학생이 함께 자퇴했는데 아카데미 교육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곧 전통미술에 대한 불신을 의미했다.
당시 쉴레가 그린 그림을 보면 아카데미의 관점에서 오브제나 모델을 모사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본 장면이나 모습으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자퇴하기 얼마 전 그는 큰아버지 집을 나와 (그는 그동안 큰아버지 집에서 먹고 자고 했다) 아틀리에를 얻고 독자적으로 생활했고 큰아버지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매달 생활비를 지불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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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쉴레와 여동생
 

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에곤 쉴레와 4살 아래 여동생 게르티의 관계는 보통 남매의 관계가 아니었다.
게르티를 모델로 한 많은 누드 그림에서 이를 알 수 있는데 그녀는 늘 오빠를 위해 포즈를 취하곤 했다.
쉴레의 아버지는 남매의 관계를 우려했다.
하루는 남매가 방문을 잠그고 있는 것을 의심스럽게 생각하여 방문을 부수고 들어가보니 마침 에곤은 게르티와 필름 현상을 하고 있었다.
에곤이 16살 때는 게르티와 기차를 타고 트리스테까지 가서 호텔 방에 묵은 적이 있는데 그곳은 아버지 어머니가 신혼여행 때 묵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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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아주 이상한 여인이었습니다  

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아버지를 잃은 14살의 에곤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누이의 죽음과 더불어 에곤의 어린 시절은 뭉크와 유사한 데가 있다.
에곤은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살았으며 1913년 매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느 누구도 자신이 왜 아버지가 계시던 장소들을 방문하면서 고통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에곤은 귀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이 무덤이나 그와 유사한 것들을 그리는 이유는 귀신이 자신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친척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에곤의 그같은 행동을 몹시 우려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자신의 일대기를 쓴 평론가 아르투어 뢰슬러에게 에곤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아주 이상한 여인이었습니다.
...
그분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별로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를 이해하거나 사랑했다면 좀더 헌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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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쉴레의 에로티시즘 
 

클림트가 1904년에 자위행위를 하는 여자를 묘사한 데서 예술적 아이디어를 얻은 쉴레는 1910년 관람자로 하여금 여자의 음부를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포즈를 달리 해서 그렸다.
당시만 해도 누드는 화가들의 보편적 주제였지만 모델의 음부를 직접 볼 수 없게 몸을 옆으로 틀게 한다든가 손으로 가리게 하는 등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을 피했다.
쉴레는 이런 금기를 깨고 과감하게 관람자의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자신의 성기가 드러난 누드를 주제로 여러 점 그리기도 한 그는 1911년에는 자위행위하는 모습마저 폭로하여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쿠르베와 로댕도 여자의 음부를 관람자를 향해 그린 적이 있지만 쉴레의 그림은 두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성의 사슬을 완전히 끊는 것이었다. 1911년 이후 그의 누드는 더욱 과격해졌다.
섹스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911년 이후 그의 누드는 더욱 과격해졌다.
섹스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섹스는 그에게 해결되어야 할 커다란 과제였다.
성적 충동은 누구에게도 있지만 인류는 이를 감추는 문화를 형성하고 섹스를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했다.
생리적으로 자연스러운 이런 충동을 억제하는 것에 쉴레는 반발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춘화로 여겼지만 친구들과 그의 그림을 수집하던 컬렉터들은 그가 춘화작가가 아님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쉴레는 비엔나 사람들의 도덕적 이중성을 고발하려고 했다.

뢰슬러는 말했다.

쉴레의 에로티시즘에도 불구하고 그는 저열한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
그가 종종 에로틱한 장면을 그린 것은 아마 섹스에 대한 신비감 때문이었을 것이며
...
끊임없는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로운 느낌은 그에게 으슬으슬한 것으로 어려서부터 있었으며 친구들과 어울릴 때도 그가 명랑할 때도 가족과 함께 있을 때도 그는 외로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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