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생명은 왜 신성할까

 

 

 

 

철학자들은 이런 문제에 부딪힐 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기본적인 문제를 깊이 생각해본 뒤 문제에 다가선다. 우리도 두 가지 문제를 먼저 생각해본 뒤 문제가 되는 상황을 다루어보겠다. 한 가지 질문은 어떤 생명이 내재적 가치를 지니는가(말하자면, 다른 사물의 가치를 압도하거나 자신의 생명에 대한 소유권을 본래부터 지녔는가)다. 정상인이라면 이러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그런데 동물, 뱃속 태아, 지적 장애인, 영구히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은 어떠할까? 그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는데, 무엇이 인간의 생명에 가치를 부여하는가다. 예를 들어, 동물의 생명에도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보려 할 때 확실한 방법은 인간의 생명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동물의 생명에도 존재하는가를 자문해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생명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이 문제를 먼저 생각해보자.
우리는 너무나 뻔하고 많은 생각을 자아내는 한 가지 사실을 살펴본 바 있다. 인간을 다른 사물을 대하듯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단순한 습관이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인간에 대한 특별한 대우를 정당화하거나 요구하는 인간의 특징을 찾아내야 한다. 총 잡은 사내는 이러한 특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도덕적 지위조차 누리지 못하는 일반 사물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면서 인간의 생명에만 깃들어 있는 특징을 찾아내야 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생명의 신성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강력하게 내세우는 점은 인간에게는 가장 진화한 동물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지적 풍부함과 잠재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에 대한 소유권과 더불어 자신의 행동을 방향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동물은 괴로움과 즐거움, 그리고 그 밖의 느낌을 의식하는 능력이있다는 점에서 식물과는 다르다. 식물은 한마디로 그냥 무시당하며 살다가 시들어 죽고 마는 존재일 뿐이다. 식물에 의식이 있다면 식물에게 나쁜 일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식물은 명백히 그런 상태를 나쁜 것으로 경험할 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망아지를 학대하면 망아지는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망아지 같은 동물은 식물과 달리 더 좋고 더 나쁜 것을 안다. 스스로 좋고 나쁨을 경험하는 것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건 인간도 마찬가지지만, 인간의 생명을 신성시 여기는 이론가들은 단순히 이 사실만으로는 인간의 특별한 능력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사랑에 빠지고, 게임을 즐기고, 연설하고, 나라를 세우며, 자신의 근원을 알고, 신앙에 관해 사색하고, 고기를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하고, 그 밖의 여러 가지 행위를 할 수 있다. 인간은 괴로움과 즐거움뿐 아니라 놀라움과 무서움, 기쁨과 자랑, 수치와 죄의식, 질투와 희망 같은 것을 안다. 이런 까닭에 인간은 우주에서 특별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사물에 대한 경험을 쌓고, 동식물과 달리, 더 크고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활동에 참여할 줄 안다. 더 중요한 건, 인간은 어떤 일에 관해 심사숙고하면서 다른 사물이나 현상을 참작한 뒤 결심할 줄 안다는 점이다.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위해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제어할 수 있기에 자기 생명에 대한 소유권을 지닐 자격이 있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인간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것이 특별히 나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행위는 복합적이고 경이에 가득 차 있는 것(인간의 생명은 말 그대로 놀라운 존재다. 그에 깃들어 있는 복합성과 능력이야말로 놀라움의 원천이다)을 파괴하는 짓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없애는 일은(이런 말을 덧붙이려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그 사람의 생명을 제 것인 양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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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의 사상은 무엇입니까?

 

 

장자莊子(기원전 369~289년경)의 이름은 주周, 송宋나라 몽蒙 지방에서 태어나 맹자와 동시대에 노자老子의 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노자老子와 마찬가지로 그 실재성은 의심스럽습니다. 전국시대 말기, 도가의 사상가들이 <장자莊子>를 편찬할 때, 이것을 장주莊周에게 가탁假託하여 <장자>라 명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장자>는 공자孔子, 맹자孟子보다 노자와 함께 장자가 존중되기에 이르렀던 한대 초기에, 전국 말 이래의 도가의 논저論著를 부가하여 성립한 것으로서, 통일된 체계는 없지만 도가 사상의 역사적 전개를 볼 수 있습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장자>가 원래 52편이라고 적혀 있으나 현존하는 <장자>는 33편(내편內編 7, 외편外編 15, 잡편雜編 11)뿐입니다. 전통적으로 장자 자신이 이 책의 내편을 썼고, 그의 제자와 같은 계열의 철학자들이 외편과 잡편을 썼다고 봅니다. 장자 자신이 어느 부분을 직접 저술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찾기 어려우나, 내편의 ‘소요유逍遙游’편, ‘제물론齊物論’편, ‘대종사大宗師’편이 장자 자신의 사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현존하는 <장자> 33편 중, 내편 7편이 장자의 저술이며 나머지는 문하생들이 지은 것이라 합니다. <노자老子>가 철학적 시의 형식을 빌리고 있는 데 반해 <장자>는 환상적인 비유와 풍부한 우언, 탁월한 문체로 인해 중국 문인들에게 문학적, 미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장자는 세상의 만물만상이 무한히 변화 변동하는 도道의 무한한 변화 속에 처해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도를 영원한 생성의 실체로 파악했으며, 도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지식은 단지 상대적인 의미만 가질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자> ‘천하天下’편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장주莊周는 장자의 본래 이름입니다.

 

실제는 항상 홀연히 흘러가니 일정한 형태가 없다. 모든 존재는 무상하게 변화해가는 것이다. 무엇이 삶이고 무엇이 죽음인가? 나는 자연과 함께 가는 것인가? 정신은 어디로 움직여가는 것인가? 그들은 훌훌 어디로 가며, 총총히 어디로 떠나버리는가? 모든 존재는 눈앞에 펼쳐있으되, 돌아갈 곳을 모르는구나! 옛날 도술道術의 이런 면을 장주莊周는 듣고서 기뻐하였다. 그는 터무니없는 환상, 황당하기만 한 이야기, 끝없는 변론으로 때때로 방자하게 사설을 늘어놓지만, 편견을 고집하지 않았고, 한 면만으로 자기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세상이 더러워서 정중한 말을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리멸렬支離滅裂하여 앞뒤로 사리가 어긋나는 말巵言(치언)로써 변화무궁하게 담론하고, 옛 성현의 말씀重言으로 진실을 믿게 하며, 비유寓言로써 도리를 펼쳤다. 그는 홀로 천지자연과 더불어 정신을 교류했으나, 뽐내어 만물을 경시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옳고 그름是非을 따지지 않고서, 세속에 섞여 살았다. 그의 글은 비록 장대하지만 완곡하여 어그러짐이 없다. 그의 말이 비록 들쭉날쭉하고 괴상해도 읽어볼 만하다. 꽉 들어차있어 끝날 줄을 모른다. 그의 정신은 위로는 천지의 조물자造物者와 함께 노닐고, 아래로는 삶과 죽음, 처음과 끝을 넘어서 있는 자연과 벗이 되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원대하고 넓으며, 또한 깊고 무한하다. 그의 종지는 조화를 이뤄서 위로 천도天道와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변화에 적응하고 모든 존재를 해석함에 있어서 그의 이론은 무진장하다. 그 이론의 전개는 끝이 없으며 홀홀망망忽忽茫茫하여, 모두 파악될 수 없도다!

 

장자에 따르면, 인생은 유한하나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무한하며, 유한으로 무한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언어, 인식 등은 자신의 관점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내린 결론이 모든 것에 대해 동등하게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주관론은 ‘물고기의 즐거움魚之樂’이라 불리는 다음 유명한 우화에서 보듯이 일종의 감각적 전체론으로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다음은 <장자>의 ‘추수秋水’편에 있는 내용인데 장자의 입장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장자와 혜자가 강둑에서 산책하고 있었을 때,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밖으로 나와 즐겁게 헤엄치니, 저것이 물고기의 진정한 즐거움이겠지.’

혜자가 말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장자가 말했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가?’

혜자가 말했다.

‘나는 자네가 아니기 때문에 자네가 무얼 아는지 몰라. 마찬가지로, 자네도 물고기가 아니니, 자네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네.’

장자가 말했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 보세. 자네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지. 이 질문을 했을 때, 자네는 이미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어. 나는 이 강가에 서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지.’

 

<장자>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는 내편 ‘제물론齊物論’편에 나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입니다. 어느 날 장자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자신은 나비가 되어 꽃밭을 날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꿈을 깨어보니 자신은 장자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순간 장자는 ‘나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장자라는 인간이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이로부터 꿈과 현실을 구분 짓는 것 자체가 의미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호접지몽은 도가道家 사상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자가 꾼 이 꿈을 장주지몽莊周之夢이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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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다리 손은 양陽의 근본이다

 

 

팔은 어깻죽지, 팔죽지, 팔굽, 팔뚝, 손목까지를 말하며 다리는 넓적다리, 허벅지, 무릎, 종지뼈, 장딴지, 정강이를 가리킵니다. 인체 중에서 팔과 다리 그리고 손은 모두 양陽의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항상 가만히 있질 못하고 움직이려 하며 힘쓰기를 좋아합니다.

팔다리를 쓰지 못하고 나른하면서 아픈 것은 비위脾胃의 정기가 잘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脾와 위胃는 막을 사이에 두고 서로 접해 있으면서 진액을 돌리는 기능을 하는데,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팔다리가 음식물의 기를 받지 못해 힘줄과 뼈와 살에 기운이 빠지게 됩니다. 팔과 다리에 부종edema이 올 때 얼굴이 누렇게 되면서 소화불량 증세를 보이는 환자를 많이 보게 됩니다. 부종은 조직 내에 림프액이나 조직의 삼출물 등의 액체가 고여 과잉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피부와 연부 조직에 부종이 발생하면 임상적으로 부풀어 오르고, 푸석푸석한 느낌을 갖게 되며, 누르면 피부가 일시적으로 움푹 들어갑니다. 비위의 작용이 곧바로 팔과 다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비장의 기능은 실해도 허해도 팔다리에 병이 옵니다. 비장이 실하면, 기능이 이상 상태로 항진되더라도 팔다리를 들지 못하는데, 이 병은 기름진 음식을 너무 많이 먹었을 때 생깁니다. 비장이 허해서, 즉 기능이 이상 상태로 약해서 팔다리를 쓰지 못하는 건 위장으로 진액을 잘 돌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긴 대로 병이 온다>의 저자 조성태는 이때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십보탕十補湯, 십전산十全散으로도 불림) 등으로 정기를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십전대보十全大補라는 처방명은 모든 것十을 온전하고全 지극하게大 보補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중국 송宋나라 태종 때 진사문陳師文 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지은 의서 <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劑局方>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후 허준許浚, 유완소劉完素 등의 저명한 의학자들이 저술한 의서에서 기혈氣血을 대보大補시켜 허로虛勞를 치료한다고 수록되어 있습니다. 즉 십전대보탕은 몸을 전반적으로 보양補養하는 대표적인 처방으로 사용되어왔고 현재도 각종 허약성 질환에 널리 활용되고 있습니다.

조성태는 팔다리와 비장의 관계는 소화 작용이라는 연결 고리를 중심으로 밀접하게 이어진다면서 비장이 건강해야 음식물을 잘 소화시켜 팔다리가 튼튼해지고, 팔다리를 자주 움직여주고 운동을 해야 비장의 소화 기능 역시 좋아진다고 말합니다. 한의학에서는 팔다리를 성체成體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팔다리를 잘 움직여 소화 작용을 원활히 하면 음식물로부터 충분한 기를 받아들여 건강한 몸體을 이룰 수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은 팔다리가 편히 쉬어야 하는 저녁이나 밤에는 먹지 않는 것이 좋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할 무렵인 아침에는 많이 먹어도 좋습니다.

팔다리 병은 주로 비위와 관련해서 오지만 체액이 위胃에 머물러 소리를 내는 담음痰飮이나 신경성, 기혈 순환 장애, 과음, 풍한습에 의해서도 불편한 증상이 생깁니다. 담음이 원인으로 아픈 경우는 팔다리와 가슴, 잔등, 허리, 엉치 등으로 은근하면서도 참기 어려운 통증을 느끼면서 힘줄과 뼈까지 땅깁니다. 이것은 담이 중완中脘(위胃가 있는 자리)에 막혀서 비기脾氣가 잘 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팔다리만 아니라 손바닥을 통해서도 위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손등보다 손바닥이 유난히 뜨겁고 열이 나면 위가 별로 좋지 않다는 표시입니다. 손바닥이 뜨거운 사람은 특별히 식습관에 주의해야 하고, 위의 기능을 잘 다스려주어야 합니다. 손바닥보다 손등이 더 뜨거운 건 나쁜 기운이 아직 몸속까지는 들어가지 않은 것이므로 함부로 해열제를 쓰거나 독한 약을 복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조성태는 요즘 수지침이 유행하는데 굳이 수지침이 아니더라도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이나 두 손을 마주 비비는 것만으로도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동작을 수시로 하면 손바닥에 있는 경혈들을 자극하여 기혈이 잘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발 역시 평소에 안마를 잘 해주면 건강에 좋습니다. 특히 용천혈湧泉穴(발가락을 모두 오므렸을 때 발바닥 앞쪽으로 움푹 들어가는 곳)을 중심으로 자주 주무르면 두통이나 구토, 설사, 고혈압 등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발을 매일 닦아 청결 유지와 함께 혈액 순환이 잘 되도록 하고 늘 따뜻하게 해주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손톱은 간담의 영화榮華를 누리는 곳입니다. 따라서 간담이 허하면 손톱이 얇고 윤기가 없으며 잘 부러집니다. 이런 손톱을 가진 사람은 무서움을 잘 타고 목에서 가래가 자주 끓으며 편도가 많이 붓는 특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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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성스러운 생명

 

 

 

 

 

“그러나 양심에 비추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돼!” 당신의 결론이 이렇게 나온다면, 이것은 바로 인간을 대하는 태도와 인간이 아닌 그 밖의 ‘사물’을 대하는 태도 사이에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뜻이 된다. 예를 들어, 의자를 생각해보자. 이 나무의자는 여러 해 동안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지만, 이제 몸체와 다리 사이가 벌어져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몇 달 안 가서 못쓰게 되겠기에, 이를 고쳐서 쓰거나 새 의자를 구해야 한다. 어찌할 것인가? 의자를 고치는 데 얼마가 드는지, 새것을 사는 데 얼마가 드는지를 알아봐야겠다. 그동안 이 의자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생각이 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한 가지 커다란 가정을 하게 된다. 헌 의자를 버리고 새것을 구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권리에 속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가게에서 봐둔 새것이 썩 마음에 들기에 순전히 자신의 권리로 헌것을 버려도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인간을 대하는 태도와 의자 같은 물건을 대하는 태도 사이에 기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자 같은 물건을 대하는 태도는 두 가지 면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구별된다. 무엇보다 우리는 의자가 그 사용가치(의자를 쓰는 데서 얻는 가치)를 다하면 가치가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쓸모없는 것이 되면 가치가 없어진다. 버려도 된다. 총을 잡은 사내가 “간단히 죽여버리자”고 제안하던 예에서 충격적인 사실은 인간을 그냥 버려도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첫 번째 논리와 관련 있기도 한데 의자를 재산이라고 보는 점이다. 내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언제라도 버리기로 마음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소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어떤 존재가 나의 소유물이라면, 그에 관한 결정은 대체로 나의 권리에 속한다. 그것을 계속해서 쓸 수도 있고, 부술 수도 있으며, 그것으로 다른 걸 만들어도 좋고, 팔아치워도 된다. 하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만한 권리를 가질 수 없지 않을까?
앞의 예에서, 우리는 인간을 함부로 처분할 수 없다는 점에 생각을 같이한다고 가정하자. 즉 다른 사물과 달리 인간은 특별한 종류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인간은 단순히 바꿔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과 통한다. 이렇게 보면 개개의 인간은 다른 사물과는 다르게, 특별한 개인으로서 대접을 해야 하고, 그런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은 두 번 다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을 더 잘 이해하려면,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어, 별일 아니야, 또 낳으면 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는 있을 수 없는 개체를 잃었고, 그 자식이 지닌 특별함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는 개개인을 사랑하기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하라고 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개개인을 성스러운 것으로 대하는 것은 곧 예수의 사랑을 본받는 일이다. 기독교 신앙이 아니더라도 단순히 도덕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인간은 그들을 부리거나 쓰는 데서가 아니라, 그 모두를 뛰어넘는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기에 인간의 가치를 결과만으로 저울질해서는 안 되며, 인간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인 혹은 내재하는 가치를 지닌다. 인간은 스스로 가치를 지니며, 그 가치는 그 사람의 쓸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본질적인 혹은 내재하는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될 행위가 왜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 하여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인간의 가치는 우리가 다른 이에게 할 수 있는 행위에 한계를 설정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을 지닌 까닭에, 자기 이익을 위해 저질러서는 안 될 특정 행위를 정해놓은 셈이다. 물론 총을 든 사내는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곤궁한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서 채권자를 해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사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내에게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인간의 가치란 것을 알지 못한다.
인간이 그 무엇에 비할 수 없는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은 두 갈래 주장으로 나타나는데, 이에 관해서는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의무론과 결과주의론에 바탕을 둔 도덕론의 차이를 살피면서 볼 것이다. 한편으로, 인간의 가치는 다른 모든 것의 가치를 압도하는 까닭에 인간의 행위 자체에 일정한 제약이 설정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생명의 신성함을 인정하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의 가치를 초월하여 그 이상 가치 있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예를 들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지닌 가치가 바로 그것이다. 또 한편으로, 생명이 신성하다거나 인간의 생명에 가치가 있다는 것은 곧 인간 생명의 가치를 단순히 우리가 누리는 다양한 가치 가운데 하나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은 다른 것에 견줄 수 없는 고유의 가치를 지녔을 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에 대한 권위를 지닌다. 생명을 지녔을 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생명에 대하여,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즉각적인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나쁜 까닭은 그 행위가 단순히 크나큰 가치를 지닌 어떤 것을 파괴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죽이는 사람에게 그럴 권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사용상 가치와 내재적 가치의 차이를 옳게 설명하려면 내재적 가치를 지닌 생명은 ‘단순한 사물’이 지니지 못한, 자기 생명의 소유권을 지니고 있음을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별의 문제를 좀 더 살펴보자.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한계를 설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권리를 지니기 때문이다. 내게 어떤 것에 대한 권리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나를 특정한 방식으로 대우해야 하거나 특정한 방식으로는 대우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예를 들어, 내게 투표할 권리가 있다면 국가는 내게 투표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부정적으로 말하자면 국가는 내가 투표하는 것을 막지 말아야 하고,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국가는 내게 권리행사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내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면 국가는 내게 교육받을 기회를 줄 의무가 있다. 내게 언론 자유의 권리가 있다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발표하거나 출판하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또한 내가 내 생명에 권리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내 생명을 앗아가서는 안 될 의무가 있다. 권리가 사람들에게 무엇이 허용되지 않는지를 알려줄 때, 그들은 ‘손대지 마시오’라는 경고문 앞에 선 것처럼 행동한다. 권리가 어떤 것을 놔두라고 명령한다. 본질적이건 내재적이건, 인간의 생명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말은 인간이 곧 생명의 권리를 지닌다는 말과 같다.
우리가 문제 삼는 몇몇 상황들을 돌아보면, 각각의 상황마다 내재적 가치와 관련되는 문제를 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낙태를 생각하는 부부는 무엇보다 낙태를 하는 것이 총 잡은 사내를 시켜 채권자들을 죽이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놓고 고민할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의 생명을 없애야 할까? 그렇다면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닐까? 동물문제에서 비슷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동물의 고기를 먹지 않아도 좋을 만한 대안이 있음에도 계속해서 육식한다면, 우리는 사용 가치만을 고려하여 동물을 의자나 테이블 다루듯 하는 셈이다. 그런데 동물에는 오직 사용 가치만 있을까? 아니면 인간과 공통되는 어떤 것이 있어서 우리가 마땅히 존중해야 하는 걸까? 마지막으로 안락사의 상황에도 똑같은 기본 문제가 깃들어 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정부의 재정으로 건강지원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어서 그리 큰돈을 들이지 않더라도 환자 둘 다 목숨을 지탱할 수 있다. 병원과 납세자가 부담하는 비용과 더불어 환자들을 돌보는 데 드는 비용이 문제되기도 하지만, 사정이 위중한 상태에 이른 터에, 이런 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할 사람은 흔치 않을 터이다. 인간의 생명에 내재적 가치가 있다면,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환자의 생명을 멈추게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되는지, 아니면 환자의 생명을 환자 스스로 돌보도록 해야 할 것인지가 문제다. 자기 이익을 위해 건강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쁜 일임이 분명한데, 혼수상태에서 깨어날 가망이 없거나 심각한 뇌상을 입어 지적으로 쇠퇴한 환자의 생명을 멈추게 하는 것도 그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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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의 사상은 무엇입니까?

 

 

노자老子는 주周나라 말기의 사상가로 도가道家의 시조입니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으로 주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史라는 벼슬을 지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노자가 주나라가 쇠퇴하여 서쪽으로 떠날 적에 영윤令尹 희喜라는 사람의 요청으로 지었다고 전해지는 <노자老子> 혹은 <도덕경道德經>은 약 5천자, 81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이라 합니다. 노자가 실존한 인물인지, 가공의 인물인지에 대한 후대의 논란이 분분한 것처럼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요약되는 <도덕경>도 한 사람이 한꺼번에 저술했다는 관점과 도가학파의 손에 의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당시의 여러 사상을 융합시켜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으로 나뉩니다.

<도덕경>의 내용은 대부분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상황을 반영하는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상당히 발전한 무렵부터 한漢대까지의 도가 사상의 소산所産입니다. <도덕경>은 유가儒家, 묵가墨家, 그리고 제자백가의 사상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중심 사상은 인의仁義 등 도덕이나 지혜에 의해 인위적으로 백성을 지배하려고 하는 유가(주로 맹자)에 대하여, 도덕, 지혜 그리고 지배의욕을 버리고 무위자연에 의해 지배하려는 정치사상과, 동일하게 무위무욕無爲無欲으로 남에게 겸양하는 것에 의해 성공, 보신保身하려는 처세술입니다.

우주 만물의 규율, 원리, 본원本源, 본체 등을 가리키는 도道가 중국 철학의 중요 범주로서 본격적인 철학적 범주로 사용된 것은 노자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장老莊 사상에서 표방한 도는 천지의 시작이며, 만물의 어머니로서의 우주의 생성 원리이자 대원칙입니다. 노장에 의하면 만물은 모두 이 도에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본질에 있어서 평등하며 차별이 없다고 하여 모든 상대적인 가치평가, 가치판단을 배격했습니다. <도덕경> 4장에 도의 개념이 있습니다.

 

도는 텅 비어있는 듯하지만

그 작용함은 아무리 해도 끝이 없다.

깊고 그윽하여 만물의 근원과 같다.

만물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깎아주고

그것들의 어지러움을 풀어주며

그것들의 빛과 조화하고

그것들의 티끌과 동화한다.

깊고 고요하여 혹 있는 듯 없는 듯한다.

나는 그것이 누구에게서 태어난 자식인지 모르나

상제보다 앞서 생긴 듯하다.

 

노장에 의하면 인간과 사회생활의 모든 불행은, 사람들이 도의 법칙에 역행하는 인의仁義, 겸애兼愛 등과 같은 자의적인 인위적 규범 틀을 만들어서 자신과 남을 구속하는 데서 오기 때문에 인간은 인위人爲를 버리고 자연스런 무위無爲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덕경> 38장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도道가 사라지고 난 뒤에 덕德을 말하고,

덕이 사라지고 난 뒤에 인仁을 말하며,

인이 사라지고 난 뒤에 의義를 말하고,

의가 사라지고 난 뒤에 예禮를 말한다.

무릇 예란 진실함과 믿음이 옅기 때문에 난동의 시작인 것이다.

 

<도덕경> 1장에는 “크나큰 도의 원칙이 무너지자 인의仁義의 도덕규범이 생겨난 것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도덕경> 19장에는 “성인의 법도와 지식을 잘라버리면 백성의 이로움은 백배나 늘어난다. 인의의 도덕규범을 표방하지 않으면 백성은 다시 효도하고 사로 사랑하게 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인의仁義는 맹자가 주장한 개념으로 도가가 이를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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