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와 지방紙榜



한국인은 봉분封墳이 완성되면 흔히 성분제成墳祭(봉분제封墳祭라고도 한다)라 하여 혼백魂帛을 모시고 산소 앞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성분제가 끝나면 혼백을 다시 영여靈與에 모시고 돌아와 궤연几筵에 모신 다음 반혼제를 지냅니다.
영여는 영혼을 모시는 가마라는 뜻이고, 혼백과 신주를 상징하는 위패를 모십니다.
궤연은 사자死者의 영궤靈几와 그에 딸린 모든 것을 차려놓은 곳을 말한다.
혼백은 물론 궤연에 모셔 만 2년이 되는 대상까지 받습니다.
조석 때가 되면 상식이라 하여 매끼를 거르지 않고 식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대상이 지난 다음에야 밤나무로 신주를 만들어 사당에 모셨습니다.
5대째가 되면 묘소에 묻습니다.

神主신주는 주나라 때의 예를 따라 단단한 밤나무로 만듭니다.
신주에 사용되는 나무는 중국의 하夏나라 때는 소나무를, 은나라 때는 잣나무를 주나라 때부터 밤나무를 사용했습니다.
이들 나무는 각기 그 나라의 사당祠堂이 있던 지역의 토양에서 잘 자라던 나무를 사용한 것입니다.
밤나무 흔히 닭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자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닭은 밝음, 곧 광명을 맞고 그 힘으로 잡귀雜鬼를 쫓는 종물로 생각한 듯합니다.
귀신들은 밤에만 활동하고 움직이므로 닭소리에 또는 동터오는 광명에 쫓겨난다고 여겨, 닭과 신은 상극相剋으로 본 것입니다.

예서禮書에 사당과 신주의 관리 방법에 두 가지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먼저 수해, 재해나 도적이 들었을 때는 사당의 신주와 유서를 옮긴 뒤 제기를 옮기고, 그,런 다음에 가재도구家財道具를 옮깁니다.
사당에 불이 났을 때는 3일 동안 곡을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주가 불탔을 때 사당의 자리에 신위를 설치하고 신주를 새로 만들어 모신 다음 분향하여 고제告祭를 올립니다.

신주를 태우거나 묻어버리고 제사를 안 지내는 사람들은 처형되었습니다.
正祖 15년(1791) 한국 최초의 천주교박해 사건인 신해박해辛亥迫害가 바로 그것입니다.
당시 천주교 신자였던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 권상연 두 사람이 윤지충의 모친상을 당해 신주를 불태웠다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 실록實錄에는 “무부無父의 무리, 즉 아버지를 능멸하고, 조상을 능멸하는 인간들로, 이런 패륜은 인류가 생긴 이래 들어보지 못한 것이라고 몰아붙이고, 불에 태웠건 묻었건 사당에 있는 신주를 의도적으로 손을 댔으니,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자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으니, 사형에 처한 것만도 헐한 처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사형에 처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진산군이 현으로 강등될 만큼 큰 죄로 다스렸습니다.

조상祖上은 신神이기 때문에 어떤 형체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체는 없지만 강림降臨하는 곳으로 인정되는 일정한 자리에 모시기 때문에 신위라 일컬어지고, 격식에 따라 다듬어진 나무로 신이 강림하여 깃드는 자리로 삼기 때문에 신주 혹은 목주木主라 합니다.
천주교가 제사를 금하던 시기에 정하상은 『상제상서』에서 목주가 하나의 나무조각일 뿐이요 조상의 영혼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미 기백과 골혈이 서로 연결됨이 없고, 또 낳아서 길러 준 노고와도 서로 관련이 없습니다. ... 직공이 만든 것이요, 분칠하고 먹을 찍은 그것을 참 아비라 참 어미라 이릅니까. 바른 이치의 근거가 없고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신주를 모시지 않은 집은 제사 때마다 가로 6cm, 세로 22cm 정도로 한지를 오려서 신주와 같이 글을 적어 사용합니다.
이것을 지방紙榜이라고 하며, 지방은 신주와 달리 제사가 끝나면 축문과 함께 태워버립니다.
제사에 지방을 사용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송宋나라 때부터 신주 대신 일회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한반도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사용되었습니다.

기제사의 봉사 대수는 주인의 관계官階에 따라 3대, 2대, 고비考妣로 정하며, 문헌에도 4대 봉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19세기 말엽까지도 문헌에는 주인의 관계에 따라 차등을 두는 것이 보이나, 이재李縡의 사례편람의 보급 등에 따라 조선 후기에 이르면 경국대전 이래 법규정은 사문화되고 4대 봉사를 묵인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양반가문에서는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불문하고 4대조 제사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제사 시간은 주자가례에는 기일 자시子時(십이시의 첫 번째 시로 밤 11시부터 오전 1시까지)에 지낸다고 합니다.
이는 대체로 첫닭이 울기 전에 제사를 지내야 조상님이 제사를 흠향한다고 믿어온 터이나, 밤 8시에서 9시 사이, 혹은 밤 10시 전후로 바뀌고 있습니다.
제수의 장만도 예서의 기준보다 사자死者가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올리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세시풍속은 생업형태와 깊은 관련을 맺는 한편, 각각의 절기에 맞춰 놀이문화와 더불어 공동체의 염원을 기원하는 습속도 다양하게 배태해왔습니다.
이런 민속현상들 대부분은 의례수행과 관련한 정통성, 즉 “옛날부터 그래 왔다”는 불변不變의 논리論理는 민속지식에 근거합니다.
종교를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궁극적인 의미를 밝혀주고, 또한 우리의 불안이나 갈등 같은 인생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신앙체제라고 말할 때 세시풍속과 관련된 제의의례는 종교성을 띤 종교의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민간신앙은 조직적인 종교집단을 형성하지 않은 신앙현상입니다.
민간신앙은 오랜 세월을 두고 민중 속에서 신봉되어 왔지만 대체로 미신迷信으로 취급받아 늘 배척과 억압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민간신앙은 제례의식을 가진 무속신앙, 즉 굿이나 산신제 같은 것과 제례의식을 갖지 않는 점복, 예언, 풍수도참신앙 등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세시풍속이 지닌 종교적 성격은 제의의 대상신에 대해 금기와 구별(분리와 금지)을 행하고 각종 공물 봉납과 의례를 일관되게 수행함으로써 공동체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 염원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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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음식문화


공양供養할 때 외우는 『소심경小心經』 중의 「오관게五觀揭」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 음식이 내게 오기까지) 공력功力이 얼마나 들었으며 어찌하여 여기 왔는가. 내 공덕과 내 행실이 이 공양을 받을 만한가. 나쁜 마음 끊으려면 탐진치貪嗔蚩를 끊는 것이 으뜸이다. 여위는 몸 낫는 데 아주 좋은 약이니, 보리도를 이루고자 이 음식을 먹습니다.”
불교에서는 만물萬物이 사대四大, 즉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뤄졌다고 말하는데, 대大란 요소 혹은 원소를 의미합니다.
『불의경佛醫經』에는 불설佛說 경전 특유의 첫머리 부분인 “여시아문如是我聞(오와 같이 나는 들었다)”이 빠져 있어 이 경이 언제 어디서 설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불의경』은 병고를 사대의 부조라고 설합니다.
병고病苦가 일어날 경우 사대 하나하나에 백한 가지의 병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합치면 사백네 가지의 병이 있게 됩니다.
더구나 계절마나 사대의 성쇠盛衰가 있으며 그에 따라서 병의 종류도 변한다고 설합니다.
사람이 사대부조에 빠지는 원인으로 열 가지를 꼽습니다.

첫째로 빨리 먹고, 둘째로 먹는 데 여유가 없으며, 셋째로 근심, 넷째로 피로, 다섯째가 분노, 여섯째가 과다한 성욕, 일곱째가 대변을 참는 일, 여덟째가 소변을 참는 일, 아홉째가 하품을 참는 일, 열 번째가 방귀를 참는 일입니다. 
 

단명의 원인으로는 아홉 가지 항목을 덧붙입니다.
첫째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먹거나 계절음식을 먹지 않고, 둘째로 음식을 먹을 때 절도가 없이 과식하며, 셋째로 식사시간을 지키지 않고 지나치게 간식을 먹으며, 넷째로 먼저 먹은 음식이 소화되기 전이나 복용한 약이 체내에서 빠져나가지 않았을 때 식사를 하며, 다섯째로 대소변을 과도하게 참으며, 여섯째로 계율을 지키지 않으며, 일곱째로 나쁜 동료와 사귀며, 여덟째로 속가에 살고, 출가인답게 행동하지 않으며, 아홉째로 피해야할 위험에 부주의하게 접근하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스님은 우유를 제외한 일체의 동물성 식품과 술 그리고 오신채五辛菜를 금하는데, 오신채란 다섯 가지 매운맛을 내는 채소인 파(자총慈蔥), 마늘(대산大蒜), 부추(혁총革蔥), 달래(난총蘭蔥), 흥거興渠(미나리과의 아위阿魏로 이란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자란다)입니다.
오신채를 금하게 된 이유를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마늘을 먹은 한 비구가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러왔다. 그런데 그 냄새가 스스로도 느낄 정도로 심해 부처님에게서 얼굴을 돌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좀처럼 그 스님이 부처님을 바라보지 않는 원인이 마늘 냄새 때문임을 아시고 조사해보았더니 의외로 마늘을 먹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늘, 파, 부추 종류를 먹으면 안 된다”는 계를 정하신 것이다. 

 『수능엄경首能嚴經』에는 “모름지기 세간의 오신채를 끊어야 한다. 이런 다섯 가지 식품은 익혀 먹으면 음욕을 일으키고, 날 것을 먹으면 성내는 마음을 증대시킨다”고 하여 수행에 방해가 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부처의 원시교단이 육식肉食에 너그러웠음을 『마하승기율』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원정사祇園精舍의 비구가 사위성舍衛城을 탁발하며 다니던 중 마침 고기조각을 입에 물고 하늘을 날던 새가 발우 속에 그것을 떨어뜨렸습니다.
비구는 그대로 정사에 가지고 돌아와서 익혀 먹었습니다.
다른 비구들이 그것을 알고 문제로 삼았지만 장로長老 비구는 축생이 떨어뜨린 것은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기 때문에 파계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현재도 남방불교에서는 탁발로 얻은 음식에 고기가 들어있는 경우 탁발하여 얻은 고기를 먹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먹어서는 안 되는 종류의 고기가 있으며, 『마하승기율』은 열 가지 금기 육류를 열거합니다.
첫째로 사람고기이며, 둘째로 용고기(용 대신 뱀을 열거하기도 한다), 셋째로 코끼리고기, 넷째로 말고기, 다섯째로 개고기, 여섯째로 새고기, 일곱째로 독수리고기, 여덟째로 돼지고기, 아홉째로 원숭이고기, 열 번째로 사자고기이다.

그 밖에도 호랑이고기, 표범고기, 곰고기, 여우고기, 닭고기 등을 깨끗하지 못한 고기(不淨肉)로 금했습니다.
깨끗한 고기란 어떤 목적으로 죽인 고기가 아닌, 즉 비구比丘를 위해 죽인 것이 아닌 고기를 말합니다.
그런 경우 보고(見), 듣고(開), 의심이 가는(疑) 세 가지 사항을 검토해야 한다고 모든 율에서 설하고 있습니다.

『마하승기율』 권32에는 다음의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본다(見)는 것은 바로 눈앞에서 죽인 것을 보았으면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본다(見)는 뜻이다. 듣는다(開)는 것은 자신이 귀로 듣고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누구를 위해 죽였다’고 들었다면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만약 ale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 일부러 비구를 혼란스럽게 하고자 할 때는 그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항상 믿을 만한 사람을 따르고 계율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을 듣는다(開)고 하는 것이다. 의심이 간다(疑)는 것은 비구가 신도의 집에 가서 이전에 보았던 양(羊)의 머리와 다리가 땅에 있는 것을 보고 마음에 곧 의심이 생겨 ‘예전에 보았던 양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이니 스님을 위해 죽였습니다’라고 대답한다면 먹어서는 안 된다. ‘존자尊者시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고 죽였는데 다 먹지 못하고 남았으니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먹을 수 있다. 이것을 의심한다(疑)고 말하는 것이다.

원시불교에서는 깨끗한 고기 먹는 것을 허락했는데, 언제부터 불교도는 육식을 금했던 것일까?
부처가 돌아가시기 전후 일 년 가까운 사적事蹟을 서술한 경전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소승과 대승에 관해 적혀 있습니다.
대승의 『열반경涅槃經』은 중국의 육조 혜능선사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가운데 육식의 문제에 관한 기술(권4 사상품 제7)이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은 큰 자비慈悲의 종자를 끊는다” 하여 부처가 확실하게 육식을 금하고 있다. 가섭존자迦葉尊者는 이를 긍정하면서도 “어찌하여 먼저는 비구에게 세 가지 깨끗한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하셨습니까? 생선이나 고기가 어류와 육류가 맛있는 음식이기 때문에 그것을 금하는 것이라면 유(乳), 락(酪), 락장(酪漿), 생소(生酥), 숙소(熟酥)의 다섯 가지 맛이나 참기름과 같은 것도 맛이 있는 것이므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은 아닙니까?” 하고 질문한다. 이에 대해 부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내가 제정한 일체의 하지 말라는 계율戒律은 어느 것이든 나타나는 것 외에 그 속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속에 있는 특별한 의미에 입각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세 가지의 깨끗한 고기를 먹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본래의 취지에 어긋나는 생각, 즉 식탐食貪으로 먹는다면 열 종류의 고기도 먹지 말아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본래의 취지에 어긋난 식탐의 생각이 있으므로 육류는 일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며, 일부러 죽인 고기뿐만 아니라 자연사自然死한 짐승의 살을 먹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대반열반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습니다.
보살菩薩은 고기를 먹는 습관을 지녀서는 안 된다.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고기 먹는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일은 있지만, 그것은 단지 보이기 위해 먹는 척하는 것일 뿐 실제로 먹는 것은 아니다.

보살菩薩은 Bodhisattva로 보디bodhi는 깨닫다budh에서 파생한 말로 깨달음, 지혜智慧, 불지佛智라는 의미를 지니며, 사트바sattva는 존재하다as가 어원으로 생명 있는 존재, 즉 중생衆生, 유정有情을 뜻합니다.
보살의 일반적인 정의는 ‘보리를 구하고 있는 유정으로서 보리를 증득證得할 것이 확정된 유정’, ‘구도자求道者’ 혹은 ‘지혜를 가진 사람’, ‘지혜를 본질로 하는 사람’ 등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보살이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된 것은 대승불교가 확립된 뒤부터이지만 그 용어와 개념의 시초는 기원전 2세기경에 성립된 본생담本生譚(석가의 전생前生에 관한 이야기)에서였습니다.
보살은 구도자로서의 석가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대반열반경』의 육식 기피는 철저하여 “비구, 비구니, 청신사, 청신녀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생활하므로 걸식할 때 고기가 섞인 음식을 준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라고 가섭존자가 묻자 “물로 씻어 고기는 따로 골라내고 먹는 것이 좋다. 그릇에 고기가 묻었더라도 거기에 맛을 들이지 않으면 사용해도 죄가 없으며, 음식 가운데 고기가 많이 섞였으면 받지 말아야 하고 고기가 드러난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 먹으면 죄가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은 부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설한 『대반열반경』은 육조六祖 혜능선사惠能禪師 이후의 불교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술과 관련해서는 『육방예경六方禮經』에 술에 빠져 방일하면 저축을 잃고 싸움만 늘고 병의 원인을 낳고 명예를 손상시키며 숨겨야 할 곳이 나타나고 지혜를 경감시키는 여섯 가지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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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


탁발(혹은 걸식乞食)의 원어는 고대 인도의 언어로 발우라는 그릇 속에 떨어져 모여진 밥이라는 의미였습니다.
탁발하는 사람은 발우에 받은 음식을 그대로 먹었습니다.
오전에 탁발하여 얻은 음식을 오후에 가지고 다닐 수 없는 계율이 있었던 것도 더운 기후조건과 관련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면서 스님들의 식생활이 변하게 됩니다.
탁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절에서 자급자족自給自足의 식생활을 원칙으로 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 선림禪林의 생활규범生活規範인 청규淸規를 처음 제정한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을 먹지 않는다一日不作一日不食’고 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예로부터 스님은 원래 하루 한 끼를 원칙으로 했습니다.
아침식사는 물론 저녁식사도 먹지 않았습니다.
점심식사가 정식이었고, 그 밖의 비시식非時食이라고 해서 제한했습니다.
스님들은 하루에 한 번 먹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서 정오正午를 넘기면 그 날은 먹지 않았습니다.
점심 이후인 오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았던 이유를 『석씨요람釋氏要覽』에서 「처처경處處經」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오 이후에 먹지 않으면 다섯 가지 복을 얻는다. 첫째는 소음少淫, 둘째는 잠이 적어지고, 셋째는 일심一心을 얻으며, 넷째 방위각方位角 없고, 다섯째 몸에 안락함을 얻으며 병이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스님은 이런 복을 얻기 위해 정오 이후에는 먹지 말아야 한다.

그 뒤 한 끼를 먹던 비구들에게 죽을 한 끼 더 먹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연유가 『마하승기율』에 나타나 있습니다.
난타難陀의 어머니는 포살날에는 식사를 만들어서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렸는데 어느 날 솥에 밥을 짓고 있을 때 끓어 넘친 밥물을 마셔보니 몸의 상태가 좋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졌습니다.
그래서 물을 많이 넣고 쌀을 적게 넣은 뒤, 물과 쌀을 분별할 수 없을 만큼 푹 삶아 후추 등을 넣어 단지에 담아 기원정사의 부처님께 갔습니다.
“원하옵나이다. 부처님이시여, 스님들께 이 죽공양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옵소서” 하고 간청하니 부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도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분율四分律』은 “새벽이 되어야만 비로소 죽을 먹을 수 있고 다른 때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새벽에도 세 종류가 있는데 『석씨요람』에서는 “바사론이 말하기를”이라는 주를 붙여 “첫째로 빛이 나무줄기를 비추어서 하늘이 아직 어둑어둑할 때이다. 둘째로 해가 나뭇잎을 비추어서 하늘이 청색이 날 때이다. 셋째로 해가 떠올라 하늘이 백색이 될 때이다. 이 세 가지 색 중에 백색을 정시로 삼는다. 모름지기 손바닥을 펴보아 손금이 분명하게 보일 때 비로소 죽을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현재 한국의 설에서는 하루 세 끼를 먹는 것이 보통으로 아침 공양은 새벽 예불 두세 시간 후인 6시 전후에 먹으며, 점심 공양은 오전 9시와 11시 사이에 부처님 앞에 올리는 밥인 사시마지巳時摩旨가 끝나는 11시에서 12시 사이이고 저녁 공양은 예불하기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 전인 4시 반에서 5시 반 사이에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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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과 발우


밥을 먹는 것을 공양이라고 합니다.
범어 pujana에서 온 말로 공급供給, 공시供施, 공供이라고도 하며 자양資養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 기원은 설산에서 고행하던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수행修行하는데 고행苦行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 마을로 내려와 우유죽 한 그릇을 얻어먹고 원기元氣를 되찾아 명상에 잠겨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었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이와 같은 유래由來를 가진 공양은 남에게 공양을 하도록 한 공덕의 의미가 부과되면서 의미가 바뀌어 불법승佛法僧의 삼보三報, 순생보順生報를 말한다)와 부모, 죽은 영혼에 이르기까지 음식뿐 아니라 의복 등 그 밖의 물건을 바치는 것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삼보三報란 중생衆生이 지은 업業으로 받는 세 시기의 과보果報로 현세에서 업을 지어 현세에서 받는 과보, 즉 순현보順現報를 말합니다.
순후보順後報는 현세現世에서 지은 선악善惡에 따라 삼생三生 이후에 받는 과보를 말합니다.

공양에는 부처님이나 보살님을 모셔두는 상단에 올리는 불전공양佛典供養과 사자死者의 영혼에게 음식을 베풀고 경전과 법문을 읽어주며 영혼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기원하는 시식 그리고 불전공양과 시식에 올린 음식은 각종 의례행위를 통해 보통 음식과는 다른 법식으로 의미가 부여되며 법식의 의미가 부여된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불법의 공덕을 이어받게 된다고 하는데, 이렇게 나눠 먹는 것을 대중공양이라고 합니다.
대중공양大衆供養은 음식을 나눠 먹는 격식과 의례행위의 차이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으며, 크게 반승과 식당작법食堂作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반승飯僧은 스님들에게 신도가 음식이나 물건을 베푸는 것이고 식당작법은 법식法食을 나눠 먹는 대중공양할 때 행하는 의례행위를 말합니다.
식당작법 중 발우공양鉢盂供養은 스님들이 절에서 공동으로 음식을 먹을 때 행하는 것이며, 본격적으로 의례화한 식당작법은 사자死者를 위해 사흘에 걸쳐 행하는 영산재靈山齋를 올릴 때 행하는 식당작법이 있습니다.

나무나 놋쇠 따위로 대접처럼 만들어 안팍에 칠을 한 중의 공양 그릇인 발우鉢盂의 어원은 범어의 파르타patra의 음을 딴 발다라鉢多羅에서 온 것입니다.
파트라를 한자로 의역意譯하면 우盂라고 합니다.
우盂는 음식물을 담는 그릇을 말합니다.
발우는 따라서 범어의 발과 한자의 우가 합쳐진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밥그릇, 국그릇, 반찬그릇, 물그릇의 네 개가 한 조로 되어 있습니다.
발우를 포개어 놓았을 때 가장 밑에 놓이게 되는 가장 큰 발우를 어시발우(두발頭鉢, 밥발우)라고 합니다.

스님들의 식사는 원칙적으로 발우를 사용하는데, 발우는 크기에 따라 들어가는 음식물이 정해져 있습니다.
죽이나 밥은 어시발우에, 국은 두 번째 큰 발우에, 청수물은 세 번째 발우에, 반찬은 가장 작은 발우에 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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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거리, 산바라기, 제석거리, 별성거리, 대거리, 호구거리


샤머니즘은 원래 아시아 대륙의 동북부, 즉 극동아시아의 우랄Ural 알타이Altai 민족 사이에서만 행해졌던 토착적인 고유 원시종교의 한 형태로 오늘날 우럽과 아시아 모두 즉 유라시아Eurasia 대륙에서, 즉 동쪽으로는 베링 해협Bering Sound으로부터 서쪽으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the Scandinavian Peninsula에 걸친 대륙을 포함해 전반 혹은 부분적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샤머니즘의 가장 큰 특색은 정령숭배입니다.
정령숭배精靈崇拜란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자연물의 정령이 인간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믿어 갖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섬기고 숭배하는 초기 단계의 신앙을 말합니다.

무당을 통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무당을 주主가 되게 만들고 정령은 무당에 의해 구사되는 자구資具와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무당을 생래적生來的 혹은 후천적後天的으로 혹은 특수한 영능靈能을 가지고 정령과 통해 인간과 정령과를 매개媒介하는 역할을 하고 정령에게 인간의 뜻을 호소해 전하며 정령의 뜻을 살펴 정령 대신 인간에게 의지(예언, 기도, 치병)를 나타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샤먼은 한국의 무당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당내력巫堂來歷』은 조선조 말 난곡蘭谷이란 호를 가진 사람이 서울 굿의 각 거리巨理를 그림으로 그려 설명한 책자로, 제물의 그림을 통해 제물의 종류를 알 수 있고, 무녀의 그림을 통해 무복巫服과 무구巫具를 알 수 있는 훌륭한 서울지역의 무속지巫俗誌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서울 무당의 내력에 대해 단군檀君에서 부루扶婁로 이어지는 단군 조선에서 무속이 시작되었으며, 농경사회農耕社會에서 곡신신앙穀神信仰이 가정에까지 보편화되면서 무속신앙이 자리 잡았다고 봅니다.
이 책은 작고 큰 두 책으로 되어 있으며, 두 책에는 각기 열세 굿거리에 관한 그림과 설명이 들어있지만 굿거리를 배열한 순서가 다릅니다.
이것이 국사당國師堂 열두 굿거리의 종류와 순서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 굿거리의 순차와 굿의 규모가 내용에 따라 기본적인 열두 굿거리를 중심으로 약간 가감을 통한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 부정거리(不淨巨理/不精巨理)
굿을 시작함에 앞서 부정不淨의 생각이 있거나 무명의 잡귀가 있으면 이를 안정시켜 부정을 제거하는 굿거리를 말합니다.
무당굿의 열두 굿거리 가운데서 첫 번째 거리로 부정풀이라고도 합니다.
무당인 사제자師弟子는 굿을 하기에 앞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합니다.
사람이 죽은 집에서 부정을 없애려고 무당이나 점을 치는 소경을 시켜 악귀를 물리치는 것을 말합니다.

2. 산바라기/감응청배感應請陪
사경굿에서, 마지막 날 아침에 산 위에서 산신맞이로 하는 굿입니다.
『무당내력』에서는 상단에 제상을 그렸고, 하단에는 무녀가 춤추는 모습을 그려놓았습니다.
제물이 별로 없는 것이 특징이고, 하단의 무녀는 남치마에 초록 두루마기를 입고 흰 수건을 양손에 들고 두 팔을 벌리고 서서 춤추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치성할 때 무녀는 태백산을 바라보고 성령 감응을 세 번 부른다고 적혀 있습니다.
책(작은)의 첫 페이지에 녹색과 남색 두루마기와 갓을 쓴 남자들은 피리와 해금을 들고 앉아 있으며, 녹색치마에 남색저고리를 입은 여인은 제금을, 남치마에 주황저고리를 입은 여인은 장고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 악사는 청배시請陪時와 오신시娛神時에도 무악을 연주합니다.
감응거리(가망거리, 감응청배, 감응정배)는 원래 태백산 산신인 단군을 모시는 굿거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제석거리帝釋巨理
제석거리는 단군인 삼신을 모시는 굿거리로서 자녀의 출산을 관장하는 신이 바로 제석帝釋이며, 단군을 삼신제석이라 일컫습니다.
제석은 불교신인 제석천帝釋天에서 명칭을 따온 것입니다.
본래 무속의 생산신生産神을 말합니다.
민속에서 항아리에 벼를 담아 모셔두었다가 햇곡이 나면 갈아 넣는 것이 있는데 이곳은 곡식의 형태로서 부루扶婁단지, 제석帝釋단지, 시준단지 등으로 불립니다.
시준단지를 영남지방에서는 세존단지라고 합니다.
제석거리에서 무녀는 흰 장삼을 입고 흰 고깔을 쓰고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한 손에는 방울을 들고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입니다.
제석거리나 안택에서 제석신의 유래를 읊는 서사무가인 제석본帝釋本풀이를 구연하는데, 부잣집 외동딸이 중과의 인연으로 삼형제를 낳고 삼신三神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4. 별성거리別星巨璃
『무당내력巫堂來歷』 상단 둥그런 소반에 제물 진설이 있고 무녀는 흑색 전립戰笠(모립毛笠이라고도 하는데 품계에 따라 장식이 다름)을 쓰고 붉은 저고리와 푸른 치마를 입고 그 위에 검은색 태자를 걸쳐 입고 오른손에는 큰 칼, 왼손에는 삼지창을 들고 있습니다.
『무당내력』의 저자는 별성신別星神의 기원을 농경을 처음 백성에게 가르쳐준 단군의 시신 고시례高矢禮에 두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별성신은 ‘별상’이라고도 하는데 흔히 높은 벼슬을 했던 인물의 혼령을 모시는 거리로 알고 있거나 천연두신天然痘神을 호구별성戶口別星이라 하여 별성신은 역병疫病으로 관장하는 신으로 알고 있으나, 『무당내력』에서는 호구거리가 별도로 그려져 있어 별성신이 역병신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5. 대거리大巨璃
『무당내력』에 따르면 대거리를 최장군거리라고도 합니다.
단군을 받들어 모신 뒤에 성스러운 뜻으로 소원을 이루도록 해준다고 하며, 최근에는 최장군崔將軍이 하강下降한다고 합니다.
대거리는 옛날에 단군을 모시던 거리였지만, 최근에는 최장군을 모시는 거리고 바꾸어졌으며, 사람의 소원을 이루게 해주는 신을 모시는 굿거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녀巫女의 복색服色은 장군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단군의 모습이 아니고 崔塋 將軍의 모습을 타나낸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조 지배층으로부터 탄압을 받던 무속인들은 민속신앙으로써 민족의 영웅인 최영 장군을 무신巫神으로 받들게 되었고, 특히 고려군의 서울이었던 개성을 중심으로 최영 장군에 대한 숭앙崇仰이 두드러졌습니다.
개성 덕물산 위에 무신당巫神堂을 세우고 최영 장군의 영을 주신으로 봉안하고 장군의 제일 부인인 상산부인上山婦人과 제이 부인인 의일義一 將軍장군도 함께 신으로 모십니다.
대거리의 제물祭物에서 특이한 점은 숭상崇尙을 따로 그리고 있는 것으로 대거리의 주신이 술을 좋아하는 신이란 점입니다.

6. 호구거리戶口巨理
『무당내력』 상단에 둥근 소반에 편, 떡, 과일 등의 제물이 진설되어 있으며, 무녀는 붉은 망을 덮어쓰고 신모나 쾌자가 없는 민 노란 저고리에 홍색치마를 입고 오른손에는 부채, 왼손에는 방울을 들고 서 있는 모습으로 여성신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천연두신 혹은 마마신을 호구라고 합니다.
가정에서 홍역을 치르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치성 드릴 때 그 순두를 빌곤 합니다.
최근에 호구신이 최장군의 딸이라고도 하고 혹은 첩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망발妄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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