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와 지방紙榜



한국인은 봉분封墳이 완성되면 흔히 성분제成墳祭(봉분제封墳祭라고도 한다)라 하여 혼백魂帛을 모시고 산소 앞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성분제가 끝나면 혼백을 다시 영여靈與에 모시고 돌아와 궤연几筵에 모신 다음 반혼제를 지냅니다.
영여는 영혼을 모시는 가마라는 뜻이고, 혼백과 신주를 상징하는 위패를 모십니다.
궤연은 사자死者의 영궤靈几와 그에 딸린 모든 것을 차려놓은 곳을 말한다.
혼백은 물론 궤연에 모셔 만 2년이 되는 대상까지 받습니다.
조석 때가 되면 상식이라 하여 매끼를 거르지 않고 식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대상이 지난 다음에야 밤나무로 신주를 만들어 사당에 모셨습니다.
5대째가 되면 묘소에 묻습니다.

神主신주는 주나라 때의 예를 따라 단단한 밤나무로 만듭니다.
신주에 사용되는 나무는 중국의 하夏나라 때는 소나무를, 은나라 때는 잣나무를 주나라 때부터 밤나무를 사용했습니다.
이들 나무는 각기 그 나라의 사당祠堂이 있던 지역의 토양에서 잘 자라던 나무를 사용한 것입니다.
밤나무 흔히 닭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자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닭은 밝음, 곧 광명을 맞고 그 힘으로 잡귀雜鬼를 쫓는 종물로 생각한 듯합니다.
귀신들은 밤에만 활동하고 움직이므로 닭소리에 또는 동터오는 광명에 쫓겨난다고 여겨, 닭과 신은 상극相剋으로 본 것입니다.

예서禮書에 사당과 신주의 관리 방법에 두 가지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먼저 수해, 재해나 도적이 들었을 때는 사당의 신주와 유서를 옮긴 뒤 제기를 옮기고, 그,런 다음에 가재도구家財道具를 옮깁니다.
사당에 불이 났을 때는 3일 동안 곡을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주가 불탔을 때 사당의 자리에 신위를 설치하고 신주를 새로 만들어 모신 다음 분향하여 고제告祭를 올립니다.

신주를 태우거나 묻어버리고 제사를 안 지내는 사람들은 처형되었습니다.
正祖 15년(1791) 한국 최초의 천주교박해 사건인 신해박해辛亥迫害가 바로 그것입니다.
당시 천주교 신자였던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 권상연 두 사람이 윤지충의 모친상을 당해 신주를 불태웠다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 실록實錄에는 “무부無父의 무리, 즉 아버지를 능멸하고, 조상을 능멸하는 인간들로, 이런 패륜은 인류가 생긴 이래 들어보지 못한 것이라고 몰아붙이고, 불에 태웠건 묻었건 사당에 있는 신주를 의도적으로 손을 댔으니,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자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으니, 사형에 처한 것만도 헐한 처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사형에 처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진산군이 현으로 강등될 만큼 큰 죄로 다스렸습니다.

조상祖上은 신神이기 때문에 어떤 형체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체는 없지만 강림降臨하는 곳으로 인정되는 일정한 자리에 모시기 때문에 신위라 일컬어지고, 격식에 따라 다듬어진 나무로 신이 강림하여 깃드는 자리로 삼기 때문에 신주 혹은 목주木主라 합니다.
천주교가 제사를 금하던 시기에 정하상은 『상제상서』에서 목주가 하나의 나무조각일 뿐이요 조상의 영혼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미 기백과 골혈이 서로 연결됨이 없고, 또 낳아서 길러 준 노고와도 서로 관련이 없습니다. ... 직공이 만든 것이요, 분칠하고 먹을 찍은 그것을 참 아비라 참 어미라 이릅니까. 바른 이치의 근거가 없고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신주를 모시지 않은 집은 제사 때마다 가로 6cm, 세로 22cm 정도로 한지를 오려서 신주와 같이 글을 적어 사용합니다.
이것을 지방紙榜이라고 하며, 지방은 신주와 달리 제사가 끝나면 축문과 함께 태워버립니다.
제사에 지방을 사용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송宋나라 때부터 신주 대신 일회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한반도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사용되었습니다.

기제사의 봉사 대수는 주인의 관계官階에 따라 3대, 2대, 고비考妣로 정하며, 문헌에도 4대 봉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19세기 말엽까지도 문헌에는 주인의 관계에 따라 차등을 두는 것이 보이나, 이재李縡의 사례편람의 보급 등에 따라 조선 후기에 이르면 경국대전 이래 법규정은 사문화되고 4대 봉사를 묵인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양반가문에서는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불문하고 4대조 제사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제사 시간은 주자가례에는 기일 자시子時(십이시의 첫 번째 시로 밤 11시부터 오전 1시까지)에 지낸다고 합니다.
이는 대체로 첫닭이 울기 전에 제사를 지내야 조상님이 제사를 흠향한다고 믿어온 터이나, 밤 8시에서 9시 사이, 혹은 밤 10시 전후로 바뀌고 있습니다.
제수의 장만도 예서의 기준보다 사자死者가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올리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세시풍속은 생업형태와 깊은 관련을 맺는 한편, 각각의 절기에 맞춰 놀이문화와 더불어 공동체의 염원을 기원하는 습속도 다양하게 배태해왔습니다.
이런 민속현상들 대부분은 의례수행과 관련한 정통성, 즉 “옛날부터 그래 왔다”는 불변不變의 논리論理는 민속지식에 근거합니다.
종교를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궁극적인 의미를 밝혀주고, 또한 우리의 불안이나 갈등 같은 인생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신앙체제라고 말할 때 세시풍속과 관련된 제의의례는 종교성을 띤 종교의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민간신앙은 조직적인 종교집단을 형성하지 않은 신앙현상입니다.
민간신앙은 오랜 세월을 두고 민중 속에서 신봉되어 왔지만 대체로 미신迷信으로 취급받아 늘 배척과 억압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민간신앙은 제례의식을 가진 무속신앙, 즉 굿이나 산신제 같은 것과 제례의식을 갖지 않는 점복, 예언, 풍수도참신앙 등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세시풍속이 지닌 종교적 성격은 제의의 대상신에 대해 금기와 구별(분리와 금지)을 행하고 각종 공물 봉납과 의례를 일관되게 수행함으로써 공동체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 염원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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