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왕신, 대감신, 망량신, 전내신




군왕신君王神을 군웅君雄이라고도 하며, 군왕君王이 와전訛傳된 것입니다.
더러는 고려 군왕의 신이라 하고, 혹은 군왕으로서 정상적인 죽음을 하지 못한 자라고도 합니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영조英祖의 아들 장헌세자莊憲世子가 뒤주 속에서 원통히 죽었기 때문에 속칭 뒤주대왕이라 하는데, 이를 속칭 군왕신이라고 합니다.
군왕은 관직에 있으면서 임지에서 죽은 자를 말합니다.
민가民家에서 군왕신사君王神祀를 행할 때는 무녀가 군복을 착용하고 무장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부녀자들이 이를 두려워합니다.
군왕 혹은 군웅을 장군신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장헌세자莊憲世子(1735-62)는 영조의 둘째 아들이고, 정조正祖의 생부生父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로 더 잘 알려졌습니다.
정신질환으로 말미암은 포악暴惡한 성격과 시파時派, 벽파僻派의 대립對立에 휘말려 부왕父王 영조에게 미움을 받아 뒤주에 갇혀 죽고 말았습니다.

무격신인 대감신大監神에는 10여 가지가 있습니다.
전내대감殿內大監은 관장무關壯繆이며, 토주대감土主大監을 지신대감地神大監이라고도 합니다.
수문장대감守門將大監은 문신門神이며, 왕래대감往來大監이란 떠돌아다니는 귀신鬼神을 말합니다.
부군대감府君大監, 군왕대감君王大監, 건립대감建立大監, 업왕대감業王大監(재신財神)이 있으며, 용궁대감龍宮大監은 수신水神, 호구대감戶口大監은 곧 천연두의 신이며, 성주대감城主大監은 상주신城主神입니다.

대감은 주로 집안에 재복을 가져다주는 신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이 밖에도 많은 대감들이 있으며, 새로운 문화와 더불어 대감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는데, 예컨대 자동차 대감, 암 대감 등이 그것입니다.
관장무關壯繆는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촉蜀나라(221-263)의 장군 관우(?-214)를 말하며, 장무壯繆란 229년(후주 건흥 7년) 관우에게 내려진 시호입니다.
시호諡號란 사후 공덕公德을 칭송하여 추증追增하는 칭호입니다.

우리말에서는 망량魍魎을 도깨비라 하는데, 무당이 도깨비를 가리켜서 대감大監이라 했습니다.
세속에서 말하기를 도깨비가 장난을 쳐서 사람들의 골치를 많이 썩게 하는데, 돌을 던져서 창이나 문을 부수기도 하고, 물건을 훔쳐다가 나뭇가지에 걸기도 하고, 불을 질러 집을 태운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 무격巫覡을 불러 신사神祀를 행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이능화는 서울에 전등을 밝히고 나서부터 이른바 도깨비라는 것이 일시에 자취를 감추었는데, 어둡고 음지를 좋아하는 귀신이 광명光明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서울 안의 늙은 여인네 무리가 관성제군關聖帝君이 자기에게 내렸다고 자칭하면서 사당祠堂을 짓고 신상神像을 받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들은 점占을 묻는 사람이 가거나, 푸닥거리를 하려는 사람이 가면 금전金錢을 받아 생계生計를 영위했습니다.

관성제군關聖帝君은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촉蜀나라의 장수將帥 관우를 신으로 받들 때 부르는 명칭입니다.
관우에 대한 신앙이 유행함에 따라 송宋나라에서는 왕王으로 봉했고(1123년 의용무안왕으로 봉한 것이 시초) 명明나라에서는 1614년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이라 하여 제帝로 봉했습니다.
그래서 관우를 관왕, 관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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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각씨 귀신




세속世俗에 전하기를 손씨孫氏 집안에 규수가 있었는데 출가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녀를 손각씨孫閣氏 귀신鬼神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귀신을 섬기는 집에서는 처녀가 있어 출가시키고자 하면 먼저 무녀巫女에게 부탁해 예탐신사預探神祀(여탐굿)을 행했습니다.
이는 신의 뜻을 미리 알아본 뒤 출가出家시키는 것입니다.
혼인예복婚姻禮服을 만들 때는 옷감의 한쪽 끝을 양복점의 옷감 견본처럼 조금 잘라서 신을 모시는 상자 속에 넣어 두며, 무릇 음식과 새로운 물건이 생기면 반드시 먼저 진상進上했습니다.
대개 각시란 규수에 대한 명칭이며, 손은 곧 손님이라는 뜻으로 외부로부터의 침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손각씨孫閣氏를 모시는 방법은 여자 인형을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자고紫姑처럼 만들고, 연두색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히며, 화장도구를 모두 생시에 쓰는 것과 똑같이 만들어 종이상자에 넣어 대나무 그릇에 간직하고, 수시로 무녀巫女를 불러 신사神祀를 행하며 이를 달랩니다.
한국의 지방풍속에 처녀가 출가 전에 죽으면 그 장례방법이 자못 기이했는데, 메밀과 밀가루 떡으로 신체의 일곱 군데 구멍을 막고, 또 양손에는 떡을 쥐어주고 남자 옷을 입힌 뒤 베로 자루를 만들어 그 속에 신체를 넣고, 십자로의 가운데에 묻습니다.
이는 손각씨 귀신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고紫姑란 중국의 측신廁神, 즉 화장실의 신을 말합니다.
당唐나라 수양자사壽陽刺史 이경李景의 첩 하미河媚가 본처에 의해 화장실에서 살해당했으므로 영혼이 화장실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神에 대한 의례儀禮는 정월 보름날 신의 인형을 만들어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인형을 가지고 노는 소꿉장난을 자고놀이라 하게 되었습니다.
“일곱 군데 구멍”이란 사람의 머리에 있는 7개의 구멍. 즉 귀, 눈, 입, 코 등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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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산신사木覓山神祀[남산의 국사당]



목멱산木覓山은 서울 남산南山의 다른 명칭이며, 남산을 인경산引慶山이라고도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태조太祖 4년(1395년) 12월 29일에 이조吏曹에 명해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경대부卿大夫 및 선비와 서민들은 제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목멱신사木覓神祀는 목멱산木覓山 꼭대기에 있었고, 해마다 봄과 가을로 초제醮祭를 행했습니다.

이조吏曹는 육조六曹의 하나로 문관文官의 선임과 공훈功勳, 봉작封爵, 관인官人의 성적成績, 고사考査, 포폄褒貶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정이품 아문衙門입니다.
초제醮祭는 도교의 제사로 별을 향해 지냅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따르면 서울의 목멱산 잠두봉蠶頭峰의 국사당國師堂 음사淫祀는 다음과 같습니다.
목멱산신木覓山神을 제사할 때 전사청典祀廳에서는 이를 국사당國師堂이라 사칭詐稱하고, 고려 공민왕恭愍王, 본조本朝의 승려 무학無學, 고려 승려 나옹懶翁, 서역西域 승려 지공指空의 상像 및 기타의 여러 신상을 걸어놓았습니다.
조선 정조正祖 때 편찬된 『한경식략漢京識略』 사묘조에 따르면 춘추春秋로 목멱신사를 치제할 때는 무학無學의 화상畵像을 지각池閣에 옮겨놓는다고 했습니다.
또 맹인의 상과 여자아이의 상도 있는데, 여자아이를 천연두의 신이라 하면서 신 앞에 화장품 종류를 놓아두었으며, 대단히 추악했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자못 성행盛行하여 나라에서도 금하지 못했습니다.
전사청典祀廳은 1472년(성종成宗 3년) 각종 국가제사의 제물 주관 등을 위해 설치한 관청입니다.
나옹懶翁은 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 때의 왕사王師였습니다.
지공指空은 인도 출신의 승려僧侶로 1326년(충숙왕忠肅王 13년) 고려에 와서 대단한 각광을 받았고 나옹화상懶翁和尙 혜근惠勤에게 법法을 전했습니다.

목멱신사, 일명 국사당은 현재 정상 팔각정이 있는 곳에 한강을 향해 서남향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건創建에 대해서는 조선 태조太祖가 잠저 시에 왕위王位에 오를 것을 예언했던 함경도 영흥의 노파 모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전합니다.
잠저潛邸란 왕세자王世子와 같이 정상법통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또는 그 살던 기간을 말합니다.
목멱신사는 1925년 일제가 그 아래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이건移建을 강요해 지금의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산1번지로 옮겼으며, 서울의 대표적인 굿당인 국사당國師堂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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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산 정녀부인묘



『천예록天倪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예록』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의 귀신담이나 기괴한 사연을 모아놓은 야담집野談集입니다.

시인詩人 석주石洲 권필權鞸(1569-1612)이 어렸을 때, 일찍이 백악산에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백악산白岳山은 서울 경복궁의 뒷산으로 북악이라고도 했습니다.
그 산꼭대기에 한 신당이 있었는데, 곧 세상에서 말하는 정녀부인貞女夫人의 사당이었습니다.
그 안에 영정影幀을 모셔놓았으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길을 이었습니다.
석주石洲가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저것이 어떤 계집이기에 이리도 괴이하고 황당무계荒唐無稽한가. 하늘과 땅의 귀신들이 밝게 두루 늘어서 있거늘, 어찌 네까짓 여자 귀신이 제멋대로 하면서, 맑고 밝은 세상에 위엄을 부리며 복을 줄 수 있단 말인가’ 하고는 그 영정을 찢어버렸습니다.
석주는 그날 밤 꿈을 꾸었는데, 한 부인이 흰 저고리 푸른 치마를 입고 노기를 머금고 나타나 말하기를 “이 몸은 천제天帝의 딸인데, 천제를 모시는 국사國士에게 시집을 와서 정녀부인貞女夫人이라는 칭호稱號를 받았다. 고려의 운이 이미 가고, 하늘이 이씨李氏(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太祖가 이씨李氏라는 것을 말한다)를 도와 한양漢陽으로 도읍都邑을 옮기도록 하면서, 천제께서는 국사國師에게 명하여 목멱산에 내려가 동쪽 땅을 지키도록 했다. 때문에 이 몸이 국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게 되니, 천제께서 그 마음을 불쌍히 여겨 백악으로 내려가는 것을 허락하셔서, 목멱산과 마주볼 수 있도록 했다. 이 몸이 이 땅에 산 지 3백 년이나 되었는데, 결국에는 네까짓 어린놈에게 능멸을 당하였으니, 내 장차 천제께 하소연할 것이며, 수십 년 뒤에 마땅히 돌아와서 너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 뒤 석주는 시詩로 인해 화를 입었습니다.
광해군光海君의 처남 유희분 등 유씨 일당이 세력을 휘두르는 것을 풍자한 「궁류시」를 지었다가 광해군의 분노를 사서 해남으로 귀양을 가던 중 동대문 밖에서 행인行人들의 동정으로 주는 술을 폭음하고 이튿날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석주는 체포된 뒤 고문을 당했으며, 결국 전라도 해남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저녁에 성동城東의 여관에서 유숙하는데, 한 부인이 머리맡에 서 있었으니 곧 전날 꿈에 나타난 그 사람이었습니다.
부인은 석주의 귀에 대고 말하기를 ‘그대는 나를 모르겠느냐? 내가 바로 정녀부인이다. 내가 오늘 한번 보복報復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날 석주는 죽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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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택신, 성주신, 토주신



예禮에 오사五祀가 있으니, 2월에 호戶를 제사하고, 5월에 부엌을 제사하고, 6월에 땅을 제사하고, 8월에 문門을 제사하고, 11월에는 우물을 제사했습니다.
이로 미루어 집에는 호신戶神이 있고, 부엌에는 조신竈神이 있으며, 땅에는 토신土神이 있고, 우물에는 우물신이 있으니, 집안 내에 신이 없는 곳이 없었습니다.
이들을 모두 가택신家宅神인 것입니다.
한국 풍속에서 집집마다 신의 이름으로 성주신城主神, 토주신土主神, 제석신帝釋神(집안사람들의 수명, 곡물, 의류 및 화복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업왕신業王神, 수문신守門神(혹은 문신門神), 조왕신竈王神 등이 있었습니다.

업왕業王이란 재신財神을 말합니다.
성주城主란 가택家宅의 신神을 모두 관할하는 신의 명칭名稱입니다.
민속民俗에서 10월(10월을 상달이라고 함)에 무당을 시켜 기도하는 것을 안택安宅이라 합니다.
안택신사의 한 부분으로 성주석이 있으며, ‘성주받이 굿’이라고도 하는데 성주신을 받들어 위안慰安하는 일입니다.
성주석城主釋은 속칭 성주풀이이며, 풀이를 의역하면 석釋이 됩니다.
성주신城主神에 대한 신사神祀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성주신을 처음 봉안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해마다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것입니다.
성주신을 처음 봉안하는 의례를 ‘성주받이’ ‘성주맞이’라 하며, 집을 새로 지었거나 이사했을 때 거행합니다.
이에 반해 정기적 의례를 안택安宅, 고사告祀라 하며, 안택은 정월 중에 고사는 10월 중에 주로 행해집니다.
성주받이는 지방에 따라 풍속이 다르며, 서울에서는 흰 종이에 동전을 싸고 첩절帖折(종이를 접은 것)을 만들어 여기에 깨끗한 물을 부어서 대들보에 붙여놓고 마르기 전에 흰쌀을 던져 그 위에 붙입니다.
충청북도는 서울식과 같으나 다만 상주上柱에 붙입니다.
세속에서 가옥의 가운데 기둥을 상주라 합니다.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쌀을 항아리에 담아 대들보 위에 봉안합니다.

요즈음 민가에서는 해마다 10월 농사가 끝나면 햇곡식으로 큰 시루떡을 찌고 이와 함께 술과 과일을 차려놓고 굿하는 것을 성조成造라 합니다.
성조란 것은 나라를 조성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군檀君이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거처의 제도를 가르쳤고 궁실을 조성했으므로, 인민人民이 그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해 반드시 단군이 단목檀木에 내려온 달에 신의 공로에 보답하는 굿을 합니다.
대종교大倧敎에서는 단군이 10월 3일 단목, 즉 박달나무를 통해 지상에 내려왔다고 합니다.

토주신土主神을 보통 터주신이라고도 하며, 집터를 주관하는 가신家神을 말합니다.
주로 여신女神으로 여겨지며, 성주신의 부인이라는 전승傳承도 있습니다.
우리 풍속에서 토주신을 받드는 방법을 보면 쌀과 베를 볏집에 넣어 부엌 뒷벽에 놓아둡니다.
가정에서 비단을 한 필 사와서 그 앞부분(속명 토끗)을 잘라 신을 모신 볏짚에 매달아 두는데, 제사나 잔치 때 누름적이나 산적을 꽂은 꼬챙이 끝에 감아 늘어뜨린 좁고 가늘게 오린 종이 모양과 같습니다.
10월에 농사가 끝난 뒤 안택신사安宅神祀에서 무녀는 먼저 성주를 모시고, 나중에 토주를 모시므로 토주풀이를 ‘뒷전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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