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신신사, 초혼석, 지로귀산음신사




용신신사龍神神祀
용신신사龍神神祀를 ‘용신굿’이라고도 합니다.
이 신사는 배에서 행해지며, 또 수부석水府釋이 있습니다.
수부水府란 물귀신 혹은 수신水神, 용궁龍宮 등을 뜻합니다.
이 신사들은 밤과 쌀로 밥을 지어 물속에 던져 고기들에게 공양하는데, 칭稱하여 어보시魚布施라 합니다.
세간世間에서 와전訛傳하여 ‘어부심’이라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흰 종이에 성명과 생년을 쓰고 백반을 싸서 물고기에게 주면서 도액度厄(액막이)하는 것을 어부식魚付食이라 하는데, 어부심과 같은 것입니다.

초혼석招魂釋
큰 신사神祀를 행할 때 첫머리에 초혼석招魂釋을 합니다.
부정거리를 통해 굿을 하는 장소를 정화한 뒤 신을 불러들이는 감응청배感應請陪, 가망거리 절차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속에서는 초안석招安釋이라 하는데 혼신魂神을 불러 편안하게 하며 영혼靈魂을 위로한다는 뜻입니다.
또 내림석이 있는데, 이는 신사를 행할 때 신들을 초청해 도량道場에 내림토록 하여 공양供養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지로귀산음신사指路歸散陰神祀
지로귀산음신사指路歸散陰神祀를 ‘지노귀새남’이라고도 합니다.
망자亡者의 극락천도極樂天道를 위한 굿입니다.
새남굿이라면 상류층이나 부유층의 망자천도굿이며, 중류층을 위한 것은 얼새남, 하류층을 위한 것은 평진오기라 합니다.
지노귀새남은 망령亡靈을 추천하는 신사神祀입니다.
추천追薦을 추선追善, 추복追福이라고도 하는데, 사자死者를 위해 산 사람들이 현세現世에서 좋은 일을 하고 이를 망자에게 돌리는 행위입니다.
그럼으로써 망자는 고통을 덜고 극락極樂으로 왕생往生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추천에는 당탑건립堂塔建立, 축복받기 위해 경문經文을 베끼는 사경寫經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사후 매 7일마다 거행하는 7.7재(49재)가 대표적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는 혼魂이 공중으로 가나 그것이 너무 넓고 끝이 없어 갈 바를 모르는데, 불가佛家에서는 이를 ‘죽은 뒤 다음 삶을 받을 때까지 떠도는 영혼’이라고 해서 중음신中陰身이라 합니다.
중음신은 사람이 죽어 다음 생을 받기까지의 과도기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칠칠재七七齋 및 현왕재現王齋를 베풀어 영혼을 추천하여 속히 왕생하도록 합니다.
현왕재는 사람이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 현왕탱화現王幀畵 앞에서 영혼을 천도하는 의례입니다.
탱화幀畵(정화)는 불교 신앙내용을 그린 그림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염라대왕閻羅大王에게 멀지 않은 장래 성불成佛하여 보현왕여래普賢王如來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현왕이란 보현왕여래의 줄임말입니다.
그리고 현왕탱화는 염라대왕을 주존主尊으로 판관判官, 녹사錄事, 사자使者, 동자童子 등을 그린 그림입니다.
우리 무속巫俗은 불교와 혼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신사神祀를 행하며, 염불念佛로서 끝을 맺습니다.
염불은 부처의 모습이나 그 공덕功德을 생각하면서 부처의 이름을 외는 일이며, 특히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는 일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이란 아미타불에 돌아가 의지함을 이르는 말로 공들인 일이 헛일이 됨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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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지내는 성황제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문헌비고』는 우리나라 상고로부터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문물제도를 망라한 종합 자료집으로 1770년(영조 46년) 홍봉한洪鳳漢이 왕명을 받들어 처음 편찬하고, 이를 1782년(정조 6년) 이만운李萬運이 보완했으며, 1903년(고종 7년) 찬집청撰集廳이 다시 증보해 총 16고 250권으로 간행된 책입니다.

본조本朝의 성황단城隍壇은 풍風, 운雲, 뇌雷, 우雨의 신과 단壇을 같이하고, (이곳에서) 성황신을 제사했다. 성황신城隍神의 자리는 풍, 운, 뇌, 우의 신의 오른쪽에 있으며, 모두 남향하게 한다. 의례의 규정[사의祀儀]은 풍운뇌우단에 대한 규정을 참고할 것이며, 여제厲祭 때에는 먼저 발고제發告祭를 성황단에서 거행한다. 또 여제를 지내는 날에는 성황위판城隍位版을 모시고 가서 여단厲壇에서 제사를 지낸다.

조선왕조는 명明나라의 제도에 따라 서울의 남쪽에 남단南壇을 두고, 이곳에서 성황城隍, 산천山川, 풍운뇌우風雲雷雨의 신을 함께 모셨습니다.
남단의 중앙에 풍운뇌우를 모시고, 서쪽에 성황, 동쪽에 산천山川의 신위神位(신주神主를 모셔두는 자리)를 두었습니다.
여제厲祭란 천재지변, 전쟁, 도적, 기근 등으로 말미암아 비정상적으로 죽었으며, 또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 즉 여귀厲鬼에게 지내는 제사를 말합니다.
여제는 명 태조 때 처음 제도화되었으며, 조선왕조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정기적으로는 연 3회, 즉 청명일淸明日(한식寒食이며 식목일植木日이기도 함), 7월 15일, 10월 1일에 제사를 거행하고, 전염병傳染病 등의 재앙이 있을 때는 수시로 거행했습니다.
발고제發告祭는 성황신城隍神에게 여제厲祭의 거행을 알리는 의례이며, 성황신이 사후세계의 관리자이며 심판자란 관념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단厲壇은 여제를 거행하는 제단으로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1번지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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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때의 여러 산천과 성황신의 봉호封號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태조太祖 원년(1392년) 8월 11일 예조전서禮曹典書 조박趙璞 등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 여러 신묘神廟와 여러 주군州郡의 성황城隍은 국가에서 제사하는 곳이니, 다만 모주某州, 모군某郡 성황의 신이라 일컫고, 위판位版을 설치하여 각기 그 고을 수령首領에게 매양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소서’라고 했다.”

예조전서禮曹典書는 6조曹의 장관으로 태종 5년(1405년) 판서判書로 고쳤습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조박趙璞(1356-1408)은 태종太宗 이방원과 동서지간으로 조선왕조 건국과 태종의 즉위卽位에 많은 공功을 세웠습니다.
종전從前에는 성황신城隍神을 ‘-대왕大王’으로 칭하거나 각종 작호爵號를 붙여 칭했으며, 또 성황사城隍寺에는 신상을 모셔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중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명明나라에서는 1369년(홍무 3년) 성황신의 미호美號나 봉호封號를 폐지하고, 신상을 철거하고 대신 신주神主를 모시기로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조박趙璞의 건의建議는 명明나라 제도에 따라 성황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것입니다.

태종太宗 6년(1406년) 정월 7일 백악白嶽의 성황신城隍神에게 녹祿(관리의 봉급俸給)을 주었습니다.
이전에는 송악松嶽의 성황신에게 녹을 주었는데, 한양으로 도읍을 정했기 때문에 옮겨서 준 것입니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 따르면 태종太宗 13년(1413년) 6월 8일 사전祀典을 개정해 예조禮曹에서 아뢰었습니다.
“삼가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살펴보건대 산천에 작爵(벼슬)을 봉한 것은 무후武后로부터 시작했고, 송宋나라 진종眞宗 때에 이르러 5악五岳을 모두 봉하여 제帝(임금)로 삼았으며, 또 각각에 대해 후后(왕후)을 봉했습니다. 진무陳武가 말하기를 ‘제帝는 단지 하나 상제上帝가 있을 뿐인데, 어찌 산을 제帝라 부를 수 있겠는가. 또 후전后殿을 그 뒤에다 세운다 하나, 어느 산이 그 배필이 되는지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홍무예제洪武禮制』에서는 악岳, 진鎭, 해海, 독瀆을 제사하는데, 모두 모악某岳, 모해某海의 신이라 했을 뿐 봉작의 이름을 가진 것은 없었습니다. 전조前朝(고려왕조)는 경내의 산천에 대하여 각각 봉작封爵을 가하고, 혹은 처첩, 자녀, 생질의 상像을 설치하여 모두 함께 제사했으니 진실로 불편했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즉위하신 초에 우리 예조에서 건의하기를 ‘각 지방 성황신의 작호를 없애고, 단지 모주某州 성황지신城隍之神이라 부르게 하소서’ 하여, 즉시 허락을 받아 이미 확실한 법령法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당 관청官廳에서 지금까지 구습舊習을 따르고 이를 실행하지 않아 작호爵號와 신상의 설치가 아직도 그전 대로여서 음사淫祀를 행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태조太祖께서 이미 내린 교지를 거듭 밝혀, 단지 ‘모주某州의 성황지신城隍之神’으로 일컫게 하고, 신주 1위位만 남겨 두되 그 처첩妻妾(아내와 첩) 등의 신은 모두 다 없애버리게 하소서. 산천, 해도海島의 신 역시 주신主神 1위만 남겨두고, 모두 목주木主(위패位牌 혹은 신주神主)에 쓰기를 ‘모해某海, 모산천지신某山川之神’이라 하고, 그 신상은 모두 다 철거하여 사전祀典을 바르게 하시옵소서.”

임금께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문헌통고文獻通考』는 중국 송宋나라 말 원元나라 초의 인물인 마단림馬端臨(1254-?)이 1317년에 완성한 일종의 백과전서로 전 348권이며, 고대에서 남송南宋시대까지의 여러 제도를 24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했습니다.
무후武后는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이며, 무후가 수공 4년(688년) 낙수신洛水神을 현성후顯聖侯로, 숭산신嵩山神을 신악천중왕神嶽天中王으로 봉한 것이 중국에서 신기神祈에게 제후諸侯로 봉하고 관작官爵을 주는 봉작封爵을 수여한 최초의 사례입니다.
5악五岳은 국토의 동, 서, 남, 북, 중앙에 있는 큰 산으로 천자나 왕이 순수하던 곳입니다.
순수巡狩란 왕이 나라 안을 두루 보살피며 돌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진종眞宗(998-1022년 재위)은 송宋나라 제3대 황제로 대중상부大中祥符 5년(1012년) 5악과 그 부인을 각각 봉했습니다.
진무陳武는 송대宋代의 학자로 『춘추春秋』에 정통했으며, 『강동지리론江東地理論』 등의 저술이 있습니다.
『홍무예제洪武禮制』는 명明나라 초 홍무년간洪武年間(1368-98년)의 예제禮制를 규정한 책으로 저자와 출판물을 발행해 반포한 연도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악嶽과 진鎭은 산, 해海는 바다, 독瀆은 강의 의미합니다.
강을 독이라 하는 것은 흘러가면서 더러운 것을 씻어내기 때문입니다.
음사淫祀는 부정한 귀신鬼神에게 지내는 제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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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의 산천단묘山川壇廟의 제도




『태조실록太祖實錄』에 따르면 세종世宗 6년(1424년) 2월 11일 임금께서 상정제조詳定提調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 등에게 명했습니다.
“여러 곳의 성황과 산신을 흔히 태왕太王(태상왕), 태후太后(황태후), 태자太子, 태손太孫, 비妃(왕비)라고 칭하는 것은 무리가 심하며, 이것들은 진실로 요망한 신이다. 옛날에는 단壇을 산 밑에 설치하고 제사하였는데, 이제 감악紺嶽 등과 같은 산에는 사당을 산 위에 세워서 그 산을 밟으며 그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난잡하고 불경스럽다. 또 옛날 예제禮制에는 오직 국왕만이 영토 안에 있는 산천에 제사할 수 있도록 했으나, 지금은 서민도 모두 제사하고 있으니, 구분이 엄하지 못하다. 나의 생각으로는 단壇을 산 밑에 설치하고 신판神板(위패나 신주)을 두되, 다만 ‘어느 산의 신[모산지신某山之神]’이라고만 쓰고, 오직 국가에서만 제사하고, 민간의 음사淫祀는 금지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려 한다. 그러니 경들은 모두 산천에 봉작과 사당을 세우는 데 대한 옛날 법제를 상고하여 아뢰어라.”

이에 이직李稷이 대제학大提學 변계량卞季良, 이조판서 허조許稠, 예조판서 신상申商 등과 함께 고전을 살펴보고 아뢰었습니다.
대제학은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禮文館의 으뜸 벼슬로 정이품이며, 1401년(태종 1년)에 대학사大學士를 고친 것입니다.
변계량卞季良(1369-1430)은 문장에 능해 집현전集賢殿이 설치되면서부터 거의 20년 동안 대제학을 역임했습니다.
허조許稠(1369-1439)는 문신으로 조선 초기 예악제도 정비에 공이 많았고, 1422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습니다.
신상申商(1372-1435)은 1424년에 이어 1426년에도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습니다.

산신에게 작爵을 봉하는 것은 당唐, 송宋, 때에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산신에 작을 봉하고 산 위에 사당을 세워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두루 제사한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또 귀신에게 배필이 있는지 없는지도 억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臣들은 예전처럼 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허조許稠와 신상申商은 음사淫祀를 없애려고 했지만, 이직李稷과 변계량卞季良의 말을 듣고서 마침내 의견을 조율하여 아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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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근당付根堂




우리나라 풍속風俗에 무릇 사람이 노래와 춤을 하면서 흥을 북돋우면 ‘신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무당에서 비유를 취한 것입니다.
여자가 장차 무당이 되려면 먼저 수십일 병을 않는데,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고 펄쩍펄쩍 뛰면서 춤을 춘 뒤에야 마음이 시원하게 되며, 이것으로 무신巫神이 있어 그렇게 시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 집을 다니면서 쌀을 얻어다가 떡과 과자를 갖추고 무당에게 스승이 되어줄 것을 청하는데, 이를 불러 신어미라 하고 큰 굿을 행하는데 이를 몸굿이라 합니다.
이 여자가 한바탕 펄쩍펄쩍 뛰면서 춤을 추면 무신이 접하고 병은 씻은 듯이 나으며, 이때부터 신어미로부터 무업巫業을 배웁니다.
서울에서는 무당을 만신萬神이라 하며, 대개 빌지 않는 신이 없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서울 무당이 받드는 신에는 부군신府君神, 군왕신君王神, 대감신大監神, 전내신殿內神이 있으며, 또 남산 국사당國師堂, 인왕산仁王山, 칠성당七星堂 등이 있습니다.
그 밖에 가택신家宅神과 천연두 신이 있는데,모두가 무당이 신사神祀를 하는 곳입니다.

쌀을 얻는 것을 걸립乞粒이라 하며, 걸립에는 쌀걸립뿐만 아니라 쇠걸립도 있습니다.
몸굿을 내림굿이라고도 합니다.

부군付君 혹은 부근신付根神을 모신 신당을 부근당付根堂이라 합니다.
부군신付君神의 성격이 확실하지 않으므로 광명신光明神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고, 부군당에 목제 남근男根을 봉안奉安하는 풍습을 근거로 생산과 관련된 성기신앙性器信仰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중종中宗 12년(1517년) 8월 13일 우리나라 풍속에 각 관청 안에 모두 신을 모시고 제사를 하니 이를 일컬어 부근付根이라 했다. 행해온 지 이미 오래되어 혁파革罷하려는 자가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헌부가 먼저 지전紙錢을 태워버리고, 각 관청에 관關을 보내어 모두 불살라버리고 그 제사를 금지하도록 하니 많은 사람들이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지전紙錢은 진짜 화폐가 아니라 돈처럼 종이를 잘라놓은 것을 말합니다.
관關이란 상급관청에서 하급관청으로 내리는 공문서公文書를 말합니다.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무속고』에서 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나무 막대기는 송씨宋氏 아가씨를 위해 만든 것이며, 부근付根이라는 명칭은 나무 막대기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송씨宋氏 아가씨와 시집을 가지 못하고 죽은 처녀를 일컫는 손각씨孫閣氏를 이능화가 동일시한 까닭은 손孫과 송宋의 음音이 비슷해 서로 통하기 때문인 것으로 꼽았습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풍속에 서울 소재의 관청에는 으레 작은 집을 지어 두고, 지전紙錢을 빽빽하게 걸어놓는데, 이를 불러 부군府君이라 한다. 서로 모여 난잡하게 제사했으며, 새로 부임한 관원은 반드시 정중하게 이를 제사했고, 비록 법을 집행하는 관청官廳이라 해도 역시 이처럼 했다. 어효첨魚孝瞻이 집의執義가 되자 하인들은 관례라 하면서 이를 고하였다. 어효첨이 ‘부군이 대체 어떤 물건이냐’ 하면서 지전을 거두어 태워버리도록 했고, 그가 전후로 거쳐 간 관부官府에서는 부군을 모신 사당을 거의 모두 불태워버렸다.

관청官廳은 사헌부, 형조, 한성부를 가리킵니다.
사헌부司憲府는 정사政事를 논하고 풍속을 바로 잡으며 관리의 비행을 조사하여 그 책임을 규탄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를 말합니다.
형조刑曹는 6조六曹 가운데 법률, 소송, 형옥刑獄, 노예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를 말합니다.
한성부漢城府는 서울의 행정, 사법을 맡아보던 관아입니다.
어효첨魚孝瞻(1405-75)이 사헌부 집의가 된 것은 1449년(세종 31년)이었습니다.
집의執義란 사헌부의 종삼품 관직입니다.

부군당府君堂마다 제사하는 신이 각기 달랐습니다.
형조刑曹의 부군은 송씨부인宋氏夫人이고, 옥수獄囚를 관장하는 관청 전옥서典獄署의 부군은 동명왕東明王이며, 기타 제갈무후諸葛武候, 문천상文天祥 등의 신도 있습니다.
송씨부인이 어떤 신인지 미상未詳이나, 포도청捕盜廳과 사역원의 부군신도 송씨부인이었다고 합니다.
사역원司譯院(번역, 통역 및 외국어 교육기관)에는 조선말까지 부군당이 있었고, 여기에는 나무로 만든 남자 성기가 공양되어 있었습니다.
제갈무후諸葛武候란 중국의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정치가이며, 촉나라를 위해 동서분주하다 과로로 숨진 제갈량諸葛亮, 즉 제갈공명諸葛孔明(181-234)을 말합니다.
제갈무후란 그가 223년 무향후武鄕侯로 봉해진 데서 유래합니다.
제갈량은 형조刑曹의 부군신付君神이었습니다.
문천상文天祥(1236-83)은 중국 남송南宋의 충신忠臣으로 몽고군과의 강화를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하다 포로가 되었으며, 몽고의 회유懷柔에도 지조志操를 지키다 죽었습니다.
문천상은 병조兵曹의 부군신이었습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을 받드는 곳 또한 많았습니다.
고려 말의 유민들로서 각 관청의 직원이 된 사람이 많아, 항상 옛 나라의 왕을 생각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했습니다.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무속고』에서 부군신府君神이란 명칭이 지명地名에서 유래由來하고 관명官名의 잘못으로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각 군郡에도 또한 부군당이 있었고, 그 신은 대개 수령首領으로 임지任地에서 죽은 이가 많았으며, 그리고 지방 수령을 또한 부군이라 칭했기 때문입니다.
부군이란 한漢나라 때 지방관地方官 태수太守의 칭호稱號였습니다.

이수광李晬光(1563-1628)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말했습니다.
오늘날 풍속에 관아에는 으레 비는 곳을 두었는데, 칭稱하여 부군府君이라 한다. 새로 부임하는 관원은 반드시 이를 제사했는데, 복을 빌기 위한 것이라 한다. 이것은 대개 무격巫覡의 도리에 어긋난 짓거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옛날 어효첨魚孝瞻은 거쳐 가는 관부마다 그곳의 부군의 사당을 모두 불태워 없애버렸다. 그래도 후에 벼슬은 1품까지 이르렀고, 아들 세겸世謙 또한 정승政丞의 지위地位에 올랐으니, 빈다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어세겸魚世謙(1430-1500)은 연산군燕山君 때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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