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샤머니즘




중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유족이 지붕 위에 올라가 사자의 영혼을 향해 새 옷을 보여주면서 육신으로 돌아오라고 간청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중국인은 병도 영혼이 육신에서 도망치는 것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병자가 생기면 요술사가 접신상태에서 병자의 영혼을 잡아다 병자의 육신에 되돌립니다.

고대 중국에는 남녀 요술사, 영매, 축귀술사, 우사雨師, 주술사 등 몇 가지 범주의 종교 관련 종사자들이 고루 있었습니다.
그중 특기할 만한 것이 자신의 영혼을 외면화, 실제화시키는, 즉 영혼인 상태에서 여행하는 기술을 가진 접신사接神師입니다.
최초로 비상의 능력을 획득한 사람은 순舜 황제皇帝(기원전 2258-2208년)로 알려졌습니다.
이 전승에 따르면 황제 요堯의 딸인 여영女英과 아황娥皇이 순에게 새처럼 하늘을 나는 기술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여기서 주력呪力이 여성에게만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고대 중국이 모권사회였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완벽한 군주는 주력의 소유자였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접신능력은 정치적 덕행과 같이 국조國祖에게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습니다.
왜냐면 주술적 권능이 세계에 대한 권위와 지배를 정당화하는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주술적 비행의 기원이 샤머니즘이라는 암시는 중국 문헌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천계비상이 중국에서는 “새의 깃으로 그는 모습을 바꾸고 불사신처럼 날아올랐다”는 식으로 표현됩니다.
깃털은 무당적 비상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상징입니다.
도교의 전설에는 승천 같은 이적異跡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주술적 비상이나 무당의 춤을 언급하고 있는 중국 전승에 빙의憑依(빙령憑靈)에 대한 기술이 전무한 점입니다.
황제, 도가의 불사신, 연금술사, 심지어 요술사의 전설에 승천했다거나 기적을 연출했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빙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한 무녀는 “우리는 천상으로 솟아 혜성을 쓸어버린다”는 내용의 무가를 부릅니다.
중국의 옛이야기는 주술사의 장하고 큰 계획인 장거壯擧를 내용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바라문 행문파에 관한 전설과도 흡사합니다.
이런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술사들은 달까지 날아가기도 하고, 벽을 예사로 지나다니기도 하며, 식물에서 싹을 틔워 자라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신화와 민간신앙의 전통은 모두 영적 여행을 의미하는 접신의 이념 및 기술을 출발점으로 합니다.
아득한 옛날부터 탈혼상태를 만드는 가장 고전적 수단은 춤이었습니다.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무당의 주술적 비상이나 영혼의 하강을 가능하게 한 것은 접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하강이 반드시 빙의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영혼이 무당에게 영감을 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도교는 요가와 불교에 비해 훨씬 많은 고대의 접신기술을 흡수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술적 요소로 변질된 후기 도교의 경우 그러합니다.
그러나 상승의 상징체계가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그 구조가 견실하고 건강한데도 불구하고 도교는 접신, 빙의와는 구별됩니다.
중국의 무속巫俗은 유교와 국가 종교가 우위를 차지하기 전 시대의 종교생활을 지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상고시대의 수세기 동안 무巫는 중국의 정통 사제였습니다.
무는 무당과 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는 영靈과 합일하고 이 합일을 통해 신과 인간을 중재했으며 영의 도움을 받아 병자를 고치는 치료술사이기도 했습니다.
숫자로는 여무가 압도적이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빙의가 시작된 것은 무가 귀신과 합일할 때였습니다.

후한後漢의 사상가 왕충王充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자는 흔히 탈혼망아의 산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하지만, 일단 무巫가 검은 현弦을 타면서 사자를 부르면 사자는, 이번에는 무의 입을 빌려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무슨 말을 하건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이는 영매현상을 혐오하는 작가의 판단입니다.
그러나 여무의 마술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무는 사람들의 눈에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할 수도 있으며, 칼로 자기 몸을 찌르거나 혀를 자를 수도 있고, 칼을 삼킬 수도 있으며, 불을 뿜을 수도 있고, 번개처럼 빛나는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 수도 있습니다.
여무女巫는 선무旋舞를 추는가 하면, 신어神語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주위에 있는 사물을 공중으로 뜨게 해서는 서로 부딪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다분히 바라문 행문파가 보여주는 이적 같은 현상은 중국의 주술계 및 영매계에서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영신을 보거나 예언을 하고 싶다고 해서 반드시 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들리기만 하면 이 정도의 일을 얼마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신통력과 빙의는 종종 상궤常軌를 벗어난 자발적 샤머니즘으로 귀착합니다.

중국의 샤머니즘은 중요한 요소들인 승천, 초혼과 영혼의 수탐, 영신과의 합일, 불의 다스림, 바라문 행문파적 묘기 등을 골고루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명계하강은 일반적이지 못합니다.
병자의 영혼이나 사자의 영혼을 찾기 위한 명계하강이 특히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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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은 그때 리와 아주 사이가 나빴다



폴록은 자신이 알고 있는 여인들을 찾아가 자기 아이를 임신하지 않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린버그는 7월에 폴록과 함께 주말을 보내려고 스프링스로 왔다가 부엌에 앉아서 폴록과 리의 싸움을 목격할 수 있었다.
폴록은 리에게 하루 종일 화를 냈으며 그린버그가 리의 편을 들어주면 폴록은 더욱 화를 못 참았다.
폴록은 리에게 “난 너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 소리쳤으며 “결혼이 두 사람을 죽일 것만 같았다”고 그린버그는 전한다.
다음 날 리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다.
폴록이 리를 죽일 것만 같아서 그린버그가 리에게 의사를 찾아가보라고 권한 것이다.
폴록은 리와 함께 치료를 받았는데 폴록에게는 이번이 다섯 번째였다.
젊은 의사 랄프 클라인은 폴록과 함께 뉴욕에 가서 그리니치빌리지에 있는 시다에서 함께 술을 마시면서 폴록의 정신 상태를 가까이서 관찰하기도 했다.

랄프 클라인은 맨해턴에서 개업하고 있었으므로 폴록은 매주 화요일이면 클라인을 만난 후 시다에 왔다.
술을 마시면 폴록은 “시팔, 매춘부 같은 놈들아! 네 놈들이 화가라고 생각해?”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느 날 밤에는 테이블에 있는 십여 개의 술잔들을 바닥으로 쓸어버렸고, 어떤 때는 음식물을 친구들이나 낯선 사람들에게 마구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여자들을 희롱했는데 그건 폴록만이 했던 짖궂은 장난은 아니었다.
드 쿠닝도 마찬가지이고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보통 있는 일이었으므로 특기할 만하지는 않다.
폴록은 여자에게 혀를 내미는 시늉을 하면서 “근래에 좋은 자지를 빨아본 적이 있냐?”고 묻기도 했다.
어느 여류화가에게는 “넌 섹스는 잘하겠지만 빌어먹을 가치 있는 그림을 그리지는 못할 게다”라고 말했으며, 흑인에게 “너는 네 피부 색깔을 좋아하니?”라고 물었다.

시다에 출입하는 십여 명의 젊은 예술가들은 폴록을 우상처럼 생각하면서 그들도 그처럼 유명한 예술가가 되기를 고대했는데 폴록은 그들에게 “시팔 너희는 뭐 하는 놈들이냐?”고 하고 어떤 때는 “너희는 네 놈들의 이름을 알리려고 무슨 짓들을 하고 있니?”라고 묻기도 했다.
그는 사내 동성연애자들을 ‘심부름꾼들’이라고, 여자 동성연애자들은 ‘매춘부들’이라고 불렀는데 어떤 때는 사내에게도 이 말을 적용했다.
또 그는 동료 예술가들을 ‘지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접시와 술잔들을 부순 후 상처 난 손가락의 피를 짜서 테이블 위에 물감 흘리기 기교로 그림을 그리듯이 칠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이 시기에 시다에서 폴록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예술가는 프란츠 클라인이었다.
“그곳에 가는 사람들은 언제든 클라인이 거기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들이 떠날 때에도 그가 그곳에 있음을 보았다”고 래리 리버스가 말했다.
폴록처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클라인은 당시 아내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으므로 더욱 술을 마셨다.
그도 세상을 피해서 술집으로 도피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맥주를 주로 마시는 그도 늘 주량을 초과하는 편이었다.
자연히 폴록은 클라인을 형처럼 따르면서 함께 술을 마셨다.
폴록이 술을 젓는 플라스틱 대롱을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으면 클라인도 따라서 씹었다.
두 사람이 서로 응시할 때는 마치 영화 <하이 눈 High Noon>의 한 장면 같았다.
어느 날 밤 클라인은 야구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하는데 폴록이 그의 팔꿈치를 쳤다.
그가 “잭슨, 까불지 마!”라고 말하고 다시 야구 이야기를 계속하자 폴록은 다시 그의 팔꿈치를 쳤다.
클라인은 “한 번만 더 그러면 네 명줄을 끊어놓겠다!”고 소리쳤다.
클라인이 다시 야구 이야기를 시작하자 폴록은 지루해서 클라인의 모자를 벗겨 높은 선반 위로 올려 보내고는 술집 밖으로 달아났다.
두 사람이 취하면 대화가 아니라 온통 욕지거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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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양자통계역학의 핵심적인 발명자가 되었다




1924년 6월 인도의 사티엔드라 나스 보스Satyendra Nath Bose(1894~1974)라는 젊은 물리학자가 자신의 논문을 영어로 작성해 아인슈타인에게 보냈다.
그 논문은 복사를 기체구름으로 가정한 후 통계적인 방법을 적용해 플랑크의 흑체복사 법칙을 유도한 것이었다.
그런데 비약이 있었다.
보스는 같은 에너지를 가진 두 개의 광자는 이론적으로는 물론 실질적으로도 구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통계 계산에서 별개로 다루지 말아야 했다.

아인슈타인은 보스의 논문이 발표될 수 있도록 심사를 통과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세 편의 논문을 통해 그 결과를 확장했다.
그 논문에서 그는 훗날 “보스-아인슈타인 통계학”으로 불리게 될 보스의 계산방법을 실제 기체분자에 적용함으로써 양자통계역학의 핵심적인 발명자가 되었다.

보스의 논문은 질량을 가지지 않은 광자를 다룬 것이었고, 아인슈타인은 통계적인 목적에서 질량을 가진 양자 입자를 서로 구별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그 이론을 확장했다.
그는 “양자나 분자는 통계적으로 서로 독립적인 구조로 취급되지 않는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이 보스의 논문에서 발견한 핵심적인 사실은 여러 개의 양자 입자의 가능한 상태에 대한 확률을 계산하는 방법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그런 방법을 통해 놀라운 특징을 발견했는데, 고전 입자의 경우 서로 끌어당기지 않으면 기체로 남아있게 되지만 양자의 경우에는 입자들 사이에 인력이 없는 경우에도 액체와 같은 상태로 응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보스-아인슈타인 응축Bose-Einstein condensation으로 불리는 그런 현상은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발견이었으며, 아인슈타인은 그 업적에 대한 공로의 대부분을 인정받았다.
보스는 자신이 사용한 통계수학이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방법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방법은, 자신과 드 브로이가 제안했던 것처럼 입자들이 파동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취급하는 효과를 냈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기체분자들을 이용해서 토머스 영의 빛상을 두 개의 슬릿에 통과시키면 간섭무늬가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빛이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준 이중슬릿실험을 한다면, 분자들이 파동처럼 서로 간섭할 것임을 예측했다.
그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기체분자살은 빛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회절현상을 나타내야만 한다”고 했다.
놀랍게도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의 발전 방향에 대해서는 불만을 갖고 있었으나 최소한 한동안은 양자역학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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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uncertainty principle


 

1925년 여름 스물세 살의 청년으로 등산을 좋아했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1901~76)가 양자역학에 대한 또 다른 접근방법을 개발했다.
그는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의 학생이었고, 후에는 괴팅겐의 막스 보른의 학생이었다.
젊었을 때의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그도 이론은 관찰하거나 측정하거나 확인할 수 없는 개념을 멀리해야 한다는 에른스트 마흐의 격언을 받아들였다.
하이젠베르크에게 그런 주장은 관찰할 수 없는 전자 궤도의 개념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들이 에너지를 잃어버리는 과정에서 방출하는 복사의 스펙트럼선의 파장처럼 관찰 가능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수학적 접근에 의존했다.
결과는 너무 복잡했다.
그는 자신의 논문을 보른에게 주고, 그가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친구들과 함께 캠핑여행을 떠났다.
보른은 모든 것을 정리해 논문으로 발표하도록 해주었다.
하이젠베르크는 괴팅겐에서 보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을 통해 훗날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과 동등한 것으로 밝혀진 행렬역학matrix mechanics을 완성했다.

아인슈타인은 보른의 아내 헤드비히에게 “하이젠베르크-보른 개념은 우리의 숨을 멈추게 만들었습니다”라는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신중하게 꾸며진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이해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라이덴에 있는 에렌페스트에게 보낸 편지에 “하이젠베르크가 큰 양자 알을 낳았습니다. 괴팅겐에서는 그것을 믿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적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27년 스물여섯 살 때 양자물리학의 개념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졌으면서도 가장 당혹스러운 불확정성원리uncertainty principle로 물리학에 기여했다.
그는 움직이는 전자와 같은 입자의 정확한 위치와 정확한 모멘텀(the도와 질량의 곱)을 동시에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관찰하는 행동, 즉 광자, 전자, 다른 입자나 에너지 파동이 물체에 충돌하는 것 자체가 관찰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은 그것을 넘어섰다.
전자는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기 전에는 명백한 위치나 경로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단순히 우리의 관찰이나 측정능력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우주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우리의 관찰범위 바깥에는 객관적인 실체, 심지어 입자의 객관적인 위치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더욱이 하이젠베르크 원리를 비롯한 양자역학의 다른 면들은 우주가 엄격한 인과법칙을 따른다는 생각을 무너뜨렸다.
우연, 비경정성, 확률이 확실성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특징들을 반대하는 아인슈타인의 편지에 대해서 하이젠베르크는 “저는 비결정주의, 즉 엄격한 인과성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라는 단호한 답장을 보냈다.

하이젠베르크는 1926년에 강연하러 베를린에 왔을 때 처음 아인슈타인을 만났다.
어느 날 저녁에 아인슈타인은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그곳에서 그들은 우호적인 논쟁을 벌였다.
그 논쟁은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에테르를 인정하지 않는 자신에게 반발하던 보수주의자들과 가졌을 수도 있는 형식의 논쟁과 닮은꼴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리는 원자 안에 있는 전자의 궤도를 관찰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이론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양을 근거로 해야만 합니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그러나 자네도 물리학 이론에는 관찰할 수 있는 양만 들어있어야 한다고 믿지는 않겠지?”라고 반발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놀라면서 “선생님도 상대론에서 정확하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어쩌면 나도 그런 종류의 추론을 사용했겠지만 그것은 어쨌든 터무니없는 것이었네”라고 응답했다.

1920년대 중반에 하이젠베르크를 포함한 닐스 보어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론적 발전은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으로 알려졌다.
물체의 성질은 그런 성질이 어떻게 관찰되거나 측정되는지의 범위에서만 논의될 수 있으며, 그런 관찰은 단순히 그림의 한 면이 아니라 상보적이라는 것이다.
즉 다른 관찰과 상관없는 유일한 근원적 진실은 없다는 것이다.
보어는 “물리학의 임무가 자연이 어떠한가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물리학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1927년 봄 뉴턴 사망 200주년을 계기로 인과성과 확실성을 근거로 하는 고전역학 시스템을 유지시켜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새로운 양자역학에서 엄격한 인과성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마지막 판결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뉴턴 방식의 정신이 우리에게 물리적 진실과 뉴턴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심오한 요소인 엄격한 인과성의 결합을 회복시키는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에테르나 절대적 시간과 공간 그리고 동시성처럼 관찰할 수 없는 개념을 거부했다.
그는 친구 필리프 프랑크에게 관찰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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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이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의 관찰 여부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재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양자역학이 인과성을 포기하고 물리적 실재를 비결정성, 불확정성, 확률을 이용해서 규정한다는 이유로 양자역학을 거부했다.
그는 물리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원인과 결과를 엄격하게 결정해주는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결정주의와 인과성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믿음은 그가 가장 좋아했던 철학자 바루흐 스피노자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는 스피노자에 대해서 “그는 자연현상의 인과관계에 대한 지식을 알아내려는 노력이 여전히 크게 성공하지 못했던 시기에 살았지만 모든 현상의 인과적 의존성을 철저히 확신하고 있었다”고 했다.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도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인격적인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을 지배하는 우아한 법칙은 신성한 설계를 반영한다고 믿었다.

아인슈타인은 막스 보른에게 말했다.
“양자역학은 확실히 훌륭합니다. 그러나 은밀한 목소리가 내게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이론은 많은 것을 말해주지만 우리를 악마의 비밀 가까이까지 데려다주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나는 신이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틀리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완전하지 않다고 보았다.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더욱 완전한 설명, 즉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모두를 아우르는 설명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 과정에서는 그 어느 것도 우연에 맡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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