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uncertainty principle


 

1925년 여름 스물세 살의 청년으로 등산을 좋아했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1901~76)가 양자역학에 대한 또 다른 접근방법을 개발했다.
그는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의 학생이었고, 후에는 괴팅겐의 막스 보른의 학생이었다.
젊었을 때의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그도 이론은 관찰하거나 측정하거나 확인할 수 없는 개념을 멀리해야 한다는 에른스트 마흐의 격언을 받아들였다.
하이젠베르크에게 그런 주장은 관찰할 수 없는 전자 궤도의 개념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들이 에너지를 잃어버리는 과정에서 방출하는 복사의 스펙트럼선의 파장처럼 관찰 가능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수학적 접근에 의존했다.
결과는 너무 복잡했다.
그는 자신의 논문을 보른에게 주고, 그가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친구들과 함께 캠핑여행을 떠났다.
보른은 모든 것을 정리해 논문으로 발표하도록 해주었다.
하이젠베르크는 괴팅겐에서 보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을 통해 훗날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과 동등한 것으로 밝혀진 행렬역학matrix mechanics을 완성했다.

아인슈타인은 보른의 아내 헤드비히에게 “하이젠베르크-보른 개념은 우리의 숨을 멈추게 만들었습니다”라는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신중하게 꾸며진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이해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라이덴에 있는 에렌페스트에게 보낸 편지에 “하이젠베르크가 큰 양자 알을 낳았습니다. 괴팅겐에서는 그것을 믿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적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27년 스물여섯 살 때 양자물리학의 개념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졌으면서도 가장 당혹스러운 불확정성원리uncertainty principle로 물리학에 기여했다.
그는 움직이는 전자와 같은 입자의 정확한 위치와 정확한 모멘텀(the도와 질량의 곱)을 동시에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관찰하는 행동, 즉 광자, 전자, 다른 입자나 에너지 파동이 물체에 충돌하는 것 자체가 관찰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은 그것을 넘어섰다.
전자는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기 전에는 명백한 위치나 경로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단순히 우리의 관찰이나 측정능력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우주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우리의 관찰범위 바깥에는 객관적인 실체, 심지어 입자의 객관적인 위치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더욱이 하이젠베르크 원리를 비롯한 양자역학의 다른 면들은 우주가 엄격한 인과법칙을 따른다는 생각을 무너뜨렸다.
우연, 비경정성, 확률이 확실성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특징들을 반대하는 아인슈타인의 편지에 대해서 하이젠베르크는 “저는 비결정주의, 즉 엄격한 인과성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라는 단호한 답장을 보냈다.

하이젠베르크는 1926년에 강연하러 베를린에 왔을 때 처음 아인슈타인을 만났다.
어느 날 저녁에 아인슈타인은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그곳에서 그들은 우호적인 논쟁을 벌였다.
그 논쟁은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에테르를 인정하지 않는 자신에게 반발하던 보수주의자들과 가졌을 수도 있는 형식의 논쟁과 닮은꼴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리는 원자 안에 있는 전자의 궤도를 관찰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이론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양을 근거로 해야만 합니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그러나 자네도 물리학 이론에는 관찰할 수 있는 양만 들어있어야 한다고 믿지는 않겠지?”라고 반발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놀라면서 “선생님도 상대론에서 정확하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어쩌면 나도 그런 종류의 추론을 사용했겠지만 그것은 어쨌든 터무니없는 것이었네”라고 응답했다.

1920년대 중반에 하이젠베르크를 포함한 닐스 보어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론적 발전은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으로 알려졌다.
물체의 성질은 그런 성질이 어떻게 관찰되거나 측정되는지의 범위에서만 논의될 수 있으며, 그런 관찰은 단순히 그림의 한 면이 아니라 상보적이라는 것이다.
즉 다른 관찰과 상관없는 유일한 근원적 진실은 없다는 것이다.
보어는 “물리학의 임무가 자연이 어떠한가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물리학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1927년 봄 뉴턴 사망 200주년을 계기로 인과성과 확실성을 근거로 하는 고전역학 시스템을 유지시켜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새로운 양자역학에서 엄격한 인과성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마지막 판결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뉴턴 방식의 정신이 우리에게 물리적 진실과 뉴턴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심오한 요소인 엄격한 인과성의 결합을 회복시키는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에테르나 절대적 시간과 공간 그리고 동시성처럼 관찰할 수 없는 개념을 거부했다.
그는 친구 필리프 프랑크에게 관찰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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