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인도의 상승의례




터키, 몽고의 종교, 특히 자작나무가 지니는 의례적 중요성과 관련해서, 일곱 개 혹은 아홉 개의 눈금이 새겨진 자작나무나 기둥은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우주수를 상징합니다.
자작나무나 기둥을 오름으로써 무당은 최고천最高天에 올라 천신天神 바이 윌갠Bai Ülgän을 만납니다.

바라문교Brahmanic(브라만교라고도 하며, 힌두교 및 인도 종교의 바탕이 된 베다 시기에 만들어져 베다교 혹은 베다브라만교라고도 부름) 의례에서도 이러한 상징이 발견됩니다.
이 상징 역시 신들의 나라로의 의례적 상승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제물이 놓일 자리는 “오직 한 군데, 마지막 한 군데 ... 결국 하늘밖에 없다.” “저승을 건너는 배가 바로 제물이다.” “모든 제물은 하늘을 향하는 배이다.”
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두로하나durohana, 즉 “어려운 상승”인 세계수 오르기 의식입니다.

희생제의 기둥인 유파yupa는 우주수와 동일시되는 나무로 만들어집니다.
이 나무는 공희제주供犧祭主 자신이 벌목수伐木手를 데리고 숲으로 들어가 몸소 고릅니다.
이 나무가 벌목되는 동안 공희제주는 나무를 향해 “하늘을 쳐다보지 말라! 대기를 다치지 말라!” 하고 외칩니다.
이때 희생제의 기둥은 일종의 우주의 기둥이 됩니다.
그래서 공희제주는 “숲의 주主인 바나스파티Vanaspati시여, 이 땅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르소서” 하고 외칩니다.

이 우주의 기둥을 이용하여 공희제주는 혼자서 또는 신처神妻와 함께 하늘로 오릅니다.
우주의 기둥에 사다리를 대면서 공희제주는 신처에게 말합니다.
“아내여, 와서 하늘로 오릅시다!”
그러면 신처는 “오르시지요!” 하고 대답합니다.
이들은 이러한 의례적인 대사를 세 차례 주고받습니다.
기둥 꼭대기까지 올라간 공희제주는 새가 날개를 펴듯 기둥 꼭대기에 손을 대고 두 팔을 벌리고 소리칩니다.
“우리는 하늘에, 신들에게 이르렀다. 우리는 이로써 불사不死를 얻었노라!” “진실로 공희제주는 이를 천계에 오르는 사다리나 다리로 삼았거니.”

바라문 경전에 “나무를 오르는” 사례가 자주 나오는데, 이 나무 오르기는 영적인 상승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그 의미가 일목요연一目瞭然한 것은 아니지만, 같은 상징은 민간전승에서 풍부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승은 석가의 탄생 설화에서도 발견됩니다.
『중아함경中阿含經Majjhima-nikáya』에 따르면 “석가는 태어나는 순간 ... 두 발로 서서, 북쪽을 향해 일곱 걸음을 옮겨 놓는다. 햇볕을 가리기 위해 세우는 큰 양산인 흰 일산日傘을 머리 위로 거느린 채 그는 사방을 보고는 황소 우는 소리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귀한 자, 나는 세계에서 가장 선한 자, 나는 세계에서 가장 연장자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태어나는 것이니 금후로 나를 대신할 새로운 존재는 없다.’”
이 일곱 걸음은 석가를 이 세계의 정점으로 데려다 놓습니다.
최고천最高天에 오르기 위해 의례용 자작나무에 새겨진 일곱 개 혹은 아홉 개의 눈금을 타고 오르는 알타이 무당처럼, 석가도 천상계 7천에 대응하는 일곱 개의 우주 전 단계를 상징적으로 뛰어넘습니다.
여기에서 고대의 무당적인 그리고 베다 시대의 상징적 천계상승의 우주론적 도식이 인도 지복천년의 형이상학적 사색思索의 빛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석가의 일곱 걸음이 지향하는 것은 더 이상 베다 시대의 “신들의 세계”나 “영생”이 아닙니다.
석가의 일곱 걸음으로 지향하는 세계는 인간조건을 초월한 곳에 존재합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귀한 자”라는 표현은 그의 초공간성을 의미하고, “나는 세계에서 가장 연장자”라는 표현은 그의 초시간성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우주의 정상에 도달함으로써 석가는 “세계의 중심”을 획득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창조행위가 이 중심(정상)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석가는 세계가 시작되던 시대와 동시대인이 되는 것입니다.

『중아함경』이 언급하는 7천天 개념의 기원은 바라문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개념은 알타이와 시베리아의 우주론적 개념에 영향을 끼친 바빌로니아 우주론에서 온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심오하게 내면화된 형태이기는 하나 불교 역시 9천이라는 우주론적 도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불교의 9천의 개념에 따르면 처음 4천은 즈하나스(선종禪宗jhanas), 다음의 4천은 사타바사스(유정거有情居sattavasas) 그리고 마지막 1천은 니르바나(열반涅槃Nirvana)를 상징합니다.
이들 천계에는 각기 불교의 여러 신들이 투영되어 있으며, 이러한 신들은 각기 요가적 명상의 단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알타이 무당이 최고천인 9천에 오르면 여기에는 바이 윌갠이 있습니다.
물론 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상징적인 천계상승이 아니라 명상을 통해 도달하는 정신의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탈解脫에 이르는 걸음걸이입니다.
불교의 승려들은 생전에 수행한 요가의 단계에 따라 사후에 거기에 맞는 천계에 듭니다.
그러나 석가 자신은 최고천인 열반에 드는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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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도의 주술적 비상




바라문교의 공희제주供犧祭主는 제의적으로 사다리를 오름으로써 천계에 오르며, 석가는 상징적으로 7천을 가로지름으로써 우주를 초월하고, 불교의 요가 행자는 명상을 통해 그 성격이 완벽한 영적 상승을 체현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모두 유형론적類型論的으로 동일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기 자신이 존재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나름의 방법으로 속계俗界에서, 이러한 행동이 어느 정도까지 천계상승이라는 샤머니즘적 문화전승의 부류에 들어갑니다.
고대의 인도인 또한 천계상승과 주술적 비상을 가능하게 하는 접신의 경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 문헌으로 바라문교의 근본 경전인 4베다 중 첫 번째 문헌인 『리그 베다Rig Veda』(리그는 성가聖歌 베다는 경전이란 뜻임)에 나오는 장발長髮kesin의 ‘접신한 이 muni’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점신의 성덕聖德에 힘입어 우리는 바람 위에 올랐다! 보라, 중생들이여, 접신의 경지에 들어있는 우리의 모습을! ... 우리 접신한 자들은 바람의 말馬, 태풍신 바유의 친구, 신성으로 드높여진 무리를 ... .”
여기서 알타이 무당이 자기의 무고를 ‘말馬’이라고 부른다는 점, 부르야트족Burjat의 이야기에서 말머리 모양을 새긴 지팡이(이 지팡이 또한 ‘말’로 불림)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고에 의한 접신상태, 말머리가 새겨진 일종의 목마인 지팡이를 타고 도달하는 접신상태는, 환상의 말을 타고 천계를 달리는 상태와 동일시됩니다.
비非아리아계 인도인의 경우에도 주술사는 아직까지도 점신무를 출 때 목마나 말머리가 새겨진 지팡이를 이용합니다.

『리그 베다』의 같은 찬가에 “무니는 신들(의 힘)을 보증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접신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고도의 정신적 가치를 지니는 일종의 신비주의적 빙의상태를 말하는 듯합니다.
무니는 “동서의 양대양兩大洋에 살며 아프사라사스(천녀天女Apsarasas)와 간다라바스(건달파乾闥婆Gandharvas) ... 그리고 야수의 길을 간다.”
바라문교 최고 네 경전 가운데 네 번째의 것인 『아타르바 베다Atharva Veda』(나머지 셋은 『리그 베다』, 『사마 베다』, 『야주르 베다』)는 고행정신의 불가사의한 힘, 즉 타파스tapas를 터득한 제자들을 칭송하여 “이들은 한순간에 동해에서 북해로 간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 거인적巨人的인 체험은 그 근원이 무당의 접신으로서 불교에도 남아 요가 행자의 기술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인도의 민간신앙民間信仰과 신비주의 기술에서 상승上昇과 주술적呪術的 비상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공중으로 솟아올라 새처럼 날고 눈 깜짝할 사이에 먼 거리를 가고 그리고 사라지는 기술은, 불교와 힌두교가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인 아라한阿羅漢과 주술사 혹은 왕에게 부여하는 주술적 권능이기도 합니다.
하늘을 나는 왕, 주술사의 전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적의 호수인 아나바타프타(청량지淸凉池Anavatapta)에는 하늘을 나는 초자연적超自然的인 힘을 지닌 사람만이 이를 수 있습니다.
석가와 고승高僧은 일순간에 청량지를 다녀왔습니다.
이는 리시스(타인他人rishis)이 하늘을 날아 북방에 있는 신비한 신의 나라인 스베탓비파(백주白洲Svetadvipa)에 다녀왔다는 힌두교 설화와 동일합니다.
그 나라가 “더럽혀지지 않은 땅”, “극락極樂”의 의미를 지닌 신비의 나라, 비법秘法의 전수자들만이 가까이 갈 수 있는 “내적 공간”과 관계가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청량지나 백주 혹은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에는, 요가를 통해서도, 금욕주의를 통해서도 혹은 명상을 통해서도 도달할 수 있습니다.
즉 극락은 나름의 다양한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 경전에서는 가마나(승천지행昇天之行gamana)의 주술적 능력이 네 가지 있다고 전하는데, 그중에 으뜸가는 능력이 새처럼 나는 능력입니다.
철학적 특색에 관한 금언을 수록한 요가의 근본 경전으로 400-450년에 편찬된 4장 194경으로 구성된 『요가 수트라Yoga sutra』의 편집자 파탄잘리Patanjali는 요가 행자가 할 수 있는 시디스(성취成就siddhis) 가운데 하나로 공중을 나는 힘을 꼽습니다.
고대 인도의 개서사시 『마하바라다Mahabharata』에서 현자賢者인 나라다Narada는 항상 이 ‘요가의 힘’으로 하늘로 오르거나 ‘세계의 중심’인 메루 산 꼭대기에 이르거나 합니다.
여기서 나라다는 멀리 떨어진 우유의 바다나 신의 나라 백주를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요가적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요가 행자는 자기가 마음 먹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그러나 『마하바라다』에 기록되어 있는 또 다른 전승은 이미 늘 구체적일 수는 없는 진정한 신비주의적 상승과 환상일 뿐인 주술적 비상을 구별합니다.
“우리도 하늘로 날아 올라가거나 갖가지 모습으로 둔갑할 수 있다. 그러나 마야야(환상mayaya) 속에서 그렇게 한다.”

주술적 비행이라는 비의秘儀가 인도의 연금술鍊金術에서도 엿보입니다.
이러한 주술적 비행 능력이 소승불교에서 수행의 최고위에 오른 사람인 아라트(아나한阿羅漢arhat)들에게는 보편적입니다.
심지어 불교의 이상 인간형인 아라한트arahant라는 명사가 실론어Singhalese로 ‘모습을 감추다’, ‘일순간에 이동하다’라는 뜻의 라하트베rahatve라는 동사의 어원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요가적 수단에 의해 초월적 힘을 획득하고 최고의 원리와 합일을 실현하는 방법으로서의 탄트라힌두교Tantric Hinduism의 요정 주술사인 다키니dakini가 몽고에서는 ‘공중을 나는 여자’, 티베트에서는 ‘천상으로 오르는 여자’로 불립니다.
주술적 비행이나, 사다리 및 밧줄을 이용한 천계상승 모티프는 티베트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티베트의 이러한 모티프를 반드시 인도로부터 차용한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인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본포Bon-po 전승이나, 여기에서 유래한 많은 전승에서도 이러한 모티프가 검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모티프는 중국의 주술적 비행이나 민간전승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인식됩니다.
이러한 모티프는 고대세계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기도 합니다.

무니의 상승과 바라문교 의례의 상승은 그 경험적 성격에서 구별됩니다.
무니의 상승은 시베리아 무당의, 접신적接神的 것임이 분명한 무의의 탈혼망아脫魂忘我(ecstasy)에 견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접신체험이 바라문교 공희제의 일반적 이론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무당의 탈혼망아가 시베리아나 알타이 종교의 우주론적ㆍ신학적 체계 속에 교묘하게 흡수되어 있는 형국과 비슷합니다.
두 가지의 상승은 그 체험의 강도에서 서로 다른데, 심리적心理的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강도가 어떻든 접신체험은 세계적으로 분포한 상징체계를 통해 전파되었으므로 접신체험이 기왕에 존재하던 주술적ㆍ종교적 체계로 함몰되어간 범위는 확인이 가능합니다.
주술적 힘은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요소가 아니라 다양한 샤머니즘 이념으로부터 포괄적인 신학적, 우주론적 총체 안에서 자리매김된 것이라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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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과 가입의례




의례와 접신 사이의 연속적 관계는 범汎인도적 이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다른 개념과의 관련에서도 발견됩니다.
그 개념이 고행tapas입니다.
타파스는 ‘맹렬한 열기’이란 의미이지만, 고행의 노력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타파스에 관해서는 『리그 베다』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대로 타파스의 힘은 우주적 의미에서든 정신적 의미에서든 창조적입니다.
수행자는 타파스를 통해 천리안이 되기도 하며 신으로 화신하기도 합니다.
조물주 혹은 창조신Prajapati은 고행을 통해 자신을 극도로 과열시킴으로써 세계를 창조합니다.
즉 프라자파티는 일종의 주술적 땀을 내는 일인 발한發汗을 통해 세계를 창조합니다.
내적 열기 혹은 신비스런 열기는 창조적입니다.
이 열기는 직접 우주론으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에도 소우주의 차원에서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일종의 주력呪力으로 작용합니다.
이 열기는 고행자나 요가 행자의 많은 환상 혹은 주술적 비행, 물리적 법칙의 부정, 기문둔갑奇門遁甲(둔갑술) 등의 기적奇蹟을 지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열기는 원시시대 주술 및 무당 기술의 필요불가결必要不可缺한 부분을 구성합니다.
세계 어디에서든 이러한 내적 열기를 획득한 인간은 불을 다스리고, 물리적 법칙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에게 이러한 권능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말하자면 정식으로 열기에 휩싸인 주술사만이 기적을 연출하고 우주에서의 새로운 존재양식을 창조할 수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천지창조를 되풀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프라자파티는 주술사의 원본인 것입니다.

이러한 열기는 불 가까이에서 명상함으로써 혹은 숨을 다스림으로써(수식관법數息觀法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호흡법 기술과 수식관법이 요가라고 하는 명칭을 두루 싸잡는 고행실천과 주술적ㆍ신비적ㆍ형이상학적 이론과의 복합체 안에서 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고행의 노력이란 의미에서 타파스는 모든 형태의 요가에서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합니다.
고전적 요가 전통에서는 역逆의 의미에서 천지창조로서의 호흡조절(pranayama프라나야마)에 부여된 힘을 이용합니다.
‘역의 의미에서 청지창조’란 요가 행자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차원까지 이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러한 힘을 통해 요가 행자가 세상으로부터 해탈하거나 어느 정도까지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왜냐면 요가 행자의 해탈이 우주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해탈에 이른 사람에게 우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타파스는 접신상태에 빠지기 쉬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행이 아닙니다.
타파스는 속인의 종교 체험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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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무당적 상징체계와 그 기술




병자로부터 빠져나간 영혼을 불러들이거나 찾아다니는 무당의 치병술에 관한 사례가 『리그 베다』에도 적혀 있습니다.
기도를 담당하는 사제는 죽어가는 사람에게 “비록 그대의 영혼은 아득한 하늘로 갔거나 ... 이 땅의 끝까지 가버렸지만, 우리가 그대의 영혼을 수습해 여기에서 오래 살게 할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라문 병자의 영혼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바라건대 그대의 영혼이 ... 다시 돌아와 신심 있게 덕행을 쌓고 힘을 행사하며 더불어 살고 오래 태양을 보게 되기를. 우리의 조상이, 여러 신들이 그대의 영혼을 되돌려 주시기를. 그리하여 바라건대 우리가 그대를 위해 그대의 총체적인 생명의 기능을 되찾을 수 있기를.”
『아타르바 베다』의 주술, 의술과 관련된 대목에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술사가 바람으로부터 숨결을 부르고 태양으로부터 눈을 요구하여, 이윽고 그 영혼을 육신에 되돌리고는 죽음의 여신 니르티Nirrti의 굴레로부터 죽어가는 사람을 해방시킵니다.

이는 무당적 치병의 흔적밖에 보여주지 못하는 예입니다.
인도의 의술이 후세에 전승의 주술적 관념을 차용하지만, 이러한 관념은 엄밀한 의미에서 무당적 이념에 속하지 않습니다.
『아타르바 베다』의 주술사처럼 우주의 여러 권역에 흩어져 있는 갖가지 기관을 부르는 의식에는 필연적으로 인간과 소우주와 관련된 다른 개념이 묻어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오래되었지만 무당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그 베다』에는 육신을 빠져나간 병자의 영혼을 부르는 기록이 있고 마찬가지의 무당적 이념과 기술이 인도의 비非아리아계를 지배하므로 하층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알타이와 시베리아의 무당과 마찬가지로 벵갈 지방의 오라온족Oraon 주술사로 병자의 영혼을 찾아 산과 강, 심지어 사자의 나라에까지 갑니다.

그뿐 아니라 고대 인도인에게는 영혼의 불안전성에 관한 교리가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샤머니즘의 지배를 받는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람이 꿈을 꿀 때 그 영혼이 육신을 떠나 방황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는지 『리그 베다』에 있는 창조신화인 「사타파타 브라gm마나Satapatha Brahmana」는 자는 사람을 갑자기 깨우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갑자기 깨우면 영혼이 돌아오는 도중에 길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하품을 해도 영혼이 위험해진다고 믿었습니다.

인도의 신앙체계에도 죽음 및 사자의 운명과 관련된 무당적 요소가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아시아 민족에게 그렇듯이 인도인의 신앙체계에도 영혼을 복수復數로 상정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고대 인도인은 사후에 영혼이 저승왕Yama과 조상pitaras이 있는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습니다.
사자들은 눈이 네 개인 저승왕의 망보는 개인 번견番犬들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천계로 계속해서 올라가 조상들과 저승왕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리그 베다』에는 사자들이 건너는 다리에 관해 장황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강이나 배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사자는 천상계로 간다기보다는 지하계로 간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의식을 집전하는 사제가 사자에게 저승왕 나라의 길을 가르쳐주는 고대적 의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자는 죽은 즉시 이 땅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자의 영혼靈魂은 상당 기간 때로는 근 1년 동안이나 자기가 살던 집을 배회徘徊하는 것으로 믿어졌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사자를 위한 공희제에서 사제가 사자의 혼을 부르는 현상에 대한 설명이 됩니다.

그러나 베다 및 바라문교에는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이라는 관념이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베다 시대의 인도에는 알타이와 북시베리아에서 볼 수 있는 사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인도자를 연상시키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고대의 경전을 보면 예외도 많고 모순되는 대목도 많지만, 베다 시대 인도의 사자는 지하계로 간 것이 아니라 천상계로 간 듯합니다.
그러므로 천상계로 가는 길은 지하계로 가는 길보다 덜 위험합니다.
베다 시대와 바라문 시대에 사자의 영혼을 인도하는 신이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신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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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상승天界上昇



성도成道하고 나서 처음으로 고향 카필라바스투(迦毘羅衛城가비라위성)로 돌아온 석가는 몇 가지 ‘기적적 권능’을 행사해보였습니다.
친인척들에게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보여주고 이들을 불교로 회심回心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하늘로 치솟아 자기 육신을 토막 낸 뒤 머리와 사지를 땅바닥으로 떨어드리고는, 눈이 휘둥그래진 친인척 앞에서 이것들을 다시 모아 온전한 육신이 되게 했습니다.
아스바고사Asvaghosa(馬鳴尊者마명존자)의 기록에도 남아있는 이 기적은 인도 주술 전통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대의 주술 전통은 이미 바라문 행문파行門派(fakirism)의 이적異跡이란 모습으로 정착해 있었습니다.
바라문 행자의 유명한 밧줄 마술은, 밧줄이 하늘로 솟아오르다 그 끝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스승이 젊은 제자를 밧줄을 타고 오르게 만드는데, 제자 역시 시야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이때 스승이 공중으로 칼을 던지면 제자의 사지는 하나씩 차례로 땅에 떨어집니다.

인도에서 역사가 유구한 이 밧줄은 두 가지의 무속의례, 즉 악령에 의한 미래 무당의 입문의례의 육신 해체와 무당의 천계상승에 견주어집니다.
밧줄 마술은 인도 바라문 행자들의 장기長技가 되고 있지만 이러한 마술은 중국, 자바, 고대 멕시코, 심지어 중세의 유럽에도 있었습니다.
유럽의 경우 13세기 이후의 많은 텍스트가 이와 같은 마술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텍스트에 따르면 기적을 연출하는 것은 주로 요술사나 주술사들인데, 이들은 무당이나 요가 행자처럼 몸을 사라지게 하는 능력도 갖고 있습니다.

바라문 행자의 밧줄 마술은 무당에 의한 천계상승의 한 변형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당의 천계상승은 상징적입니다.
왜냐면 무당의 육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천상계로의 여행은 영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사다리의 상징체계와 같이 밧줄 마술 또한 천상계와 지상계 사이의 교통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역사가 길고 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문화전승입니다.
이러한 전승은 인도에서도 티베트에서도 발견됩니다.

티베트의 경우 밧줄이 지닌 의례적儀禮的ㆍ신화적神話的 기능은 상당히 많은 전승, 특히 불교 이전의 전승에 남아있습니다.
초대 티베트 왕 냐치 첸포는 무탁이란 밧줄을 타고 내려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신화적 밧줄은 왕릉에도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왕이 사후에 다시 밧줄을 타고 천상으로 올라갔음을 의미합니다.
티베트인의 신앙에 따르면 고대의 통치자는 죽는 것이 아니라 천상으로 올라간 데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승천의 개념은 일종의 실낙원의 기억을 일깨웁니다.

탄트라교와 라마교 의례에서 두개골과 여성이 맡는 역할에 관해서는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이른바 해골춤은 치얌acham이란 드라마의 줄거리에서 중요한 몫을 합니다.
치얌에 해골춤이 등장하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죽음과 환생 사이의 중간상태인 바르도bardo 상태에 있는 수호신령의 무서운 이미지에 길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치얌은 일종의 입문의례입니다.
왜냐면 드라마 자체가 사후의 체험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해골 모습을 한 티베트의 의상과 가면은 중앙아시아 및 북아시아 무당의 의상과 흡사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인도에서 티베트로 전해진 대승불교가 티베트 고유 신앙과 동화해서 발달한 라마교Lama의 영향으로 짐작됩니다.
라마교의 영향은 시베리아 무당의 의상, 장신구, 북의 모양에서도 발견됩니다.
이러한 영향은 동물의 뼈를 신성시하고 그래서 인간의 뼈도 신성시하는 유서 깊은 관념체계가 있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티베트에는 츄라고 하는 탄트라 의례가 있으며, 무당적입니다.
츄 의례는 악령들에게 육신을 내맡겨 살을 파먹게 하는 의례입니다.
이 의례는 악령과 조상영신들에 의한 미래 무당의 입문의례적 육신 해체 의식을 상기시킵니다.
인간의 해골로 만든 북소리와 인간의 대퇴골로 만든 피리소리에 따라 춤이 시작됩니다.
이로써 의례 당사자의 육신을 먹을 영신들에 대한 초혼招魂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명상의 힘이 여신을 부르면 여신은 맨 칼을 휘두르며 나타납니다.
여신은 제물이 된 의례 당사자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그 머리를 자르고 몸을 난자합니다.
그러면 악령과 야수들이 달려와 경련이 가시지 않은 제물의 살점을 먹고 피를 마십니다.
이때 의례를 집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부처가 전생前生에 주린 짐승과 주린 아귀에게 자기 살을 먹게 했다는 이야기가 기록된 「본생담本生譚」(Jatakas쟈타카스)와 관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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