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활인원에 무당을 배치하여 전염병을 치료하게 하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 따르면 성종成宗 5년(1474년) 6월 4일 호조戶曹, 예조禮曹, 한성부漢城府에 전교하시기를 “사람들이 사는 곳에 전염병이 유행한다기에, 의원과 무당을 시켜 약을 가지고 치료하도록 하라고 이미 전지傳旨를 내렸는데, 지금 들으니 관리가 태만하고 신경을 쓰지 않아 숨지는 자가 많다 한다.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니, 마음을 다하여 치료하라. 도성에 인가가 즐비하므로 한 집에서 병을 앓으면 연달아 전염이 되니, 또한 염려스럽다. 평민과 천인의 병자는 죄다 동서활인원에 내어다 두어 함께 치료하도록 하고, 그중에서 죽은 자는 곧바로 묻어서 도성 근처에 주검을 버려두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호조戶曹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량錢糧, 식화食貨 등을 맡았던 육조六曹 중 하나입니다.
예조禮曹는 조선시대 육조의 하나로 예악禮樂, 제사祭祀, 연향宴享, 조빙朝聘, 학교學校, 과거科擧의 일을 맡아 보았습니다.
한성부漢城府는 조선시대 서울의 행정, 사법을 맡아보던 관아입니다.

『중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영조 8년(1732년) 하교하시기를 “선대 임금 때부터 활인원活人院을 수도의 동東과 서西에 두었는데, 그 백성을 위하는 큰 뜻이 오늘에까지 미치고 있다. 그러나 세대가 멀어짐에 따라 기강이 해이해져서 오늘에는 헛되이 이름만 있고 실제가 없다. 하물며 오늘과 같은 때에 어찌 각별히 명령을 하여 격려하지 않으리오. 주린 자는 마땅히 진휼청賑恤廳에서 맡고 병자는 활인원活人院에서 맡는데, 백성에서 굶주려 죽는 자가 있으면 이는 진휼청의 책임이고 백성들이 혹 병들어 죽으면 활인원活人院의 잘못이다. 비록 활인원에 단단히 일러두더라도 맨손으로 어찌 살릴 수 있겠는가. 비국備局에 분부하여 상당한 약물을 활인원에 나누어주도록 하라. 병은 비록 나았으나 굶으면 반드시 죽게 되니, 지난번 비록 진휼청에서 초기草記한 것을 이미 윤허했지만, 다시 진휼청에 단단히 일러두라” 했습니다.

진휼청賑恤廳은 나라에 재난이 있을 때 굶주린 사람을 구제하기 위한 관청입니다.
비국備局은 비변사의 준말로 원래 변경 문제를 위해 설치했던 임시 관청이었으나 후일 권한이 강화되어 군정과 정무를 함께 처리하는 막강한 권력기구가 되었습니다.
초기草記는 중앙의 각 관아에서 정무상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항에 대해 간단하게 요지만 기록하여 상주하는 문서를 말합니다.

정조 4년(1780년) 9월 24일 낮 경연經筵을 하였습니다.
활인원活人院 제조提調 황경원黃景源이 특진관特進官으로 입대入對하여 아뢰었습니다.

애당초 활인원을 설립한 것은 대개 서울 안의 백성들이 만약 돌림병을 앓을 경우 구제하여 살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단 활인원에는 원래 재력이 없어서 서울 무녀들의 신포身布를 활인원에서 거두어들여 직원들의 1년 급료를 지급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선대왕先大王(영조) 갑오년(1774, 영조 50년)에 여자들이 내는 신공身貢을 폐지하였으므로, 서울 무녀들이 내는 신포도 따라서 폐지하였습니다. 그 대신 특별히 평안도 별향고別餉庫의 돈 580냥을 하사하여, 균역청均役廳으로 올려 보내고 균역청에서 본 활인원에 그 대신 지급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작년에 경연관經筵官 송덕상宋德相의 말에 따라 다시 무녀들의 신포를 받아들이게 했기 때문에, 균역청에서 대신 지급해주던 돈도 폐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서울의 무녀들은 이미 지방으로 쫓겨났기 때문에 신공을 거둘 수 없고, 그래서 활인원 직원들의 1년 급료가 또다시 나올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국가에서 이미 혜민서를 설치하여 병든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으니, 굳이 또 활인원을 둘 필요는 없으므로 임시로 활인원을 없애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깁니다” 했습니다.
비답批答 하기를 활인원活人院이 “근래에는 다만 관서의 이름만 있었고 실효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구제하는 일만 폐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직원들의 살림살이조차도 폐지되었다고 하니, 경의 요청대로 시행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망설이는 것은 갑자기 혁파하면 아끼고 예우하는 의리에 어긋날까 염려되고, 또한 명분에 맞는 정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겠다” 했습니다.

황경원黃景源(1709-87)은 조선 후기의 문신입니다.
특진관特進官은 경연에 참여하여 임금의 고문에 응하던 관원으로 현직 2품관이 겸임했습니다.
입대入對는 대궐에 들어가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것입니다.
신포身布는 나라에서 부과하는 공물인 신공 대신 바치는 베를 말합니다.
별향고別餉庫는 서북지방의 군량미 전용 창고 이외의 창고를 말합니다.
균역청均役廳은 균역법과 관련된 사무를 담당하는 관청입니다.
경연관經筵官은 왕에게 유교의 경서를 강론하는 등 학문 지도와 치도治道 강론하고 때로는 국왕과 함께 현안 정치문제도 토의하는 관직이어서 가장 명예로운 자리로 알려졌고, 그만큼 학문과 인품이 뛰어난 문관을 임명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재야 학자도 참여했습니다.
송덕상宋德相(?-1783)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송시열의 현손玄孫이며 홍국영의 당여黨與입니다.
당여黨與란 같은 편에 속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비답批答은 상소에 대한 대답입니다.
묘당廟堂은 정무를 총괄하는 국가 최고기관인 의정부의 다른 명칭입니다.

고종 4년(1867년)에 『육전조례六典條例』를 완성했는데, 그중 「활인원」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활인원活人院은 도성의 병자들을 구제하고 살리는 일을 담당한다. 제조 1명[종2품], 별제別提 2명[종6품], 참봉 2명[종9품. 혜민서의 의관의 체아직遞兒職이다], 이예吏隸[서원書員 2명, 고직庫直 1명, 사령使令 5명, 구종駈從 1명].

『육전조례六典條例』는 1865년(고종 2년) 『대전회통大典會通』을 완성했으나, 여기서 빠진 사례가 많아 이를 보완하기 위해 편찬한 일종의 행정볍규집行政法規集입니다.
체아직遞兒職은 현직現職을 떠난 문무관文武官에게 계속해서 녹봉祿俸을 주려고 만든 벼슬입니다.
이예吏隸는 아전과 하인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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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업세巫業稅와 신포세神布稅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충혜왕忠惠王 후後 4년 9월(1343년, 충혜왕후 4년) 악소惡少를 지나 각도道로 나누어 파견해서 산과 바다의 세금을 거두고, 혹은 무당과 장인匠人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서 공포貢布를 거두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충혜왕忠惠王(1315-44)은 고려 제28대 왕이며, 충숙왕忠肅王의 맏아들로 1330년 충숙왕에게서 전위를 받아 즉위했으나,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함에 따라 왕위에서 물러났습니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다시 왕위에 올랐으나 실정이 많아 1344년 원元나라에 의해 폐위되었으며, 원元으로 끌려가 게양현으로 유배를 가다가 악양현에서 죽었습니다.
악소惡少는 불량배를 말합니다.
공포貢布는 세금으로 바치는 베를 말합니다.

조선 세종 초년에 이르러 또한 무업巫業에 대해 세포稅布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보이는데, 이는 아마 고려의 제도를 계승한 것입니다.
영조 20년(1744년)에 간행된 『속대전續大典』 중에 “무녀 한 명당 포布 1필匹을 거둔다”고 명확히 기재하여 국고 수입의 한 항목으로 간주했으며 정식 세금正貢과 동일시했습니다.
영조英祖 22년(1746년) 4월에 간행된 『속대전續大典』은 김재로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법전으로 6권 4책으로 『경국대전』을 보완한 것입니다.

『문종실록文宗實錄』에 따르면 문종文宗 원년(1451년) 4월 12일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었습니다.
사헌부司憲府는 삼사三司의 하나로 당시의 전치에 관해 논의하고 관리의 비행을 조사하여 책임을 규탄하며 풍기와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일이 없는지 살펴 그것을 풀어주는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입니다.

강원도와 함길도(함경도) 두 도에서는 해마다 신세포를 거두는데, 이는 실로 명분이 없는 세금입니다. 이 지역의 민간에서 신을 제사할 때 사용하는 베는 그들이 강만한 데 따르고 처음에는 길고 짧음을 따지지 않다가, 세금을 거둘 때는 반드시 규정된 규격의 한 필을 채우도록 합니다. 또 신에게 제사할 때 사용한 베는 모두 무당의 집에 귀속되는데, 이제 이미 무세巫稅를 징수하면서 또 백성에게도 징수하므로, 백성들은 반드시 따로 세포稅布를 장만하여 이를 납부해야 하니, 진실로 불편합니다. 하물며 음사淫祠를 금하는 법을 세워놓고도 도리어 그 세금을 징수하니 또한 모순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거기다가 국가에 실어오는 것은 적고, 거의 수령守令과 감사監司가 함부로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설령 무격의 풍속을 모두 없앨 수는 없을지라도 바라옵건대 무세만을 거두고, 평민으로 하여금 신세포를 납부하지 않도록 하시옵소서”라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傳敎하시기를 “무녀의 신당포세의 일은 비록 옳지 못한 것을 억제하기 위해 거두는 것이지만, 거두는 것은 부당하다. 무녀 또한 활인원活人院에 소속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승정원承政院은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기구로 왕의 비서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교傳敎는 임금의 명령으로 전지傳旨와 같습니다.

문종文宗 원년(1451년) 4월 22일 승정원承政院이 신포神布와 신당神堂의 퇴물退物을 징수하지 말도록 하라는 전지에 대해 입계入啓하니, 전교傳敎하시기를 “이제 유옥柳沃의 상소上訴를 보니 역시 신포를 거두는 일의 폐단에 대해 말하였다. 당초 이 법을 세운 것은 금지하고 억제하기 위해서였지만, 만약 이를 불변의 규칙으로 여겨 계속 징수한다면 이는 무격巫覡의 일을 조장하는 것과 같다. 또 활인원活人院의 무격巫覡을 혁파하는 일은 새로 법을 세우는 일이니 또한 대신大臣과 의논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입계入啓는 왕에게 구두로 아뢰거나 혹은 계상啓狀을 올리는 일을 말합니다.
유옥柳沃(1487-1519)은 조선 전기의 문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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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星湖僿說』의 무세巫稅 기사




이익李瀷(1681-1763, 호는 성호星湖)은 평생 안산 첨성리에 은둔하여 탈주자학적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은 이익이 40세 전후부터 생각이 미치는 대로 그때그때 적어둔 것을 그의 나이 여든에 조카들이 정리한 것입니다.
천지문, 만물문, 인사문, 경사문, 시문문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국어國語에 ‘백성들 가운데 정신이 맑으며 집중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신명神明이 내리는데, 남자에게 내린 것을 격覡이라 하고 여자에게 내린 것을 무巫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요즈음 세상에는 여자 무당이 전국에 두루 퍼져있으며, 들린 귀신도 요사妖邪한 마귀魔鬼의 종류이다. 민간의 풍속에서는 음악을 연주하고 기도와 축원을 하면서 이를 신사神事라 하는데, 법으로 능히 금하지 못하고 있다. 금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권장하는 까닭이 있다. 무릇 무녀들은 모두 세금을 내고, 관에서는 그 물건으로 이득을 보는데 무녀의 재물은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이는 모두 기도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니, 그래서 금하기 어려운 것이다. 『주례周禮』에 무관巫官을 둔 것은 그 뜻이 옛날에는 귀도鬼道를 숭상하여 재앙이 있으면 반드시 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국가의 사전祀典에 무당을 쓰지 않으니 그 의식이 지극히 바른 것이다. 그러므로 무당을 마땅히 배척하고 근절하는 데에도 겨를이 없는데 또 어찌 세금을 거둔다 말인가. 이미 세금을 거두면서 또 그 귀신 섬기는 것을 처벌하여 많은 속전贖錢을 받아 관에서 이득을 보니, 이는 관에서 금하는 것이 아니오, 그 본의는 돈과 베를 거두어들이는 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까이는 서울에서부터 멀리는 주읍州邑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무主巫가 있어, 마음대로 출입하므로 백성들의 풍습이 따라가는 것이다. 무당들은 한결같이 신이 내려온다고 말하지만, 이는 곧 사람이 부르는 것이지 귀신이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는 남자 무당覡도 있고 여자 무당巫도 있었는데, 지금은 다만 여자 무당만 존재한다. 이것은 대개 안팎을 출입하면서 사람들에게 친근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데 있어, 남자가 여자만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자 무당이 마침내 없어지게 된 것이다.

국어國語는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춘추외전』이라고도 합니다.
『춘추좌전』이 춘추시대사春秋時代史를 노魯나라 중심으로 기술한 데 비해 『국어』는 진, 초를 비롯한 여덟 제후국의 역사를 나라별로 기록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좌구명의 저술이라고 전하나, 믿기 어렵습니다.
『주례周禮』는 주周나라의 제도를 이상화하여 정리한 유교경전으로 『주관』이라고도 합니다.
주공周公의 저술로 전하나 이론이 많습니다.
주周나라의 제도를 천관, 지관, 춘관, 하관, 추관, 동관의 육관으로 나누고 이에 속하는 직장職掌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한漢나라 정현鄭玄의 주註와 당唐나라 가공언賈公彦의 소疏가 있습니다.
무관巫官은 무당과 같은 일을 하는 관리입니다.
사전祀典은 국가 제사 혹은 국가에서 제사하는 신들의 목록입니다.
궁무宮巫를 칭하여 국무國巫라 하고, 주군州郡의 주무主巫를 칭하여 내무녀內巫女 혹은 내무당內巫堂이라 합니다.

이긍익李肯翊(1763-1806)은 전통 소론의 가문에 속했고 이 가문은 정쟁政爭으로 말미암아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이긍익은 벼슬을 단념한 채 역경과 빈곤 속에서 학문에 전념했습니다.
그의 학문은 양명학陽明學과 관련이 깊습니다.
양명학이란 송宋나라 주자朱子에 의해 확립된 성리학性理學의 사상에 반대하여 명明나라 때 왕명양王陽明이 주창한 학문입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은 이긍익이 기사본말체의 형식을 빌려 찬술撰述한 조선시대의 역사서로 전사본이 많고 정본이 없어 필사본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말했습니다.

평론하여 말한다. 우리 동방은 서울로부터 두루 8도에 이르기까지 무격巫覡의 번성함이 거의 남초南楚보다도 심한데, 이것은 부녀자婦女子들과 어리석은 백성들이 지성으로 믿고 부지런히 섬기는 탓이다. 재산을 없애고 풍속을 그르치며 나라의 기강紀綱을 경멸하고 거리와 마을을 음란淫亂하게 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다. 여러 읍의 수령首領들 중에 간혹 그것을 몹시 싫어하는 자가 있어 마음속으로는 쫓아내고 철저하게 금지하고자 하지만, 해마다 무포巫布를 거두어들이는 이익이 있는 까닭에 이를 탐하여 감히 다스리지 못하니 개탄할 일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초楚나라는 중국의 남방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남방을 남초南楚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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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때의 무포巫布




정조正祖의 묘호廟號는 정종이었으나 고종 27년(1890년) 정조로 고쳤습니다.
제조提調는 조선시대 중앙 관직의 하나로 당상관 이상의 관원이 없는 관아에 당상관이 겸직으로 배속되어 각 관아를 통솔했습니다.
황경원黃景源(1709-87)은 문신이며 예학자입니다.
『정조실록正祖實錄』에 따르면 정조正祖(1776-1800년 재위) 4년(1780년) 9월 24일 활인원活人院 제조 황경원이 아뢰었습니다.

우리 활인원活人院에서는 원래 재력이 없어, 오직 서울 무녀巫女의 약간의 신포神布를 우리 활인원에서 받아서 직원들의 1년 급료를 지급해왔습니다. 그런데 선대왕(영조) 갑오년(영조 50년, 1774년)에 여공女貢을 폐지하므로 서울 무녀의 신공身貢 역시 폐지되었습니다. 그래서 균역청均役廳에서 우리 활인원에 직원 급료를 대신 지급해주었습니다. 작년 경연관經筵官 송덕상宋德相의 말에 따라 다시 무녀에게 베를 거두었기 때문에 균역청에서 대신 경비를 지급하던 것을 중지했습니다. 그러나 서울 무녀를 지방으로 쫓아버렸기 때문에 우리 활인원의 직원들의 1년 급료가 또다시 나올 곳이 없어졌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호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이 아뢰기를 “서울의 무녀들은 이미 강 밖으로 쫓아내었으니 무세는 해당되는 읍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이 말아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공女貢은 여자가 바치는 신공으로 정세 대상은 주로 여자 공노비였습니다.
신공身貢은 공노비들이 노역에 나가지 않는 대신 바치는 현물을 말합니다.
송덕상宋德相(?-1783)은 송시열의 현손玄孫으로 한때 홍국영을 뒷받침을 받기도 했으나, 결국 노론벽파로 몰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김화진金華鎭(1728-1803)은 1796년 호조판서에 임명되어 주전鑄錢 사업과 전세錢稅 문제를 관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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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병巫兵 제도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고려 말 무당으로 하여금 말을 내게 하여 군용에 충당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조 말에는 무당으로서 병사를 삼았으니, 충익위忠翊衛, 무병巫兵, 난후포수攔後砲手, 무부군뢰巫夫軍牢 등이 그것입니다.

『일성록日省錄』에 따르면 고종高宗 9년(1872년) 5월 15일에 충청수영忠淸水營의 포과砲科 설치 요청을 허락했습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충청수사忠淸水使 이규안李奎顔이 보고한 바를 보니, 도내의 무부巫夫 가운데 대포에 정통한 자 3백 명을 엄선하여 난후포수라 이름하고 청廳을 설치하여 교대 근무시키려고 한다 하니, 보고한 바에 따라 윤허允許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해서, 이를 윤허했습니다.

『일성록日省錄』은 영조英祖 36년(1760년) 1월부터 융희 4년(1910년) 8월까지 역대 임금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으로 정조正祖가 세손으로 있으면서 기록하기 시작하고 즉위한 뒤에는 각신에게 대필하게 했으며, 나중에는 규장각奎章閣에서 편찬했습니다.

박제경朴齊絅은 저서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서 말했습니다.
박제경은 김옥균계의 개화파 인물로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참여했다가 민중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은 대원군大院君 집정 시기 한국 정치사의 이면을 기록한 야사로 1886년 일본 동경에서 간행되었습니다.
원래 상하 2권이었던 것 같으나 현재 상권만 전해집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교훈을 얻은 대원군은 대대적으로 군비를 정돈했는데, 전담기관을 설치하여 대포를 주조하고 화약을 제조했다. 팔도의 배우俳優와 놀이패의 무리들을 대오隊伍로 편성하여 총포에 대한 기술을 연습하도록 하고, 난후군攔後軍이라 칭하여 여러 고을(주군州郡)에 배치했다.

병인양요丙寅洋擾는 1886년(고종 3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강화도를 침입했다가 격퇴당한 사건입니다.
배우를 광대라고도 하는데, 곧 무부巫夫를 가리킵니다.
대오隊伍는 군대 행렬의 줄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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