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병巫兵 제도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고려 말 무당으로 하여금 말을 내게 하여 군용에 충당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조 말에는 무당으로서 병사를 삼았으니, 충익위忠翊衛, 무병巫兵, 난후포수攔後砲手, 무부군뢰巫夫軍牢 등이 그것입니다.
『일성록日省錄』에 따르면 고종高宗 9년(1872년) 5월 15일에 충청수영忠淸水營의 포과砲科 설치 요청을 허락했습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충청수사忠淸水使 이규안李奎顔이 보고한 바를 보니, 도내의 무부巫夫 가운데 대포에 정통한 자 3백 명을 엄선하여 난후포수라 이름하고 청廳을 설치하여 교대 근무시키려고 한다 하니, 보고한 바에 따라 윤허允許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해서, 이를 윤허했습니다.
『일성록日省錄』은 영조英祖 36년(1760년) 1월부터 융희 4년(1910년) 8월까지 역대 임금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으로 정조正祖가 세손으로 있으면서 기록하기 시작하고 즉위한 뒤에는 각신에게 대필하게 했으며, 나중에는 규장각奎章閣에서 편찬했습니다.
박제경朴齊絅은 저서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서 말했습니다.
박제경은 김옥균계의 개화파 인물로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참여했다가 민중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은 대원군大院君 집정 시기 한국 정치사의 이면을 기록한 야사로 1886년 일본 동경에서 간행되었습니다.
원래 상하 2권이었던 것 같으나 현재 상권만 전해집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교훈을 얻은 대원군은 대대적으로 군비를 정돈했는데, 전담기관을 설치하여 대포를 주조하고 화약을 제조했다. 팔도의 배우俳優와 놀이패의 무리들을 대오隊伍로 편성하여 총포에 대한 기술을 연습하도록 하고, 난후군攔後軍이라 칭하여 여러 고을(주군州郡)에 배치했다.”
병인양요丙寅洋擾는 1886년(고종 3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강화도를 침입했다가 격퇴당한 사건입니다.
배우를 광대라고도 하는데, 곧 무부巫夫를 가리킵니다.
대오隊伍는 군대 행렬의 줄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