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正祖 때의 무포巫布
정조正祖의 묘호廟號는 정종이었으나 고종 27년(1890년) 정조로 고쳤습니다.
제조提調는 조선시대 중앙 관직의 하나로 당상관 이상의 관원이 없는 관아에 당상관이 겸직으로 배속되어 각 관아를 통솔했습니다.
황경원黃景源(1709-87)은 문신이며 예학자입니다.
『정조실록正祖實錄』에 따르면 정조正祖(1776-1800년 재위) 4년(1780년) 9월 24일 활인원活人院 제조 황경원이 아뢰었습니다.
“우리 활인원活人院에서는 원래 재력이 없어, 오직 서울 무녀巫女의 약간의 신포神布를 우리 활인원에서 받아서 직원들의 1년 급료를 지급해왔습니다. 그런데 선대왕(영조) 갑오년(영조 50년, 1774년)에 여공女貢을 폐지하므로 서울 무녀의 신공身貢 역시 폐지되었습니다. 그래서 균역청均役廳에서 우리 활인원에 직원 급료를 대신 지급해주었습니다. 작년 경연관經筵官 송덕상宋德相의 말에 따라 다시 무녀에게 베를 거두었기 때문에 균역청에서 대신 경비를 지급하던 것을 중지했습니다. 그러나 서울 무녀를 지방으로 쫓아버렸기 때문에 우리 활인원의 직원들의 1년 급료가 또다시 나올 곳이 없어졌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호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이 아뢰기를 “서울의 무녀들은 이미 강 밖으로 쫓아내었으니 무세는 해당되는 읍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이 말아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공女貢은 여자가 바치는 신공으로 정세 대상은 주로 여자 공노비였습니다.
신공身貢은 공노비들이 노역에 나가지 않는 대신 바치는 현물을 말합니다.
송덕상宋德相(?-1783)은 송시열의 현손玄孫으로 한때 홍국영을 뒷받침을 받기도 했으나, 결국 노론벽파로 몰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김화진金華鎭(1728-1803)은 1796년 호조판서에 임명되어 주전鑄錢 사업과 전세錢稅 문제를 관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