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업세巫業稅와 신포세神布稅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충혜왕忠惠王 후後 4년 9월(1343년, 충혜왕후 4년) 악소惡少를 지나 각도道로 나누어 파견해서 산과 바다의 세금을 거두고, 혹은 무당과 장인匠人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서 공포貢布를 거두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충혜왕忠惠王(1315-44)은 고려 제28대 왕이며, 충숙왕忠肅王의 맏아들로 1330년 충숙왕에게서 전위를 받아 즉위했으나,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함에 따라 왕위에서 물러났습니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다시 왕위에 올랐으나 실정이 많아 1344년 원元나라에 의해 폐위되었으며, 원元으로 끌려가 게양현으로 유배를 가다가 악양현에서 죽었습니다.
악소惡少는 불량배를 말합니다.
공포貢布는 세금으로 바치는 베를 말합니다.
조선 세종 초년에 이르러 또한 무업巫業에 대해 세포稅布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보이는데, 이는 아마 고려의 제도를 계승한 것입니다.
영조 20년(1744년)에 간행된 『속대전續大典』 중에 “무녀 한 명당 포布 1필匹을 거둔다”고 명확히 기재하여 국고 수입의 한 항목으로 간주했으며 정식 세금正貢과 동일시했습니다.
영조英祖 22년(1746년) 4월에 간행된 『속대전續大典』은 김재로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법전으로 6권 4책으로 『경국대전』을 보완한 것입니다.
『문종실록文宗實錄』에 따르면 문종文宗 원년(1451년) 4월 12일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었습니다.
사헌부司憲府는 삼사三司의 하나로 당시의 전치에 관해 논의하고 관리의 비행을 조사하여 책임을 규탄하며 풍기와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일이 없는지 살펴 그것을 풀어주는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입니다.
“강원도와 함길도(함경도) 두 도에서는 해마다 신세포를 거두는데, 이는 실로 명분이 없는 세금입니다. 이 지역의 민간에서 신을 제사할 때 사용하는 베는 그들이 강만한 데 따르고 처음에는 길고 짧음을 따지지 않다가, 세금을 거둘 때는 반드시 규정된 규격의 한 필을 채우도록 합니다. 또 신에게 제사할 때 사용한 베는 모두 무당의 집에 귀속되는데, 이제 이미 무세巫稅를 징수하면서 또 백성에게도 징수하므로, 백성들은 반드시 따로 세포稅布를 장만하여 이를 납부해야 하니, 진실로 불편합니다. 하물며 음사淫祠를 금하는 법을 세워놓고도 도리어 그 세금을 징수하니 또한 모순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거기다가 국가에 실어오는 것은 적고, 거의 수령守令과 감사監司가 함부로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설령 무격의 풍속을 모두 없앨 수는 없을지라도 바라옵건대 무세만을 거두고, 평민으로 하여금 신세포를 납부하지 않도록 하시옵소서”라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傳敎하시기를 “무녀의 신당포세의 일은 비록 옳지 못한 것을 억제하기 위해 거두는 것이지만, 거두는 것은 부당하다. 무녀 또한 활인원活人院에 소속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승정원承政院은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기구로 왕의 비서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교傳敎는 임금의 명령으로 전지傳旨와 같습니다.
문종文宗 원년(1451년) 4월 22일 승정원承政院이 신포神布와 신당神堂의 퇴물退物을 징수하지 말도록 하라는 전지에 대해 입계入啓하니, 전교傳敎하시기를 “이제 유옥柳沃의 상소上訴를 보니 역시 신포를 거두는 일의 폐단에 대해 말하였다. 당초 이 법을 세운 것은 금지하고 억제하기 위해서였지만, 만약 이를 불변의 규칙으로 여겨 계속 징수한다면 이는 무격巫覡의 일을 조장하는 것과 같다. 또 활인원活人院의 무격巫覡을 혁파하는 일은 새로 법을 세우는 일이니 또한 대신大臣과 의논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입계入啓는 왕에게 구두로 아뢰거나 혹은 계상啓狀을 올리는 일을 말합니다.
유옥柳沃(1487-1519)은 조선 전기의 문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