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사설星湖僿說』의 무세巫稅 기사
이익李瀷(1681-1763, 호는 성호星湖)은 평생 안산 첨성리에 은둔하여 탈주자학적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은 이익이 40세 전후부터 생각이 미치는 대로 그때그때 적어둔 것을 그의 나이 여든에 조카들이 정리한 것입니다.
천지문, 만물문, 인사문, 경사문, 시문문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국어國語에 ‘백성들 가운데 정신이 맑으며 집중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신명神明이 내리는데, 남자에게 내린 것을 격覡이라 하고 여자에게 내린 것을 무巫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요즈음 세상에는 여자 무당이 전국에 두루 퍼져있으며, 들린 귀신도 요사妖邪한 마귀魔鬼의 종류이다. 민간의 풍속에서는 음악을 연주하고 기도와 축원을 하면서 이를 신사神事라 하는데, 법으로 능히 금하지 못하고 있다. 금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권장하는 까닭이 있다. 무릇 무녀들은 모두 세금을 내고, 관에서는 그 물건으로 이득을 보는데 무녀의 재물은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이는 모두 기도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니, 그래서 금하기 어려운 것이다. 『주례周禮』에 무관巫官을 둔 것은 그 뜻이 옛날에는 귀도鬼道를 숭상하여 재앙이 있으면 반드시 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국가의 사전祀典에 무당을 쓰지 않으니 그 의식이 지극히 바른 것이다. 그러므로 무당을 마땅히 배척하고 근절하는 데에도 겨를이 없는데 또 어찌 세금을 거둔다 말인가. 이미 세금을 거두면서 또 그 귀신 섬기는 것을 처벌하여 많은 속전贖錢을 받아 관에서 이득을 보니, 이는 관에서 금하는 것이 아니오, 그 본의는 돈과 베를 거두어들이는 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까이는 서울에서부터 멀리는 주읍州邑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무主巫가 있어, 마음대로 출입하므로 백성들의 풍습이 따라가는 것이다. 무당들은 한결같이 신이 내려온다고 말하지만, 이는 곧 사람이 부르는 것이지 귀신이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는 남자 무당覡도 있고 여자 무당巫도 있었는데, 지금은 다만 여자 무당만 존재한다. 이것은 대개 안팎을 출입하면서 사람들에게 친근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데 있어, 남자가 여자만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자 무당이 마침내 없어지게 된 것이다.”
국어國語는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춘추외전』이라고도 합니다.
『춘추좌전』이 춘추시대사春秋時代史를 노魯나라 중심으로 기술한 데 비해 『국어』는 진, 초를 비롯한 여덟 제후국의 역사를 나라별로 기록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좌구명의 저술이라고 전하나, 믿기 어렵습니다.
『주례周禮』는 주周나라의 제도를 이상화하여 정리한 유교경전으로 『주관』이라고도 합니다.
주공周公의 저술로 전하나 이론이 많습니다.
주周나라의 제도를 천관, 지관, 춘관, 하관, 추관, 동관의 육관으로 나누고 이에 속하는 직장職掌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한漢나라 정현鄭玄의 주註와 당唐나라 가공언賈公彦의 소疏가 있습니다.
무관巫官은 무당과 같은 일을 하는 관리입니다.
사전祀典은 국가 제사 혹은 국가에서 제사하는 신들의 목록입니다.
궁무宮巫를 칭하여 국무國巫라 하고, 주군州郡의 주무主巫를 칭하여 내무녀內巫女 혹은 내무당內巫堂이라 합니다.
이긍익李肯翊(1763-1806)은 전통 소론의 가문에 속했고 이 가문은 정쟁政爭으로 말미암아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이긍익은 벼슬을 단념한 채 역경과 빈곤 속에서 학문에 전념했습니다.
그의 학문은 양명학陽明學과 관련이 깊습니다.
양명학이란 송宋나라 주자朱子에 의해 확립된 성리학性理學의 사상에 반대하여 명明나라 때 왕명양王陽明이 주창한 학문입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은 이긍익이 기사본말체의 형식을 빌려 찬술撰述한 조선시대의 역사서로 전사본이 많고 정본이 없어 필사본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말했습니다.
“평론하여 말한다. 우리 동방은 서울로부터 두루 8도에 이르기까지 무격巫覡의 번성함이 거의 남초南楚보다도 심한데, 이것은 부녀자婦女子들과 어리석은 백성들이 지성으로 믿고 부지런히 섬기는 탓이다. 재산을 없애고 풍속을 그르치며 나라의 기강紀綱을 경멸하고 거리와 마을을 음란淫亂하게 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다. 여러 읍의 수령首領들 중에 간혹 그것을 몹시 싫어하는 자가 있어 마음속으로는 쫓아내고 철저하게 금지하고자 하지만, 해마다 무포巫布를 거두어들이는 이익이 있는 까닭에 이를 탐하여 감히 다스리지 못하니 개탄할 일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초楚나라는 중국의 남방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남방을 남초南楚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