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상류층 부녀자가 무당이 되다




무당巫堂은 본래 씨(종種)가 없어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고려의 옛 도읍인 지금의 개성군開城郡의 풍습에서는 상류층 여자가 무당이 되면 선관仙官이라 하고, 하류층 여자가 무당이 되면 무당이라 일컫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선관이란 명칭은 의종毅宗 때 양반(문반과 무반의 관리) 중에서 재산이 넉넉한 자를 가려 선관이라 하고 팔관회八關會를 주관하게 한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충숙왕忠肅王 때 좌정승左政丞(좌의정) 강융姜融의 누이가 무당이 되었다고 했는데, 선관이 된 것을 말합니다.
이 기록을 토대로 고려시대는 상류층 부녀자도 무당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융의 집안은 원래 관노官奴였으므로 상류층 부녀자가 무당이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더라도 강융의 누이의 경우를 근거로 삼기는 부족합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의종 22년 3월 왕이 평양에 행차하여 내린 하교 가운데 선풍仙風을 진작하라는 것이 있고, 그 구체적인 방안의 하나로 선관 선발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충숙왕 4년(1317년) 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융의 누이가 무당이 되어 송악사松岳祠에서 기식했습니다.
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은 고려시대에 도첨의부에 속한 종1품 벼슬로 충혜왕 때 첨의좌시중을 고친 것인데, 뒤에 문하시중으로 고쳤습니다.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의 좌정승이면 삼사三司의 장관을 겸직했다는 의미로 판삼사사判三司事는 종1품 벼슬입니다.
송악사松岳祠는 개성 송악산에 있던 신당입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제28대 왕 충혜왕忠惠王(전前1330-32년, 후後 1340-44년 재위) 후後 4년(1343년) 악소惡少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서 혹은 산과 바다의 세금을 거두고, 혹은 무당과 장인匠人을 업으로 사람들에게서 공포貢布를 징수했습니다.
충혜왕은 충숙왕의 양위讓位를 받아 즉위했으나 행실이 좋지 못해 쫓겨났고, 1340년에 다시 복위해서도 악행을 계속해 결국 원元나라에 잡혀갔습니다.
악소惡少는 국왕 측근의 불량배를 말합니다.
공포貢布는 세금으로 바치는 베를 말합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우왕 13년(1387년) 2월 양부兩府의 관리에서부터 아래로 무격巫覡에 이르기까지 차등을 두어 말을 바치라고 명령했고, 이로써 중국 명明나라에 보내는 예물을 보충했습니다.
양부兩府는 문하부門下府와 밀직사密直司의 합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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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무당을 탄압하다




『동국통감東國通鑑』 「고려기」에 따르면 인종仁宗 9년(1131년) 8월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근래 무풍巫風이 크게 일어나 음사가 날로 성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담당 관청에 명하시어 무당의 무리를 멀리 쫓아버리도록 하십시오”라고 하니, 조서를 내려 이를 허락했습니다. 여러 무당들이 이를 근심하여 은병銀甁 1백여 개를 거두어 권력자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권력자가 아뢰기를 “귀신은 형체가 없으니, 그 허와 실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렇다고 여겨 금지 조치를 완화했습니다.
『동국통감』은 고조선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편년체 사서로 서거정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여 1485년(성종 16년)에 완성했습니다.
일관日官은 추길관의 옛 명칭입니다.
은병銀甁은 고려시대의 은화로 한반도 지형을 본떠 병처럼 만든 것이며, 은병 하나가 쌀 10-50석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최항崔沆(?-1258)이 무격巫覡들을 도성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최항崔沆은 최씨 무인정권의 제3대 집정자였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충숙왕忠肅王 후 8년(1339) 5월, 고려시대 사정기관인 감찰사監察司에서 방榜으로 금령을 게시했습니다.
무격의 무리가 요사스러운 말로 민중을 현혹시키고 있고, 사대부士大夫가 노래와 춤으로 귀신을 제사하니, 오염이 막심하다. 옛 제도에서는 무격이 도성 내에 살 수 없도록 했으니, 바라건대 각 부에서는 무당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모두 성 밖으로 쫓아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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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무당을 모아 비를 빌다




고대에는 무당으로 비를 빌었을 뿐만 아니라 무릇 하늘과 땅, 일월과 성신, 산천 제사에서부터 풍백, 우사에 대한 제사에 이르기까지 무당을 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승려와 무당이 기우제祈雨祭를 드렸습니다.
유교, 불교, 도교가 수입된 후부터 승려, 도사, 무격이 신을 제사하는 데 함께 쓰이게 되었습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태종 13년(1413년) 왕이 승정원承政院에 하교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홍수나 가뭄의 재난은 모두 임금의 부덕함이 초래한 바인데, 지금 승려와 무당을 모아 비를 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내가 성인의 경전을 대강 읽었지만 승려와 무당이 거짓됨을 아는데, 지금 도리어 좌도左道에 기대어 하늘이 단비를 내려주기를 바라니 이를 옳다 할 수 있는가’라고 하셨다.
좌도左道란 그릇된 도, 즉 이단을 말합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은 조선왕조 역대 왕의 선정만을 모아 편찬한 편년체의 역사서로 이중 태조, 태종, 세종, 문종 4조의 보감[사조보감]은 1457년(세조 3년) 신숙주와 권람 등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태종 16년(1416년)에 또다시 무당을 모아 우단雩壇에서 비를 빌고 명산에 무당을 보내어 천둥과 벼락을 기양祈穰하며, 18년(1418년) 6월에 서울과 개성에 무당을 모아 사흘 동안이나 비를 빌었습니다.
우단雩壇은 우사단雩祀壇이라고도 하며,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으로 동교東郊 홍인문 밖에 있었으며, 구망句芒, 축융祝融, 후토后土, 욕수蓐收, 현명玄冥, 후직后稷 등의 신을 모셨습니다.
기양祈穰은 자연재해自然災害나 개인의 불행不幸이 발생했을 때 이를 소멸하기 위해 거행한 의례입니다.

성종成宗 때 문신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성현의 수필집)에 기우의식에 대해 논하기를 “성안의 집집마다 병에 물을 담고 버들가지를 꽂았다”고 했고, 『인조실록仁祖實錄』에서는 “마을의 집집마다 물병을 마련하여 버들가지를 꽂아놓으며, 눈 먼 무당이 기원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대체로 불교의 풍속에서 온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대자대비大慈大悲하여 고난을 구제할 때 버들가지로 감로수甘露水를 뿌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물병에 버들가지를 꽂고 승려나 무당이 비를 비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조선시대 이래로 무당으로 비를 빈 사실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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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성수청星宿廳에 국무國巫를 두다




조선 초기에 국무國巫를 무격巫覡을 전담하는 관청인 성수청星宿廳에 두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고려시대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무당巫堂이 도교道敎와도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무격을 활인원活人院에 두어 병자의 치료를 맡겼는데, 무당이 의술醫術과 관련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활인원은 서울 안의 가난한 전염병 환자의 치료와 기민에 대한 구휼救恤을 위해 설치한 의료기관입니다.
구휼救恤이란 빈민이나 이재민 등에게 금품을 주어 구조함을 말합니다.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옛날에 무당이 의약醫藥을 주관했습니다.
의醫라는 글자는 무巫자를 따랐으니, 의醫의 옛 글자는 의毉였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무巫로써 치병治病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 따르면 성종成宗 9년(1478년) 11월 30일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성현成俔 등이 상소上訴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귀신을 다투어 믿으며, 무릇 길흉화복吉凶禍福에 대해 오로지 무당巫堂의 말만 듣고서 신상을 그려놓거나 돈을 걸어놓기도 하고, 영혼을 맞이하여 집안에 들이기도 하며, 공창空唱을 추종하기도 하며, 직접 성황城隍에 제사도 지내며, 노비奴婢를 바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 조정에서 금하는 바로서 『속전續典』에도 실려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아시고, 또 법사法司로 하여금 무당을 모두 찾아내어 도성 밖으로 내쫓게 하였습니다. 엎드려 보건대 요즈음 금하는 법령이 차츰 해이해짐에 따라 성 밖으로부터 점점 다시 들어와 부인들을 유혹하고 술과 음식을 낭비시키면서 혹은 액厄을 물리친다, 혹은 병을 구제한다 하니 비록 대가大家와 거실巨室이라 하더라도 이들을 불러들여 다투어가며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그런데도 이로 인하여 한 사람이라도 죄를 받았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며, 북 치고 피리 불며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길거리나 저자 사이에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신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가르치면 따르고, 말로만 가르치면 다투게 된다’ 했고, ‘위에서 명령하는 바가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에 반대되면 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성수청星宿廳이 아직도 도성 안에 있고, 기은사祈恩使가 봄가을로 끊이지 않으니, 이렇게 하면서 백성만 못하게 한다면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성수청 같은 것은 어떤 귀신이며 어떤 제사입니까? 귀신도 분명한 귀신이 아니고, 제사도 올바른 제사가 아니니, 이 또한 임금님의 정치를 위해 마땅히 먼저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과단성 있는 정치를 행하시어 풍속을 정돈하고 간사스럽고 음란하고 요망한 것들로 하여금 임금님의 고명한 덕 아래서는 용납되지 않게 하소서. 이 또한 신들의 소망입니다.

부제학副提學은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관직입니다.
『속전續典』은 조선시대의 법령집인 『경제육전속전經濟六典續典』의 줄임말이며, 태조 때 편찬된 『경제육전』 이후의 교지敎旨, 조례條例 중 법이라고 할 만한 것을 뽑은 것으로 태종 때 편찬되었습니다.
법사法司는 법을 집행하는 관아로서 사헌부, 형주, 한성부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전傳이란 경서의 뜻을 해석한 것을 말합니다.
기은사祈恩使는 정식 국가제사가 아니라 왕실에서 사사로이 복福을 비는 별기은別祈恩을 위해 파견된 사신使臣입니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따르면 연산군 9년(1503년) 5월 1일에 전교하시기를 “성수청에 국무國巫를 둔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했으며, 또 12년(1506년) 3월 15일에 전교하시기를 “성수청의 도무녀都巫女와 수종무녀隨從巫女들에게 잡역雜役을 면제시켜 주라”고 했습니다.
도무녀都巫女는 으뜸 되는 무녀巫女를 말합니다.
잡역雜役은 공역 이외의 갖가지 부역을 말합니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중종中宗 원년(1506년) 10월 25일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이윤李胤(1462-?) 등이 상소하여 이단을 물리치고 소격서昭格署 성수청星宿廳 같은 것을 모조리 혁파하기를 청했습니다.
소격서昭格署는 조선시대 도교 의례를 주관하던 관서로 1518년(중종 13년) 조광조 일파의 주장에 의해 일시 폐지되었다가 1522년 부활되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완전 소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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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에 무격巫覡을 둔 동기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세종世宗 11년(1429년) 4월 18일 예조禮曹에서 아뢰었습니다.

지금 의정부 및 여러 조曹와 함께 의논하기를 각 고을과 각 리里의 민호民戶를 가까이 사는 무격巫覡에게 나누어 맡겨, 만약 열병을 앓는 집이 있으면 수령이 의생醫生과 무격巫覡에게 명해 보살피고 치료하게 한다. 만일 치료에 마음을 써서 구제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즉시 죄를 논하고, 연말에 가서 사람을 많이 살린 자에게는 무세巫稅를 감해주거나 부역을 덜어준다. 만약 병자의 집이 가난하여 치료비가 없으면 서울의 활인원活人院의 예에 의거하여, 국고의 곡식으로 하루에 쌀 한 되를 지급하고, 해마다 병자의 수를 감사에게 보고하고 이로서 회계의 근거 자료로 삼자고 했습니다” 하니, 허락했습니다.

조曹는 행정실무行政實務를 담당한 육조六曹를 말합니다.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에 무격巫覡을 소속시킨 것은 세종 때가 아니라 이보다 앞서 태종 때였습니다.
『태종실록太宗實錄』에 따르면 태종太宗 15년 6월 경인의 기사, 즉 육조六曹에서 올린 33조의 진언 중 안성군 이숙번李叔蕃의 진언인 ‘활인원活人院에서 나누어 소속시킨 무격으로 하여금 병자를 돌보아 보호하게 하고, 해마다 연말마다 활인活人한 인원의 다소를 상고하여, 10명을 살린 자는 상을 주어 뒷사람을 권장하고, 마음을 쓰지 않은 자는 죄를 논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세종世宗 18년(1436년) 여름 5월 12일 삼정승三政丞인 황희黃喜, 최윤덕崔潤德, 노한盧閈 등을 불러 정사를 논했습니다.
삼정승三政丞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말합니다.
황희黃喜(1363-1452)는 세종대의 명재상으로 이때는 영의정이었습니다.
최윤덕崔潤德(1376-1445)은 무신으로 서북방 영토 확장에 공을 세웠으며, 이때는 좌의정이었습니다.
노한盧閈(1376-1443)은 문신으로 이때는 우의정이었습니다.
세종世宗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사헌부에서 신문하고 있는 요망한 무당巫堂 7명은 능히 귀신鬼神을 부려서 공중에서 소리를 내게 하는데 사람이 말하는 것과 같이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니, 율문律文을 적용하면 교살형에 해당한다. 그러나 미리 금지하는 법을 마련해두지 않고 갑작스레 하루아침에 법으로 처단하는 것은 불가하므로, 이들을 지방으로 쫓아내고, 또 금지하는 법을 세워 그 폐단을 막는 것이 어떻겠는가?
요망한 무당 7명”이란 옛날 참형당한 장수나 재상의 신을 두박신豆朴神이라 하며 이를 섬긴 강유두, 박두언 등의 무리를 말합니다.
율문律文에서 율律이란 형법刑法을 말하며, 여기서는 『대명률大明律』을 가리킵니다.
당시 조선왕조에서는 중국의 『대명률』을 형법으로 사용했습니다.

세종世宗의 말씀에 삼정승三政丞이 아뢰었습니다.
지방으로 쫓아내면 지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은 더욱 유혹誘惑되기 쉽습니다. 또 금하고 방지하는 법이 엄하지 않으면 폐단이 갑절이나 될 것이오니,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에 소속시키고 출입을 제한하여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고, 또 사헌부司憲府로 하여금 수시로 검사하고 살피게 합시다. 그래도 금지조항을 어길 경우에는 엄하게 죄를 규명하여 다스리고, 지방에 있는 요망한 무당들도 죄를 심리하여 처벌하되, 양인良人 여자는 관부에 예속시키고 사노비私奴婢는 원래 주인에게 주어서 수령이 수시로 점검을 해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인良人은 조선 초기 신분의 법제적 규범인 양천제良賤制 하에서 나타난 용어로 노비奴婢가 아닌 모든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세종世宗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태종조에도 역시 요망한 무당이 있으므로, 지방으로 쫓아내어 서울에서 섞여 살지 못하게 하였다. 지금 경들이 이미 ‘지방의 요망한 무당은 마땅히 관부에 소속시키고, 수령들로 하여금 검찰하도록 합시다’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예에 따라 서울의 요망한 무당들도 자기가 원하는 관청에 나누어 소속시켜 두면서 금지하고 예방하는 것이 어찌 잘못이겠는가. 또 미리 금지하고 방지하는 법을 마련해두지 않고 갑자기 처벌하는 것은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황희와 최윤덕 등이 아뢰었습니다.
만약 율에 따라 다스리지 않고 갑자기 놓아주면 요망한 무당들이 자신의 죄가 중하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오니, 율대로 다스려서 그 죄를 알게 하고, 그 다음으로 특별한 은혜로서 감등해서 죄를 결정하여 활인원活人院에 소속시키면 어짊(仁)과 위엄이 함께 행해질 것이며, 요망한 무당들도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무당에도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이 있었고, 무당이 되는 종자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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