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성수청星宿廳에 국무國巫를 두다




조선 초기에 국무國巫를 무격巫覡을 전담하는 관청인 성수청星宿廳에 두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고려시대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무당巫堂이 도교道敎와도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무격을 활인원活人院에 두어 병자의 치료를 맡겼는데, 무당이 의술醫術과 관련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활인원은 서울 안의 가난한 전염병 환자의 치료와 기민에 대한 구휼救恤을 위해 설치한 의료기관입니다.
구휼救恤이란 빈민이나 이재민 등에게 금품을 주어 구조함을 말합니다.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옛날에 무당이 의약醫藥을 주관했습니다.
의醫라는 글자는 무巫자를 따랐으니, 의醫의 옛 글자는 의毉였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무巫로써 치병治病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 따르면 성종成宗 9년(1478년) 11월 30일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성현成俔 등이 상소上訴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귀신을 다투어 믿으며, 무릇 길흉화복吉凶禍福에 대해 오로지 무당巫堂의 말만 듣고서 신상을 그려놓거나 돈을 걸어놓기도 하고, 영혼을 맞이하여 집안에 들이기도 하며, 공창空唱을 추종하기도 하며, 직접 성황城隍에 제사도 지내며, 노비奴婢를 바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 조정에서 금하는 바로서 『속전續典』에도 실려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아시고, 또 법사法司로 하여금 무당을 모두 찾아내어 도성 밖으로 내쫓게 하였습니다. 엎드려 보건대 요즈음 금하는 법령이 차츰 해이해짐에 따라 성 밖으로부터 점점 다시 들어와 부인들을 유혹하고 술과 음식을 낭비시키면서 혹은 액厄을 물리친다, 혹은 병을 구제한다 하니 비록 대가大家와 거실巨室이라 하더라도 이들을 불러들여 다투어가며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그런데도 이로 인하여 한 사람이라도 죄를 받았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며, 북 치고 피리 불며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길거리나 저자 사이에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신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가르치면 따르고, 말로만 가르치면 다투게 된다’ 했고, ‘위에서 명령하는 바가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에 반대되면 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성수청星宿廳이 아직도 도성 안에 있고, 기은사祈恩使가 봄가을로 끊이지 않으니, 이렇게 하면서 백성만 못하게 한다면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성수청 같은 것은 어떤 귀신이며 어떤 제사입니까? 귀신도 분명한 귀신이 아니고, 제사도 올바른 제사가 아니니, 이 또한 임금님의 정치를 위해 마땅히 먼저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과단성 있는 정치를 행하시어 풍속을 정돈하고 간사스럽고 음란하고 요망한 것들로 하여금 임금님의 고명한 덕 아래서는 용납되지 않게 하소서. 이 또한 신들의 소망입니다.

부제학副提學은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관직입니다.
『속전續典』은 조선시대의 법령집인 『경제육전속전經濟六典續典』의 줄임말이며, 태조 때 편찬된 『경제육전』 이후의 교지敎旨, 조례條例 중 법이라고 할 만한 것을 뽑은 것으로 태종 때 편찬되었습니다.
법사法司는 법을 집행하는 관아로서 사헌부, 형주, 한성부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전傳이란 경서의 뜻을 해석한 것을 말합니다.
기은사祈恩使는 정식 국가제사가 아니라 왕실에서 사사로이 복福을 비는 별기은別祈恩을 위해 파견된 사신使臣입니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따르면 연산군 9년(1503년) 5월 1일에 전교하시기를 “성수청에 국무國巫를 둔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했으며, 또 12년(1506년) 3월 15일에 전교하시기를 “성수청의 도무녀都巫女와 수종무녀隨從巫女들에게 잡역雜役을 면제시켜 주라”고 했습니다.
도무녀都巫女는 으뜸 되는 무녀巫女를 말합니다.
잡역雜役은 공역 이외의 갖가지 부역을 말합니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중종中宗 원년(1506년) 10월 25일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이윤李胤(1462-?) 등이 상소하여 이단을 물리치고 소격서昭格署 성수청星宿廳 같은 것을 모조리 혁파하기를 청했습니다.
소격서昭格署는 조선시대 도교 의례를 주관하던 관서로 1518년(중종 13년) 조광조 일파의 주장에 의해 일시 폐지되었다가 1522년 부활되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완전 소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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