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의 화광동진(和光同塵)
재능을 숨기고 속세에 동화되어 살다 

<아주 오래된 오늘>(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으로 돌아온 도연명은 무위자연하고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사람들과 별로 접촉이 없는 외로운 생활이었으나 술만 있으면 서로 면식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같이 술잔을 나눴다.
어떤 때는 자기가 주인일지라도 취하면 손님들을 향하여 나는 취하여 잘 터이니 그대들은 그만 돌아가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는 또 음악을 즐겼다.
거문고를 하나 가지고 있었으나 줄이 없었다.
술이 취하면 줄 없는 거문고를 들고 음악에 취하여 흥에 잠겼다.
“내 어찌 거문고 줄에 수고를 끼치랴” 하고 스스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도연명은 사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당시 강주자사(지방장관)였던 왕홍은 그의 인격을 숭배하고 깊이 사귀려고 애썼으나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연명은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는 것은 원래 사교생활에 맞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어떤 명성을 떨쳐보려고 이런 은둔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도연명이 살고 있던 산중에는 선종(禪宗)의 고승들이 모이는 종교단체가 있었다.
석학이었던 승장(僧長)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도연명을 초빙하여 자기들의 단체인 백연사(白蓮社)에 가입시키려고 했다.
도연명은 술을 좋아했으므로 불교의 금주계(禁酒誡)를 깨뜨리더라도 그만은 받아들인다는 조건이었다.
이 단체는 저명한 학자나 시인들도 가입하기 어려운 단체였다.
하지만 막상 단원으로 입단시키려 하자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사퇴를 했다.

도연명이 도망쳐 돌아간 후에도 승장은 매우 호의를 보이며 사귀려 했다.
하루는 가까운 친구 노장파(老壯派) 육수정(陸修靜)과 함께 연명을 술좌석에 초대했다.
이렇게 세 사람이 모이게 되었는데 승장 혜원법사는 불교를, 육수정은 도교를, 도연명은 유교를 대표한 셈이다.

이 절간의 원내에는 호계교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혜원법사는 매일 산보를 하면서 절대 이 다리는 넘지 않는다는 결심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날은 혜원법사가 친구 육수정과 더불어 도연명을 전송하다가 너무도 재미있는 이야기에 도취되어 무심히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넘어가고 있었다.
‘아차!’ 하고 알았을 때 세 친구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 웃는 세 노인을 그린 그림을 <호계삼소도>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명화로 알려졌다.
즉 이 그림은 무애무우(無碍無憂)한 삼현자(三賢者)의 환담유락(歡談愉樂)의 상징이며, 유·불·도 세 종교가 해학으로 조화되고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연명은 가난한 농부이자 전원시인으로 현명하고 진실 된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이다.
참으로 그는 완전무결한 자연에 이르렀고 아직까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조화된 생활에 대한 지성과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다.
또 그 감정과 재능은 감탄할 만한 시인이요, 참으로 자연을 사랑한 철인이었다.

착하면 하늘이 복 내린다 하였거늘
백이숙제는 수양산에서 굶어죽었노라.
선과 악이 제대로 응보되지 않거늘
어찌하여 공연한 말만을 내세우는가?

구십 노인 새끼 띠 매고 가난을 지켰거늘
한참 나이에 기한(飢寒)에 굽힐 수 있으랴!
선비 된 몸 곤궁의 절개 아니고서
영원한 후세에 어찌 이름 전하리요. ●도연명, 「음주」

어려서부터 세속에 어울리지 못하고
성품이 본시 산을 사랑했거늘
잘못해서 먼지 속 그물에 빠져들어
어느덧 벼슬살이 십삼 년을 겪었노라.
●도연명, 「전원에 돌아와서」

어려서부터 세속적인 일 밖에서 살면서
오직 거문고와 책만을 생각했노라.
거친 베옷을 입고 즐거웠으며
뒤주가 항상 비어도 태연했노라.

그러나 엉뚱한 운명에 부딪혀
고삐를 돌려 벼슬에 살고자
지팡이 버리고 부임할 채비 갖추고
잠시 전원의 집과 이별했노라.

외로운 배가 아득히 멀리 갈 새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 연연하니
어찌 나의 길 멀지 않으리요.
●도연명, 「처음 참군(參軍)이 되어」

도연명이 벗어나려고 했던 것은 정치였지, 인생 자체는 아니었다.
그는 삶을 사랑했기 때문에 곤궁한 생활을 하면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자연으로 돌아가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그에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였다.
전원의 나무들과 동산의 소나무에 대한 애착은 그로 하여금 논리적인 삶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는 삶을 살게 했다.

도연명이 인생의 조화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인생을 적극적이고 사려 깊은 태도로 대하는 데 있었다.
연명은 인생과의 조화로부터 가장 위대한 중국의 시가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결의는 이 세상에 속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으로서 인생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고, 높은 이상을 품고 혼자 걸어가거나 혹은 지팡이를 세우고 밭가는 삶을 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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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오늘 - 김윤철 에세이 1
김윤철 지음 / 지와사랑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굴원의 어부사(漁父辭)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 입는다 

 <아주 오래된 오늘>(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달통하면 나가서 천하를 구제하고,
막히면 물러나 자신을 착하게 살라.
達則 兼善天下 窮則 獨善其身

도연명은 중국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조화되고 완전한 인격을 갖춘 자연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송대(宋代)의 시인으로, 고매한 인격으로 가난을 극복하고 초야에 묻혀서 농사를 지으며 참삶을 사랑한 시인이다.
그는 일찍이 이름을 날려 공을 세워보겠다는 의기도 있었다.
그는 달통하면 나가서 천하를 구제하고, 막히면 물러나서 자신을 착하게 살라고 하는 유가사상에 따라 벼슬에 나갔으나 원래 정직하고 고고한 성격이라 그 생활을 견디기 어려웠다.

한때 지방교육감이라는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13년간의 관리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밭을 갈며 농사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우주만물의 근원인 도는 ‘무위자연(無爲自然)하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한다’는 노자의 도가사상을 따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는 도가사상이 많이 나타나 있다.
도연명은 권농이라는 시에서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겠다는 신념을 굳히고 있다.

옛 스승 공자께서 가르치셨다.
도를 걱정하지 가난을 근심하지 말라.
쟁기지고 철따라 즐겁게 농사짓고
미소 지으며 농군들에게 격려한다.
해지면 함께 돌아와 술 마시며 이웃과 피로를 푼다.
사립문 닫고 시를 읊으며 농민생활을 즐기리.

다음 시를 통하여 그가 절박한 생활고를 면하기 위하여 욕스러운 벼슬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어찌하여 이렇게 열심히 고생스런 벼슬에 붙어 있는고?
허긴 몸은 매어 있는 듯해도 본래의 뜻은 변함이 없노라.
매일 꿈에 그리는 고향의 전원을 오래 버려둘 수야 있으랴.
마지막 생활은 은둔생활이다. 서리에도 변하지 않는 송백같이 되리라.

소동파(蘇東坡)는 도연명을 이렇게 평했다.

도연명은 벼슬하고 싶으면 나가서 했고 그렇다고 꺼리는 일이 없었다.
또 은퇴하고 싶으면 은퇴했고 그렇다고 고결하다고 자처하지도 않았다.
배고프면 남의 집 문을 두드리고 밥을 찾기도 했으며, 살림이 넉넉하면 닭 잡고 술을 빚어 놓고 손님을 청하여 대접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그의 태도를 높이는 것은 바로 무위자연에 기인한 참삶이라 하겠다.

없으면 구걸하고 있으면 나눠주는 솔직하고 담담한 태도, 즉 참삶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도연명의 인품과 시를 이해할 수도 없고 공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문학은 기교가 아니라 사상이며 덕이므로 시인은 인생을 알아야 한다.

『노자』에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말이 있다.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에 같이한다는 뜻으로, 자기 재능을 숨기고 속세에 묻혀 동화되어 살라는 말이다.
참으로 도연명은 이와 같이 산 사람이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그의 은퇴생활은 무위도식이 아니었다.
자연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천지의 대덕인 생산에 힘쓰는 일이다.
그는 부지런했고 손수 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김을 매며 농사를 지었다.
이것이 이 시인을 더욱 숭고한 전원시인으로 만들어준다.

속세에서 악덕과 타협하여 안일하게 살지 않고 은퇴하되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영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은둔자들은 일도 아니하고 세상을 비웃고 부정적인 공론만 일삼는다.
그러나 도연명은 자연에 몸을 맡기고 흙을 갈며 그의 이상인 무위자연을 실현했다.
그는 29세에 벼슬에 나아가 41세에 관리생활을 청산하며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남기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55세에 저작랑이란 벼슬에 초청된 일이 있고, 62세에는 강주자사로부터 출사를 요청 받았으나 깨끗이 거절하고 보내온 선물을 모두 돌려보냈다.
이 알차고 깊이 있는 문학 유산이 그의 불우한 삶을 재물로 삼고 승화된 결정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의지할 바 있거늘
나만은 외로운 구름 기댈 데가 없노라.
아득한 하늘에 깜박이며
언제나 길게 빛을 보리.

이 시는 도연명의 고고한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도연명을 잘 이해한 안영지라는 사람은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은둔자, 고고한 정신의 소유자, 학문과 생활을 자유롭게 한 사람, 가난하여 손수 밭을 갈아 먹은 선비, 부모에게 효도하고 가족들과 인(仁)으로써 화목하며, 타고날 때부터 술을 좋아했다.”
주자(朱子)는 도연명을 기념하여 그의 고향에 서당을 세웠는데, 이는 송(宋)대의 대학자와 문호들의 칭찬을 받으며 선비들의 좌우에서 항상 정신의 빛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퇴계 선생도 그에게 심취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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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의 무속巫俗




고구려의 무당은 사람이 병에 걸리게 된 원인을 말하고, 뱃속의 아이를 점치고, 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에 대해 말하고, 사람과 귀신鬼神이 자기에게 내렸다고 말하며, 시조始祖 왕王의 사당祠堂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후세의 무속에 보이는 굿, 저주詛呪, 복서卜筮, 공창空唱, 신탁神託, 치료治療, 위호衛護 등의 원류입니다.
굿을 한자漢字로 표현한 것이 새신賽神입니다.
복서卜筮는 길흉을 알기 위해 치는 점을 말합니다.
공창空唱은 무당이 입을 벌리지 않아도 공중에서 소리가 들리게 하는 술법을 말하는데 일종의 복화술複話術입니다.
치료治療란 조선시대 의료를 맡아본 관아 활인원活人院에서 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위호衛護는 무당의 집에서 조상의 혼령을 모시는 풍습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조상을 모신 신묘神廟와 같습니다.

사무師巫라는 것은 주周나라의 태사太師가 국가를 위해 길흉吉凶을 점쳤다거나, 혹은 만주의 살만薩滿이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한 것과 같습니다.
무당을 사무라 한 표현은 중국의 경우 송대宋代 이후에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례周禮』 춘관春官 종백宗伯에 따르면 악공樂工의 우두머리가 태사太師이며, 출정 때 군사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승패를 예측했습니다.
살만薩滿은 퉁구스족Tungus 언어 샤먼shaman의 한자 표기입니다.
사무는 왕에게 덕을 닦아 재앙을 물리칠 것을 권했습니다.
사무는 당시에 왕의 사표師表가 되었습니다.
현명한 신하나 좋은 관리(현신양좌賢臣良佐)가 재이災異(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에 관해 논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에 재이가 있으면 반드시 사무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 제2대 왕 유리왕琉璃王(기원전 19-기원후 18년 재위) 19년(기원후 3년) 가을 8월, 하늘에 제사할 때 바치는 돼지가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에서는 돼지를 숭배했습니다.
유리왕이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로 하여금 뒤쫓게 하니 장옥택長屋澤 가운데에 이르러 이를 잡아 칼로 돼지 다리의 힘줄을 끊었습니다.
장옥택長屋澤은 고구려의 지명地名으로 추측되나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유리왕이 듣고 노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희생을 어찌 해칠 수 있는가” 하고 마침내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묻어 죽였습니다.
9월에 왕이 병들자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와 사비가 병의 빌미가 된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왕이 무당을 시켜 사과하니 병이 곧 나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제7대왕 차대왕次大王(146-165년재위) 3년(148년) 가을 7월에 왕이 평유원平儒原에서 사냥을 했는데, 흰 여우가 뒤를 따라오면서 울었습니다.
평유원平儒原은 고구려의 지명으로 추측되나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왕이 흰 여우를 쏘았으나 맞지 않았습니다.
사무師巫에게 물으니 “여우라는 것은 요사한 짐승으로 상서로운 조짐은 아닙니다. 하물며 그 색이 흰색이니 더욱 괴이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거듭거듭 일러 친절하게 이야기할 수 없으므로 요괴함을 보여서 임금님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이를 계기로 반성해서 스스로 새롭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임금님께서 덕을 닦는다면 화를 바꾸어 복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왕은 “흉하면 흉하고, 길하면 길할 뿐이거늘 너는 먼저는 요망하다 해놓고 또 복이 될 수 있다고 하니, 이 어찌 거짓말이 아니냐” 하고 마침내 그를 죽였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제10대 왕 산상왕山上王(197-226년 재위) 13년(209년)에 왕자 교체郊彘의 어머니(주통촌酒桶村의 여자)를 세워 소후小后로 삼았습니다.
교체郊彘는 산상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11대 왕이 된 동천왕東川王의 이름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산상왕 12년(208년) 제천용 돼지가 달아나 주통촌에 이르러 어떤 여인을 보고 멈추자 산상왕이 이를 신기하게 여겨 이 여인을 만났고, 그래서 동천왕을 낳았다고 합니다.
교체郊彘는 하늘에 제사할 때 바치는 돼지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제11대 왕 동천왕東川王(227-248년 재위) 8년 9월에 태후太后 우씨于氏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씨于氏는 원래 고국천왕故國川王의 부인이었으나 고국천왕 사후 시동생인 산상왕山上王과 재혼했습니다.
우씨于氏가 임종하면서 유언하기를 “첩은 행실(절개)을 잃었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國壤(태후의 전 남편인 국양왕國壤王이다. 국양왕이란 제9대 왕인 고국천왕을 가리킨다)을 만나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나를 차마 구렁텅이에 버리지 못한다면 청컨대 산상왕의 능陵 곁에 묻어 달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우씨于氏의 유언대로 묻었더니 무당이 말했습니다.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 말씀하시기를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그와 함께 싸웠는데, 물러나 생각하니 너무나 부끄러워 나라 사람들을 차마 볼 수 없다. 네가 조정에 알려 무슨 물건으로 나를 가리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남편의 사후 시동생과 재혼하는 취수혼娶嫂婚은 고구려의 일반 혼인 풍속이었으므로 우씨의 재혼이 당시로서는 비윤리적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취수혼의 경우 죽은 뒤 원래의 남편 곁에 묻혀야 하는데, 우씨가 이를 어긴 것입니다.
따라서 무당의 말은 고국천왕을 빌어 우씨의 처사를 비난한 것입니다.
이에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제28대 왕 보장왕寶藏王(642-668년 재위) 4년(645년) 5월에 당唐나라 장군 이세적李世勣이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기를 12일 동안이나 계속했습니다.
고구려는 보장왕 때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이세적李世勣(594-669)이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요동성遼東城은 지금의 중국 요령성 요양시에 있던 성입니다.
당唐나라 제2대 황제 태종太宗이 정예병을 이끌고 합세해 요동성을 수백 겹으로 에워싸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습니다.
요동성에는 주몽사가 있었고 그 사당에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예리한 창이 있었는데,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전연前燕(선비족의 일파인 모용부가 세운 국가) 때에 하늘에서 내려보내온 것이라 했습니다.
바야흐로 포위가 급박하게 되자 미녀를 꾸며 신의 부인으로 삼았는데,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께서 기뻐했으므로 성은 반드시 안전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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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의 무속巫俗




백제 무속의 역사는 거의 없다시피 하여, 마지막 왕의 마지막 해에 무당이 거북의 예언을 해독한 기록이 하나 있을 뿐입니다.
백제는 부여, 고구려에서 나온 나라였으므로 백제의 무속이 고구려와 같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는 무당이 여우의 변괴를 설명한 것이 있고, 백제에는 무당이 거북의 예언을 해석한 것이 있어 이런 것들이 동일한 계통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후주서後周書』에 따르면 “백제에서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술術을 이해한다”고 했으므로 예언을 해석한 무당이 날의 길흉을 점치는 사람, 즉 일자日者였을 것입니다.
『후주서後周書』를 『주서周書』 혹은 『북주서北周書』라고 하는데, 서위西魏, 북주北周 왕조(535-581)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 정사로 636년 당唐나라 영호덕분令狐德棻 등이 편찬했습니다.
일자日者란 천상天上과 지상地上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의 의미를 해독하고, 그 대처방안을 제시한 관리를 일컫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 따르면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기원전 18-기원후 28년 재위) 25년(기원후 7년) 2월 왕궁의 우물물이 넘쳐흐르고, 한성漢城의 인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이었다. 일자日者가 말하기를 “우물물이 넘쳐흐른 것은 대왕께서 발흥할 징조이며, 소가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인 것은 대왕께서 이웃나라를 병합할 조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왕이 이를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진마辰馬(진한辰韓과 마한馬韓)를 병탄倂呑할 마음을 가졌다고 했는데, 이곳에서 일자日者라고 한 것도 무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제시대에서도 무풍巫風을 숭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백제 제31대 왕 의자왕義慈王(641-660년 재위) 20년(660년) 6월, 한 귀신이 궁중에 들어와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곧 땅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의자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들을 시켜 땅을 파게 하니 깊이 3자쯤 되는 곳에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거북의 등에는 “백제는 보름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라는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왕이 이를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보름달과 같다는 것은 찼다는 의미로 차면은 기울어질 것이고,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았다는 것이니 차지 않은 것은 점차 찰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왕은 노하여 그를 죽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보름달과 같다는 것은 왕성한 것이요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미미한 것이니,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성할 것이고 신라는 점점 미약해진다는 뜻일 겁입니다” 하니 왕이 기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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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의 무속巫俗




신라 말로는 무당巫堂을 차차웅次次雄이라 했습니다.
웅雄을 가리켜 무당이라 한 것은 신시神市의 환웅桓雄에서 시작된 것으로 환웅의 신시란 곧 고대 무축巫祝을 말합니다.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한 까닭에 단군檀君이라 했으니, 단군은 곧 신권찬자神權天子입니다.
단군檀君은 환웅의 아들로 기원전 2333년 아사달(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했습니다.
신라인은 차차웅이 제사를 받들고 귀신을 섬기는 까닭에 이를 두려워하고 공경했으며, 마침내 웃어른을 차차웅이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유어는 삼한三韓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무당을 차차웅이라 한 것은 그 말이 환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환桓과 한寒은 음音이 서로 가깝고 한寒의 훈訓은 차次입니다.
또 신라의 고유어를 한자漢字로 표기할 일이 있으면 훈訓으로 하거나 음音으로 했습니다.
예를 들면 서연산西鳶山을 서술산西述山이라고 한 것입니다.
경주의 서쪽 구간에 있는 서술산西述山은 선도산仙桃山으로도 불리는데, 선도산신仙桃山神 사소娑蘇는 소리개의 안내로 이곳에 와서 머물게 되었으며, 그래서 소리개 연鳶을 써서 서연산西鳶山이라고 했습니다.
선도산에 사는 지선地仙 사소娑蘇는 중구구왕실의 공주였습니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海東에 와서 오랫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않아, 그녀의 부친이 솔개를 통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녀는 이 솔개의 인도로 선도산에 살게 되었습니다.
신라의 고유어에 연鳶을 가리켜서 술術이라 했으므로 연과 술은 서로 통용됩니다.
연의 훈인 소리개와 술의 음인 술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차차웅은 환웅을 말합니다.
신라 제2대 왕 남해차웅南解次次雄(?-24, 4-24년 재위)은 단지 무당이라는 칭호만 빌렸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곧 제사를 주관하고 신을 섬기는 자였으므로 그 또한 한 사람의 단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라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기원전 57-기원후 3년 재위)는 진한辰韓 육부인六部人의 추대를 받아 거서간居西干(진한의 말로 왕王)이 되었습니다.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오로지 마한馬韓 사람만 삼한三韓 전체의 왕王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박혁거세는 반드시 마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한의 여러 국읍國邑들은 각기 한 사람으로 하여금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했고, 이를 천군天君이라 했다고 하니 박혁거세도 곧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던 천군이라 하겠고, 천신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은 곧 차차웅(巫堂)입니다.
남해차차웅은 그의 친누이인 아로阿老로 시조묘始祖廟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대개 신라의 풍속에서는 무당이 제사를 숭상하고 귀신을 섬겼습니다.
따라서 아로 또한 무당임이 분명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차차웅次次雄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이 말하기를 ‘차차웅이란 신라 고유어로 무당을 이른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므로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마침내 웃어른을 자충이라 했다’고 했다.

김대문金大問은 신라 성덕왕 때의 학자로 『화랑세기花郞世記』, 『고승전高僧傳』 등을 저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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