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高句麗의 무속巫俗
고구려의 무당은 사람이 병에 걸리게 된 원인을 말하고, 뱃속의 아이를 점치고, 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에 대해 말하고, 사람과 귀신鬼神이 자기에게 내렸다고 말하며, 시조始祖 왕王의 사당祠堂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후세의 무속에 보이는 굿, 저주詛呪, 복서卜筮, 공창空唱, 신탁神託, 치료治療, 위호衛護 등의 원류입니다.
굿을 한자漢字로 표현한 것이 새신賽神입니다.
복서卜筮는 길흉을 알기 위해 치는 점을 말합니다.
공창空唱은 무당이 입을 벌리지 않아도 공중에서 소리가 들리게 하는 술법을 말하는데 일종의 복화술複話術입니다.
치료治療란 조선시대 의료를 맡아본 관아 활인원活人院에서 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위호衛護는 무당의 집에서 조상의 혼령을 모시는 풍습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조상을 모신 신묘神廟와 같습니다.
사무師巫라는 것은 주周나라의 태사太師가 국가를 위해 길흉吉凶을 점쳤다거나, 혹은 만주의 살만薩滿이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한 것과 같습니다.
무당을 사무라 한 표현은 중국의 경우 송대宋代 이후에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례周禮』 춘관春官 종백宗伯에 따르면 악공樂工의 우두머리가 태사太師이며, 출정 때 군사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승패를 예측했습니다.
살만薩滿은 퉁구스족Tungus 언어 샤먼shaman의 한자 표기입니다.
사무는 왕에게 덕을 닦아 재앙을 물리칠 것을 권했습니다.
사무는 당시에 왕의 사표師表가 되었습니다.
현명한 신하나 좋은 관리(현신양좌賢臣良佐)가 재이災異(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에 관해 논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에 재이가 있으면 반드시 사무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 제2대 왕 유리왕琉璃王(기원전 19-기원후 18년 재위) 19년(기원후 3년) 가을 8월, 하늘에 제사할 때 바치는 돼지가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에서는 돼지를 숭배했습니다.
유리왕이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로 하여금 뒤쫓게 하니 장옥택長屋澤 가운데에 이르러 이를 잡아 칼로 돼지 다리의 힘줄을 끊었습니다.
장옥택長屋澤은 고구려의 지명地名으로 추측되나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유리왕이 듣고 노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희생을 어찌 해칠 수 있는가” 하고 마침내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묻어 죽였습니다.
9월에 왕이 병들자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와 사비가 병의 빌미가 된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왕이 무당을 시켜 사과하니 병이 곧 나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제7대왕 차대왕次大王(146-165년재위) 3년(148년) 가을 7월에 왕이 평유원平儒原에서 사냥을 했는데, 흰 여우가 뒤를 따라오면서 울었습니다.
평유원平儒原은 고구려의 지명으로 추측되나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왕이 흰 여우를 쏘았으나 맞지 않았습니다.
사무師巫에게 물으니 “여우라는 것은 요사한 짐승으로 상서로운 조짐은 아닙니다. 하물며 그 색이 흰색이니 더욱 괴이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거듭거듭 일러 친절하게 이야기할 수 없으므로 요괴함을 보여서 임금님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이를 계기로 반성해서 스스로 새롭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임금님께서 덕을 닦는다면 화를 바꾸어 복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왕은 “흉하면 흉하고, 길하면 길할 뿐이거늘 너는 먼저는 요망하다 해놓고 또 복이 될 수 있다고 하니, 이 어찌 거짓말이 아니냐” 하고 마침내 그를 죽였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제10대 왕 산상왕山上王(197-226년 재위) 13년(209년)에 왕자 교체郊彘의 어머니(주통촌酒桶村의 여자)를 세워 소후小后로 삼았습니다.
교체郊彘는 산상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11대 왕이 된 동천왕東川王의 이름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산상왕 12년(208년) 제천용 돼지가 달아나 주통촌에 이르러 어떤 여인을 보고 멈추자 산상왕이 이를 신기하게 여겨 이 여인을 만났고, 그래서 동천왕을 낳았다고 합니다.
교체郊彘는 하늘에 제사할 때 바치는 돼지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제11대 왕 동천왕東川王(227-248년 재위) 8년 9월에 태후太后 우씨于氏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씨于氏는 원래 고국천왕故國川王의 부인이었으나 고국천왕 사후 시동생인 산상왕山上王과 재혼했습니다.
우씨于氏가 임종하면서 유언하기를 “첩은 행실(절개)을 잃었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國壤(태후의 전 남편인 국양왕國壤王이다. 국양왕이란 제9대 왕인 고국천왕을 가리킨다)을 만나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나를 차마 구렁텅이에 버리지 못한다면 청컨대 산상왕의 능陵 곁에 묻어 달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우씨于氏의 유언대로 묻었더니 무당이 말했습니다.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 말씀하시기를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그와 함께 싸웠는데, 물러나 생각하니 너무나 부끄러워 나라 사람들을 차마 볼 수 없다. 네가 조정에 알려 무슨 물건으로 나를 가리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남편의 사후 시동생과 재혼하는 취수혼娶嫂婚은 고구려의 일반 혼인 풍속이었으므로 우씨의 재혼이 당시로서는 비윤리적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취수혼의 경우 죽은 뒤 원래의 남편 곁에 묻혀야 하는데, 우씨가 이를 어긴 것입니다.
따라서 무당의 말은 고국천왕을 빌어 우씨의 처사를 비난한 것입니다.
이에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제28대 왕 보장왕寶藏王(642-668년 재위) 4년(645년) 5월에 당唐나라 장군 이세적李世勣이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기를 12일 동안이나 계속했습니다.
고구려는 보장왕 때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이세적李世勣(594-669)이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요동성遼東城은 지금의 중국 요령성 요양시에 있던 성입니다.
당唐나라 제2대 황제 태종太宗이 정예병을 이끌고 합세해 요동성을 수백 겹으로 에워싸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습니다.
요동성에는 주몽사가 있었고 그 사당에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예리한 창이 있었는데,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전연前燕(선비족의 일파인 모용부가 세운 국가) 때에 하늘에서 내려보내온 것이라 했습니다.
바야흐로 포위가 급박하게 되자 미녀를 꾸며 신의 부인으로 삼았는데,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께서 기뻐했으므로 성은 반드시 안전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