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토 운하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우리의 다음 경유지는 고린토(Corinth)였다. 아테네를 떠난 사도 바울로가 1년 반 동안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곳이다.
로마 시대에 고린토는 교육의 중심지인 아테네를 제외하면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또한 고린토는 기원전 4세기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디오게네스는 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니면서 현인을 찾았다고 한다.
그는 남루한 옷을 걸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통 속에서 살았는데 통을 굴려 옮겨 다녔다.
어느 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를 찾아가서 “나는 왕이니 무엇이라도 할 수 있소. 선생이 원하시는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겠소” 하고 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대왕이여, 태양을 그대가 가렸으니 비켜주시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감탄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겠다.”

고린토의 아크로폴리스 산성은 해발 576m 높이의 암석으로 되어 있다.
산성에 고린토를 보살피는 수호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는데 아프로디테는 일천 명의 여자 제관들을 두고 매음을 일삼았다.
아크로폴리스 아래에는 옛 도시의 모습을 짐작케 하는 잔해가 있는데 건축양식이 도리아식과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이 혼용되어 있다.
베레네 샘터에서는 지하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공중목욕탕과 옥타비아누스 신전이 있고, 그것들과 나란히 고린토 박물관이 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어디를 가나 신전, 원형극장, 경기장, 공중목욕탕 등의 유적이 있어 그것들이 곳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린토는 그리스 남부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남아 있는 엄청난 유적에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은 고린토를 인근지역을 포함한 수도로 정하고 총독관저를 두었다.
아테네는 학문으로 유명했고 고린토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다.
고린토가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은 그리스 본토에서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건너오는 길목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었다.
고린토 사람들은 일찌감치 해양무역에 착안하였고 동서교역의 중심지로 알려지게 되자 세계 각국에서 장사꾼들이 모여들어 곧 국제도시로 변모했다.

고린토는 항구도시가 아니면서도 두 개의 항구도시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동쪽에는 에게해로 진출하는 겐크레아 항구가 있었고 서쪽으로는 아드리아해로 나가는 레카이온 항구가 있었다.
서방 유럽에서 오는 배들은 고린토 만으로 먼저 들어오게 되는데 레카이온 항구에 하역한 화물을 육로로 지협을 통과해 동부 겐크레아 항구로 운송한 후 그곳에서 다시 에페소 등 아시아로 보급했다.
두 항구를 통해 아시아와 유럽 등지에서 들어온 화물은 고린토에서 모아진 후 다시 그리스 전역으로 수출되었던 것이다.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있을 때 네로 황제는 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직접 고린토로 와 황금의 삽으로 흙을 파면서 운하공사를 시작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로는 불가능했으므로 네로 황제가 사망하자 공사는 중단되었다.
운하공사가 재개된 것은 1800년이 지난 19세기 말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고린토 지협 중간지점에 있는 거대한 암벽을 부수는 일이었다.
높이가 70m나 되는 암벽을 25m의 폭으로 자르는 엄청난 작업이 성공하자 배가 왕래할 수 있는 운하가 만들어졌다.
길이 6.4km, 폭 22.7m, 깊이 8m의 고린토 운하는 1893년에 완공되어 현재 동쪽의 에게해와 서쪽의 이오니아해를 연결하고 있다.
운하가 없다면 여전히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도는 700km의 항해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고린토 운하를 지나면 곧바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인데 운하 때문에 육지가 갈라졌으므로 이젠 섬이라고 불러야 맞을 것 같다.
자동차로 몇 킬로미터를 가면 오른쪽 해변에 보이는 작은 항구도시가 고린토 신도시이다.
고린토 시민들은 신약시대의 고린토를 팔레오 고린토(Paleo Corinth), 즉 구고린토라고 불러 현대적인 항구도시 신고린토와 구별하고 있다.
구고린토에는 허영의 거리가 있는 등 다른 도시에 비해 음란과 방탕이 판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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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석의 도시: 로마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로마가 성지에 포함되는 이유는 사도 바울로와 베드로가 순교한 곳이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자동차로 40분쯤 가자 로마 시를 둘러싼 고대 성벽과 성문이 눈에 들어왔다.
3세기 스토아 철학자이자 황제였던 아우렐리우스가 축성한 20km에 달하는 성벽이 상당부분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 과거의 번영을 전해준다.

로마 시 전체는 박물관과도 같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것들이 모두 고대의 유적이고, 발길이 닿는 곳마다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있다. 로마에는 바티칸 박물관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들이 무려 30곳이나 있고 베드로 대성당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도 무려 40군데나 된다.
며칠 동안 로마에 머무는 것으로는 로마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독일의 위대한 시인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로마에 온 지 7일이 지났다.
그동안 열심히 로마를 둘러보았다.
이제야 비로소 난 로마가 어떤 도시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로마에 마을을 세운 사람은 목동들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8세기 중엽 테베레 강변 팔라티노 언덕 위에 목동들이 세운 작은 마을에서부터 로마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언덕에서 차츰 확장된 로마는 왕정과 공화정 시대를 거쳐 거대한 규모의 도시로 변했다.
500년 동안 지속된 로마의 공화정은 카이사르의 암살로 끝나고,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41년 동안 황제 직에 있으면서 벽돌로 되어 있던 로마 시를 대리석으로 된 로마 시로 변모시켰다.
이탈리아는 대리석의 나라다.
국내 도처에 있는 각양각색의 희귀한 대리석이 로마로 운반되었으며, 그때부터 웅장한 대리석 건물들이 건립되기 시작했다.
로마 건축양식의 특징은 둥근 아치(arch)와 둥근 천장(vault)이다.
아치와 천장을 만드는 로마인들의 건축공법이 로마를 세계에서 으뜸가는 도시로 바꾸어놓을 수 있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로마인들의 대담함이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거대한 규모로 건축했는데 지금보아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3세기의 황제 카라칼라(Caracalla)가 건축한 공중목욕탕은 냉탕과 온탕은 물론 운동실과 도서관까지 갖춘 석조 건물로 길이 337m에 폭이 320m나 된다.
3만 3천 평에 이르는 면적이다.
그곳은 현재 오페라와 음악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카이사르 때 짓기 시작해서 네로 황제 때 완성되었다는 대서커스장(Circus Maximus)은 길이가 370m에 폭이 80m에 달하며 15만 명이 함께 관람할 수 있는 경기장이다.
(로마인들에게 서커스란 마차경주를 의미한다.)

원형극장(The Colosseum)은 72년 황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가 짓기 시작하여 아들 티투스(Titus)가 80년에 완공했다.
극장의 길이는 188m이고 너비는 156m이며 높이는 50m에 이른다.
4층으로 이루어진 관람석은 계단식으로 건립되었는데 각 층을 석조 아치 형태로 만들었으며, 출입문이 80개나 된다.
티투스 황제는 이 거대한 극장을 완공한 후 100일 동안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5만 명이 함께 관람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극장은 과연 로마인이 뽐낼 만한 건축술의 결과다.
높게 올라간 외곽 원형은 관람자들이 비와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3층 위에 한 층이 더 있는데 그 층을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다.
이 극장에서 로마 시민들은 훈련받은 노예들의 격투, 외국에서 운반해온 야수들의 사냥, 전쟁을 재현한 작품 등을 관람했다.
타원형으로 된 경기장의 지름은 긴 쪽이 188m이고 짧은 쪽이 156m이다.

원형극장은 검투사가 맹수와 격투한 곳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교인들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를 말살하고자 했던 황제들이 그곳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을 맹수의 밥이 되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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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로 기념교회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우리는 먼저 바울로 기념교회를 찾았다.
그의 무덤 위에 세워진 교회다. 324년 교황 실베스타 1세 때 바울로를 기념하는 교회로 봉헌되었고, 395년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 때 증축되었으며, 호노리우스(Honorius) 황제 때 완공되었다.
1823년 화재로 전소되어 모자이크로 된 교회 뒤쪽 반월형 부분만 남았다.
교황청은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서 전 세계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재정협조를 호소했고 교황 파이어스 11세가 1853년 새로 교회를 건립했다.
교회 입구에 있는 거대한 크기의 바울로 초상조각은 교황 골더린스(Golderins)가 1928년에 세운 것이다.
바울로는 한 손에 성서를, 그리고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서있는데 칼은 로마 시민으로서 힘과 권리를 상징한다고 안내인이 말해주었다.

교회 건물 꼭대기에 십자가가 높이 세워져 있는데 아래 벽은 황금색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가운데 예수님이 앉아계시고 그 양편에는 바울로와 베드로가 앉아 있다.
거대한 코린트식 대리석기둥이 떠받치는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홀이 나타났다.
양쪽으로 대리석 기둥들이 네 줄로 나란히 서있는 홀의 길이는 무려 127m나 된다.
베드로 성당과 다른 점은 장식품과 조각으로 치장되지 않은 단순함이다.
양쪽 벽에는 역대 교황들의 초상이 모자이크로 새겨져 있는데 끝에 현재의 교황 바울로 2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들이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되어 찬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안내인의 말로는 이 교회를 건축하는 데 베드로 성당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제단은 전체 건물에 비해 작았는데 12세기에 세워졌던 원형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바울로의 무덤은 교회 지하에 있다.
바울로가 이곳으로 와서 순교한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루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로는 세 차례에 걸친 포교여행을 마친 후 아주 지친 몸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유대인들은 바울로를 죽일 준비를 하고 그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야고보와 원로들을 만나고 성전으로 들어갈 때 유대인들이 그를 붙잡았다.
바울로는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져 파견대장의 지시로 채찍질을 당하게 되었고, 바울로는 백인대장에게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내세워 재판도 하지 않고 매질하는 것은 로마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파견대장은 백인대장 두 사람을 부른 다음 이렇게 말했다.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투척병 이백 명을 준비시켜 오늘 밤 아홉 시에 가이사리아로 출발하여라.
그리고 말도 준비하여 바울로를 태우고 펠릭스 총독에게 호송하여라. 【사도행전 23:23-24】

파견대장 리시아는 펠릭스 총독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백인대장에게 주었다.

글라우디오 리시아는 총독 펠릭스 각하께 삼가 문안드립니다.
호송되어가는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살해당할 뻔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가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구해냈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슨 이유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아보려고 그를 유대인의 의회로 데리고 갔었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그가 유대인들의 율법문제로 고발을 당했을 뿐 사형을 받거나 감옥에 갇힐 만한 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저는 그를 각하께 보내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를 고발하는 사람들에게도 각하 앞에서 직접 그를 고발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사도행전 23:26-30】

펠릭스 총독은 편지를 읽은 후 바울로에게 어느 지방 출신이냐고 묻고 그가 길리기아 출신이라고 대답하자 “그대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온 다음에 심문하겠다”고 하고는 바울로를 헤로데 관저 안에 가두었다.
닷새 후 대사제 아나니아가 바울로를 총독에게 고소하기 위해서 원로 몇 사람과 데르딜로라는 법관과 함께 왔다.
데르딜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바울로를 고발했다.

펠릭스 각하, 우리는 각하의 덕분으로 크게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각하의 선견지명으로 개선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각하를 환영하며 감사하여 마지않습니다.
이제 각하께 더 폐가 되지 않도록 간단히 말씀드리겠으니 너그럽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아본 결과 이 자는 몹쓸 전염병 같은 놈으로서 온 천하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이며 나자렛 도당의 괴수입니다.
그는 심지어 우리 성전까지 더럽히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붙잡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우리 율법대로 재판하려고 했지만 파견대장 리시아가 와서 그를 우리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고소하는 사람들에게 각하께 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하오니 각하께서 친히 그를 심문해보시면 우리가 그를 고소하는 까닭을 다 아시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4:2-8】

바울로는 데르딜로의 고발에 이렇게 답변했다.

저는 (펠릭스) 각하께서 여러 해 동안 이 나라 전체의 재판권을 행사해 오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쁜 마음으로 제 자신에 대한 사실을 각하께 해명하겠습니다.
각하께서도 확인해볼 수 있는 일입니다만 제가 순례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지는 이제 열이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동안에 성전이나 회당이나 거리에서 어느 누구와도 논쟁을 벌인 일도 없으며 군중을 선동한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지금 저를 고소하면서도 각하께 그 증거는 댈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각하 앞에서 시인하는 것은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를 따라 우리 조상의 하느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를 고소하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하느님을 믿으며 올바른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같이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언제나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간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동족에게 구제금을 전달하고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러 여러 해 만에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제가 정결예식을 행하고 나서 그 일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이 성전 안에서 저를 보기는 하였지만 제가 군중을 선동하거나 소란을 피운 일은 없습니다.
그 자리에는 다만 아시아에서 온 유다인 몇 사람이 있었는데 저를 걸어 고소할 일이 있다면 그들이 직접 각하 앞에 와서 고소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제가 예루살렘 의회에 불려갔을 때 이 사람들이 저에게 무슨 죄목을 찾아냈는지 말해보라고 하십시오.
다만 저는 그들 앞에 서서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문제로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재판을 받고 있소’ 하고 한마디 소리쳤을 뿐입니다. 【사도행전 24:10-21】

펠릭스 총독은 자신의 후임으로 보르기오 페스도가 부임할 때까지 2년 동안이나 바울로를 가이사리아의 감옥에 가두어두었다.
바울로는 페스도 총독에게 “나는 카이사르에게 상소합니다” 하고 말했고, 페스도는 배석판사들과 협의한 끝에 “그대가 카이사르에게 상소하였으니 그대를 카이사르에게 보내겠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바울로는 로마로 보내졌고 그때 루가가 그와 동행했다.
바울로와 루가가 탄 배는 지중해의 크레타 섬 근처에서 풍랑을 만나 2주 동안 표류하는 등 온갖 고생 끝에 로마에 도착했다.
로마에는 이미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어 있었으므로 그리스도교인들이 바울로를 맞았다.
루가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에 바울로는 경비병 한 사람의 감시를 받으면서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사도행전 28:16】

바울로는 로마에서 2년 동안 지내다가 처형당했다.
루가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바울로는 셋집을 얻어 거기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모두 맞아들이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대담하게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사도행전 28:31】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

루가는 바울로의 순교에 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사도행전의 뒷이야기는 라틴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터툴리안(160∼225년)의 기록에서 발견되는데, 그에 의하면 바울로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네로 황제가 그를 처형했다고 한다.
교회 지하에는 바울로가 참수당할 때 그의 목을 받쳤던 돌기둥과 그의 목이 세 번 튀어서 세 개의 샘이 솟았다는 자리가 있다.
지하에는 1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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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바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바울로 기념교회에서 버스로 15분가량 성 밖으로 가니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바(Catacomba)가 나타났다.
뜰에 세워져 있는 성 베르나르(St. Bernard)의 초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단테(Dante)는 성 베르나르를 《신곡》 연옥편에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베르나르는 양손을 벌리고 인류를 향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하느님의 자비를 베푸는 일꾼임을 자처하는 듯하다.

카타콤바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로마 군인들을 피해서 예배를 드리던 곳으로 유명하다.
기원전에 공동묘지로 사용하던 곳을 그리스도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은신처로 사용했던 것이다.
동굴은 터널로 사방팔방 연결되어 있는데 어떤 곳은 5층 아래로 내려가는 곳도 있어 구불구불한 미로(迷路)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통로의 총길이가 무려 20km에 이른다.
어두컴컴한 계단식 통로를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심한 습기가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성 안에 시신을 매장해서는 안 된다는 로마법 때문에 카타콤바는 모두 성 밖에 있다.
로마로 통하는 아피아 도로(Via Appia) 주변에는 15개의 카타콤바가 밀집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발견된 카타콤바는 모두 45개라고 하는데 또 발견될 수도 있다.
카타콤바는 고대 로마인들만의 특이한 묘지형태가 아니다.
몰타 섬이나 소아시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도 고대의 카타콤바가 발견된다.
그러나 로마처럼 커다란 카타콤바가 무더기로 발견된 곳은 없다.
19세기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데 로시(De Rossi)는 평생 카타콤바를 연구했고, 오늘날까지 그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로마 성 밖에 카타콤바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순교자들을 카타콤바에 안치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사흘 동안 동굴무덤에 안치되었던 것처럼 순교자들을 세마포에 싸서 카타콤바 묘실에 안치했다.
로마에는 천연 동굴무덤이 없으므로 그리스도교인들은 장례법을 따라 카타콤바에서 장사를 지내고는 순교자들이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나기를 고대했다.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받아 순교자들의 수가 늘어나자 자연히 카타콤바의 규모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카타콤바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전용 묘역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카타콤바가 그렇게 사용되었다.
230년과 310년 사이에 로마 교회의 주교(교황)들도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카타콤바에 묻혔다.
이는 카타콤바가 로마의 초대교회 교인들의 보편적인 장례지였음을 말해준다.
10인의 교황의 시신이 안치된 방을 ‘교황의 묘실’이라고 부른다.
그 가운데 파비아누스나 식스투스 2세는 순교한 교황이다.

안내인이 비춰주는 전등불을 따라 두 사람이 겨우 내려갈 정도로 좁은 25계단을 내려가니 큰 홀이 나온다.
그곳에는 20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있고 전등이 켜져 있다.
마침 그곳에서 순례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거기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통로 양편에는 여기저기 관을 안치할 만한 공간이 있다.

안내인은 우리를 작은 방으로 인도했는데 방 양쪽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벽화는 서기 1세기를 전후하여 열 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이 그린 그림이다.
어린이들이 예수님과 베드로 그리고 바울로를 만난 기억을 더듬어 그렸다고 한다.
안내인은 그 그림들이 예수님의 인성을 확증할 수 있는 훌륭한 사료라고 말했다.
벽화에 사용된 물감은 천연물감으로 프레스코(Fresco)의 시초가 되는데 안내인은 프레스코의 기원이 카타콤바의 벽화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로마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순교자들이 순교한 날이면 카타콤바를 찾아가서 성 만찬을 베풀며 기념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카타콤바에 안치된 친지 그리스도교인들의 기일에도 그곳에서 추모예배를 드렸다.
카타콤바는 장례지이자 예배장소 즉 교회가 되었다.
다행히도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카타콤바 장례와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는 방해하지 않았다.
누가 묻혔든 간에 로마법은 묘지를 성역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정책이 달라져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 카타콤바에서의 예배도 금지되었고 카타콤바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300년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후 카타콤바에는 변화가 생겼다.
카타콤바는 그리스도교인들의 묘지로 확고해져갔으며 규모 또한 확장되었다.
교황이 카타콤바 내에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당을 만들기도 했다.
300년대 후반 교황의 명으로 건립된 지하 예배당은 길이 31m에 폭이 17m나 되는 거대한 규모로 순교자 네리우스와 아키레우스 두 사람을 기념하는 예배당이다.
476년 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카타콤바는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500년대 이후로 카타콤바는 거의 매장지로 사용되지 않았고 세월이 가면서 사람들은 카타콤바가 지하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그러다가 16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우연히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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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라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사해를 향해 달리는 버스의 창 밖에는 광야가 한없이 펄쳐져 있다.
버스는 유목민족 베두인 촌을 지나서 예리고 쪽으로 달리다가 어느 촌락에서 멈추었다.
조그마한 건물 위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여관’이라고 적혀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관광객들에게 흥미거리도 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상품들이 약간 진열되어 있다.
이곳이 루가의 복음서(10:30-36)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여관이다 .

제사장과 레위인 모두 강도를 만나 사경에 이른 사람을 못 본 체 하고 지나친 곳이다.
나는 나 자신을 반성해보았다.
나는 과연 어느 편에 속하고 있는지를.
나도 제사장과 레위인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선한 사마리아인만이 강도를 만난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에 투숙시키면서 치료비가 모자라면 돌아올 때에 갚겠노라고 말했다.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의 완쾌를 부탁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너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라고 명령하시는 것 같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니 ‘선한 사마리아인의 여관’은 내게 아주 감명 깊게 느껴졌다.

여관 옆에 베두인족의 초라한 천막이 있는데 안에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추운데 따끈한 차라도 마시고 가라는 친절의 제스처로 보였다.
유목민의 친절한 손짓을 뒤로하고 버스에 타 아주 가파른 언덕길을 올랐다.
경사진 내리막길을 지날 때에는 마음을 몹시 조였다.
아론이라는 이름의 운전기사는 그 길을 수없이 다녔을 터인데도 노파심에 걱정이 되었다.
창밖을 보니 계곡은 험산준령이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우리에 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절벽 골짜기에서 길을 잃으면 험란한 계곡을 헤매다가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상에 올라 건너편을 바라보니 ‘시험 산’이 보인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실 때에 사탄이 그 산에서 천하의 만국과 영광을 보여주며, 네가 내게 절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했다는 이야기가 마태오의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그리 많지 않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우리들이 도착한 곳은 사해였다.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나는 너무 사치스런 순례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예수님께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감을 이렇게 적어보았다.

이 망망한 사해, 유유한 물결
어떠한 생물도 서식 못하게 하는 사해
너의 교만을 염려한다.
말없이 부드럽게 흐르는 물결처럼
너도 영원히 겸손하게 흐르거라.
너를 보러 오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와 겸손을 본받도록 가르쳐다오.
기약 없는 헤어짐 아쉬울 뿐
흐르는 물 막을 길 없으니
내 다시 오면 지금의 너는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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