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콤바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바울로 기념교회에서 버스로 15분가량 성 밖으로 가니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바(Catacomba)가 나타났다.
뜰에 세워져 있는 성 베르나르(St. Bernard)의 초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단테(Dante)는 성 베르나르를 《신곡》 연옥편에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베르나르는 양손을 벌리고 인류를 향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하느님의 자비를 베푸는 일꾼임을 자처하는 듯하다.

카타콤바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로마 군인들을 피해서 예배를 드리던 곳으로 유명하다.
기원전에 공동묘지로 사용하던 곳을 그리스도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은신처로 사용했던 것이다.
동굴은 터널로 사방팔방 연결되어 있는데 어떤 곳은 5층 아래로 내려가는 곳도 있어 구불구불한 미로(迷路)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통로의 총길이가 무려 20km에 이른다.
어두컴컴한 계단식 통로를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심한 습기가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성 안에 시신을 매장해서는 안 된다는 로마법 때문에 카타콤바는 모두 성 밖에 있다.
로마로 통하는 아피아 도로(Via Appia) 주변에는 15개의 카타콤바가 밀집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발견된 카타콤바는 모두 45개라고 하는데 또 발견될 수도 있다.
카타콤바는 고대 로마인들만의 특이한 묘지형태가 아니다.
몰타 섬이나 소아시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도 고대의 카타콤바가 발견된다.
그러나 로마처럼 커다란 카타콤바가 무더기로 발견된 곳은 없다.
19세기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데 로시(De Rossi)는 평생 카타콤바를 연구했고, 오늘날까지 그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로마 성 밖에 카타콤바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순교자들을 카타콤바에 안치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사흘 동안 동굴무덤에 안치되었던 것처럼 순교자들을 세마포에 싸서 카타콤바 묘실에 안치했다.
로마에는 천연 동굴무덤이 없으므로 그리스도교인들은 장례법을 따라 카타콤바에서 장사를 지내고는 순교자들이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나기를 고대했다.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받아 순교자들의 수가 늘어나자 자연히 카타콤바의 규모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카타콤바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전용 묘역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카타콤바가 그렇게 사용되었다.
230년과 310년 사이에 로마 교회의 주교(교황)들도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카타콤바에 묻혔다.
이는 카타콤바가 로마의 초대교회 교인들의 보편적인 장례지였음을 말해준다.
10인의 교황의 시신이 안치된 방을 ‘교황의 묘실’이라고 부른다.
그 가운데 파비아누스나 식스투스 2세는 순교한 교황이다.

안내인이 비춰주는 전등불을 따라 두 사람이 겨우 내려갈 정도로 좁은 25계단을 내려가니 큰 홀이 나온다.
그곳에는 20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있고 전등이 켜져 있다.
마침 그곳에서 순례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거기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통로 양편에는 여기저기 관을 안치할 만한 공간이 있다.

안내인은 우리를 작은 방으로 인도했는데 방 양쪽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벽화는 서기 1세기를 전후하여 열 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이 그린 그림이다.
어린이들이 예수님과 베드로 그리고 바울로를 만난 기억을 더듬어 그렸다고 한다.
안내인은 그 그림들이 예수님의 인성을 확증할 수 있는 훌륭한 사료라고 말했다.
벽화에 사용된 물감은 천연물감으로 프레스코(Fresco)의 시초가 되는데 안내인은 프레스코의 기원이 카타콤바의 벽화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로마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순교자들이 순교한 날이면 카타콤바를 찾아가서 성 만찬을 베풀며 기념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카타콤바에 안치된 친지 그리스도교인들의 기일에도 그곳에서 추모예배를 드렸다.
카타콤바는 장례지이자 예배장소 즉 교회가 되었다.
다행히도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카타콤바 장례와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는 방해하지 않았다.
누가 묻혔든 간에 로마법은 묘지를 성역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정책이 달라져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 카타콤바에서의 예배도 금지되었고 카타콤바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300년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후 카타콤바에는 변화가 생겼다.
카타콤바는 그리스도교인들의 묘지로 확고해져갔으며 규모 또한 확장되었다.
교황이 카타콤바 내에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당을 만들기도 했다.
300년대 후반 교황의 명으로 건립된 지하 예배당은 길이 31m에 폭이 17m나 되는 거대한 규모로 순교자 네리우스와 아키레우스 두 사람을 기념하는 예배당이다.
476년 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카타콤바는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500년대 이후로 카타콤바는 거의 매장지로 사용되지 않았고 세월이 가면서 사람들은 카타콤바가 지하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그러다가 16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우연히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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