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토 운하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우리의 다음 경유지는 고린토(Corinth)였다. 아테네를 떠난 사도 바울로가 1년 반 동안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곳이다.
로마 시대에 고린토는 교육의 중심지인 아테네를 제외하면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또한 고린토는 기원전 4세기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디오게네스는 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니면서 현인을 찾았다고 한다.
그는 남루한 옷을 걸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통 속에서 살았는데 통을 굴려 옮겨 다녔다.
어느 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를 찾아가서 “나는 왕이니 무엇이라도 할 수 있소. 선생이 원하시는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겠소” 하고 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대왕이여, 태양을 그대가 가렸으니 비켜주시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감탄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겠다.”

고린토의 아크로폴리스 산성은 해발 576m 높이의 암석으로 되어 있다.
산성에 고린토를 보살피는 수호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는데 아프로디테는 일천 명의 여자 제관들을 두고 매음을 일삼았다.
아크로폴리스 아래에는 옛 도시의 모습을 짐작케 하는 잔해가 있는데 건축양식이 도리아식과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이 혼용되어 있다.
베레네 샘터에서는 지하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공중목욕탕과 옥타비아누스 신전이 있고, 그것들과 나란히 고린토 박물관이 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어디를 가나 신전, 원형극장, 경기장, 공중목욕탕 등의 유적이 있어 그것들이 곳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린토는 그리스 남부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남아 있는 엄청난 유적에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은 고린토를 인근지역을 포함한 수도로 정하고 총독관저를 두었다.
아테네는 학문으로 유명했고 고린토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다.
고린토가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은 그리스 본토에서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건너오는 길목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었다.
고린토 사람들은 일찌감치 해양무역에 착안하였고 동서교역의 중심지로 알려지게 되자 세계 각국에서 장사꾼들이 모여들어 곧 국제도시로 변모했다.

고린토는 항구도시가 아니면서도 두 개의 항구도시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동쪽에는 에게해로 진출하는 겐크레아 항구가 있었고 서쪽으로는 아드리아해로 나가는 레카이온 항구가 있었다.
서방 유럽에서 오는 배들은 고린토 만으로 먼저 들어오게 되는데 레카이온 항구에 하역한 화물을 육로로 지협을 통과해 동부 겐크레아 항구로 운송한 후 그곳에서 다시 에페소 등 아시아로 보급했다.
두 항구를 통해 아시아와 유럽 등지에서 들어온 화물은 고린토에서 모아진 후 다시 그리스 전역으로 수출되었던 것이다.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있을 때 네로 황제는 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직접 고린토로 와 황금의 삽으로 흙을 파면서 운하공사를 시작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로는 불가능했으므로 네로 황제가 사망하자 공사는 중단되었다.
운하공사가 재개된 것은 1800년이 지난 19세기 말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고린토 지협 중간지점에 있는 거대한 암벽을 부수는 일이었다.
높이가 70m나 되는 암벽을 25m의 폭으로 자르는 엄청난 작업이 성공하자 배가 왕래할 수 있는 운하가 만들어졌다.
길이 6.4km, 폭 22.7m, 깊이 8m의 고린토 운하는 1893년에 완공되어 현재 동쪽의 에게해와 서쪽의 이오니아해를 연결하고 있다.
운하가 없다면 여전히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도는 700km의 항해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고린토 운하를 지나면 곧바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인데 운하 때문에 육지가 갈라졌으므로 이젠 섬이라고 불러야 맞을 것 같다.
자동차로 몇 킬로미터를 가면 오른쪽 해변에 보이는 작은 항구도시가 고린토 신도시이다.
고린토 시민들은 신약시대의 고린토를 팔레오 고린토(Paleo Corinth), 즉 구고린토라고 불러 현대적인 항구도시 신고린토와 구별하고 있다.
구고린토에는 허영의 거리가 있는 등 다른 도시에 비해 음란과 방탕이 판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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