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비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우리 일행은 마케도니아를 경유하여 그리스로 갔다.
우리는 카발라(Kavala)에 여장을 풀었는데 카발라는 사도 바울로가 상륙했던 예전의 네아폴리스다.
조용한 항구도시로 어항(漁港)이었다.
다음날 아침 카발라를 출발한 우리는 16km 서쪽에 있는 필립비(Philippi)로 갔다.
필립비는 기원전 358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친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가 만든 요새로 자신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기원전 42년 필립비 성 밑에서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 군대와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카시우스 군대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브루투스-카시우스는 8,000명의 병사를 잃고 패전하여 자살했으며,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는 1만 6,000명의 병사를 잃고 승전했다.
이후 필립비는 ‘중동의 작은 로마’로 불리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로마 공화국을 동서로 분할 통치하다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누른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하고 스스로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 칭하였다.

필립비가 발굴된 것은 1862년 나폴레옹 3세에 의해서였다.
산 위에는 아크로폴리스 산성의 잔해가 남아 있고 평야에는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도로 옆에 디오니소스 신전과 바울로가 갇혔던 감옥이 있다.
필립비에 도착한 바울로와 실라는 성문 밖 강가에서 몇 명의 여자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리디아였다.
리디아는 소아시아의 티아디라(두아디라) 출신의 옷감 장수로 티아디라에서 자색 옷감을 가져와 필립비에서 파는 활동적인 여인이었다.
평소에 종교문제에 관심이 많던 리디아는 바울로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가족까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
이로써 리디아 일가는 교회 역사상 최초로 유럽 대륙에서 세례 받은 그리스도교 가족으로 기록되었다.

바울로가 필립비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지각티스 강은 폭이 좁아 큰 개천 정도로 보이는데 강가에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리디아 교회가 있다.
리디아가 옷감장수였음을 의식해서인지 내부 전면을 채색유리로 단장했다.
지각티스 강에서 리디아와 그의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온다.

필립비에서 바울로와 실라는 이상한 종교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군중까지 합세해서 그들을 공격하자 치안관들은 부하를 시켜 바울로와 실라의 옷을 찢고 매질을 하게 하였다.
이렇게 몹시 때리고 나서는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깊숙한 감방에 집어넣고 발목을 차꼬로 단단히 채워두었다.

때는 한밤중이었다.
바울로와 실라는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었고 다른 죄수들은 그것을 듣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을 기초부터 온통 뒤흔들어놓는 바람에 문이 모두 열리고 죄수들을 묶어두었던 쇠사슬이 다 풀리고 말았다.
간수가 잠을 깨어 감옥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는 죄수들이 다 도망쳤으려니 하고 칼을 빼어 자살하려고 하였다.
그때에 바울로가 큰소리로 “당신의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 있소” 하고 알렸다.
간수는 등불을 찾아들고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울로와 실라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두 분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네 집안이 다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고 간수와 그 집안 온 식구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간수는 한밤중이었는데도 그 두 사람을 데려다가 상처를 씻어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울로와 실라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음식을 대접하며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가족과 함께 기뻐하였다. 【사도행전 16:22-34】

필립비 교회는 바울로가 고초를 겪고 세운 교회라서 바울로는 어디를 가나 필립비 교회를 생각했다.
그가 이 교회를 세운 것은 2차 전도여행 때였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1:3-4】

교인들로는 리디아를 수반으로 한 경건한 사람들과, 바울로를 석방했던 간수와 그의 가족, 그리고 바울로가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라고 한 에바프로디도가 있었다.

사실 그는 병이 나서 죽을 뻔했으나 지금은 하느님의 자비로 다 나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자비를 베푸셔서 나에게 겹치는 슬픔을 면하게 해주셨습니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27】

바울로는 필립비 교회를 두세 차례 방문하였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바울로가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필립비 교인들이 예물을 보낸 데 대한 회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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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카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 데살로니카(Thessalonica)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 이름에서 따온 지명으로 기원전 315년에 건설되었다.
기원전 323년 여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서른두 살의 나이에 열병으로 사망하자 부하 장군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쟁탈전이 벌어졌다.
카산드로스(Cassandros) 장군이 권력을 잡게 되었는데 카산드로스의 아내가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이복동생 데살로니카였다.
카산드로스는 왕위에 오르자 자신에게 저항했던 알렉산드로스의 계모 올림피아 대비를 죽였을 뿐 아니라 후환을 없애기 위해알렉산드로스의 부인 록사나 왕비와 그의 아들까지 모두 죽였다.
민심이 그에게서 떠나자 카산드로스는 수습책의 하나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아내의 이름을 따서 데살로니카라고 불렀다.

해변가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기마상이 서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뛰어난 천재였으며 시대의 풍운아였다.
그는 권력보다는 최고의 지식에 의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나는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았지만 스승으로부터는 보람 있는 인생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보면 마케도니아 군대는 보병 3만 명에 기병이 4천 명(혹은 보병이 4만 명, 기병이 5천 명)이었고, 페르시아 군대는 60만 명으로 어떤 때는 백만 대군이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널 때 페르시아군의 절반이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 합류해서 페르시아군과 싸웠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의 모친과 부인 그리고 두 딸을 포로로 잡았지만 그들을 왕족으로 예우하고 모든 소유물이나 명예를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왕비와 두 딸이 절세미인이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녀들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리우스 왕은 전투에서 부상당하고 숨을 거두려는 순간에 마케도니아 장교에게 물을 달라고 청했다.
장교가 물을 한 그릇 건네주니 받아 마신 후 이렇게 말했다.
“용사여, 그대의 은혜를 갚지 못하고 저승으로 가는 것이 내 일생의 가장 큰 불행이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그대를 표창할 것이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내 모친과 처자를 후히 대해주신 은혜는 신이 갚아줄 것이오.”
다리우스 왕은 장교의 손을 잡고서 이런 말을 덧붙이고 눈을 감았다.
“내 대신 알렉산드로스의 손을 이렇게 잡아주시오.”

곧이어 도착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장교로부터 다리우스의 말을 전해 듣고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다리우스 왕은 적장이었지만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왕의 유해를 왕의 유해답게 정중하게 그의 모친에게 보내고 왕자를 가까운 신하로 삼았다.
적과 적 사이에 얽힌 이 인정 어린 미담은 후세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인도주의의 교훈이 되었다.

점령지역에 그리스 문화를 심어 세계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서 동양과 서양이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이루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점령지 군인들을 그리스-마케도니아 군대에 편입시켰고, 포로들을 해방시켜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며, 외국 여인들을 자신의 부하들과 결혼하게 했다.
그는 가는 곳곳마다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의 생활은 검소하고 절제 있었으며, 결혼한 아내 외에는 다른 여자를 범하지 않았다.
적에 대한 승리보다도 자기를 이기는 것이 왕 된 소임이라고 생각한 그를 훗날 로마 젊은이들이 신격화하며 숭배했다.

데살로니카는 에게해로 진출하는 마케도니아 지역의 가장 큰 항구도시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가 브루투스-카시우스와 싸웠을 때 데살로니카는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의 편에 섰다.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가 승리하자 데살로니카는 기원전 42년에 자유시가 되었고 인구 230만 명으로 그리스 세계에서 아테네 다음가는 큰 항구도시였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정치적 중심지였으며, 그 후 비잔틴 시대에도 콘스탄티노플에 버금가는 도시로 명성을 떨쳤다.

지금의 카발라(당시 네아폴리스) 항구를 통해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온 바울로는 필립비에서 전도활동을 마친 후 데살로니카로 발길을 옮겼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펴온 바울로가 데살로니카를 다음 목적지로 삼은 것은 당연했다.

데살로니카 교회는 바울로가 2차 전도여행에서 세운 교회였다.
바울로는 고린토에 18개월 동안 거주하면서 데살로니카 교회에 두 편의 서신을 써서 보냈는데 그것이 데살로니카 전서와 후서이다.
그가 데살로니카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낸 것은 교회가 핍박받는 가운데서도 주님께 충성하며 정신적 성숙에 대해 감사하기 위해서였다.
실라와 디모테오가 활동한 곳도 데살로니카 교회였던 것 같다.
그러나 데살로니카의 교우 가운데 야손이 폭도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일이 일어나자 바울로와 실라는 베레아를 거쳐 아테네로 피했다.

이것을 시기한 유다인들은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켜 도시를 혼란 속에 빠뜨렸다.
그리고 바울로 일행을 찾아 민중 앞에 끌어내려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바울로 일행을 찾지 못하게 되자 폭도들은 야손과 교우 몇 사람을 시 치안관들에게 끌고 가서 큰소리로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던 자들이 여기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런 자들을 야손이 자기 집에 맞아들였습니다. 그자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카이사르의 법령을 어기고 있습니다” 하고 떠들어댔다.
이 말을 듣고 무리들과 시 치안관들은 당황하였다.
그러나 시 치안관들은 야손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서 보석금을 받은 뒤에 그들을 놓아주었다. 【사도행전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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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아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교우들은 그날 밤으로 바울로와 실라를 베레아로 보냈다.
베레아에 도착한 두 사람은 유다인의 회당으로 들어갔다.
그곳 유대인들은 데살로니카 유대인들보다 마음이 트인 사람들이어서 말씀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바울로의 말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서를 연구하였다.
이리하여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또 그리스 귀부인들과 남자들 가운데서도 믿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사도행전 17:10-12】

바울로가 말씀을 선포한 곳을 베마(Bema)라고 하여 돌로 대를 만들고 대리석으로 아치형 벽을 쌓아올린 다음, 벽에 금색 모자이크로 바울로가 설교하는 얼굴을 묘사했다.
바울로를 기념하는 교회는 잔해만이 남아 있고 맞은편에는 수천 년 묵은 나무가 서있는데, 1430년 터키 군대가 그리스도교인들을 교수형에 처한 곳이라고 한다.

베레아에는 크고 오래된 모스크에 높은 첨탑이 세워져 있는데 베레아의 모스크는 7대 이슬람 사원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오스만 투르크 때 세운 것으로 지금도 이슬람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그리스에는 약 15만 명의 이슬람교도들이 있다고 한다.

데살로니카에 살고 있던 유다인들은 바울로가 베레아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말을 듣고 거기까지 가서 무리를 선동하여 소란을 피웠다.
그래서 교우들은 급히 바울로를 바닷가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실라와 디모테오는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바울로를 안내하던 사람들은 아테네까지 같이 갔다가 실라와 디모테오도 되도록 빨리 오라는 바울로의 전갈을 받아가지고 베레아로 돌아갔다. 【사도행전 17:13-15】

우리는 메테오라(Meteora)로 가는 길 오른편으로 신비로운 올림푸스 산이 반쯤 흰 눈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았다.
제우스 신을 비롯한 열두 거신족이 군림하며 천하를 호령하던 곳이다.
열두 신은 다음과 같다.

제우스(zeus): 구로노스와 레아의 아들로서 우뢰의 신이다.
그리스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으로 신과 인간들의 아버지이다.

·헤라(Hera): 출산과 질투의 여신으로 제우스의 아내이다.

·포세이돈(Poseidon): 바다의 신이자 지진의 신이다.

·아테나(Athena): 애지(愛智)와 공예의 여신으로 아테네의 수호신이다.

·아폴론(Apollon): 태양의 신이며, 음악, 궁술, 의술, 예언의 신으로 미 청년이다.

·아르테미스(Artemis): 달의 여신이며, 활의 명수로 수렵의 여신이기도 하다.
아폴론과 쌍둥이로 에페소의 수호신이다.

·헤르메스(Hermes): 제우스의 전령이며, 웅변, 나그네, 상업, 도적의 신으로 항상 철모를 쓰고 단장을 짚고 샌들을 신었다.

·아레스(Ares): 전쟁의 신으로 성격이 흉포해 신들의 미움을 받았다.

·헤파이스토스(Hephaistos): 불과 철공의 신으로 절름발이지만 아테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아프로디테(Aphrodite): 미와 사랑의 여신으로 고린토의 수호신이다.

·데미테르(Demeter): 수확의 여신이다.
·
헤스티아(Hestia): 주방의 여신으로 가정의 수호신이다.

아르고스 왕의 딸 이오는 제우스의 사랑을 받았으므로 자연히 헤라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헤라는 제우스와 이오의 밀회를 감시하기 위해 일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를 감시원으로 보냈다.
그 사실을 알아챈 제우스는 이오를 아름다운 암소로 변신시켰다.
헤라는 이오가 암소로 변신한 것을 알았지만 모르는 척하고 남편 제우스에게 암소를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했다.

제우스는 아르고스의 눈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암소를 이오로 다시 변신시키는 일을 지혜로운 헤르메스에게 부탁했다.
헤르메스가 불행한 이오가 묶여 있는 목장에 와보니 아르고스가 일백 개의 눈을 뜨고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도적질에는 초인적인 재주를 가진 헤르메스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헤르메스는 피리로 자장가를 불기 시작했다.
달 밝은 밤에 구성지게 들려오는 피리소리에 아르고스의 눈은 하나하나 스스르 감기기 시작했다.

일백 개의 눈이 모두 감기고 아르고스는 깊은 잠에 빠졌다.
그때 헤르메스가 칼을 빼어 그의 목을 내리쳤다.
이오는 그리스 서쪽 바다로 뛰어들었는데 그때부터 그 바다를 ‘이오니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오는 헤엄을 쳐서 이집트로 갔다.
제우스는 그곳에서 헤라의 눈을 피해 이오를 전과 같은 모양으로 변신하게 하여 자녀를 낳았는데 그 자녀들이 오늘날 리비아인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헤라는 아르고스를 잃은 것을 슬퍼하며 광채 나는 아르고스의 일백 개의 눈을 공작의 꼬리에 장식하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차로 세 시간 가량을 달려서 주위가 바위산으로 휘장을 친 메테오라에 도착했다.
400m 높이의 층암절벽이 우뚝 서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는 그곳에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이 모여 있다.
13세기부터 이곳으로 수도사들이 모여들어 14세기부터 수도원이 건립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자 수도원 다섯과 수녀원 하나만이 남아 있다.

어떻게 산상절벽에 있는 수도원으로 물자를 날랐는지 놀랍게 여겨진다.
지금은 케이블카로 물품을 수송한다.
중턱까지는 도로가 포장되어 있어 올라가기가 쉬웠지만 계곡의 다리와 계단은 험준함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가장 크다고 하는 성 마테오라(St. Matheora) 수도원과 성 스테파노(St. Stephano) 수도원을 관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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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중심지: 아테네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헬레니즘 문명의 발원지인 아테네로 향하는 길은 일기가 계속 쾌청했다.
안내인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는 연중 300일 이상 해를 볼 수 있는 개인 날씨가 계속된다고 한다.
그리스 문화의 발상지인 아테네는 기원전 600년경부터 헬라(Hellas) 민족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였으며,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에는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을 배출했다.
예루살렘이 서양종교의 중심지라면 아테네는 서양지성의 중심지였다.
민주주의로도 유명한 아테네는 유리피데스와 소포클레스의 희곡이 원형극장에서 공연되는 예술의 도시이기도 했다.
아테네에는 세 가지 철학 학파가 형성되었는데 플라톤의 이상주의와 에피쿠로스의 향락주의 그리고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였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아테네가 처음 생겼을 때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 사이에 아테네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이 벌어졌다.
두 신은 누가 아테네에 유용한 선물을 제공할 수 있느냐로 승부를 걸었다.
아테나는 올리브기름을 내는 감람나무를 가져왔으며, 포세이돈은 바닷물처럼 짠물을 가지고 왔다.
아테나 여신이 이겼으므로 도시의 이름을 여신의 이름을 따서 아테네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아테나는 아테네의 수호신이 되었다.

아테나 여신은 제우스와 메데이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데이스가 아테나를 임신했을 때 사내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아버지를 살해할 것이라는 운명적인 신탁이 있었다.
제우스는 신탁이 두려워서 메데이스를 삼켜버렸다.
그러자 뱃속의 아이는 제우스의 머리로 올라와 그곳에서 자랐다.
두통이 나서 견딜 수가 없던 제우스는 아들 헤바이스토스에게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쪼개라고 명령했다.
헤바이스토스가 도끼로 아버지의 머리를 쪼개니 제우스의 머리에서 창과 방패로 무장한 기골이 장대한 아테나 여신이 태어났다.
아테나 여신은 ‘바라스 아테나’로 불리는 영원한 처녀인데, 시민들의 교육에 힘썼으며, 밭가는 일, 직조 일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학자들은 계시를 받기 위해서, 발명가는 영감을 얻으려고, 재판관은 명석함과 공평함을 고대하면서, 군인들은 전술을 연마하기 위해서 아테나 여신에게 기원했다.
올리브 나무(감람나무)는 아테나의 성목(聖木)이 되었으며 올빼미는 그녀의 성조(聖鳥)가 되었다.

아테네는 섬들에 에워싸인 천연 요항으로 페르시아 전쟁의 격전지로도 유명하다.
페르시아는 세 차례에 걸쳐 아테네를 침공했다.
1차 침공은 기원전 492년에 다리우스 왕이 대군을 이끌고 온 것이었는데 트라키아 해전에서 패하여 퇴각했다.
2년 후 페르시아는 육해군 2만 명과 전함 600척을 동원하여 2차 침공을 시도했다.
그리스는 불과 1만 명의 군인만으로 그들과 싸워야 했지만 아테네의 명장 밀티아데스(Miltiades)가 마라톤 평야에서 페르시아군을 무찔러 대승을 거두었다.
이 마라톤 전쟁에서 페르시아 군인 6,400명이 사살되었으며, 그리스 군인은 192명이 전사했을 뿐이었다.
승전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한 병사가 42km의 길을 달려와 사령관에게 보고했는데 얼마나 전력을 다해 달려왔던지 보고를 마치자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병사의 정신을 기려서 올림픽에 마라톤 종목이 생기게 되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사망하자 기원전 480년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전함 1,200척을 동원하여 다시 아테네로 진격한 것이 3차 침공이었다.
그리스 군대는 고작 아테네 전함 200척과 연합군 전함 300척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테네의 명장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의 뛰어난 전략으로 페르시아 해군은 아덴 만 살라미스 해협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데미스토클레스 장군은 수년 전부터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하여 견고한 전함 200척을 건조하고 침공을 격퇴할 준비를 해두었던 것이었다.
전함은 바닥이 넓고 앞머리에는 쇠로 충각(衝角)을 부착한 장갑선으로 빠른 속력으로 페르시아의 전함에 다가가 충돌하면 적의 전함은 침몰할 수밖에 없었다.
에게해를 건너온 페르시아 전함들은 공격을 목표로 속력에만 치중했으므로 배의 바닥이 좁아 쓰러지기가 쉬웠다.
그리스 전함들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페르시아 전함들을 유인한 후 조수를 이용했는데, 적의 전함들은 비좁은 해협에서 서로 충돌하여 파선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싸움은 이순신 장군의 지략을 떠올리게 한다.
임진왜란 때 명량해협에서 장군이 불과 13척의 거북선으로 일본의 전함 200여 척을 보기 좋게 격파한 일이 살라미스 해협에서도 일어났던 것이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관해서 헤로도토스는 《역사》에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리스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페르시아인>에는 데미스토클레스가 자신의 노예를 페르시아 군대에 간첩으로 보내 살라미스의 비좁은 해협으로 페르시아의 전함들을 유도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데미스토클레스는 유능한 정치가이자 용맹한 군인이었지만 오만하고 부패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전쟁이 끝난 후 시민들에 의해 아덴에서 추방된 그는 대담하게도 적국 페르시아 왕에게로 가서 그의 보호를 받으며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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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테논 신전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아테네의 전성기는 기원전 5세기 페리클레스(Perikles, 기원전 495∼429년) 시대로 페르시아를 무찌르고 모처럼 평화를 누릴 때였다.
페리클레스는 유능한 정치가였을 뿐 아니라 예술과 학문에 관심이 많아 아테네에 많은 건축물을 지어 아테네를 아름답게 꾸몄다.
그가 재임한 시기를 그리스인들은 황금기로 여긴다.
페리클레스가 전몰자 장송(葬送)에서 행한 연설문을 보면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사랑하지만 사치에 빠져서는 안 되며, 지식을 사랑하지만 유약해져서는 안 된다.
부를 허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행동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하며,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열심히 일해 가난을 면치 못함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나라 전체가 헬라의 학원이며, 우리는 누구나 모든 행동에 있어서 신체의 건강함과 유연함을 국가를 위한 자재로 사용해야 한다.

아테네의 바위언덕 아크로폴리스에 페리클레스가 기원전 447∼432년에 건립한 유명한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의 유적이 있다.
파르테논은 ‘처녀가 머무는 집’이란 뜻으로 이 신전은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 여신을 위해 건립되었다.
폭이 30.8m이고, 길이가 69.5m이며, 높이가 10.4m인데 도리아 양식의 석주가 46개 세워졌다.
신전의 어느 부분도 직선을 이루지 않는 것이 이 건물의 아름다움이다.
모든 부분들이 완만한 곡선으로 되어 있어 신전을 방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이 아름다운 신전을 터키군이 탄약 창고로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그리스군이 차마 신전을 폭파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네치아 군대가 쏜 대포가 신전에 떨어져 사흘 동안 화재가 일어난 적이 있다고 한다.
유네스코(UNESCO)는 파르테논 신전을 인류문화재 제 1호로 지정했다.

신전 옆에는 서기 130년에 건립한 아티크오데온 극장이 있는데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파르테논 신전에서 내려오면 언덕에 소크라테스가 갇혔던 감옥이 있는 것을 보며, ‘친구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필로파푸 언덕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아레스 신의 언덕’이라는 뜻의 아레오파구스(Areopagus) 광장을 만난다.
기원전 683년부터 매년 귀족 명문가에서 아홉 명의 집정관 아르곤(Archon)이 선출되었다.
아르곤은 임기 일 년을 마친 후 종신 원로원의 회원이 되는데 아레오파구스에 모여서 회의를 했다고 해서 원로원을 아레오파구스 회의라고도 불렀다.

바울로는 아레오파구스에서 이렇게 설교했다.

내가 아테네 시를 돌아다니며 여러분이 예배하는 곳을 살펴보았더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온 그분을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17:23】

오늘날 그리스 인구의 95%가 그리스도교인이며 5%가 이슬람교도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15세기 이후로 370년 동안 터키(투르크)의 박해를 받았지만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현재 아테네의 인구는 330만 명으로 그리스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의 수가 본토 인구보다 더 많아 1,200만 명에 이른다.
주산업은 해운업으로 세계에서 2위를 자랑하는데 보유하고 있는 선박의 수가 세계 3위이다.
국민 총수입 가운데 해양운수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60%이고 관광수입이 20%이며, 그 외는 교포들이 보내는 송금과 수출로 얻어지는 것이다.
주요 생산품으로는 올리브유, 포도주, 도자기 등이 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어 병원은 누구에게나 무료이며, 교육은 대학졸업 때까지 무료이고, 은퇴한 후에는 누구나 연금을 받는다.

아테네의 결혼풍습은 특이하여 신부는 집도 장만하고 가재도구도 마련해야 하는 반면, 신랑은 침대 하나만 가지고 오면 된다.
그래서 여권이 아주 강하며, 딸을 낳으면 부모는 딸의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하고 아들을 낳으면 그렇게 일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출산을 기피하여 매년 인구가 줄어드는 실정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오후 2시가 되면 문을 닫고 낮잠을 자며, 5시에 일어나 다시 문을 열고 장사를 계속한다.
몇 년 전 대통령이 낮잠을 자는 폐습을 없애려고 했지만 국민들의 항의시위에 못 이겨 그 만둔 적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올림픽 경기장으로 갔다. 1894년에 완공된 경기장은 6만 9,000개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원래 올림픽 경기장은 서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올림피아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겨졌다.
중세 로마 시대부터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올림픽 경기는 새 경기장에서1896년에 다시 시작되었다.
올림픽 월계관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신화가 전해진다.
아폴론은 다프네라는 처녀를 짝사랑했는데 아폴론이 그녀를 포옹하려고 하자 다프네는 월계수로 변해버렸다.
아폴론은 슬퍼하면서 월계수를 성수(聖樹)로 삼아 나뭇가지로 월계관을 만들어 영웅, 시인, 승리한 경기자에게 씌워주었다.
월계수는 올리브 나무를 말한다.

우리는 대통령 관저를 지나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아테네 대학을 방문했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학건물 전면 회랑 벽에는 이 도시의 역사가 벽화로 서술되어 있다.
아테네의 영화를 기록한 벽화의 마지막 부분에 사도 바울로가 설교하는 모습이 있다.
아테네에서의 바울로의 전도가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가 뿌린 복음은 열매를 맺어 아테네는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의 중심이 되었다.
캠퍼스 본관 건물 삼각형 지붕 위에는 제우스가 있고, 오른쪽에 아테나 여신이 있으며, 왼쪽에는 아폴론이 우아한 모습으로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아래에는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석상이 순서대로 세워져 있다.
소크라테스는 턱을 손으로 받치고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포즈인데, 그는 생전에 추운 겨울에도 눈 위에서 한나절을 명상에 잠긴 적이 있었으며, 길을 가다가도 우뚝 서서 오랫동안 명상에 잠기곤 했다고 한다.
아테네 대학이 곧 고대 그리스 학문의 메카이자 예술의 전당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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