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카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 데살로니카(Thessalonica)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 이름에서 따온 지명으로 기원전 315년에 건설되었다.
기원전 323년 여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서른두 살의 나이에 열병으로 사망하자 부하 장군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쟁탈전이 벌어졌다.
카산드로스(Cassandros) 장군이 권력을 잡게 되었는데 카산드로스의 아내가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이복동생 데살로니카였다.
카산드로스는 왕위에 오르자 자신에게 저항했던 알렉산드로스의 계모 올림피아 대비를 죽였을 뿐 아니라 후환을 없애기 위해알렉산드로스의 부인 록사나 왕비와 그의 아들까지 모두 죽였다.
민심이 그에게서 떠나자 카산드로스는 수습책의 하나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아내의 이름을 따서 데살로니카라고 불렀다.

해변가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기마상이 서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뛰어난 천재였으며 시대의 풍운아였다.
그는 권력보다는 최고의 지식에 의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나는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았지만 스승으로부터는 보람 있는 인생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보면 마케도니아 군대는 보병 3만 명에 기병이 4천 명(혹은 보병이 4만 명, 기병이 5천 명)이었고, 페르시아 군대는 60만 명으로 어떤 때는 백만 대군이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널 때 페르시아군의 절반이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 합류해서 페르시아군과 싸웠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의 모친과 부인 그리고 두 딸을 포로로 잡았지만 그들을 왕족으로 예우하고 모든 소유물이나 명예를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왕비와 두 딸이 절세미인이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녀들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리우스 왕은 전투에서 부상당하고 숨을 거두려는 순간에 마케도니아 장교에게 물을 달라고 청했다.
장교가 물을 한 그릇 건네주니 받아 마신 후 이렇게 말했다.
“용사여, 그대의 은혜를 갚지 못하고 저승으로 가는 것이 내 일생의 가장 큰 불행이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그대를 표창할 것이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내 모친과 처자를 후히 대해주신 은혜는 신이 갚아줄 것이오.”
다리우스 왕은 장교의 손을 잡고서 이런 말을 덧붙이고 눈을 감았다.
“내 대신 알렉산드로스의 손을 이렇게 잡아주시오.”

곧이어 도착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장교로부터 다리우스의 말을 전해 듣고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다리우스 왕은 적장이었지만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왕의 유해를 왕의 유해답게 정중하게 그의 모친에게 보내고 왕자를 가까운 신하로 삼았다.
적과 적 사이에 얽힌 이 인정 어린 미담은 후세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인도주의의 교훈이 되었다.

점령지역에 그리스 문화를 심어 세계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서 동양과 서양이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이루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점령지 군인들을 그리스-마케도니아 군대에 편입시켰고, 포로들을 해방시켜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며, 외국 여인들을 자신의 부하들과 결혼하게 했다.
그는 가는 곳곳마다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의 생활은 검소하고 절제 있었으며, 결혼한 아내 외에는 다른 여자를 범하지 않았다.
적에 대한 승리보다도 자기를 이기는 것이 왕 된 소임이라고 생각한 그를 훗날 로마 젊은이들이 신격화하며 숭배했다.

데살로니카는 에게해로 진출하는 마케도니아 지역의 가장 큰 항구도시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가 브루투스-카시우스와 싸웠을 때 데살로니카는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의 편에 섰다.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가 승리하자 데살로니카는 기원전 42년에 자유시가 되었고 인구 230만 명으로 그리스 세계에서 아테네 다음가는 큰 항구도시였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정치적 중심지였으며, 그 후 비잔틴 시대에도 콘스탄티노플에 버금가는 도시로 명성을 떨쳤다.

지금의 카발라(당시 네아폴리스) 항구를 통해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온 바울로는 필립비에서 전도활동을 마친 후 데살로니카로 발길을 옮겼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펴온 바울로가 데살로니카를 다음 목적지로 삼은 것은 당연했다.

데살로니카 교회는 바울로가 2차 전도여행에서 세운 교회였다.
바울로는 고린토에 18개월 동안 거주하면서 데살로니카 교회에 두 편의 서신을 써서 보냈는데 그것이 데살로니카 전서와 후서이다.
그가 데살로니카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낸 것은 교회가 핍박받는 가운데서도 주님께 충성하며 정신적 성숙에 대해 감사하기 위해서였다.
실라와 디모테오가 활동한 곳도 데살로니카 교회였던 것 같다.
그러나 데살로니카의 교우 가운데 야손이 폭도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일이 일어나자 바울로와 실라는 베레아를 거쳐 아테네로 피했다.

이것을 시기한 유다인들은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켜 도시를 혼란 속에 빠뜨렸다.
그리고 바울로 일행을 찾아 민중 앞에 끌어내려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바울로 일행을 찾지 못하게 되자 폭도들은 야손과 교우 몇 사람을 시 치안관들에게 끌고 가서 큰소리로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던 자들이 여기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런 자들을 야손이 자기 집에 맞아들였습니다. 그자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카이사르의 법령을 어기고 있습니다” 하고 떠들어댔다.
이 말을 듣고 무리들과 시 치안관들은 당황하였다.
그러나 시 치안관들은 야손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서 보석금을 받은 뒤에 그들을 놓아주었다. 【사도행전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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