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중심지: 아테네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헬레니즘 문명의 발원지인 아테네로 향하는 길은 일기가 계속 쾌청했다.
안내인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는 연중 300일 이상 해를 볼 수 있는 개인 날씨가 계속된다고 한다.
그리스 문화의 발상지인 아테네는 기원전 600년경부터 헬라(Hellas) 민족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였으며,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에는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을 배출했다.
예루살렘이 서양종교의 중심지라면 아테네는 서양지성의 중심지였다.
민주주의로도 유명한 아테네는 유리피데스와 소포클레스의 희곡이 원형극장에서 공연되는 예술의 도시이기도 했다.
아테네에는 세 가지 철학 학파가 형성되었는데 플라톤의 이상주의와 에피쿠로스의 향락주의 그리고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였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아테네가 처음 생겼을 때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 사이에 아테네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이 벌어졌다.
두 신은 누가 아테네에 유용한 선물을 제공할 수 있느냐로 승부를 걸었다.
아테나는 올리브기름을 내는 감람나무를 가져왔으며, 포세이돈은 바닷물처럼 짠물을 가지고 왔다.
아테나 여신이 이겼으므로 도시의 이름을 여신의 이름을 따서 아테네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아테나는 아테네의 수호신이 되었다.
아테나 여신은 제우스와 메데이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데이스가 아테나를 임신했을 때 사내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아버지를 살해할 것이라는 운명적인 신탁이 있었다.
제우스는 신탁이 두려워서 메데이스를 삼켜버렸다.
그러자 뱃속의 아이는 제우스의 머리로 올라와 그곳에서 자랐다.
두통이 나서 견딜 수가 없던 제우스는 아들 헤바이스토스에게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쪼개라고 명령했다.
헤바이스토스가 도끼로 아버지의 머리를 쪼개니 제우스의 머리에서 창과 방패로 무장한 기골이 장대한 아테나 여신이 태어났다.
아테나 여신은 ‘바라스 아테나’로 불리는 영원한 처녀인데, 시민들의 교육에 힘썼으며, 밭가는 일, 직조 일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학자들은 계시를 받기 위해서, 발명가는 영감을 얻으려고, 재판관은 명석함과 공평함을 고대하면서, 군인들은 전술을 연마하기 위해서 아테나 여신에게 기원했다.
올리브 나무(감람나무)는 아테나의 성목(聖木)이 되었으며 올빼미는 그녀의 성조(聖鳥)가 되었다.
아테네는 섬들에 에워싸인 천연 요항으로 페르시아 전쟁의 격전지로도 유명하다.
페르시아는 세 차례에 걸쳐 아테네를 침공했다.
1차 침공은 기원전 492년에 다리우스 왕이 대군을 이끌고 온 것이었는데 트라키아 해전에서 패하여 퇴각했다.
2년 후 페르시아는 육해군 2만 명과 전함 600척을 동원하여 2차 침공을 시도했다.
그리스는 불과 1만 명의 군인만으로 그들과 싸워야 했지만 아테네의 명장 밀티아데스(Miltiades)가 마라톤 평야에서 페르시아군을 무찔러 대승을 거두었다.
이 마라톤 전쟁에서 페르시아 군인 6,400명이 사살되었으며, 그리스 군인은 192명이 전사했을 뿐이었다.
승전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한 병사가 42km의 길을 달려와 사령관에게 보고했는데 얼마나 전력을 다해 달려왔던지 보고를 마치자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병사의 정신을 기려서 올림픽에 마라톤 종목이 생기게 되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사망하자 기원전 480년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전함 1,200척을 동원하여 다시 아테네로 진격한 것이 3차 침공이었다.
그리스 군대는 고작 아테네 전함 200척과 연합군 전함 300척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테네의 명장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의 뛰어난 전략으로 페르시아 해군은 아덴 만 살라미스 해협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데미스토클레스 장군은 수년 전부터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하여 견고한 전함 200척을 건조하고 침공을 격퇴할 준비를 해두었던 것이었다.
전함은 바닥이 넓고 앞머리에는 쇠로 충각(衝角)을 부착한 장갑선으로 빠른 속력으로 페르시아의 전함에 다가가 충돌하면 적의 전함은 침몰할 수밖에 없었다.
에게해를 건너온 페르시아 전함들은 공격을 목표로 속력에만 치중했으므로 배의 바닥이 좁아 쓰러지기가 쉬웠다.
그리스 전함들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페르시아 전함들을 유인한 후 조수를 이용했는데, 적의 전함들은 비좁은 해협에서 서로 충돌하여 파선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싸움은 이순신 장군의 지략을 떠올리게 한다.
임진왜란 때 명량해협에서 장군이 불과 13척의 거북선으로 일본의 전함 200여 척을 보기 좋게 격파한 일이 살라미스 해협에서도 일어났던 것이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관해서 헤로도토스는 《역사》에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리스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페르시아인>에는 데미스토클레스가 자신의 노예를 페르시아 군대에 간첩으로 보내 살라미스의 비좁은 해협으로 페르시아의 전함들을 유도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데미스토클레스는 유능한 정치가이자 용맹한 군인이었지만 오만하고 부패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전쟁이 끝난 후 시민들에 의해 아덴에서 추방된 그는 대담하게도 적국 페르시아 왕에게로 가서 그의 보호를 받으며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