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까지 미술에 의욕을 보이는 아이들은

『아동 미술치료 Child Art Therapy』, 주디스 아론 루빈(2010, 출판사 知와 사랑) 중에서

『아동 미술치료』의 저자 주디스 아론 루빈의 아동 미술 발달을 아홉 가지 단계들 가운데 조작manipulating(1-2세), 형성forming(2-3세), 명명naming(3-4세), 표상representing(4-6세), 통합consolidating(6-9세), 친숙화naturalizing(9-12세) 단계들을 거치면, 일곱 번째가 되는 개인화personalizing 단계에 들어선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사춘기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친숙화 단계를 밟는다.
이 기간 동안 충분한 지도편달을 받고, 노력한 성과를 거둔 아이는 어떤 도구가 주이지든 자연스럽게 원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솜씨를 갖추게 된다.
또 친숙화 단계를 제대로 거치지 못했다 해도 미적인 감각이 뛰어난 아이는 추상적 작업이나 비회화적 재료를 통한 창의적 활동을 선호하게 된다.
예컨대 운동신경이 발달한 아이는 공예품 등의 실용적인 작품 만들기 등에 열중하는 경우도 있다.

사춘기까지 미술에 의욕을 보이는 아이들은 의도적으로 작품을 개인화함으로써 사춘기에 겪게 되는 여러 문제들을 극복하고자 시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미술을 이용하는 것이다.
주된 관심이 무엇이든, 십대는 스스로의 내면과 외부세상을 바라보는 개인적인 관점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만의 특정 도구나 주제를 찾는 경향이 있다.

작품의 질에 대한 자기비판과 걱정이 증가하면서, 십대들은 사실적 표현뿐 아니라 심미적인 목표에도 초점을 맞추게 된다.
십대들의 작품은 단순할 수도 복잡할 수도, 화려할 수도 황량할 수도, 구성적일 수도 비구상적일 수도 있다.
이토록 다양해 보이는 십대들의 미술 활동을 아우르는 특징으로는 작품의 질에 대한 신중한 태도와 자의식을 들 수 있다.
그들의 작업방식이 자유로운 편인지 아닌지와 관계없이,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고 계획적으로 미술 활동에 임한다.
이는 자각하지 않은 채 자연스레 미술에 열중했던 어린 시절과 대조된다.

사춘기 아이에게 세상과 관련된 걱정이나 관심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미술 활동의 주제에도 그러한 자기중심성이 반영된다.
누구를 그리든, 어떤 재료를 선택하든 상관없이 사춘기 아니는 기본적으로 자기 동조적인 주제와 방식을 찾는다.
개인화 단계는 사춘기 전반에 걸쳐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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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디스 교회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하느님의 일곱 영신과 일곱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네가 살아 있다는 말이 있지만 실상 너는 죽었다.
그러므로 깨어나거라.
너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완전히 숨지기 전에 힘을 북돋아주어라.
나는 네가 하는 일이 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요한 묵시록 3:1-2】

위에 인용한 글은 요한이 ‘사르디스 교회’에 보낸 편지 내용이다.
사르디스(Sardis)는 리디아(Lydia) 왕국의 수도였다.
사르디스 산성은 기원전 12세기에 건설된 난공불락의 성채로서 450m의 높은 산에 세워졌는데 산이 무너져 지금은 잔해만 남아 있다.
관광도로가 만들어져 있지 않아 산을 오를 수가 없다.
기원전 6세기에 사르디스는 아주 부강한 도시였다.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리디아 왕국의 마지막 왕 크로이수스(Croesus)가 지금의 터키 서부지역을 통치했다.
고레스(Cyrus, 사이러스 또는 큐로스로 발음한다) 왕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석방한 왕이며 사르디스로부터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까지 3,000km를 대리석으로 포장한 도로를 만들기도 했다.

리디아 왕국 때 사르디스 성은 아래 평야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성벽을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았는데 남아 있는 본래의 성벽에 최근 미국 대학생 팀이 와서 중수했다.
성 안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단순한 도리아 양식, 둥근 이오니아 양식, 그리고 둥글둥글한 코린트 양식의 돌기둥들이 섞여 건립되었고, 어떤 기둥들은 맷돌처럼 포개어 세워졌는데 기둥의 둘레가 여섯 아름들이 굵기이다.
기둥 가운데에 구멍을 뚫었고, 세운 후에 납 물을 끓여 부어서 고정시켰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에 건축된 아르테미스 신전을 비잔틴 시대에 개조하여 교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사르디스의 수호신은 시벨리(Cybele)였는데, 사람들은 시벨리 신에게는 죽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요한이 사르디스의 수호신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은 신실한 몇 사람을 칭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하얀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승리하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며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결코 지워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요한 묵시록 3:4-5】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바빌론을 정복한 후 그곳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석방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을 복구하고 성전을 재건할 야훼의 목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에 관한 기록이 성서에 있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 제일 년이었다.
야훼께서는 일찍이 예레미야를 시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래서 고레스는 아래와 같은 칙령을 내리고 그것을 적은 칙서를 전국에 돌렸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칙령이다.
하늘을 내신 하느님 야훼께서는 세상 모든 나라를 나에게 맡기셨다.
그리고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지워주셨다.
그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가운데 있는 당신의 모든 백성과 함께하시기를 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돌아가라.” 【역대기하 36:22-23】

(하느님께서) 나는 고레스에게 명령한다.
‘너는 내 양을 쳐라.’
그는 내 뜻을 받들어 이루리라.
‘너는 예루살렘을 재건하여라.
성전의 기초를 놓아라.’ 【이사야 44:28】

역사의 할아버지라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는 저서 《역사》의 서두에 ‘인생의 행복이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느냐’에 있다고 하면서 리디아의 왕 크로이수스와 그리스의 현인 솔론(Solon)과의 대화를 소개했다.

크로이수스 왕은 부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당시 아테네의 현인 솔론이 사르디스를 방문하자 왕은 솔론을 귀빈으로 대접하고 신하에게 명하여 그를 보물창고로 안내하여 많은 보물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왕은 솔론에게 물었다.

“아테네의 손님이여, 그대는 대단히 지혜로운 자로 식견이 높고 여러 나라를 편력한 것으로 아는데 당신이 만난 사람들 가운데 누가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
“아테네의 데로스일 것입니다.”
“어째서 귀하는 그가 가장 행복하다고 판단했는가?”
“우선 그는 좋은 나라에서 태어났고, 미목이 수려한 아들들을 두었으며, 손자들이 건강하게 자랄 때까지 장수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은 아테네가 이웃나라와 싸우게 되어 위기에 처했을 때인데, 그는 아군을 이끌고 나아가 적군을 물리치고 훌륭하게 전사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를 국민장으로 장사지내고 그에게 최고의 명예를 주었습니다.”

솔론의 말을 듣자 크로이수스 왕은 마음이 상했지만 다음번에는 자기를 지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물었다.
“다음은 누구인가?”
“아르고스의 크레오피스와 비톤입니다.
두 형제는 생활도 부유하고 체력도 건강하여 올림픽 경기에서 매번 입상을 했습니다.
어느 날 아르고스에서 헤라 여신의 축제가 있었는데 형제의 모친은 헤라의 무녀로서 우마차로 시간에 맞추어 축제에 당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소가 들에서 돌아오지 않아 두 형제는 각각 멍에를 등에 메고 소를 대신해서 모친이 탄 마차를 끌고 먼 길을 달려 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두 형제의 행동은 참배객들로부터 찬양을 받았고, 그러한 아들들을 둔 어머니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도 기쁨에 넘쳐 헤라 여신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아들의 축복을 기원했습니다.
그녀의 기도가 끝나고 향연이 벌어졌는데 두 형제는 신전 앞에서 잠들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아르고스 사람들은 두 형제의 석상을 조각하여 델포이 신전에 봉납했습니다.”

크로이수스 왕은 화가 나서 솔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테네의 길손이여, 그러면 나의 행복은 어찌된 것인가?
귀하에게 무시당해서 서민 취급도 받지 못하는 나의 행복은?”
“오오! 크로이수스여, 나는 당신이 부자인 것도 알고 왕이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존경하기 때문에 당신이 행복하게 세상을 마치셨다는 말을 듣기까지는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부자처럼 행복에서 멀리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은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즐겨 찾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부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훨씬 행복합니다.
임금님! 나의 생각으로는 최후까지 훌륭하게 살다가 훌륭하게 죽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로이수스 왕은 솔론의 말을 듣고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쫓아 보냈다.
솔론이 떠나고 얼마 후부터 크로이수스 왕에 대한 신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벙어리였으며 또 다른 아들은 사냥에 나갔다가 한 신하가 멧돼지를 향해 던진 창에 맞아 죽은 것이다.
이어서 페르시아 군대가 쳐들어와서 사르디스는 점령당했으며 결국 리디아 왕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크로이수스 왕은 체포되었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크로이수스 왕을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크로이수스 왕은 지난날 솔론이 사람은 살아 있는 한 행복할 수 없다고 한 말이 생각나서 긴 한숨을 쉬면서 큰소리로 “솔론! 솔론! 솔론!” 하고 세 번 되풀이하여 불렀다.

고레스 왕은 통역에게 그가 부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느냐고 물었다.
크로이수스 왕은 전에 솔론이 했던 말을 고레스 왕에게 고하고 그의 예언이 적중한 것과 그의 말이 자기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라고 말했다.
고레스 왕은 크로이수스 왕의 말을 듣고 자기도 사람인 이상 그러한 무상한 운명을 피하지 못하리라는 것과 지금 자기 눈앞에서 화형에 처해질 사내도 어제까지는 자기와 같은 한 나라의 왕이었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병사들에게 불을 끄라고 명령한 후 크로이수스 왕을 살려주었다.

그 후 크로이수스 왕은 고레스 왕의 훌륭한 조언자가 되었으며, 솔론은 단 한 번의 말로 두 왕 가운데 한 왕의 생명을 구하고 한 왕을 교육시킨 셈이 되어 명성이 높아졌다.
몇 백 년 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레스 왕의 무덤 앞을 지나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대가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올 것인지를 나는 알고 있다.
나는 페르시아를 지배했던 고레스다.
나의 몸을 덮은 얼마 안 되는 흙을 빼앗지 말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묘비명을 그리스어로 새겨 넣도록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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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르나 교회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네가 장차 당할 고통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기 위하여 너희 중 몇 사람을 감옥에 가두려 하고 있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월계관을 너에게 씌워주겠다. 【요한 묵시록 2:10】

밧모 섬에 유배된 요한은 계시를 받아 소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썼는데 위의 내용은 스미르나(Smrna) 교회에 보내는 말씀이다.

이스탄불로부터 스미르나까지 육로로 600km지만 직선거리는 그 절반가량밖에 안 된다.
스미르나는 지금의 이즈미르(Izmir)를 말한다. 약 600년 동안 터키를 지배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에 스미르나는 유럽의 여러 나라와 교역을 해온 투르크의 유일한 국제무역항이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몰락하고 공화정이 집권하면서 도시 이름이 이즈미르로 바뀌었다.
인구 300만 명의 이즈미르는 이스탄불에 이어 터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나토(NATO) 사령부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스 최대의 서사시인 호메로스(Homeros)의 고향으로 알려진 스미르나는 기원전 12세기에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도시였다.
기원전 688년에 이오니아인들이 스미르나를 점령한 후로는 리디아와 서방 간의 무역중심지가 되었다.
기원전 600년경 외적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가 기원전 320년대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주둔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스미르나 근처 파커스 산(지금의 카디페칼레 산)에서 사냥을 다녀온 후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네메시스 여신이 나타나 스미르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라고 말하는 꿈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여신의 분부를 받아들여 파커스 산에 거대한 규모로 성채를 지었으며, 산 아래 해안지역에는 그리스 양식의 대도시 스미르나를 건설했다.

기원전 20년대에 스미르나의 새 주인으로 로마 제국이 등장한 후, 대형 시장 아고라가 건립되고 2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 양식의 원형극장과 운동경기장, 체육관이 건립되는 등 스미르나는 더욱 발전되었다.
로마 사람들이 즐기는 공중목욕탕도 건립되었다.
그러나 170년대에 큰 지진이 일어나 스미르나는 크게 파손되고 말았다.
그때 스미르나의 웅변가 아리스티데스(Aristides)는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스미르나의 재건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는데 황제가 아리스티데스의 명문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폴리캅 교회로 갔다.
스미르나의 초대교회는 유다인 개종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초대 주교는 요한의 제자 폴리캅(Policarp)이었다.
폴리캅은 필라델피아 교인 열한 명과 함께 스미르나에서 화형당해 순교했다.

폴리캅 교회는 4세기에 건립되어 17세기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90년에 중수되었고, 19세기에개수되어 현재 가톨릭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안에 수도원도 있는 교회는 그리 크지 않으며 내부는 성서를 주제로 한 성화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폴리캅의 생애도 있다. 프랑스의 화가 레이몽 페레는 성화와 폴리캅의 생애를 그리면서 자신도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려 넣었다.

우리는 티아디라(Thyatira, 두아디라) 교회로 갔다.
요한이 책망하는 서신을 보낸 곳이다.

나는 네가 한 일들을 잘 알고 있고 네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네가 처음보다 나중에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있다.
그 여자는 예언자로 자처하며 내 종들을 잘못 가르쳐서 미혹하게 했고 음란한 짓을 하게 했으며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게 하였다.
나는 그 여자에게 뉘우칠 시간을 주었지만 그 여자는 자기의 음행을 뉘우치려고 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고통의 침상에 던지겠다.
그리고 그 여자와 간음하는 자들도 뉘우치지 않고 그와 같은 음란한 행위를 계속한다면 큰 환난 속에 던져버리겠다. 【요한 묵시록 2:19-22】

사도 바울로가 마케도니아의 필립비에서 만난 리디아는 티아디라 출신의 포목상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리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티아디라 출신으로 자색옷감 장수였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여자였다. 【사도행전 16:14】

티아디라 교회는 요한 묵시록에 언급된 일곱 교회 가운데 하나로 선행과 자비와 믿음과 인내로 칭찬은 받았지만 교인들 가운데 스스로 예언자로 자처하는 이세벨의 미혹케 하는 말을 따라 교인들이 간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었으므로 책망을 받았다.

티아디라는 “티아의 동네”라는 뜻으로 지금의 악히살(Akhisar)을 가리킨다.
티아디라는 소아시아 서쪽 루카스 강변에 있던 성으로 동남쪽의 사르디스와 서쪽의 베르가모를 잇는 길 사이에 위치해 있다.
리디아 왕국 때부터 베르가모, 비잔틴, 사르디스, 스미르나의 교차지로 상업도시였으며, 기원전 3세기에는 마케도니아의 식민지였다.
예로부터 직조, 염색, 모직물, 제혁, 철공으로 유명했다.
염색 가운데 특히 풀뿌리로 염색한 빨강색 천이 유명했는데 그것을 터키 레드라고 부른다.

지금 티아디라는 잔해만 남아 있다. 아폴론 신전과 그 옆에 티아디라 교회의 빈 터가 있다.
간판만이 그곳이 교회였음을 알려준다.
길드 조직이 잘 되어 있었던 상업도시로서 사람들이 아폴론 신전에서 제사를 드렸으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라는 책망을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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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가모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악히살에서 베르가모(Bergamo)로 가는 길은 소나무가 울창한 산길이다.
그곳에만 소나무가 많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산을 넘어서 약 한 시간 동안 차로 광막한 평야를 달렸는데 지하에서 물을 공급하는 농토가 펼쳐져 있다.
야산에는 양떼들이 보였고 소떼를 먹이는 목장도 군데군데 보였다.

성서에 나오는 베르가모는 지금은 베르가마(Bergama)로 불린다.
대도시였던 베르가모는 오늘날 인구 6만 명의 작은 동네로 변했다.
해안으로부터 25km 가량 골짜기로 들어간 언덕에 위치해 있다.
기원전 3세기와 1세기 사이에는 베르가모 왕국의 수도로서 베르가모 산 위에 아크로폴리스 왕궁과 신전들이 있었다.
그들은 화폐를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빈 터로 남아 있지만 베르가모의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큰 도서관이었다.
베르가모 도서관은 도서수집광이었던 유메네스 왕의 후원으로 규모가 커졌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베르가모 도서관이 자신들의 도서관보다 커지는 것을 막으려고 그곳으로 파피루스가 수출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파피루스에 글을 썼으며 이집트는 질 좋은 파피루스를 수출하고 있었다.
파피루스의 수입이 불가능해지자 베르가모 사람들은 대용할 만한 것을 발명했는데 그것이 양피지였다.
양의 가죽을 펴서 늘인 후 표백시켜 건조하면 훌륭한 필사재료가 되었다.
베르가모 사람들은 양피지를 그곳의 이름을 따서 “버르가메나(Pergamena)”라고 불렀다.
버르가메나는 라틴어로 그리고 영어‘Parchment’로 변형되어 양피지란 말이 되었다.

기원전 1세기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화재로 크게 손상되어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매우 상심했다.
여왕과 각별한 사이였던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베르가모 도서관의 장서를 알렉산드리아로 운반하여 클레오파트라 여왕을 기쁘게 했다.
베르가모 도서관에는 약 20만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베르가모 도서관은 19세기 독일인들에 의해서 베를린으로 이전되었다.

우리의 발길이 닿은 곳은 베르가몬 교회였다.
베르가모 교회에 서신으로 보낸 요한의 경고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네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너는 내 이름을 굳건히 믿고 있다.
또 나의 진실한 증인 안디바스가 사탄이 살고 있는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던 날에도 너는 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희 중에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발람은 발락을 사주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죄짓게 하였고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게 하였으며 음란한 짓을 하게 하였던 자다.
또 너희 중에도 니골라오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뉘우쳐라.
만일 뉘우치지 않으면 내가 속히 너에게 가서 내 입에서 나오는 칼을 가지고 그들과 싸우겠다. 【요한 묵시록 2:13-16】

베르가모에는 기원전 2세기경에 건축되었다고 하는 제우스 신전, 하드리아누스 황제 신전과 세라피스(이집트의 신) 신전이 있는데, 6세기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부터 교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건물들은 모두 잔해만 남았지만 벽돌 벽의 두께가 3m 가량 되는 규모였다.

에페소가 상업의 중심지였던 반면, 베르가모는 역대 왕들의 문화, 학술, 의학, 예술에 대한 후원으로 유명했다.
베르가모에는 의약의 신 아스클레피우스(Asklepius) 신전과 의학교가 있어 사방으로부터 병자와 예배자들이 모여들었다.
1960년대에 베르가모의 병원 아스클레피온이 발굴되었을 때 그 엄청난 규모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병원으로 들어가는 포장도로는 폭이 20m에 길이가 800m에 이르렀고 길 양쪽에는 15m 높이의 석주들이 세워져 있었다.
병원의 이름은 의약의 신 이름을 따서 아스클레피온이라고 불리었다.

아스클레피우스는 아폴론의 아들로서 아버지로부터 의술을 물려받았다.
그는 명의가 되어 죽은 사람도 살렸는데 그가 죽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살리고 죽을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쳤기 때문에 죽음의 나라의 왕인 하데스는 자기 나라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 분통을 터뜨렸다.
하데스는 제우스에게 아스클레피우스가 자기 영역을 침범하고 모든 신들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있다고 고소했고 제우스는 그것을 받아들여 벼락을 쳐서 아스클레피우스를 죽였다.
격노한 아폴론은 벼락을 제조하는 공장을 습격한 후 벼락을 만드는 기술자 큐크로프스를 죽이고 제우스에게 가서 아들의 입장을 변호했다.
제우스는 아스클레피우스를 도로 살려주었고 아폴론은 큐크로프스를 살려주어 다시 벼락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아스클레피온 병원은 기원전 4세기 이오니아 건축양식으로 건립되어 2세기에 증축되었다고 하는데 정문에서부터 대리석으로 포장된 길이 나있었다.
병원 구내에는 의학도서관을 비롯하여 치료실과 음악요법을 위한 야외 음악당이 있으며, 명상요법을 위한 기다란 통로와 목욕요법을 위한 진흙 목욕실 등도 있다.
돌기둥에 뱀의 형상이 있는데 그리스 신화에서 뱀은 의약의 신 아스클레피우스를 상징한다.
뱀이 껍질을 벗고 새 생명을 얻듯이, 아스클레피우스의 도움으로 사람들이 질병의 껍질을 벗고 새 생명을 얻는다는 데서 나온 상징이다.
2세기에는 베르가모에 해부학을 개척한 유명한 의사 갈렌(Galen)이 살았는데 그의 병리학 연구는 오늘날에도 의학서에 언급될 정도라고 한다.

베르가모는 손으로 짜는 카페트 산지로 유명하므로 우리는 카페트 공장에도 가보았다.
그들의 카페트 짜는 방법은 우리 조상들이 명주나 베를 짰던 것과 같은 방법이며 또한 우리 조상과 마찬가지로 풀뿌리와 잎을 염색원료로 사용했다.
그렇게 염색하여 얻은 색은 변하거나 퇴색하는 법이 없다.
그들은 100% 면이나 실크, 또는 혼방으로 짜는데, 한 사람이 하나를 제작하는 데에 크기에 따라 2년에서 4년이 걸린다고 한다.
카페트 생산은 주로 여자들이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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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 서사시의 무대: 트로이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트로이(Troy, 트로아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어드와 오디세이를 읽은 독자들에겐 친숙하며 성서에 “드로아”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리스도교인들에게도 친숙한 이름이다.
기원전 2000년부터 에게해를 무대로 동방문명과 서방문명의 중간적 성격을 띤 청동기 문명이 일어난 트로이를 크레타, 미케네와 함께 3대 문명의 발상지라 부른다.

트로이 문명의 존재는 19세기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90)의 발굴에 의해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슐리만은 어려서부터 호메로스의 트로이 전쟁에 관한 서사시는 공상적인 작품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사건들을 시로 쓴 것이라고 믿고, 성인이 된 후 유적을 발굴하여 실증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는 1870년에 트로이로 와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는데, 먼저 트로이 성지를 발견하고 이어서 미케네의 유적 발굴에 나서 미케네 문명의 존재도 확인했다.
그의 발굴은 세계인들에게 하나의 충격이었다.
슐리만의 발굴에 힘입어 곧 한 영국인이 크레타 문명의 유적도 발굴했다.

트로이 유적은 아홉 층의 성지가 퇴적된 것인데 트로이 전쟁은 7층의 성지(城趾) 때 일어난 듯하며, 트로이 성 함락은 기원전 1183년으로 짐작한다.
트로이 성 근처에 로마 시대에 건립되었다고 하는 아테나 신전의 잔해가 남아 있고, 성채 입구에는 최근에 제작된 트로이 목마의 모형이 세워져 있다.
목마는 높게 건립되어 꼭대기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목마 안 양편에 벤치가 놓여 있어 60명 정도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크다.

500m 고지에 위치한 성채에서는 서쪽으로 말마라해, 남쪽으로는 에게해가 보이고, 서쪽 말마라해 건너로 마케도니아가 보인다.
에게해의 섬들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트로이 전쟁 때 아마 그 섬들 뒤에 그리스 연합군이 숨어 있었을 거라고 안내인이 설명해주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트로이 전쟁의 원인으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한 사건을 꼽으면서, 그리스 연합군이 헬레네를 구출하기 위해 트로이 군대와 10년 동안 어리석은 전쟁을 벌였다고 썼다.
그리스 연합군은 아르고스의 왕 아가메논,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 최강의 용사 아킬레우스, 지장(智將) 오디세우스 등이 사령관을 맡았고, 트로이 측은 트로이의 왕 부리아모스, 무적을 자랑하는 제일 왕자 헥토르, 제이 왕자 파리스가 사령관이었다.

그리스 군대는 에게해를 건너 공격을 시작했고, 트로이 군대는 트로이 성을 방어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전쟁은 10년이 지나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무적을 자랑하는 트로이의 용장 헥토르는 매일 진중에 나와 싸움을 걸었는데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그리스 군대에 헥토르와 대적할 만한 최강의 용사 아킬레우스가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애인을 뺏어간 사령관 아가메논과의 불화로 인해 군령에 불복하고 막사에 칩거한 채 두문불출하였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메논의 독선을 비난하면서 명분이 없는 전쟁이라고 불평했다.

그리스군의 전사자 수는 매일 늘어갔다.
아킬레우스의 여러 친구들이 그의 출전을 권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 바돌로크로스는 아킬레우스에게 갑옷만 빌려주면 나아가서 헥토르와 대전하겠다고 말했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은 그의 어머니인 여신 데디스가 제우스의 아들이자 올림푸스의 철공의 명인 헤바이스투스에게 의뢰해 만들어준 것으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가장 완벽한 무구였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아끼는 갑옷과 투구를 바돌로크로스에게 내주었다.
바돌로크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빌려 입고 그의 창과 방패를 들고 전쟁터로 나아갔지만 헥토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바돌로크로스는 얼마 싸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으며 뿐만 아니라 아킬레우스가 생명처럼 아끼던 갑옷과 투구까지 빼앗겼다.
아킬레우스는 대단히 화가 났다. 가장 가까운 친구를 잃은 것만으로도 원통한데 하나밖에 없는 갑옷까지 빼앗겼으니 그는 이젠 전쟁의 명분보다도 우선 설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킬레우스는 바돌로크로스의 시체 앞에서 애도하며 조사를 읊었다.

친구여, 인간이란 얼마나 무정한가.
우리가 트로이를 함락시키고 무훈을 세워 개선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겠다고 부모님께 맹세했는데 자네가 먼저 쓰러지다니!
나도 자네의 뒤를 쫓으리라.
그 전에 너의 원수 헥토르를 쓰러뜨리고 그의 머리와 무구를 되찾기 전에는 자네의 장례식도 하지 않겠다.

아킬레우스는 어머니 데디스 여신에게 부탁하여 헤바이스투스로부터 새로 갑옷을 맞추어 입고 헥토르와 대전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갈 준비를 했다.
출전에 앞서 상심한 얼굴로 아킬레우스를 찾아온 총사령관 아가메논에게 그는 여태까지의 분쟁은 서로에게 근심만을 초래했을 뿐이니 지난날의 일은 모두 물에 흘려버리고 화해하자고 제안했다.
아가메논도 매우 기뻐하며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승리를 기원하였다.

천하무적을 자랑하는 두 용사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는 하루 종일 사자처럼 싸웠지만 싸움은 막상막하 끝나지 않았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를 당할 수 없음을 알고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려고 했는데, 아킬레우스가 비호같이 달려와서 그의 앞을 막고 창으로 헥토르의 목을 찔렀다.
헥토르는 쓰러지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승리를 자랑하는 아킬레우스여! 나의 시체를 나의 부모에게 돌려드리고 보상금을 받아라.”
“너의 부친 부리아모스가 황금을 산과 같이 쌓아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너의 시체를 부모에게 돌려보내지는 않으리라. 너의 시체는 독수리의 밥이 될 것이다.”
“아킬레우스여, 지금이야말로 너의 마음이 철통같음을 알았다. 그러나 신들의 노하심을 받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의 동생 파리스와 아폴론 신이 너를 쓰러뜨릴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여 설욕했지만 친구를 잃은 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헥토르에게서 피 묻은 무구를 벗기고 그의 시체를 전차에 매달고 전장을 몇 바퀴 돈 후 진중으로 달렸다.
아름답던 헥토르의 모습이 모래먼지와 피로 물든 진흙으로 뒤덮였다.
성벽 위에서 헥토르의 노부모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헥토르의 시체는 12일 동안이나 진중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

헥토르이 죽은 지 12일째 되던 날 아버지 부리아모스 왕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들을 죽인 원수 아킬레우스의 진영을 찾았다.
만류하는 신하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킬레우스에게도 늙으신 아버지가 계실 것이다. 그도 인간이 아니겠느냐.”
노왕은 아킬레우스 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자기 아들을 죽인 무서운 손이었다.
뜻밖에 나타난 노왕을 보자 아킬레우스는 당황했다.
부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에게 말했다.
“오오! 아킬레우스여, 그대의 부친을 생각해보시오.
그분도 나와 같이 늙으신 몸으로 가슴아파하시면서 아마도 고향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실 것이오.
그렇지만 그대가 살아 있음을 전해 들으면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행복해 하시겠지요.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 희망도 없구려.
많은 자식들이 전사했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헥토르마저 그대의 손에 쓰러지고 말았소.
지금 내가 온 것은 그대에게 아들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함이니 원컨대 나의 청을 들어주기 바라오.”

노왕의 말을 들은 아킬레우스는 그를 붙들고 함께 흐느껴 울었다.
노왕은 자신의 죽은 아들 헥토르를 생각하고 울었으며, 아킬레우스는 늙으신 부모와 죽은 친구 바돌로크로스를 생각하며 울었다.
아킬레우스는 노왕에게 말했다.
“부리아모스여, 나는 이미 나의 모친으로부터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라는 말씀을 듣고 벌써부터 그의 시신을 돌려보내려고 하던 참이었소.”

아킬레우스는 방에서 나와 시녀에게 명하여 헥토르의 시신을 목욕시키고 아름다운 옷을 입힌 후 시신을 어깨에 메고 나가 노왕의 마차에 실어주었다.
그리고는 노왕에게 만찬을 베풀어주었다.
노왕은 아킬레우스의 친절함에 슬픔도 잊고 그의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았다.
향연이 끝나자 아킬레우스는 노왕을 위하여 침실을 제공했고, 헥토르의 장례를 치루는 동안 휴전할 것을 약속했다.
노왕은 아킬레우스의 친절에 감사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노왕은 모두 잠든 후에 종복을 이끌고 아들의 시신을 싣고 아가이아 진영을 탈출했다.

아킬레우스는 온몸의 피부가 가죽처럼 단단하여 화살도 그를 상처 입힐 수 없었지만, 단 하나 발뒤꿈치에 약점이 있었다.
그의 약점을 안 파리스는 다음 전투에서 활을 당겨 아킬레우스의 발뒤꿈치를 쏘아 그를 쓰러뜨려버렸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인간의 약점을 가리켜 ‘아킬레우스의 건(腱)’이라고 하는 것이다.

트로이 군대는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최후의 전략은 지장 오디세우스가 고안한 트로이 목마였다.
그리스 군대는 나무로 말을 만들고 그 속에 특공대 300명을 넣어 트로이 성 밖에 놓고 병선을 타고 후퇴하여 근해의 섬 뒤에 숨었다.
트로이 군대는 그리스군이 후퇴하자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성 밖에는 목마가 있었고 목마에는 “아테나 여신에게”라는 문구가 씌어 있었다.

목마 앞에는 그리스의 낙오병 한 사람이 살려달라면서 울고 있었다.
트로이 병사가 그에게 연유를 물으니 자기가 어젯밤 해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뽑혀 바다에 던져졌는데 헤엄을 쳐서 다행히 살아났다고 했다.
트로이 병사들이 목마를 부숴버리려 하자 그리스 병사는 목마를 가로막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목마는 아테나 여신을 모신 것으로 만일 부순다면 아테나 여신으로부터 큰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트로이 병사들은 목마를 성 안에 끌어들여 잘 모시고 그날 밤 승전을 자축하는 향연을 열고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트로이 병사들이 만취하자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유격대원들이 밖으로 나와 성 안에 불을 놓았다.
불을 신호로 그리스 군대는 진격을 개시하여 트로이 성을 함락시켰다.
목마가 높아서 트로이 병사들은 성문을 헐고 목마를 안으로 끌어들였는데 그것도 성문을 헐기 위한 그리스의 술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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