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성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구약성서에서 ‘시온(지우온)’ 또는 ‘시온 산(하르 지우온)’이라고 하면 대개 예루살렘을 가리키던 것인데 비잔틴 시대에 와서 예루살렘의 남서쪽에 위치한 동산, 즉 힌놈 계곡과 티로포에온 계곡 사이의 하단부 고원지대를 가리키게 되었다.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곳에 다윗의 도시가 건설되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19세기에 고고학자들의 발굴을 통해서 다윗의 도시가 있던 자리는 예루살렘 남동쪽의 오벨 산, 티로포에온 계곡과 키드론 계곡 사이 하단부에 위치한 고원지대임이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남서쪽이 시온 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에 ‘기혼 샘’이 있는데 그 샘을 ‘동정녀 샘’이라고도 부른다.
예루살렘에서 유일한 천연샘이다.
기혼은 솔로몬 왕의 대관식이 거행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왕이 명령을 내렸다.
“그대들은 내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의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내려들 가시오.
거기에서 사독 사제와 나단 예언자는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시오.
그런 다음 나팔을 불며 ‘솔로몬 왕 만세’를 외치시오.
그리고 올 때에는 그를 모시고 따라오시오.
그가 와서 내 왕좌에 앉을 것이오.
나를 대신하여 왕이 되는 것이오.
내가 그를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치자로 임명하였소.” 【열왕기상 1:33-35】

기원전 8세기 히즈키야 왕은 아시리아의 왕 산헤립에게 위협을 느껴 ‘기혼 샘’에서부터 굴을 파서 수로를 만들고 그 물을 실로암 연못으로 끌어들였다.

기혼 샘 윗쪽 물줄기를 막고 땅을 뚫어 그 물을 감쪽같이 다윗 성 서쪽으로 해서 성 안으로 끌어들인 것도 바로 히즈키야였다.
히즈키야는 무슨 일을 하여도 뜻대로 되었다. 【역대기하 32:30】

히즈키야의 나머지 사적과 업적, 저수지를 파고 물길을 터서 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인 일에 관하여는 유다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열왕기하 20:20】

두 그룹의 일꾼들이 양끝에서 굴을 파 들어가기 시작하여 돌아서 물줄기를 만났다.
똑바로 뚫을 수 있었다면 335m만 파면되었겠지만 그렇지 못했으므로 533m나 파야했다.
그들은 벽에 물줄기를 끌어들인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것이 ‘실로암 비문’이다.
예수님께서 실로암에서 장님을 고치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이다.)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왔다. 【요한의 복음서 9: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거룩한 수난의 도시: 예루살렘
예루샬라임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예루샬라임’이라고 하는데 ‘평화의 도시’ 또는 ‘평화의 근원지’라는 뜻이다.
예루살렘에는 청동기 시대(기원전 4000년)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기원전 2500년대에는 셈족계의 아모리족이 와서 정착했으며, 기원전 2200년대에는 가나안족이 이주해왔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네 족보를 캐어보면 너는 가나안 출신이라, 네 아비는 아모리인이요 어미는 헷 여인이다.” 【에제키엘 16:3】

당시에는 예루살렘을 여부스라고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예루살렘은 원래 ‘살렘’이었다.
아브라함 시대에 멜기세덱이 살렘을 통치했다고 창세기에 나와 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을 맺은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오는데 소돔 왕이 왕의 골짜기라고도 불리는 사웨 골짜기까지 나와 그를 맞았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였다. 【창세기 14:17-18】

아브람(아브라함)이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치자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해주었는데 그곳이 예루살렘이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를 드리려던 모리아 산은 현재 예루살렘 성전 중심에 있는 바위로 된 제단이다.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거기(모리아 산)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놓은 다음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숫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숫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곳을 야훼 이레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주신다”고들 한다. 【창세기 22:9-14】

예루살렘에 유대인들이 정착하게 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 가운데 확률이 열의 하나인 제비에 뽑힌 사람들이 이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서 살게 되었다.
나머지 아홉은 지방 성읍들에서 살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살겠다고 자원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은 모두 칭찬을 받았다. 【느헤미야 11:1-2】

오늘날 예루살렘의 인구는 42만 명가량 되는데 30만 명이 유대인이고, 10만 명이 이슬람교도이며, 나머지 2만 명 정도는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대부분 동방 정교회 소속이다.
예루살렘은 지중해 연안에서 52km쯤 떨어진 해발 720∼750m의 고지에 위치하며, 기혼 샘을 제외하고는 샘물이라곤 없는 아주 메마른 땅에 자리하고 있다.
서쪽으로 힌놈(또는 게헨나) 계곡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키드론 계곡이 있다.
계곡들 사이에 티로포에온이라는 계곡이 있었는데 지금은 메워져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힌놈 계곡과 티로포에온 계곡 사이에는 시온 산과 갈바리아가, 티로포에온 계곡과 키드론 계곡 사이에는 오벨 산과 모리아 산이 자리한다.
그리고 키드론 계곡 동쪽으로는 올리브 산과 스코푸스 산이 위치하고 있다.

솔로몬 왕(재위 기원전 960∼926년) 시대에는 도시의 중심지가 오벨 산보다 좀더 북쪽인 모리아 산언덕으로 옮겨지고 계약의 궤를 모실 성전과 화려한 궁전, 그리고 튼튼한 성벽이 세워졌다(열왕기상 5-8장).

밀실은 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꾸며놓았는데 거기에 그는 야훼의 계약궤를 모셨다.
그 밀실은 길이 이십 척, 나비 이십 척, 높이 이십 척인데 순금으로 입혔다.
또 송백나무 제단도 만들었다. 솔로몬은 전의 안쪽을 순금으로 입혔고 밀실 앞쪽에는 사슬을 늘여놓았는데 그것도 금을 입힌 것이었다.
그는 전 전체를 금으로 입혔다. 밀실에 있는 제단도 금을 입혔다. 【열왕기상 6:19-22】

성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만군의 야훼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좋으신가!
야훼의 성전 뜰 안을 그리워하여
내 영혼이 애타다가 지치옵니다.
나의 마음 나의 이 몸이
살아계신 하느님께 기쁜 소리 지르옵니다. 【시편 84:1-2】

솔로몬 왕이 사망한 후 이스라엘은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갈라졌다(열왕기상 12장).
북왕국(이스라엘 왕국)은 세겜을 수도로 하여 여로보암(재위 기원전 926∼910년)이, 남왕국(유다 왕국)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여 르호보암(재위 기원전 926∼910년)이 통치하기 시작했다.
구약성서에 법궤에 대한 기록이 끊어졌는데 이집트 왕 시삭이 기원전 926년에 전리품으로 가져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르호보암 왕 제오 년에 이집트의 시삭 왕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야훼의 전과 왕궁의 모든 보물을 샅샅이 뒤져 모두 가져갔다.
그는 솔로몬이 만든 금방패를 포함하여 모든 값진 것을 가져갔다. 【열왕기상 14:25-26】

그래서 스룹바벨이 건립한 두 번째 성전과 헤로데 대왕이 건립한 세 번째 성전에는 법궤가 없다.

남왕국(유다 왕국)의 왕 히즈키야(재위 기원전 717∼698년)는 아시리아인들(산헤립 왕)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도시 성벽을 튼튼하게 보수했으며, 기혼 샘으로부터 실로암 못까지 길이가 거의 520m나 되는 거창한 수로를 만들었다.
그러나 므나쎄 왕(재위 기원전 697∼642년) 때에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었고, 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재위 기원전 605∼562년)가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을 정렴했을 때는 성전과 성벽이 파괴되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2차 바빌론 유수, 열왕기하 25장).
포로생활 50년 만에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유다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538∼515년에 성전과 성벽을 보수했다.
잠깐 동안의 평화스러운 시기는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침공하여 팔레스타인 전 지역이 헬레니즘과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기원전 323∼203년)에 포함됨으로써 끝이 났다.
기원전 168년에는 악명 높은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4세(재위 기원전 175∼164년)에 의해서 예루살렘 시가가 파괴되고 성전은 잡신들의 소굴로 변하고 말았다.
하스모니아 가문의 마카베오 형제들이 시리아에 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165년에는 독립을 이룰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침입으로 다시 속국이 되어버렸다.
이두매아 출신 헤로데 대왕은 로마 황제의 총애를 받아 유다의 왕에 등극하여 기원전 37년∼4년까지 예루살렘을 통치했다.
헤로데 대왕이 사망한 후 아들 안디바스(재위 기원전 4∼서기 37년)와 아그리파 1세(재위 37∼44년)를 거쳐 44년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로마의 행정권에 속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66년에 로마에 항거하는 독립전쟁을 벌였지만 로마의 티투스 황제에 의해 70년에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말았다.
바르코시바가 주도하여 로마에 대항한 두 번째 전쟁이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일어났지만 또다시 실패하였고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유다는 로마의 군사식민지로 더욱 악화되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 시가지는 유대인들이 얼씬도 못하게 되었으며 시가지에는 로마 신전과 광장들이 들어서 점차 로마 양식으로 변해갔다.
예루살렘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가족명인 엘리우스(Aelius)와 로마 수호신 카피톨리누스(Capitolinus)의 이름을 따서 ‘엘리야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 식민지로 명명되었다.
성전은 전쟁으로 파괴되었고 거의 같은 장소에 네 차례 건립되는 수난을 겪었다.

예루살렘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 지역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6∼337년)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325년 이후였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시가지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자취가 있는 유서 깊은 지역에는 교회가 세워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와 에우도키아 황후,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많은 교회들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614년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화려했던 비잔틴 시대는 막을 내렸다.
638년에 아랍인들이 예루살렘에 침입한 후로는 이슬람교도들의 도시로 변모하였다.
교회는 대부분 파괴되거나 아니면 사원이슬람으로 그 모습이 바뀌어버렸다.
칼리프 압드 엘 말릭(재위 685∼705년)은 예루살렘 성전이 자리했던 곳에 이슬람교 사원을 새로이 건립했고, 그때 이후로 오늘날까지 계속 이슬람교 대사원이 위풍을 드러내고 있다.

카이로 출신의 칼리프 엘 하킴은 예루살렘 내의 모든 교회를 파괴하도록 했으며 그리스도교인들을 혹독하게 박해했다.
예루살렘을 되찾은 것은 십자군 전쟁 때로 1099년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전 지역이 그리스도교인들의 활동지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90년 후인 1187년 살라딘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교도들의 활동지가 되어버렸고, 십자군은 1291년에 완전히 팔레스타인을 떠났다.
1516년부터 약 400년 동안은 터키계 이슬람교도들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전 지역을 통치하였다.

지금의 성전은 7세기에 이슬람교도들이 건립한 것이다.
성전은 해발 750m나 되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 성전보다 약 60m가 더 높은 올리브 산으로부터 넘어오는 아침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여덟 개의 성문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3대 종교, 즉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발상지인 예루살렘은 길이 4k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성내 면적은 30만 평에 불과하다.
성벽은 16세기 중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황제 슐레이만 1세가 축성했다.
성문은 모두 여덟 개로 북쪽에 문이 세 개 있는데, 새 문(New Gate), 다마스커스 문(세겜 문), 헤로데 문이다.
동쪽에는 스테판 문(사자문), 황금문(美門)이 있으며, 남쪽에 쓰레기 문(Dung Gate)과 시온 문이 있고, 서쪽에 요빠 문(헤브론 문)이 있다.

동쪽의 스테판 문은 스테판이 성문 밖에서 순교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마리아의 어머니 안네의 집이 이 성문 근처라고 해서 안네 문이라고도 한다.
1920년 영국 군인들이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원래의 문을 개조했다.
1967년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 문을 점령하여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한다.
역시 동쪽에 있는 황금문은 여자들이 출입했다는 문인데 금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베다니아로부터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이 문을 통과했으며, 민중들은 호산나라고 만세를 부르며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황금문이 6세기경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1530년에 투르크군이 문을 봉쇄했고, 1540년에 슐레이만이 성을 보수하면서 완전히 폐쇄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한 곳도 이곳이다.

베드로는 “나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 하며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사도행전 3:6-8】

남쪽의 쓰레기문은 히브리어로 ‘사아르 하아슈포트’라고 부르는데 예루살렘 시내의 모든 오물이 이 문을 통해 키드론 계곡과 티로포에온 계곡에 버려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약시대에는 그 문을 ‘게헤나(Gehenna)’라고 불렀는데 게헤나는 ‘Ge-Hinnom’에서 연유한 말로 ‘지옥’이란 뜻이다.
현재의 문은 요르단 사람들에 의해서 개조된 것이다.
1948년에 이스라엘 군대가 요빠 문을 봉쇄하자 성 안으로 자동차와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쓰레기문이 확장되었다.
남쪽에 있는 시온 문은 시온 산으로 통하는 문이라서 그렇게 부른다.
이 문을 통해 시온 산에 있는 다윗 왕의 무덤으로 갈 수 있다.

서쪽에 있는 요빠 문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요빠로 통하는 문이다.
히브리어로 ‘사아르 요빠’라고 부르고 아랍어로는 ‘바브 엘 카릴’이라고 부르는데 ‘하느님의 친구 문’이란 뜻이다.
엘 카릴(하느님의 친구)은 아브라함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 문은 또한 아브라함의 무덤이 위치한 헤브론과 통한다고 해서 ‘헤브론 문’이라고도 부른다.

북쪽에 있는 다마스커스 문은 다마스커스로 통하는 문이다.
새 문은 성 안팎의 교통을 위해 1889년에 새로 만들어졌으며, 헤로데 문은 헤로데 궁전 근처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는 스테판 문 근처에 있는 베짜타(베드자다) 연못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예수님 당시 연못물이 병을 낳게 한다고 해서 병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이 연못에서 예수님께서는 38년 간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치유하셨다.

얼마 뒤에 유다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예루살렘 양의 문 곁에는 히브리말로 베짜타라는 못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행각 다섯이 서있었다.
이 행각에는 소경과 절름발이와 중풍병자 등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는데(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삼십팔 년이나 앓고 있는 병자도 있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이 거기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아주 오래된 병자라는 것을 아시고는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병자는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 하시자 그 사람은 어느새 병이 나아서 요를 걷어들고 걸어갔다. 【요한의 복음서 5: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통곡의 벽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통곡의 벽(Wailing Wall)은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벽’이라고도 부른다.
70년 로마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11만 명이 사망하고 9만 명이 포로가 된 일이 있었다.
그때 마사다 요새는 집단자살로 최후를 맞았다.
당시 로마는 예루살렘 성을 전부 파괴하지 않고 일부를 남겨놓음으로써 승전국의 아량을 과시했다.
성벽 기초의 사분의 일 정도는 그때 로마가 남긴 것이고, 훗날 그 위에 성이 높게 쌓아졌다.

70년부터 로마는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을 방문하는 것을 금했다.
비잔틴 시대에 들어와서야 성전 파괴일에 한하여 매년 한 차례의 성전 방문이 허락되었다.
유대인들은 성전의 옛터를 찾아와서 통곡하고 슬퍼했으므로 남아 있는 성벽은 통곡의 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통곡의 벽은 높이 18m에 폭이 60m이다.
유대인들과 순례자들은 그곳에서 벽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도 그곳에서 기도를 드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라이토리온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로부터 십자가 처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한 보도내용은 약간씩 다르다.
같은 견해로 썼다고 해서 공관복음서라고 부르는 마태오, 마르코, 루가의 복음서는 장소에 대한 언급 없이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게 압송되었다고 적었다(마태오 27:1, 마르코 15:1, 루가 23:1).
요한은 총독 관저로 압송되었다고 기록했으며(요한 18:28), 마르코와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선고받으신 다음에 총독 관저로 들어가셨다고 기록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로부터 재판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갖은 모욕을 당하신 곳인 총독 관저란 과연 어디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리스어로 ‘프라이토리온’이라고 하는 총독 관저는 총독이 법률을 공포하거나 재판을 하는 곳이다.
총독이 법적인 처사를 이행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프라이토리온이 될 수 있다.
총독 관저가 어디였는지에 관해서는 세 가지 가설이 있는데 안토니아 성, 헤로데 궁전, 하스모니아 궁전이다.

안토니아 성은 예루살렘 대성전, 즉 지금의 회교 대사원 북서쪽 벽에 위치했던 성으로 ‘하나넬 탑’이 있던 곳이다.
느헤미야 시대에 하나니야가 재건한 적이 있었는데 기원전 167년 마카베오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기원전 31년 헤로데 대왕에 의해서 개조된 후로는 안토니아 성이라고 불리었다.
하지만 헤로데 대왕은 성에 거주하지는 않았고,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며 성전과 예루살렘 전 시가를 감시했다.
성은 66년 유다 전쟁 때 전소, 파괴되었으며 70년 티투스 황제에 의해서 자취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헤로데 궁전은 기원전 23년 헤로데 대왕이 건립한 궁전으로 오늘날 ‘다윗 시타델(다윗 망대)’이라고 부른다.
한때 하스모니아 궁전에 살았던 헤로데 대왕은 가족과 함께 이 궁전에서 살았다.
66년경 가이사리아에 살던 총독 플로루스가 예루살렘으로 와 헤로데 궁전에 머물면서 당시 폭동을 일으킨 유다 지도자들을 재판하기도 하고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도 헤로데 궁전에서 빌라도의 재판을 받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되었다.

하스모니아 궁전은 하스모니아 왕조(기원전 134∼37년) 때 건립되었다.
정확하게 그 위치를 알진 못하나 대략 예루살렘 대성전 서쪽 탈무드 학교가 있는 자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원전 37년 헤로데 대왕이 로마 황제에 의해 유다 왕으로 등위한 후 그때부터 기원전 23년까지 이 궁전에 거주했다.
한때 로마 총독이 헤로데 궁전과 안토니아 성과 함께 이곳을 거처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