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우리는 사해로 ‘내려갔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사해가 지중해보다 약 450m나 낮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해는 연중 기온변화가 별로 없이 고온이 계속되는 곳이다.
낮 기온은 섭씨 40도가 보통이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은 바다’이다.
갈릴래아 호수로부터 요르단 강을 타고 물이 그곳으로 흘러들지만 다른 곳으로 흘러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다.
요르단 강으로부터 매일 500만 톤 가량의 물이 들어오는데도 사해의 수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이유는 높은 기온으로 인해 계속 물이 증발하기 때문이다.
사해의 길이는 무려 75km이고 동서의 폭은 긴 곳이 18km이며, 둘레는 200km에 이르고 넓이는 950km2이다.

사해의 염도는 보통 바다에 비해서 7∼8배나 높기 때문에 요르단 강물을 따라 내려온 물고기들은 사해에 이르면 죽고 만다.
사해 남쪽의 염도는 더욱 높아 소금결정이 목화송이처럼 수면 위에 떠있다.
소금이 바다를 덮은 것처럼 장관을 이룬다.
근래에 갈릴래아 호수 물과 요르단 강물을 농지로 끌어대기 때문에 사해로 들어오는 수량이 줄고 있으며, 사해의 물이 점차 말라감에 따라 사해의 면적이 줄어들고 있어 생태학자들이 주목하고 있다.
물이 마른 벌판에 소금기둥이 군데군데 서있는 것이 눈에 띈다.

우리는 온천으로 갔는데 사해의 물을 끓여서 사용하고 있는 온천물은 질병을 치료하는 데 효험이 있다고 한다.
욕조에 들어가니 염분이 많아서 몸이 둥둥 뜬다.
사해의 물은 뿌옇고 비눗물처럼 미끈거린다.
그 물을 그릇에 담아 수분을 증발시키면 그릇에 남는 잔류물이 물의 4분의 1이나 된다고 한다.
잔류물은 소금뿐 아니라 각종 광물질, 즉 칼슘, 포타시움, 마그네슘, 유황, 브로마인 등이다.
‘브로마인(Bromine)’의 경우 전세계 소비량의 26%를 사해에서 공급한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향후 일천 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브로마인이 사해에 녹아 있다고 한다.
사해는 그러니까 죽은 바다가 아니라 보물창고인 셈이다.
사해의 바닥 층은 대단히 고운 검정색 진흙인데 몸에 바른 후 물로 씻으면 피부에 특효라고 해서 우리는 진흙을 몸에 발랐더니 모두 흑인처럼 보였다.
사해 지역의 공기는 다른 지역에 비해 산소가 10% 더 많아 호흡기에도 좋다.

우리들은 사해 서안의 절벽에 위치한 엔게디(Engedi)로 갔다.
엔게디는 ‘염소 새끼 우물’이란 뜻이다.
그곳은 샘물이 폭포수같이 솟아나는 오아시스로 그 물을 관개하여 집단농장(키부츠)에서 사용한다.
절벽 여기저기에 있는 동굴은 한때 다윗이 이스라엘 최초의 왕 사울을 피했던 곳이다.

다윗은 거기에서 떠나 엔게디 근방의 험준한 곳에 올라가 머물렀다.
사울은 불레셋 군을 쫓아낸 다음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온 이스라엘에서 뽑은 삼천 명을 이끌고 다윗 일당을 찾아 들염소 바위 동편으로 갔다. 【사무엘상 24: 1-3】

사울 왕이 뒤를 보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을 때 다윗은 그를 죽일 수 있었지만 사울 왕이 양심에 가책을 느끼도록 사울 왕의 겉옷자락만 잘라냈다.
사울 왕이 밖으로 나오자 다윗은 뒤따라 나와서 사울 왕에게 절을 한 후 이렇게 항의했다.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다윗이 왕을 해치려 한다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곧이들으십니까?
보십시오.
오늘 야훼께서는 분명히 동굴에 들어오신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성별해 세우신 저의 상전을 어떻게 감히 손을 대랴 하며 임금님을 아끼는 마음에서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버님, 보십시오.
여기 제 손에 임금님의 겉옷자락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겉옷자락만 자르고 임금님께 칼은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내가 임금님을 해치거나 반역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주셔야 하겠습니다.
내가 임금님께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임금님께서는 나를 잡아 죽이려고 쫓아다니시니 어찌 된 일이십니까?” 【사무엘상 24:10-12】

엔게디 남쪽에는 사람이 오르기 어려운 가파른 동굴이 여럿 있는데 그 동굴들을 쿰란(Qumran) 동굴이라고 부른다.
그 가운데 한 곳에서 1947년 <사해사본 Deadsea Scrolls>이 발견되었다.
양을 치던 베두인족 소년 목동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목동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동굴까지 왔다가 동굴에 양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동굴을 향해 돌을 던졌다.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 동굴 안으로 들어간 목동은 뜻밖에도 깨진 항아리에 들어 있던 <사해사본> 두루마리를 발견하였다.
소년은 그것을 베들레헴으로 가지고 가서 아랍 상인에게 헐값에 팔았다.

그해 11월 23일 아침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고고학 교수 수케닉(Sukenik)은 구예루살렘에 사는 아랍 골동품 상인으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아랍 상인은 사해 부근 동굴에서 베두인족 소년이 세 개의 양피지 두루마리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당시 이스라엘이 독립하기 전이었으므로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적대감이 많을 때였다.
이스라엘 지하군대 총사령관 야딘(Yadin) 장군이 수케닉 교수의 아들이었는데 야딘 또한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아버지가 아랍 상인을 만나는 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수케닉 교수는 다음날 새벽 베들레헴으로 가서 세 개의 두루마리를 사는 데 성공했다.
고고학계와 기독교계를 놀라게 한 <사해사본>은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20세기 성서고고학계의 최대의 성과였다.
수케닉 교수가 그것들을 손에 넣은 지 꼭 두 달 후 그는 다시 전화를 받았는데 이번엔 네 개의 두루마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전화였다.
수케닉 교수는 그를 만나 그것들이 <사해사본>임을 확인했지만 어떤 연유인지 그 사람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1953년에 수케닉 교수는 타계했다.

네 개의 <사해사본>을 갖고 있던 사람은 시리아 정교회의 사무엘 대주교였다.
그는 그것들의 값어치를 알아보고자 수케닉 교수를 속이고 상인을 내세워 감정을 받았던 것이다.
사무엘 대주교는 비싼 값에 팔려고 그것들을 미국으로 가지고 갔지만 그가 수백만 달러를 요구하는 바람에 1954년까지는 매매되지 못했다.

군사령관 직을 은퇴한 야딘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고학자가 되었다.
1954년 학술강연 차 미국을 방문한 그는 네 개의 <사해사본>이 아직 매매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야딘은 극비리에 이스라엘 정부에 연락을 했고, 정부의 보증을 받아 흥정 끝에 그것들을 25만 달러에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야딘은 1967년에는 여덟 번째의 <사해사본>도 구입하였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해사본 박물관 ‘책의 전당(Shrine of the Book)’에서 수케닉과 야딘 부자가 노력하여 구입한 여덟 개의 <사해사본>을 직접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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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쿰란 동굴을 지나 왼쪽에 사해를 끼고 남쪽으로 약 30km를 내려오면 엔게디 오아시스가 있다.
그곳에서 약 20km를 더 가면 오른쪽에 우뚝 서있는 언덕을 발견하게 되는데, 타원형 원통을 중간에 잘라놓은 듯한 모양의 그 언덕이 바로 마사다(Massada)이다.
거의 절벽에 가까운 언덕의 높이는 사해 해수면에서 410m이다.
산머리는 길이 약 600m에 중앙의 폭이 약 320m이다. 천연요새인 것이다.

일찍이 알렉산데르 얀네우스 왕(기원전 103∼76년)이 동쪽 국경을 방어할 목적으로 이 천연요새에 진지를 구축했다.
헤로데 대왕(재위 기원전 37∼4년)은 기원전 43년 아버지 안티파터가 암살되고 나서부터 37년 로마 황제에 의해 유다의 왕으로 임명될 때까지 마사다를 자신과 가족의 피난처로 이용했다.
그는 왕으로 즉위한 후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서쪽에 커다란 궁전을 지었으며 북쪽 절벽에는 작은 궁전을 지었다.
두 궁전 사이에는 화려한 욕탕, 유사시에 사용할 무기와 양식을 보관할 수 있는 커다란 창고들, 유다 회당, 서고 등을 건축했다.
그는 요새를 성벽으로 에워쌌는데 그 길이가 1,300m에 이른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66년에 로마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전쟁은 5년 동안 계속되었다.
로마 군대는 68년 6월경에 예리고와 쿰란을 진압했고, 70년 8월에는 티투스(Titus)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전쟁으로 사망한 유다인의 수는 11만 명에 이르렀으며 포로로 잡힌 사람은 9만 명에 달했다.
헤로데 대왕이 건립한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은 그때 전부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960명가량의 유다인들은 마사다 요새로 이동하였다.
초창기에 유대인들을 지휘한 사람은 메나헴 벤 유다였고, 차기 지휘자는 시몬 바르 기오라였으며, 마지막 지휘자는 엘레야자르 벤 야이르(Eleazar ben Yair)였다.
벤 야이르의 지휘하에 유다인들은 마사다에 진을 치고 힘에 겨운 전쟁을 계속하려고 했다.
로마의 티투스는 73년 말(또는 74년 초)에 실바(Silva) 장군으로 하여금 제10여단을 이끌고 가서 마사다 요새를 포위하도록 했고, 흙으로 서쪽 구렁을 메우고 마사다의 외벽과 그 안쪽에 급조된 내벽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로마 군인들은 성문에 불을 지른 후 성벽을 무너뜨렸으며 날이 저물자 휴식을 취하고 이튿날 성 안으로 돌진할 계획을 세웠다.
다음날 새벽 로마 군대가 공격을 개시했을 때 놀랍게도 요새로부터는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교육받은 1세기의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유다 전쟁》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로마 군대가 마사다 성벽을 부수기 시작한 날 밤, 유다인 지휘자 벤 야이르는 960여 명의 동지를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했다.
비굴한 항복이냐, 로마인의 칼에 죽을 것이냐.
벤 야이르는 제 3의 선택을 동지들에게 제시했다.
자유인으로서 죽음을 택하는 것이었다.

먼저 그들은 모든 소유물을 한곳에 모은 후 불에 태웠다.
남자들로 하여금 가족 중 여자와 어린아이의 목숨을 끊도록 했다.
남자들만 남았다.
그들은 열 사람을 뽑아서 나머지 남자들을 죽이도록 했다.
뽑히지 못한 남자들은 이미 죽은 부인과 아이들을 끌어안고 목을 내밀었다.
열 사람만 남게 되자 그들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골랐다.
마지막 한 사람이 아홉 명을 죽인 뒤 칼에 엎드려 자살했다.

요세푸스는 이어서 생존자의 증언을 기록함으로써 사실성을 더했다.

로마 군대는 마사다를 함락했을 때 동굴 속에 숨어 있던 두 명의 여자와 다섯 명의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죽음을 피해서 살아남은 마사다 최후의 증인들이었다.

노파 한 명, 엘레아자르의 친척 부인 한 명, 어린이 다섯 명이 생존자였다.
요세푸스는 그날을 산티코스 달 15일이라고 명기했는데 환산하면 74년 해방절이다.
1960년대 중반 야딘의 지휘로 마사다에서 대규모 고고학적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야딘은 발굴 작업에서 성과를 올렸는데 헤로데 대왕의 궁전뿐 아니라 그곳에서 최후를 마친 유대인들의 유물을 찾아냈다.
그들이 신던 가죽신, 물건을 담았던 바구니, 열네 개의 두루마리 성경책 등이 발굴된 것이다.
야딘은 식량창고도 발견했는데 항아리에는 곡식이 남아 있는 상태여서 그들이 굶어죽은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어로 ‘십일조’라고 표시된 항아리도 있었다.

야딘은 히브리 이름이 적힌 열한 개의 토기조각도 발굴했는데 벤 야이르의 이름이 적힌 토기도 있었다.
야딘은 열한 개의 토기조각이 최후의 날 제비뽑기를 할 때 사용되었던 것이라고 짐작했다.
요세푸스의 기록의 신빙성을 토기조각들이 증명해준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군인들은 훈련 마지막 날 마사다에 오른다.
사관에 임명되는 군인들 역시 마사다에서 서약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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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산(감람산)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예루살렘에서 가장 높은 산은 예루살렘 동북쪽에 있는 전망 산이다.
그곳에 히브리 대학이 있다.
올리브 산은 예루살렘 성전 동쪽에 있는 820m의 높이의 산으로 키드론 골짜기가 있는 곳이다.
해발 720m인 예루살렘 시가보다 100m가 더 높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올리브 산을 ‘하르 하제팀’이라고 부르는데 ‘올리브 나무들의 산’이란 뜻이다.
올리브 산과 예루살렘은 상당히 인접해 있다.
사도행전(1:12)에 의하면 올리브 산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라고 했는데 1km쯤 된다.
지금은 그곳에 많은 주택이 있어 산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구약성서에는 다윗 왕이 압살롬을 피해 백성들과 함께 맨발로 울면서 올리브 산으로 올라갔다는 기록이 있다.

다윗은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맨발로 올리브 산등성이를 걸어 올라갔다.
백성들도 모두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뒤따라갔다. 【사무엘하 15:30】

다윗 왕이 울면서 올라간 바로 그 산에 예수님께서 자주 가셨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최후에는 그곳에서 승천하셨다.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유세비우스(260∼340년)는 니케아 회의의 사회를 맡았던 사람이며 동방 정교회의 대표적 신학자이다.
그는 저서 《교회사》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한 후 성지 이스라엘에 있는 세 개의 동굴 위에 각각 역사적인 교회를 짓도록 했다.
첫째는 베들레헴에 있는 동굴 외양간에 건립한 ‘예수 탄생 교회’, 둘째는 예수가 묻힌 동굴무덤 위에 건립한 ‘성묘 교회’, 셋째는 예수가 제자들을 가르친 감람산 위에 건립한 ‘주기도문 교회’이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아에 머무는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 오고가실 때마다 올리브 산 고갯길을 걸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시가를 내려다보시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올리브 산을 게쎄마니라고도 부르는데 히브리어 ‘가쎄마님’의 그리스어 발음으로 그 뜻은 기름틀, 또는 착유기이다.

올리브 산에 있는 ‘파테르 노스테르(Pater Noster)’ 교회는 카톨릭 갈멜 수녀회에서 관장하는 교회로 ‘주기도문 교회’라고도 부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6∼333년에 그곳에 어머니 헬레나의 요구대로 길이 65m, 폭 30m의 교회를 건립하고 ‘엘레오나 교회’라고 불렀다.
‘엘레오나’는 올리브나무 숲이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엘라이온’의 와전된 발음이다.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엘레오나 교회도 파괴되고 또 재건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614년에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서 파괴된 교회를 십자군이 1106년에 재건했고 그 후 또다시 파괴되었는데, 현존하는 교회는 1874∼75년에 프랑스의 공주 오델리가 건립한 것이다.
‘파테르 노스테르’라는 말은 주기도문의 시작 ‘우리 아버지’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
주기도문 교회 벽에는 35개 국어로 번역된 주기도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글로 된 주기도문도 있다.

예수께서 하루는 어떤 곳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다.
기도를 마치셨을 때 제자 하나가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같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주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루가의 복음서 11:1-4】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에 자주 가셨다(“그리고 나서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요한의 복음서 7:53-8: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장차 닥칠 고난에 관해서 말씀하신 곳도 그곳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 올라가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따로 와서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오실 때와 세상이 끝날 때에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저희에게 알려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아무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떠들어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또 여러 번 난리가 일어나고 전쟁 소문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당황하지 말아라.
그런 일이 꼭 일어나고야 말 터이지만 그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한 민족이 일어나 딴 민족을 치고, 한 나라가 일어나 딴 나라를 칠 것이며, 또 곳곳에서 기근과 지진이 일어날 터인데 이런 일들은 다만 고통의 시작일 뿐이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잡아 법정에 넘겨 갖은 고통을 겪게 하고 마침내는 사형에 처하게 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떨어져나가 서로 배반하고 서로 미워할 것이며 거짓 예언자가 여기저기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또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하늘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에게 밝히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끝이 올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24:3-14】

주기도문 교회를 나와 가파른 비탈길을 조금 내려오면 산중턱에 물방울 형태의 교회가 보이는데 그것이 ‘눈물 교회’다.
‘도미누스 플레빗 교회’라고 부르는데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뜻이다.
이 교회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예루살렘 시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성을 바라보면서 우셨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을 상징하여 교회 건물의 형태를 눈물방울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 그곳에 교회가 선 것은 4세기였지만 그것은 파괴되었고, 지금의 교회는 1955년에야 완공된 것이다.

우리는 ‘승천 교회’로 가기 위해서 올리브 산 정상에 올랐다.
복음서 가운데 루가의 복음서만 승천에 관해 전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승천한 것으로 기록했다(루가의 복음서 24:50-52).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40일 후에 올리브 산에서 승천하셨다고 적고 있다(사도행전 1:1-12).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에서 승천하셨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어느 장소에서 승천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승천하셨다고 믿어지는 곳에 팔각형 담이 있고 중앙에 팔각형으로 된 작은 건물이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바닥에 유리를 덮어 보호해놓은 자연석의 일부가 노출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바위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밟았던 것이라고 전해온다.
383년에 귀족 출신 포이메니아가 그 바위를 중심으로 둥근 형태의 작은 교회를 건립했는데 하늘을 쳐다볼 수 있도록 지붕을 덮지 않았다고 한다.
그 교회는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서 614년에 파괴되어 670년에 재건되었지만 이슬람교 지도자 술탄 엘 하킴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1152년 십자군이 와서 폐허 위에 팔각형으로 재건하고 아오스딩 수도회에서 교회를 관리해왔는데, 1198년에 살라딘이 이슬람교 사원으로 개조했다.
살라딘은 천장이 없는 구조물은 그대로 둔 채 둥근 지붕을 씌워 교회는 ‘승천 돔’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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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쎄마니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게쎄마니는 올리브 산 북쪽 기슭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끔 들리시던 곳으로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 동산이다.

기도를 마치신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시고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동산에 들어가셨다. 【요한의 복음서 18:1】

그들은 게쎄마니라는 곳에 이르렀다. 【마르코의 복음서 14:32, 마태오의 복음서 26:36, 루가의 복음서 22:39】

예수님께서는 게쎄마니에서 밤을 새워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셨고, 아직 동이 트지 않았을 때에 대제사장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그곳에는 1500년 또는 2000년 묵은 늙은 올리브나무가 서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기도하셨을 거라고 짐작하고 그곳에서 기도를 드렸다.

게쎄마니에는 ‘만국 교회’, ‘스테판 순교 기념교회’ 등과 가톨릭 여러 종파의 성당들이 있다.
만국 교회는 예수님께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한 큰 바위를 둘러싼 곳에 있는 아름다운 예배당으로 1919년에 12개국에서 모금한 돈으로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풍의 막달라 마리아 교회가 가장 우아한 모습을 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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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마가)의 다락방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유월절(과월절) 만찬을 어디에서 하시겠느냐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무교절 첫날에는 과월절 양을 잡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날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께서 드실 과월절 음식을 저희가 어디 가서 차렸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시며 “성 안에 들어가면 물동이에 물을 길어가는 사람을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그리고 그 사람이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우리 선생님이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 음식을 나눌 방이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러면 그가 이미 자리가 다 마련된 큰 이층 방을 보여줄 터이니 거기에서 준비해놓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코의 복음서 14:12-15】

마르코의 다락방에서 열린 유월절 만찬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음식을 나눈 ‘최후의 만찬’이었지만 그때 제자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시온 산의 좁은 골목을 지나면 고색창연한 건물이 보이는데 2층이 마르코의 다락방이다.
예수님을 체포한 대제사장 ‘가야파의 집’에서 가까우며 시온 문 남쪽에 해당한다.
아래층은 다윗 왕의 무덤이다.
다락방을 예수님께 제공한 사람은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비교적 큰 다락방은 벽 쪽에 8개의 기둥이 있고 중앙에 3개의 기둥이 고딕 형태의 천장을 받치고 있다.
지금의 2층 다락방은 십자군이 12세기에 성지를 탈환하고 나서 건립한 것이다.
다락방에서 있었던 ‘최후의 만찬’ 의식은 가장 중요한 성찬식으로 오늘날까지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다.

그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시고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오의 복음서 26:26-28】

다락방을 나와 아래층의 다윗 왕 무덤으로 내려갔다.
구약성서에는 다윗 왕이 다윗 성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윗 성은 시온 산의 반대편 곧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다.
그러니까 이 무덤은 상징적인 무덤이다.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41인의 왕들의 무덤은 그 위치가 어디인지 모른다.
모세의 무덤이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르고,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무덤도 어딘지 알 수 없다.
다윗 왕의 기념묘가 상징적으로 시온 산에 건립된 것은 10세기였다.

해발 765m의 시온 산은 원래 솔로몬 왕이 야훼께 바친 성전 지역만 시온 산이라 불렀는데 차츰 예루살렘 도성 전체를 그렇게 부르게 되었으며, 신약시대 이후에는 예루살렘의 서남쪽에 있는 언덕만을 시온 산이라고 부른다.
다윗 왕의 기념묘를 나와서 길을 건너 서쪽으로 가면 ‘돌미시온 교회’가 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영면한 곳에 세워진 교회이다.
현존하는 것은 1910년 독일 가톨릭 교회가 세운 것으로 ‘돌미시온’은 라틴어로 ‘잠잔다’라는 뜻이다.
교회 내부는 황금색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교회에는 훌륭한 파이프 오르간이 있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들이 그곳에서 연주회를 가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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