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기또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아힐롯의 아들 바아나가 다아낙, 므기또, 욕므암 건너편 일대, 이즈르엘에서 내려다보이는 벳스안 전지역과 또 벳스안에서 사르단 곁에 있는 아벨므홀라에 이르기까지…. 【열왕기상 4:12】

솔로몬 왕은 야훼의 전과 자신이 살 궁전과 밀로 궁을 짓고 그리고 예루살렘 성을 쌓고 하솔, 므기또, 게젤을 증축하기 위하여 강제노역을 시켰는데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열왕기상 9:15】

팔레스타인 북쪽에 위치한 이즈르엘 평야는 불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자주 교전이 일어났던 곳이다.
이 평야를 지켜주던 도성은 므기또, 다아낙, 이즈르엘, 벳스안이었다.
솔로몬 왕(기원전 960∼928년)은 이스라엘인의 단결을 굳히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왕국의 영토를 사방으로 확장하여 여러 요새와 위성도시를 건설했다.
므기또 성채도 이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는 므기또 요새로 올라갔다.
므기또 요새는 80여 계단을 내려갔다가 다시 180여 계단을 올라간다.
지하로부터 샘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이다.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요지인 므기또 요새는 역사적인 곳이다.
다윗 왕 때부터 전란으로 20여 차례 파괴되었고 20여 차례에 걸쳐 개축되었다.
므기또 정상에는 말 수백 필을 훈련시킬 수 있는 넓은 광장과 마굿간이 있으며, 빗물을 저장할 수 있는 우물이 있고, 식량을 비축할 수 있는 창고가 있다.

므기또 요새가 처음으로 반석 위에 세워진 것은 기원전 3500년경이었다.
그 후 전쟁으로 파괴될 때마다 개축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스무 번째 개축했을 때에는 본래의 것보다 20m 가량 높아졌다.
결국 요새는 기원전 450년과 350년 사이에 파괴되고 말았다.
기록에 의하면 므기또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때부터였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이 그곳에서 발굴한 부싯돌은 그곳 사람들이 수렵시대에서 농경시대로 나아간 사실을 말해준다.

므기또 요새는 유럽으로부터 이집트로 가는 남북 해변도로가 통과하는 곳이며, 또한 이 해변도로와 동아시아 메소포타미아에서 뻗어 나온 도로가 교차되는 길목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므기또 요새를 먼저 점거하는 것이 유리하며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셈이 된다.
솔로몬 왕 역시 므기또 요새를 점령한 후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솔로몬 왕은 므기또를 군사도시로 만들고 그곳에 제 5행정본부를 두었다.

솔로몬이 병거와 말을 사 모으다보니 병거가 천사백 대, 군마는 만 이천 마리가 되었다.
그는 이 병력의 일부는 병거주둔성에 배치하고 일부는 왕이 있는 예루살렘에 배치하였다. 【열왕기상 10:26】

므기또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하므로 솔로몬 왕은 사방에서 모여드는 카라반들로부터 관세를 거두어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기원전 9세기에 북이스라엘의 왕 오므리와 아들 아합은 므기또 도성을 더욱 견고하게 했다.
그때 만들어진 것이 유명한 곡식 창고, 거대한 마굿간, 놀랄 만한 상수도 시설이다.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나시르팔 2세(재위 기원전 884∼859년)는 시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왕국을 위협했다.
기원전 845년 예언자 엘리사는 바알 신을 섬기던 아합 가문을 무너뜨리도록 예후를 왕으로 내세웠다(열왕기하 9:1-13).
예후는 이즈르엘로 병거를 이끌고 쳐들어갔다.
거기에는 당시 이스라엘의 왕 요람이 시리아군과의 전투에서 부상당해 앓아누워 있었으며, 유다의 왕 아하지야(요람 왕의 사촌)가 문병 중이었다.
예후는 이즈르엘 도성을 점령하여 요람 왕을 살해했고, 이즈르엘 도성을 빠져나가 벳하깐으로 도망친 아하지야 왕은 이블르암 근처의 고갯길에서 예후의 화살을 맞아 상처를 입고서 므기또까지 도망쳤지만 거기서 사망했다(열왕기하 9:14-27).

므기또는 기원전 732년에 아시리아의 왕 디글랏빌레셋 3세에 의해서 불바다가 되었으며, 9년 후에는 아시리아의 왕 살마네셀 5세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열왕기하 17장).
유다 왕 요시야가 일부 재건했지만 기원전 609년에 이집트 왕 느고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페르시아 제국(기원전 538∼332년) 때에 므기또는 잊혀진 도성으로 땅속에 묻혀버렸다.
이천여 년 동안 잊혀졌던 성채가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903년 독일의 고고학자 G. 슈마커에 의해서였다.
미국의 고고학자들도 1926년부터 1939년까지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했다.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야딘은 1960년부터 1972년까지 발굴한 후 조그만 박물관을 건립하고 그곳에 유물들을 소장했다.

므기또를 히브리어로 “하르마게돈(아마겟돈)”이라고 부르는데 요한은 말세에 최후의 전쟁이 이곳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세 악령은 히브리말로 하르마게돈이라고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았습니다. 【요한 묵시록 16:16】

우리들은 가이사리아로 가는 길에 사론 평야를 지나게 되었다.
솔로몬의 다음과 같은 노래가 떠오른다.

(여자)
나는 고작 사론에 핀 수선화,
산골짜기에 핀 나리꽃이랍니다.
(남자)
아가씨들 가운데서
그대, 내 사랑은
가시덤불 속에 핀 나리꽃이라오. 【아가 2:1-2】

사론 평야에는 비가 자주 내리므로 들판은 초목과 꽃이 만발하여 아름답다.
북쪽 갈멜 산으로부터 지중해 해변을 끼고 남쪽 요빠에까지 이르는 사론 평야를 남북 해변도로가 가로지르고 있다.
땅이 비옥하고 장미가 아름답기로 구약시대 때부터 익히 알려진 곳이다.
야산에는 상수리나무가 많으며, 봄에는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들을 뒤덮어 온통 꽃동산으로 변한다.
그 지역 사람들은 소떼를 평야에 풀어놓고 먹였으며, 꿀맛 나는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과수원도 많았다.
주홍색의 야생 양귀비와 아네모네 꽃이 여기저기를 수놓고 있는 평야를 지나면서 우리는 찬송가를 불렀다.

사론의 꽃 예수 나의 맘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피소서
내 생명이 참사랑의 향기로 간 데마다 풍겨나게 하소서
예수 사론의 꽃 나의 맘에 사랑으로 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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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리아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가이사리아는 요빠 북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항구도시로 적당한 곳이 아니었지만 헤로데 대왕은 로마 시를 모방하여 아름다운 항구도시로 만든 후 낙성식을 거창하게 했다.
로마 황제 카이사르(Julius Caesar, 재위 기원전 29∼서기 14년)는 헤로데 대왕에게 가이사리아 지역을 하사했고 건축광이었던 헤로데 대왕은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의 항구를 건설했다.
그는 600m와 300m 길이의 거대한 방파제를 두 개 만들었는데, 파도가 심한 그곳에 그렇게 커다란 방파제를 만든 것으로 보아 건축에 관한 지식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막대한 돈과 인력을 동원한 10년에 걸친 공사가 끝난 것은 기원전 10∼9년이었다.
그곳을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리아’라고 불렀다.

가이사리아에는 시장터 아고라(Agora), 경기장, 야외 원형극장, 로마식 공동목욕탕 등이 있어 당시 어느 문명의 도시들에 뒤지지 않았다.
가이사리아가 완공되자 로마 제국은 총독으로 하여금 그곳에 거주하게 하여 유다의 수도로 삼았다.
총독관저와 행정본부가 들어선 가이사리아는 유다의 정치중심지가 되었다.

성벽은 이중으로 쌓고 성벽과 성벽 사이에는 호수를 만들었는데 일본 궁성이나 대판성처럼 생겼다.
가이사리아는 1201년 십자군 전쟁(1099∼1291년) 중 해로를 통해 유럽에서 진입한 십자군을 맞이하는 관문이 되었다.
십자군은 가이사리아에 거대한 규모의 요새를 건설했는데 그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난 1291년 요새는 이슬람교도들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가이사리아는 약 600년 동안이나 모래더미에 파묻혀 있다가 금세기에 와서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지중해 해변에 건립한 야외 원형극장은 로마의 콜로세움을 모방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매년 여름철이면 국제적인 규모의 ‘이스라엘 음악제’가 열린다.
많은 세계의 정상급 연주자들과 지휘자들이 그곳에서 연주를 했다.

놀라운 일은 요르단 강물을 끌어오기 위해서 50km 길이로 성벽을 쌓고 성벽 위에 수로를 만든 것이다.
가이사리아에는 마실 물을 공급하는 샘이 전혀 없었으므로 12km 떨어진 갈메 산맥의 샘에서 물을 끌어오는 수로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수로의 일부가 남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준다.

가이사리아가 성지인 이유는 다름 아닌 베드로가 로마 제국의 장교 고넬료와 그의 친지들에게 세례를 베푼 곳이기 때문이다.
고넬료는 가이사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인 100명을 지휘하는 장교였는데 부하들을 시켜서 베드로를 가이사리아로 모시도록 했다.
그는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로부터 직접 예수님에 관해 듣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는 친지와 친구들을 초대하여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경청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로 결심한 그들에게 베드로는 세례를 베풀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교인으로 만들었다.

한편 가이사리아는 사도 바울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울로는 세 번째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이사리아에 들렀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면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당할 것이라며 가지 말 것을 권유했다.
바울로는 그들에게 “주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나는 감옥에 가는 것뿐만 아니라 죽을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하고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는 체포되었고, 가이사리아로 호송되어 2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로마 시민이었던 바울로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했으며 배에 태워져 로마로 호송되었다.
바울로는 로마에서 사형당했으므로 가이사리아는 그가 머물렀던 마지막 장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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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야포, 요빠)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텔아비브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도시로 경제, 사회, 문화적 중심지이다.
인구는 약 40만 명인데 주변 신시가지의 인구까지 합하면 이스라엘 인구의 3분의 1이 이곳에서 거주하는 셈이다.
1967년에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기 전에는 텔아비브가 1948년부터 1967년까지 수도였다.
텔아비브라 불리기 전에는 야포로 불린 이곳을 시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도시라고 자랑한다.

전하는 말로는 노아의 셋째 아들 야벳(창세기 6:10, 9:18)이 이곳에 항구도시를 세웠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도시를 야포로 불렀다고 한다.
로마의 문필가 플리니우스(23∼79년)는 노아의 홍수(창세기 6:13-8:13)가 있은 지 40년 후에 항구도시가 세워진 것이라고 연대까지 기록했다.
고고학자들은 야포에서 신석기(기원전 5000년대)와 청동기(기원전 4000∼3100년)의 유적을 발굴했으며, 힉소스 민족(기원전 1750∼1550년)이 도시를 이루고 살았던 흔적을 찾아냈다.
기원전 1468년경 이집트의 왕 투트모시스 3세에게 점령된 야포는 기원전 12세기까지는 이집트에 속했다.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에 하느님의 집, 성전을 건립하기 위해서 레바논에서 벌목한 목재를 야포 항구를 통해서 운반했다.
역대기하에 그 과정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은 띠로 왕 히람에게 사람을 보내어 청을 넣었다.
“당신은 본인의 선친께서 궁을 지으실 때 송백재목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본인은 본인의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모실 집을 지어 바치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분향제를 올리고 거르지 않고 젯상을 차려 올리며, 아침저녁으로 번제물을 바치고자 합니다.
또 안식일과 매달 초하루와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정해주신 절기마다 번제를 드리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은 언제까지나 이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어떤 신보다도 크신 분이시라 본인이 지어 바칠 집도 커야 합니다.
저 하늘, 저 꼭대기 하늘도 좁아서 못 계실 분에게 무슨 수로 집을 지어드리겠습니까?
본인이 무엇인데 어찌 감히 그분께 집을 지어드리겠습니까?
다만 향이나 피워 올리려는 뜻밖에 없습니다.
이제 본인은 당신에게 금은과 놋쇠와 쇠를 다룰 줄 알며, 붉은 비단, 진홍비단, 자주비단을 짤 줄 알며 조각도 할 줄 아는 기사 한 사람을 청합니다.
다윗 선왕께서 길러주신 기술자들이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일을 할 기사를 보내주십시오.
또 레바논의 송백과 전나무와 오동나무를 청합니다.
레바논에서 나무를 벨 줄 아는 일꾼들이 당신에게 있는 줄 압니다마는 본인도 일꾼을 보내어 같이 일하게 하겠습니다.
본인은 놀랄 만큼 큰 집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재목을 많이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채벌 기술자들에게 본인은 양곡을 대어주겠습니다.
밀 이만 섬, 보리 이만 섬, 포도주 이만 말, 기름 이만 말을 당신의 일꾼들에게 대어주겠습니다.”

띠로 왕 히람이 솔로몬에게 회신하였다.
“야훼께서 그의 백성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왕으로 세워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
이제 본인은 기술자 후람 선생을 보냅니다.
그는 내가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금은과 놋쇠와 쇠와 보석과 나무를 다룰 줄 알며, 붉은 비단과 자주비단과 모시와 진홍색 비단을 짤 줄 알며, 조각을 할 줄도 압니다.
갖가지 고안을 다 해내는 사람이니, 무엇이든지 부탁하십시오. …
우리는 당신에게 필요한 만큼 레바논에서 벌목을 하여 뗏목으로 엮어 요빠 앞바다까지 운반해가겠습니다.
예루살렘까지 올려가는 일은 당신이 담당하십시오.” 【역대기하 2:3-16】

야포는 예언자 요나에 얽힌 사연도 가지고 있다.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가서 그곳 주민들을 회개시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요나는 하느님의 눈을 벗어날 속셈으로 야포 항구로 발길을 돌렸다.
요나는 지금의 스페인 남단의 항구 다르싯으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치던 중 거센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뱃사람들은 풍랑이 하느님의 분노로 인해 일어난 것을 알고 요나를 바다로 던졌다.
그러자 바다는 잔잔해졌고, 큰 물고기에게 삼켜진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려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요나 1-2장).

기원전 8세기에 야포는 또다시 이집트에게 점령당했으며, 기원전 702년에는 아시리아 사람들이, 기원전 6세기에는 불레셋족이 야포를 점령했다.
바빌론에서 50여 년 동안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서 레바논으로부터 송백나무를 벌목하여 뗏목으로 야포 항구로 운반했다(에스라기 3:1-7).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후로 야포는 헬레니즘 문명권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중엽부터는 박해가 시작되어 유대인들은 더 이상 야포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시리아 사람들이 그곳으로 이주해 와서 유대인들을 바다에 던져 죽게 했던 것이다.
이에 보복하려고 기원전 163년 유다 마카베오는 야포의 부두에 불을 질렀고, 그러자 시리아는 야포 사람들을 마구 잡아 앙갚음을 했다(유대교 성서 마카베오 후서 12:3-7).
유다 마카베오의 형제들, 요나단과 시몬은 결국 야포를 점령했으며, 기원전 142년 시몬은 유대인들이 야포에서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했으므로 야포는 다시 유대인들의 도시가 되었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야포를 로마의 영토로 만든 후 이스라엘 출신의 대사제들로 하여금 이곳을 통치하게 했다.
헤로데 대왕이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가이사리아에 로마식 항구도시를 건설하자 그때부터 야포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서기 6년부터 야포는 ‘플라비아 요빠(Flavia Joppa)’라는 지명으로 로마 제국의 유다 총독관구에 속하게 되었다.
636년부터 야포는 아랍인의 도시로 변모했으며, 아랍인들이 라므라에 수도를 세우고부터는 다시 항구도시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십자군 시대에는 그리스도교인들의 도시였고, 1268년 이슬람교도들이 야포를 점령한 후에는 다시 아랍인들의 도시가 되는 수난을 겪었다.

19세기 말엽부터 유대인들이 야포의 인근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1910년에는 인근에 흩어진 여러 마을들을 합해서 텔아비브라는 이름으로 도시를 형성했다.
텔아비브는 ‘봄의 언덕’이란 뜻으로 이스라엘인들이 포로생활을 했던 바빌론의 그발 강가 텔아비브(에스겔서 3:15)와, 무덤에 묻힌 이스라엘 사람들의 부활에 관한 예언자 에스겔의 환상(에스겔서 37:1-14)을 상기시켜준다고 한다.
1948년 이스라엘은 독립 국가를 선언하면서 텔아비브를 이스라엘의 임시수도로 정했다.

우리가 순례할 성지들이 있는 팔레스타인은 옛날부터 무역상들이 서유럽과 실크 로드(Silk Road)를 통하여 중국, 인도로 가는 길목이자 동아시아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로 가는 카라반(隊商)들의 길목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헤르몬 산이 철새들이 쉬어가는 새들의 길목이라는 것이다.
약 250종의 철새들이 이곳을 거쳐 남북으로 오고 간다.
팔레스타인은 지리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문화 교류지이자, 카라반들에 의한 동서양의 교역이 활발했던 중간지역이며, 철새들에게는 쉬어가는 길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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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메시아의 고향: 베들레헴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베들레헴으로 갔다.
‘떡집’이란 뜻을 가진 베들레헴은 언덕 위에 있는 마을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곳으로 유명하다.
그곳에서 유다의 왕이 태어날 것을 기원전 8세기에 예언자 미가가 예언한 바 있었고, 그로부터 약 700년 후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예수님의 탄생은 역사를 갈랐는데, 그가 태어나기 전을 ‘B.C.(Before Christ)’라 하고 그 후를 ‘A.D.(Anno Domini)’라 한다.

그러나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간다. 【미가 5:2】

헤로데 대왕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베들레헴과 인근 지역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예수께서 헤로데 대왕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셨는데 그때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대왕이 당황한 것은 물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
왕은 백성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놓고 그리스도께서 나실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서의 기록을 보면,
‘유다의 땅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유다의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영도자가 너에게서 나리라’
고 하였습니다.”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대중하여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마태오의 복음서 2:1-6, 2:16】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는 야곱의 외사촌 라헬의 무덤이 있다.

라헬은 에브랏으로 가는 길가에 묻혔다.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다.
야곱은 라헬의 무덤 위에 비석을 세웠다.
그것이 이날까지 라헬의 묘비로 알려져 있다. 【창세기 35:19-20】

베들레헴은 룻의 죽은 남편의 고향이자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고향이라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갔다.
룻은 모압 여인으로 나오미는 이방인 며느리를 둔 것이었다.
베들레헴에서 룻은 남편의 친족인 보아즈와 재혼했다.
보아즈의 고향 또한 베들레헴이다.

때마침 보아즈가 베들레헴에서 와서 “야훼께서 자네들과 함께하여 주시기를 바라네” 하며 추수하는 일꾼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야훼께 복을 받으십시오” 하고 일꾼들이 대답했다. 【룻기 2:4】

이웃 아낙네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구나!” 하며 그 아기에게 오벳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요 이새의 아버지였다. 【룻기 4:17】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 다윗(기원전 1010∼970년경)이 태어나고 목동으로 성장한 곳이다.
예언자 사무엘이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선정했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기름 채운 뿔을 집어 들고 형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야훼의 영이 다윗에게 내려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러 있었다.
사무엘은 길을 떠나 라마로 갔다. 【사무엘상 16:13】

다윗이 왕으로 등극한 것을 제외하면 구약시대의 베들레헴은 자랑거리라곤 없는 가난한 마을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윗의 고향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베들레헴은 유대인들에게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다윗의 혈통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베들레헴에는 고색창연한 교회가 서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9년에 어머니 성 헬레나의 요청을 받아들여 건립한 교회이다.
원래 그 자리는 135년에 로마의 아도니스 신을 위한 신전이 건립되었던 곳인데 324년에 헬레나가 그곳을 순례하면서 예수님이 탄생한 곳으로 전해오는 동굴을 참배하고 아들에게 청해서 그 동굴 위에 교회를 짓도록 했다.
황제는 신전을 헐고 ‘예수 탄생 교회’를 건립했다.
교회는 531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서 더욱 아름답게 재건되었다.

교회가 1450여 년이 넘도록 훼손되지 않고 보존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614년 페르시아 군대는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모든 교회를 허물었지만 이 교회만은 그대로 두었다.
어느 화가가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베들레헴으로 찾아온 동방 점성가들을 교회 안에 그려놓았는데 용케도 페르시아 점성가들로 분장시켜놓았던 것이다.
페르시아 군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을 그곳에서 대하자 그만 감동한 나머지 교회를 허물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참배하였다.
그런가 하면 638년 이스라엘을 정복한 이슬람교 군주 오마르 역시 교회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를 드렸다.
이슬람교 경전 코란에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종이며 예언자인 예수를 종려나무 아래서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종려나무가 베들레헴에 있었다는 이슬람교 전설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슬람교도들은 예루살렘의 이슬람교 사원들과 헤브론의 성조 사원을 순례하면서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교회’에도 같이 참배한다.

아르메니아 수도원을 오른쪽에 끼고 한참 걷다가 허리를 굽히고 조그만 문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교회로 들어서게 된다.
입구의 높이가 1.2m에 지나지 않는 것이 놀랍다.
원래 입구가 높았는데 말을 탄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높이를 낮추었다고 한다.
왕이라도 교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머리를 숙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입구를 낮춘 이유이다.
입구의 폭 또한 80cm에 불과해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다.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양편으로 두 줄씩 네 줄로 기둥이 늘어선 바실리카 구조를 본다.
한 줄에 기둥이 열 개씩, 모두 마흔 개의 기둥이 있다.
중앙통로 양편의 높은 벽면에 아직 남아 있는 대형 모자이크는 1165년부터 1169년까지 십자군이 교회를 수리하면서 덧붙인 것들이다.
교회는 많은 굴이 있는 반석 위에 세워졌으므로 성채나 요새처럼 느껴진다.
교회 안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동굴의 외양간, 말구유,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서 동방으로부터 온 세 왕이 묵었던 곳, 살해당한 두 살 이하 아기들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지하실에는 초대 교부 제롬이 성경을 번역했던 방이 있다.

대리석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니 바닥에 대리석이 깔린 작은 동굴이 나타난다.
폭 3.5m에 길이 13m의 동굴에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했다고 한다.
순례자들은 그곳에 이르면 옷깃을 여미고 감격스런 자세로 찬송과 기도를 드린다.
바닥에는 은으로 만든 별 모양이 장식되어 있는데 아기 예수가 탄생한 곳을 가리킨다.
가톨릭 교회가 1717년에 만든 것이다.
‘베들레헴의 별’로 불리는 이 별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분쟁거리가 되고 말았는데, 러시아 정교회가 별을 일방적으로 없애자 성지를 지배하던 오스만 투르크가 원상회복을 요구했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853년에 크리미아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성지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강대국 간의 이해다툼으로 일어난 전쟁이었다.

고색창연한 교회 왼편으로 근대식으로 건립한 ‘성 카타리나 교회’가 있다.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 1881년에 건립한 것이다.
‘예수 탄생 교회’가 그리스 정교회 소속이므로 가톨릭이 따로 건립한 교회다.
여기서 예루살렘 주재 라틴계 가톨릭 총대주교가 해마다 12월 25일 성탄 자정미사를 집전하며 텔레비전을 통해서 전 세계에 중계된다.

‘성 카타리나 교회’ 지하 계단을 내려가면 예수 탄생 동굴이나 구유 동굴과 유사한 동굴들이 보이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성 히에로니무스(347∼420년)의 서재였다고 한다.
히에로니무스는 친구 다마수스 교황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성사되지 못하자 상심한 나머지 로마를 떠나 386년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무려 34년 동안 은거하면서 한편으론 집필하고 한편으로는 수도에 정진했다고 한다.
히에로니무스가 집필한 것들 가운데 유명한 것은 신구약 성서를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전에서 라틴어로 완역한 것인데 그의 번역본이 가톨릭의 공인을 받아 아직까지 통용되는 불가타 역본이다.
히에로니무스는 420년에 타계했는데 그는 자신의 비문까지 작성해 놓고 시신을 서재 근처 동굴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대로 시신은 서재 옆 동굴에 묻혔고 시신을 넣은 석관 앞면에는 손수 작성한 비문이 이렇게 새겨 있다.
“이곳은 내가 영원히 쉴 자리, 여기 거처하는 것이 내 소원이다.”
그러나 그의 소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13세기에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로마에 있는 성모 대성당으로 이장하여 베들레헴에는 빈 석관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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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고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예리고에서 맞은 토요일은 안식일이었다.
도시가 죽은 듯이 고요했다. 호텔 종업원들이 근무하지 않으므로 아랍인들이 대신 일을 했으며 이곳에 있는 한인교회 교인들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호텔 로비에서 예배를 드린 후 광야를 지나 예리고로 내려갔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는 길은 계속 내리막길이다.
우리가 탄 차는 요르단 강을 향해 경사진 길을 달려갔다.
차창 밖에는 황량한 광야가 펼쳐져 있고 그 광야 가운데 예리고가 있다.
광야는 예수님 생존 당시 사두개파와 바리사이파에 밀려난 비주류 유대교 지도자들이 활약하던 곳이다.
에세네파, 쿰란, 세례자 요한도 그곳에서 활약했으며, 예수님께서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은 것도 광야에서였다.
들에는 양치는 목자 베두인족이 보이고 그들이 기거하는 천막들이 이따금 눈에 띈다.
베두인족은 옛날 관습대로 광야를 유랑하는 유목민들이다.
계곡에는 헤로데 왕이 별궁으로 물을 끌어가기 위해서 설치한 22km나 되는 수로가 보인다.
일 년 내내 비가 오지 않아 메마른 땅이며, 주위에는 바위로 된 야산이 있다.
풀도 나무도 자랄 수 없지만 바위틈으로 연한 풀이 자란다.
목자는 그러한 곳으로 양들을 몰아서 풀을 먹게 한다.
아카시아의 일종인 시팀 나무(Shittim tree)가 이따금 눈에 띄는데 베두인족은 그 나무 아래서 햇빛을 피해 휴식을 취한다.
모세는 시팀 나무로 법궤를 만들었다고 한다.
예리고로 가는 길가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여관’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루가의 복음서 10:30-36】

해발 760m의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사막을 내려가다가 요르단 강 못 미쳐 조금 북상하면 해저 258m의 오아시스 도시 예리고에 이른다.
해저 258m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도시이다.
그곳에는 신기할 정도로 열대식물이 우거져 있는데 키가 10m가 넘는 종려나무들이 쑥쑥 자란다.
그곳을 오아시스라고 부르는 것은 1분에 약 4,500리터의 맑은 물이 솟는 ‘술탄 샘(엔에스 술탄)’이 있기 때문이다.
그 샘을 사람들은 ‘엘리사의 샘’이라고 불렀는데 예언자 엘리사가 수질을 좋게 만들었다는 전설을 믿고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예리고는 직경 5km의 푸른 초원으로 대추, 무화과, 바나나, 포도, 감귤, 오렌지 등을 생산하는데 그야말로 꿀맛이다.

예리고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8000년경 중석기시대였고, 기원전 7000년경 신석기시대 초에는 원시적인 도시를 형성했다.
예리고 성터에서 발굴된 유물은 기원전 7000년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당시 예리고의 인구를 2,500∼3,000명으로 어림한다.
그렇다면 예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임에 틀림없다.
기원전 6000∼5000년경 외부에서 유민이 이곳으로 와서 정착했다.
그 후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풍습이 달라졌는데 기원전 7000년경에는 시신을 집 안에 묻었지만, 6,000∼5,000년경에는 해골에다 진흙이나 석고를 바른 후 물감을 칠했으며 눈에는 조개껍질을 박아 마치 산 사람의 모습으로 보존했다.
술탄 언덕에서 발굴된 이런 해골이 예루살렘 록펠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기원전 1800년부터 1550년 사이에 힉소스(Hyksos) 민족이 북쪽에서 내려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예리고에 큰 규모로 성곽을 쌓아 예리고를 대도시로 만들었다.
성곽의 유적이 술탄 언덕 북쪽 끝에 보존되어 있다.
힉소스 민족은 성곽을 세 겹으로 쌓았는데 맨 바깥에는 돌로 약 3.5m 높이의 외벽을 쌓고, 중간에는 외벽 상단에서부터 흙으로 경사 35도의 비탈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20.75m이다.
안쪽에는 석회로 폭 5m의 내벽을 쌓았는데 높이는 알 수 없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규모였을 것이다.
힉소스 민족의 장례풍습은 독특하여 그들은 시신과 함께 식량, 가구, 화장품 따위 부장품들을 많이 묻었다.
당시 힉소스 가족묘지에서 발굴한 유품들을 록펠러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기원전 1550년 이집트인들이 힉소스 민족을 쫓아내고 여세를 몰아 팔레스타인까지 점령하면서 예리고의 성곽을 부수어버렸다.
예리고 주민들은 다시 성곽을 쌓았지만, 기원전 1230년경 여호수아가 성벽을 무너뜨리고 예리고를 점령했다.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 60만 명의 이스라엘인들은 생존하기 어려운 시나이 반도에서 무려 40년 동안 유랑하다가 마침내 요르단 강 동쪽지역에 도달했다.
모압 평지라고 불리는 그 지역은 오늘날 요르단에 속한다.
모세와 이집트를 탈출한 사람들은 예리고를 눈앞에 두고 죽고, 다음 세대의 젊은 지도자 여호수아가 2세들을 이끌고 요르단 강을 건너 예리고를 함락했다.

예리고는 ‘향기의 도시’, ‘달의 고을’, ‘종려나무의 성’이란 뜻이다.
아열대에 속하는 예리고는 연중 기온의 변화가 거의 없는 대단히 더운 곳이다.
사해 북쪽 9.6km 지점에 있는 광야의 오아시스 예리고에 헤로데 대왕은 별궁을 지었으며, 그 별궁에서 기원전 4년에 사망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예리고를 통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리고로 들어가는 입구에 돌무화과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것을 ‘자캐오의 나무’라고 부른다.

예수께서 예리고에 이르러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거기에 자캐오라는 돈 많은 세관장이 있었는데 예수가 어떤 분인지 보려고 애썼으나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리워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그곳을 지나시다가 그를 쳐다보시며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자캐오는 이 말씀을 듣고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주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자캐오를 보시며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의 복음서 19:1-10】

자캐오가 올라갔다는 나무가 현존하는 돌무화과 나무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이런 종류의 나무 위로 올라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날 구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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