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메시아의 고향: 베들레헴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베들레헴으로 갔다.
‘떡집’이란 뜻을 가진 베들레헴은 언덕 위에 있는 마을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곳으로 유명하다.
그곳에서 유다의 왕이 태어날 것을 기원전 8세기에 예언자 미가가 예언한 바 있었고, 그로부터 약 700년 후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예수님의 탄생은 역사를 갈랐는데, 그가 태어나기 전을 ‘B.C.(Before Christ)’라 하고 그 후를 ‘A.D.(Anno Domini)’라 한다.
그러나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간다. 【미가 5:2】
헤로데 대왕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베들레헴과 인근 지역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예수께서 헤로데 대왕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셨는데 그때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대왕이 당황한 것은 물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
왕은 백성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놓고 그리스도께서 나실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서의 기록을 보면,
‘유다의 땅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유다의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영도자가 너에게서 나리라’
고 하였습니다.”
…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대중하여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마태오의 복음서 2:1-6, 2:16】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는 야곱의 외사촌 라헬의 무덤이 있다.
라헬은 에브랏으로 가는 길가에 묻혔다.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다.
야곱은 라헬의 무덤 위에 비석을 세웠다.
그것이 이날까지 라헬의 묘비로 알려져 있다. 【창세기 35:19-20】
베들레헴은 룻의 죽은 남편의 고향이자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고향이라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갔다.
룻은 모압 여인으로 나오미는 이방인 며느리를 둔 것이었다.
베들레헴에서 룻은 남편의 친족인 보아즈와 재혼했다.
보아즈의 고향 또한 베들레헴이다.
때마침 보아즈가 베들레헴에서 와서 “야훼께서 자네들과 함께하여 주시기를 바라네” 하며 추수하는 일꾼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야훼께 복을 받으십시오” 하고 일꾼들이 대답했다. 【룻기 2:4】
이웃 아낙네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구나!” 하며 그 아기에게 오벳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요 이새의 아버지였다. 【룻기 4:17】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 다윗(기원전 1010∼970년경)이 태어나고 목동으로 성장한 곳이다.
예언자 사무엘이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선정했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기름 채운 뿔을 집어 들고 형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야훼의 영이 다윗에게 내려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러 있었다.
사무엘은 길을 떠나 라마로 갔다. 【사무엘상 16:13】
다윗이 왕으로 등극한 것을 제외하면 구약시대의 베들레헴은 자랑거리라곤 없는 가난한 마을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윗의 고향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베들레헴은 유대인들에게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다윗의 혈통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베들레헴에는 고색창연한 교회가 서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9년에 어머니 성 헬레나의 요청을 받아들여 건립한 교회이다.
원래 그 자리는 135년에 로마의 아도니스 신을 위한 신전이 건립되었던 곳인데 324년에 헬레나가 그곳을 순례하면서 예수님이 탄생한 곳으로 전해오는 동굴을 참배하고 아들에게 청해서 그 동굴 위에 교회를 짓도록 했다.
황제는 신전을 헐고 ‘예수 탄생 교회’를 건립했다.
교회는 531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서 더욱 아름답게 재건되었다.
교회가 1450여 년이 넘도록 훼손되지 않고 보존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614년 페르시아 군대는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모든 교회를 허물었지만 이 교회만은 그대로 두었다.
어느 화가가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베들레헴으로 찾아온 동방 점성가들을 교회 안에 그려놓았는데 용케도 페르시아 점성가들로 분장시켜놓았던 것이다.
페르시아 군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을 그곳에서 대하자 그만 감동한 나머지 교회를 허물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참배하였다.
그런가 하면 638년 이스라엘을 정복한 이슬람교 군주 오마르 역시 교회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를 드렸다.
이슬람교 경전 코란에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종이며 예언자인 예수를 종려나무 아래서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종려나무가 베들레헴에 있었다는 이슬람교 전설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슬람교도들은 예루살렘의 이슬람교 사원들과 헤브론의 성조 사원을 순례하면서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교회’에도 같이 참배한다.
아르메니아 수도원을 오른쪽에 끼고 한참 걷다가 허리를 굽히고 조그만 문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교회로 들어서게 된다.
입구의 높이가 1.2m에 지나지 않는 것이 놀랍다.
원래 입구가 높았는데 말을 탄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높이를 낮추었다고 한다.
왕이라도 교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머리를 숙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입구를 낮춘 이유이다.
입구의 폭 또한 80cm에 불과해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다.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양편으로 두 줄씩 네 줄로 기둥이 늘어선 바실리카 구조를 본다.
한 줄에 기둥이 열 개씩, 모두 마흔 개의 기둥이 있다.
중앙통로 양편의 높은 벽면에 아직 남아 있는 대형 모자이크는 1165년부터 1169년까지 십자군이 교회를 수리하면서 덧붙인 것들이다.
교회는 많은 굴이 있는 반석 위에 세워졌으므로 성채나 요새처럼 느껴진다.
교회 안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동굴의 외양간, 말구유,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서 동방으로부터 온 세 왕이 묵었던 곳, 살해당한 두 살 이하 아기들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지하실에는 초대 교부 제롬이 성경을 번역했던 방이 있다.
대리석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니 바닥에 대리석이 깔린 작은 동굴이 나타난다.
폭 3.5m에 길이 13m의 동굴에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했다고 한다.
순례자들은 그곳에 이르면 옷깃을 여미고 감격스런 자세로 찬송과 기도를 드린다.
바닥에는 은으로 만든 별 모양이 장식되어 있는데 아기 예수가 탄생한 곳을 가리킨다.
가톨릭 교회가 1717년에 만든 것이다.
‘베들레헴의 별’로 불리는 이 별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분쟁거리가 되고 말았는데, 러시아 정교회가 별을 일방적으로 없애자 성지를 지배하던 오스만 투르크가 원상회복을 요구했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853년에 크리미아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성지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강대국 간의 이해다툼으로 일어난 전쟁이었다.
고색창연한 교회 왼편으로 근대식으로 건립한 ‘성 카타리나 교회’가 있다.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 1881년에 건립한 것이다.
‘예수 탄생 교회’가 그리스 정교회 소속이므로 가톨릭이 따로 건립한 교회다.
여기서 예루살렘 주재 라틴계 가톨릭 총대주교가 해마다 12월 25일 성탄 자정미사를 집전하며 텔레비전을 통해서 전 세계에 중계된다.
‘성 카타리나 교회’ 지하 계단을 내려가면 예수 탄생 동굴이나 구유 동굴과 유사한 동굴들이 보이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성 히에로니무스(347∼420년)의 서재였다고 한다.
히에로니무스는 친구 다마수스 교황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성사되지 못하자 상심한 나머지 로마를 떠나 386년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무려 34년 동안 은거하면서 한편으론 집필하고 한편으로는 수도에 정진했다고 한다.
히에로니무스가 집필한 것들 가운데 유명한 것은 신구약 성서를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전에서 라틴어로 완역한 것인데 그의 번역본이 가톨릭의 공인을 받아 아직까지 통용되는 불가타 역본이다.
히에로니무스는 420년에 타계했는데 그는 자신의 비문까지 작성해 놓고 시신을 서재 근처 동굴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대로 시신은 서재 옆 동굴에 묻혔고 시신을 넣은 석관 앞면에는 손수 작성한 비문이 이렇게 새겨 있다.
“이곳은 내가 영원히 쉴 자리, 여기 거처하는 것이 내 소원이다.”
그러나 그의 소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13세기에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로마에 있는 성모 대성당으로 이장하여 베들레헴에는 빈 석관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