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질적 가치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둘러싸고 앞서 다루던 문제로 돌아가보자. 그중 한 가지 해석에 따르면, 인간의 생명은 그것이 지닌 풍부한 의미 때문에 다른 대부분의 존재들이 지닌 가치를 압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관점은 인간이 때에 따라서 더 중요한 다른 존재에게 압도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하는 셈이다. 그렇지만 ‘신성함’의 표준적 해석은 이런 관점을 초월한다. 거기에는 인간의 생명을 다른 어떤 사물에도 견주어보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주장이 포함된다.
다른 무엇을 위해 하나의 생명을 파괴하려 한다면 인간의 생명에 깃든 가치는 존중받을 수 없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생명의 신성함에 비추어 남을 죽여서 선을 이룬다는 생각은 허용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에 경우에 따라 생명의 신성함은 우리가 이루고 싶어 하는 모든 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나의 예로2), 이를테면 남미 정글에서 식물채집을 하다가 어느 공터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처형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보았다고 하자. 대위 한 사람의 지휘 아래 사수들이 스무 명쯤을 줄 세워 놓고 총을 쏘아댈 참이다. 나를 본 대위가 처음에는 놀라다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는 구경하도록 허락한다. 대위는 만난 것을 자축한다며, 내가 그들 중 하나를 쏘아 죽이면 나머지를 모두 살려주겠다고 제의한다. 나는 이 나라가 잔인무도한 독재국이며,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반란군을 무자비하게 소탕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처형될 이들의 대부분이 대체로 무고한 사람들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생명을 신성시 여긴다면, 어느 한 사람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생명은 누구의 것이건 신성하기 때문이다. 극단의 경우, 사람들은 더러 악질적인 죄악을 저지른 결과, 스스로 생명의 권리를 잃기도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죽어 마땅하다. 하지만 나는 한 줄로 세워져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런 경우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설령 이들 중 몇 사람이 나쁜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이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 텐데, 과연 어떻게 한 사람을 골라내야 한단 말인가? 인간의 생명이 신성하고 그리하여 내가 할 수 있는 행위에 한계가 정해져 있다면, 이들 중 한 사람의 죽음이 설령 나머지 모두를 살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가볍게 죽일 수가 없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생명의 권리가 주어지기에 모두가 ‘불간섭주의’의 존재요, 그중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생명 신성함의 원칙에, 비추어 이들을 단순히 사용 가치로만 값을 매길 일이 아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희생시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 또한 안 될 일일까?
참으로 논쟁거리가 될 만큼 중대한 문제다. 어떤 사람은 생명이 신성하다는 식의 사상이 자기 모순을 안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모순이란 이런 것이다. 한편에서는 생명이 신성하다는 것은 인간의 가치에 바탕을 둔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특히 이번 시나리오에서는 생명 신성의 원칙을 고집하면 더 많은 생명이 희생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생명의 신성함이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는 행위를 오히려 방해한다고 주장할 사람마저 있을지 모른다. 생명 신성의 원칙은 다른 목표를 위해 인간의 생명을 없애지 말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총 잡은 사내에게는 이 말이 분명히 옳았는데, 지금 줄 세워진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걸 모순이라 한다면,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는 까닭은 생명 신성에 대한 해석이 인간 생명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의무론적deontological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의무론적이란 말은 고대 그리스의 ‘법’에서 유래한 것으로, 어원은 그 발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생명 신성론의 견해는 인간의 상황을 이해할 때 이를테면, 각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소유하는 까닭에 누구라도 다른 개인의 생명을 없애는 것을 나쁜 일로 본다. 인간의 생명에 깃든 가치를 이렇듯 신성하게 보았기에, 누구라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하나의 금기로 삼게 된 것이다. 이 법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희생하여 열아홉 사람을 살리더라도 법을 어기고 탈선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각각의 인간 생명은 성스러운 것이고 인간은 모두 똑같이 이와 같은 신성을 범하지 말아야 할 의무를 진다.
의무론적 윤리학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모순, 간단히 말해서 작은 악을 행하여 더 큰 악을 미리 방지할 수 없다는 모순에 실망한 나머지 어떤 사람들은 그 반대 견해로 돌아선다. 의무론적 견해는 특정 행위를 그 자체로서 나쁜 것으로 보아 설령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라 하더라도 이를 실행에 옮겨서는 결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에 반대하는 견해에서는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을 오로지 그 행위의 결과에 비추어 판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결과주의론이라 일컫는다. 이름이 암시하듯이, 결과주의론은 도덕을 행위의 결과에 비추어 판단한다.
결과를 보기도 전에 어떤 행위가 불법하고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을 행위 자체로 미리 정해놓은 의무론과 달리, 결과주의론적 견해는 오직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만 한다면 그 행위는 정당화된다고 본다. 결과주의론적 견해에서 보면, 한 사람을 죽여서라도 열아홉 사람을 구출해야 할 일이다. 그것만이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이 이러한 견해를 잘 설명해준다. 나중에 이 두 가지 윤리이론의 차이를 자세히 검토하면서 공리주의(결과주의론)와 칸트 윤리(의무론)를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는 생명 신성론에 대한 마지막 비평으로 다음의 의문을 검토해보려 한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에 특별한 가치가 있다면 그 가치를 ‘신성하다’고 보는 것만으로 그것을 옳게 평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어떤 것이 신성하다면, 달리 더 좋은 그 무엇을 위해서라 하더라도, 그것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보호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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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스스로에게 도움을 줍니까?

 

 

 

마찰을 시작하기 전에 두 손을 딱 붙인 다음 36번(60번)을 힘을 넣어 비빈다. 그렇게 해서 손바닥을 충분히 따뜻하게 한 다음에 마찰하는 것이 효과적이며 처음뿐만 아니라 도중에도 몇 번씩 손바닥을 비비는 것이 좋다. 36번이라는 것은 태양의 황도黃道를 36도로 나누어 관찰한 중국 고 대의 6진법으로서 천체와 인체의 움직임은 같은 원리에 따른다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다.

10개의 손가락을 전부 사용하여 이마 위의 머리카락이 난 곳으로부터 목덜미까지 36번(60번)을 정성들여 문지른다. 머리카락을 이마로부터 뒤통수까지 뒤로 쓸어 넘기는 요령으로 두 손을 동시에 사용하여 약간 힘을 넣어 문지른다.

세수할 때 목을 씻는 것처럼 두 손으로 머리카락이 난 곳을 따라 힘을 넣지 않고 부드럽게 목덜미 전체를 손바닥과 손가락으로 마찰한다.

손가락으로 눈 밑을 동시에 가볍게 좌우로 36번 문지르고, 다음에 눈꺼풀을 가볍게 누른 채 눈알을 빙글 빙글 5~6차례 돌린다. 손가락에 힘을 넣지 말아야 하며, 마친 후에는 갑자기 눈을 뜨지 말 고 천천히 손가락을 뗀 다음 조용히 눈을 뜬다.

집게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으로 귀를 사이에 끼고 손가락으로 귀의 근원부根源部의 앞과 뒤 아래위로 왕복시키면서 약간 힘을 넣어 36번 마찰한다.

귓바퀴를 손바닥으로 전후좌우 36번 비빈다. 다음에 손바닥을 사용하여 귓바퀴를 접어서 귓구멍 을 덮어씌우면서 누른 채, 뒤통수에 손가락 끝을 대어 가운데손가락 위에 집게손가락을 얹은 뒤 집게손가락으로 세차게 10번 정도 퉁긴다.

집게손가락을 귓구멍 속에 넣어 10번 정도 움직인다. 그런 뒤 손가락 끝으로 귓구멍을 막는다. 그리고 강하게 압박하여 2~3초 동안 그대로 있다가 손가락을 갑자기 빼어버린다. 이것을 36번 계속한다.

한쪽 손을 완전히 펴서 얼굴을 가리는 것처럼 하여 볼의 뼈로부터 목까지 쓰다듬으면서 내려가, 목까지 내려올 때에는 턱을 위로 치켜들고 힘주어 36번 마찰한다. 좌우로 손을 교대한다.

혓바닥으로 입안을 문지르는 것. 그렇게 하면 침이 많이 생기는데 입 안의 침을 모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삼키지 말고 이를 세 번으로 나누어 천천히 삼킨다.

두 엄지로 좌우의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36번 돌려준다.

다섯 손가락 하나하나의 손톱 양 옆을 쥐고 힘을 주어 정성들여 주무른다. 양 손을 바꾸어 가며 주무르고 난 뒤에는 손가락의 관절을 하나하나 주물러서 관절에 축적되어 있는 나쁜 피를 흐르게 한다.

대장경의 합곡을 아프게 느낄 정도로 힘주어 누르거나 주무른다.

오른손 가운데손가락을 왼손 손바닥의 중앙에, 왼손 가운데손가락을 오른손 손바닥의 중앙에 각각 놓고 서로 가운데손가락에 힘을 주어 민다. 이때 가운데손가락의 끝은 손바닥에 있는 심포경心包經(젖가슴 아래에서 약손가락 끝에 이르는 경락)의 노궁勞宮(손바닥의 가운데 부위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경혈을 눌러야 한다. 이 자세에서 오른손의 힘이 강할 때에는 왼쪽 내장에, 왼손 힘이 강하면 오른쪽 내장에 결함이 있다.

가슴과 배는 손을 문지르는 일이 적은 곳이지만 그만큼 폐 위장 심장 등 내장에 미치는 효과는 크다. 오른손 손바닥으로 오른쪽 가슴에서부터 배꼽을 지나 허리까지, 다음에 왼손 손바닥으로 왼쪽 가슴에서부터 배꼽을 지나 허리까지, 좌우 교대로 36번 힘을 넣어서 마찰한다.

손바닥을 무릎에 덮어씌우는 것처럼 하여 빙글빙글 돌린다.

특히 족삼리足三里(경골조면脛骨粗面 아래에서 굵은 정강이뼈의 앞기슭으로부터 바깥쪽에 있다. 족삼리혈은 보건保健혈, 혹은 강장强壯혈이라고 해서 건강을 지키는데 많은 역할을 한다) 마찰은 식욕이 왕성해진다고 하며, 또한 예로부터 피로해지지 않기 위한 결혈이므로 지금도 해외여행을 떠날 때에 족삼리에 뜸질을 하고 떠나는 사람이 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한 번 뜸질을 하면 3개월 정도 효과가 지속된다. 발꿈치로 마찰할 수 없는 경우에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한다.

정강이 바깥쪽을 반대 발의 발꿈치로, 무릎 밑에서부터 발목 가까이까지 단숨에 문질러 내려가 족삼리 등의 경혈을 마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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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李贄의 <동심설童心說>

 

 

 

진심盡心이란 말이 있고, 진심眞心이란 말이 있다. 사전을 보니 진심盡心은 마음을 다 기울인다는 뜻으로 자기의 양심良心을 철저히 발휘發揮함을 말하고, 진심眞心은 거짓 없는 참된 마음을 말한다. 진심盡心에 대한 용례를 맹자孟子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자기의 마음을 다하면 자기의 성을 안다. 자기의 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되는 것이다孟子曰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라고 하였다.

사랑을 고백할 때에 진심盡心이란 말을 사용하게 되면 마음을 다해서 사랑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진심眞心이란 말을 사용하게 되면 참된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뜻이 된다. 뜻을 모르고 써도 사랑을 고백을 받는 사람은 매우 흡족해 할 것 같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마음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에 사악한 음모가 내재해 있다면 진심盡心으로 사랑하는 것이 매우 위험할 것 같다. 참된 마음으로 사랑하는 건 그 어떤 의도가 내재해 있지 않음을 의미하므로 사랑을 할 때에는 진심眞心으로 하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진심眞心이란 무엇일까?

명나라 말 양명좌파 이지李贄(1527~1602)는 “대저 이미 견문과 이론으로 마음을 삼으면, 말하는 것이 모두 견문과 이론의 말이지 동심에서 저절로 나오는 말이 아니니라夫旣以聞見道理爲心矣則所言者皆聞見道理之言非童心自出之言也”라고 했다. 이지의 말대로라면 공부를 많이 하고 논리적인 사람은 동심童心을 잃어버렸을 확률이 꾀 높다. 학식이 오히려 참된 마음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다음은 이지의 <동심설>이다

夫童心者眞心也(부동심자진심야)

아이의 마음은 진심이다.

若以童心爲不可是以眞心爲不可也(약이동심위불가시이진심위불가야)

아이의 마음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진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라.

夫童心者絶假純眞最初一念之本心也(부동심자절가순진최초일염지본심야)

아이의 마음이란 거짓을 버려 순수하고 참되어서 처음 가진 생각의 본마음이다.

若失却童心便失却眞心(약실각동심편실각진심)

아이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참된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失却眞心便失却眞人(실각진심편실각진인)

참된 마음을 잃어버리면 참된 사람을 잃어버리게 된다.

人而非眞全不復有初矣(인이비진전불복유초의)

사람이 되어서 진실하지 못하면 절대로 처음 가진 마음을 회복하지 못한다.

夫旣以聞見道理爲心矣則所言者皆聞見道理之言非童心自出之言也(부기이문견도리위심의칙소언자개문견도리지언비동심자출지언야)

대저 이미 견문과 이론으로 마음을 삼으면, 말하는 것이 모두 견문과 이론의 말이지 동심에서 저절로 나오는 말이 아니니라.

言雖工於我何與(언수공어아하여)

비록 말이 공교로워도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豈非以假人言假言而事假事文假文乎(기비이가인언가언이사가사문가문호)

거짓된 사람으로서 거짓된 말을 빌어 거짓된 일을 일삼아 거짓된 문장을 짓는 것이 어찌 올바르겠는가.

이 시를 지은 이지李贄의 원래 이름은 재지載贄, 호는 탁오卓吾이며 이름 바꾸기를 즐겨 생전에 무려 47가지에 달하는 호를 사용했다. 복건성 천주 출신으로 조상 중에는 이슬람 문화와 긴밀하게 교류한 이도 있었지만, 이지 본인은 중국의 전통문화 안에서 성장했다. 훗날 주자학과 양명학은 물론 노장老莊과 선종禪宗, 제자백가며 기독교, 회교까지 두루 섭렵한 이력으로 인해 그의 사상은 중국 근대 남방문화의 결정체로 설명된다.

26세 때 거인擧人에 합격하여 하남ㆍ남경ㆍ북경 등지에서 줄곧 하급 관료생활을 하다가 54세 되던 해 운남의 요안지부를 끝으로 퇴직했다. 40세 전후 왕양명과 왕용계의 저작을 처음 접한 뒤 심학心學에 몰두했지만 나이 들어서는 불교에 심취해 62세에 정식으로 출가하고 절에서 기거하였다. 유가의 정통사관에 도전하는『장서』를 집필했고, 성현이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경전을 해설한『사서평』을 출간했으며, 선진 이래 줄곧 관심 밖이었던『묵자』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기도 했다. 스스로 이단을 자처하며 유가의 말기적 폐단을 공격하고 송명이학의 위선을 폭로한 그에게 세인은 양쪽으로 갈려 성인과 요물이란 극단적인 평가를 부여했다. 결국 혹세무민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혀있던 중 76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저작들은 명ㆍ청대의 가장 유명한 금서였지만 대부분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빌린 수많은 위작 또한 횡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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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맹姜希孟의 훈자오설訓子五說(삼치설三稚說)

 

 

훈자오설訓子五說이란 자식을 훈계한 다섯 가지 이야기로 도자설盜子說(도둑의 아들), 담사설膽巳說(뱀을 잡아먹음), 등산설登山說(높은 산에 오름), 삼치설三雉說(꿩을 잡는 이야기), 요통설曜通說(오줌통의 이야기)을 말한다.

삼치설三稚說

꿩은 본래 뽐내기를 좋아하고 싸움을 잘한다. 한 마리의 장끼는 여러 마리의 까투리를 거느리고 산등성이나 산자락에서 노닌다. 특히 봄과 한여름은 번식기라서 까투리의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면 수놈인 장끼들이 그 소리를 듣고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까투리 곁으로 날아간다. 그럴 때면 사람이 곁에 있어도 두려워하지를 않는다. 그것은 자기가 까투리를 먼저 차지하려는 데 있다. 이런 때에 사냥꾼은 덧을 치고 까투리를 미끼로 잡아매 놓고는 까투리의 울음을 흉내 내며 수놈을 유인한다. 그러면 수놈은 그 죽은 까투리 앞에 늠름하게 선다. 그때 사냥꾼은 미리 설치해 놓은 그물로 장끼를 덮어 씌워 하루에도 수 십 마리씩을 잡는다고 한다.

나는 사냥꾼에게 물어 보았다.

“꿩들의 욕심이 모두 같은가, 아니면 모두 다른가?”

“그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산비탈이나 낮은 산기슭에는 수천 마리의 꿩이 있는데 저는 매일 같이 그곳에 가서 잡습니다. 그런데 어떤 놈은 그물을 한 번 만에 잡을 수 있고, 어떤 놈은 두세 번 만에 잡는 수도 있고, 또 어떤 놈은 처음에 못 잡으면 끝내 못 잡는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제가 나무사이에 숨어서 대나무 통을 불며 미끼 까투리를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면 장끼란 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듣다가 목을 길게 뽑아 바라본 뒤에 땅을 박차고 빠르게 날아옵니다. 주위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런 놈은 한 번에 잡습니다. 이는 꿩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놈으로 화근禍根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대나무 통을 한번 불고 미끼를 한번 움직일 때는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양 있다가, 두세 번 만에야 겨우 마음을 조금 움직여 고개를 뽑고 한동안 망설이다가 열 자쯤 날아올라 공중을 한 바퀴 돌고는 두려운 기색으로 가까이 다가옵니다. 이런 놈은 한 번 그물을 덮어 씌워서는 대부분 도망갑니다. 그리하여 두세 번쯤은 시도한 뒤에야 겨우 잡을 수 있습니다. 이런 놈은 꿩 중에 경계하는 마음이 많은, 화를 면하려 노력하는 놈입니다. 그밖에 지팡이 소리만 들어도 놀라서 후다닥 숲속으로 미련 없이 날아가 버리는 놈이 있습니다. 저는 이놈을 굳이 잡아 보려고 날마다 숲속을 헤매면서 온갖 방법으로 유인해보지만 그놈이 사람을 꺼리는 것은 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마른 나무 등걸처럼 숨을 죽이고 서서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보았으나 그놈은 욕심이 적고 경계하는 마음이 많아서 좀처럼 가까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뒤로 이런 놈은 대나무 통이나 미끼로는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마디로 이런 꿩은 가장 영특해 화를 멀리할 줄 아는 놈입니다.”

나는 사냥꾼 이야기를 들으며 이것이 족히 세상 사람에게 교훈敎訓을 준다고 생각하였다. 즉 쓸데없는 친구를 사귀고 여색을 좋아하며 남의 충고忠告를 무시하는 자는 부모도 가르칠 수 없고 좋은 친구도 그것을 말릴 수 없어서, 뻔뻔스럽게 나쁜 짓을 일삼다가 결국은 죄를 짓고 감옥에 가게 되지만 그러고도 끝내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이것이 단 한 번의 그물로 잡히는 꿩과도 같은 무리이다.

또 처음에는 욕망에 눈이 어두웠다가도 화가 두려워 몸을 도사리기는 하지만 주위의 나쁜 친구들이 꾀고 온갖 수단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면 결국 화근에 말려드는 사람이 있으니, 이런 사람이 바로 두 번쯤 그물에 잡을 수 있는 꿩과 같은 무리이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성격이 올곧아 스스로 자신을 자제하고 여색을 멀리하며 욕망에 초연한 사람은 나쁜 친구들이 감히 그의 뜻을 움직일 수 없어 주위에는 좋은 친구들만 있게 된다. 혹시 잘못을 저지르게 되더라도 뉘우치며 날마다 새로워져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데 이런 사람은 그물 같은 것으로는 잡을 수 없는 꿩과 같은 무리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좋은 도구와 훌륭한 기술로 많은 꿩을 잡는 것은 마치 나쁜 친구들이 마음 착한 사람을 유인하여 헤어날 수 없는 곳에 빠트리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꿩 중에도 대나무와 미끼를 피할 수 있는 놈이 적은 것처럼 사람도 자신의 비위를 맞추어 주고 아첨하는 말을 따르지 않는 자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하거늘 부모로서 자기 자식이 단 한 번의 그물로 잡힐 수 있는 그런 무리가 되기를 원하겠는가? 아니면 평생 잡히지 않는 욕심 없는 꿩과 같아지기를 원하겠는가?

그러니 너희들은 반드시 그런 것을 분별할 줄 알아 소홀히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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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지Massage가 무엇입니까?

 

 

마사지Massage란 말은 아라비아어의 압박Mass과 그리스어의 ‘주무르다’에서 기원한 것으로, 피부, 근육에 적당한 자극을 주어서 치료하는 방법이다. 마사지는 혈액, 임파액, 조직액 등 체액의 흐름을 촉진하여 국소의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함으로써 피로 물질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다. 오늘날 마사지는 과학적 치료 수단으로서 지체부자유, 두개 내 혈관손상, 신경장애, 그 밖의 여러 가지 운동실조, 스포츠나 노동의 피로 회복이나 준비운동 등에 널리 이용된다. 마사지의 기법은 호파A. Hoffa에 의하여 무마법撫摩法(어루만질 무), 유날법揉捺法(주무를 유, 누를 날), 마찰법, 타박법打拍法(칠 타, 칠 박), 진전법振顫法(떨칠 진, 떨 전) 등 다섯 가지로 분류되어 있다. 보통 한 군데에 소요되는 실시 시간은 10~15분이고 순서는 무마법으로 시작, 유날법, 마찰법을 병용하여 때로는 타박법, 진전법을 혼합, 다시 무마법으로 끝낸다. 유날법이란 엄지와 나머지 네 손가락의 손끝으로 근육을 잡아서 압박하고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말초로부터 중추를 향하여 비비는 방법이다.

마사지에 의해 혈액이나 림프의 순환을 촉진하고 신진대사를 왕성하게 하여 조직의 영양을 높여주며, 노폐물을 배설하도록 하고 저항력을 증강시켜 준다. 이 촉압자극觸壓刺戟은 신경을 자극하여 진통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마비된 신경의 회복을 촉진하고, 내장기능의 변조를 바로잡는 효과가 있다.

마사지가 치료법으로 체계화된 것은 16세기 후반~19세기 말에 유럽에서 비롯되었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의료상의 마사지는 이학요법사理學療法士가 의사의 지시나 처방에 따라 기능 훈련과 함께 사용하여 행하는 기술로서 현대의학에서 순환생리학循環生理學의 원리를 기초로 하여 전신에 퍼진 혈액을 효율적으로 심장에 되돌려 보내기 위한 구심성求心性 치료법이다.

마사지를 할 때는 아연화亞鉛華·녹말·향료香料 등을 섞은 마사지 파우더나 유지油脂·글리세린·올리브유·크림 같은 마사지 오일을 사용하며, 시술시간은 국소는 5~15분, 전신은 30∼40분으로 하루 한 번이면 충분하다. 적응증에는 근육운동의 도움·근육피로·근위축筋萎縮·연축攣縮·만성관절질환·신경통·만성변비증 등이고, 금기증禁忌症으로는 급성질환·발열시·전염성 피부질환·결핵증·출혈성 순환기질환·악성종양·지나친 쇠약 등이 있다.

마사지는 안마와 혼동되기 쉽다. 안마는 원심성遠心性의 수기라는 차이가 있기는 하나, 실제의 시술에 있어서는 둘 다 함께 실시한다. 그리고 마사지사師의 자격은 법으로 정해져 있으며, 소정의 시험에 합격해야만 면허가 주어진다. 따라서 마사지사는 1975년 12월 31일 개정 시행된 의료법 제6장 제61조의 적용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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