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질적 가치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둘러싸고 앞서 다루던 문제로 돌아가보자. 그중 한 가지 해석에 따르면, 인간의 생명은 그것이 지닌 풍부한 의미 때문에 다른 대부분의 존재들이 지닌 가치를 압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관점은 인간이 때에 따라서 더 중요한 다른 존재에게 압도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하는 셈이다. 그렇지만 ‘신성함’의 표준적 해석은 이런 관점을 초월한다. 거기에는 인간의 생명을 다른 어떤 사물에도 견주어보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주장이 포함된다.
다른 무엇을 위해 하나의 생명을 파괴하려 한다면 인간의 생명에 깃든 가치는 존중받을 수 없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생명의 신성함에 비추어 남을 죽여서 선을 이룬다는 생각은 허용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에 경우에 따라 생명의 신성함은 우리가 이루고 싶어 하는 모든 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나의 예로2), 이를테면 남미 정글에서 식물채집을 하다가 어느 공터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처형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보았다고 하자. 대위 한 사람의 지휘 아래 사수들이 스무 명쯤을 줄 세워 놓고 총을 쏘아댈 참이다. 나를 본 대위가 처음에는 놀라다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는 구경하도록 허락한다. 대위는 만난 것을 자축한다며, 내가 그들 중 하나를 쏘아 죽이면 나머지를 모두 살려주겠다고 제의한다. 나는 이 나라가 잔인무도한 독재국이며,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반란군을 무자비하게 소탕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처형될 이들의 대부분이 대체로 무고한 사람들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생명을 신성시 여긴다면, 어느 한 사람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생명은 누구의 것이건 신성하기 때문이다. 극단의 경우, 사람들은 더러 악질적인 죄악을 저지른 결과, 스스로 생명의 권리를 잃기도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죽어 마땅하다. 하지만 나는 한 줄로 세워져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런 경우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설령 이들 중 몇 사람이 나쁜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이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 텐데, 과연 어떻게 한 사람을 골라내야 한단 말인가? 인간의 생명이 신성하고 그리하여 내가 할 수 있는 행위에 한계가 정해져 있다면, 이들 중 한 사람의 죽음이 설령 나머지 모두를 살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가볍게 죽일 수가 없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생명의 권리가 주어지기에 모두가 ‘불간섭주의’의 존재요, 그중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생명 신성함의 원칙에, 비추어 이들을 단순히 사용 가치로만 값을 매길 일이 아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희생시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 또한 안 될 일일까?
참으로 논쟁거리가 될 만큼 중대한 문제다. 어떤 사람은 생명이 신성하다는 식의 사상이 자기 모순을 안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모순이란 이런 것이다. 한편에서는 생명이 신성하다는 것은 인간의 가치에 바탕을 둔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특히 이번 시나리오에서는 생명 신성의 원칙을 고집하면 더 많은 생명이 희생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생명의 신성함이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는 행위를 오히려 방해한다고 주장할 사람마저 있을지 모른다. 생명 신성의 원칙은 다른 목표를 위해 인간의 생명을 없애지 말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총 잡은 사내에게는 이 말이 분명히 옳았는데, 지금 줄 세워진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걸 모순이라 한다면,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는 까닭은 생명 신성에 대한 해석이 인간 생명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의무론적deontological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의무론적이란 말은 고대 그리스의 ‘법’에서 유래한 것으로, 어원은 그 발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생명 신성론의 견해는 인간의 상황을 이해할 때 이를테면, 각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소유하는 까닭에 누구라도 다른 개인의 생명을 없애는 것을 나쁜 일로 본다. 인간의 생명에 깃든 가치를 이렇듯 신성하게 보았기에, 누구라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하나의 금기로 삼게 된 것이다. 이 법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희생하여 열아홉 사람을 살리더라도 법을 어기고 탈선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각각의 인간 생명은 성스러운 것이고 인간은 모두 똑같이 이와 같은 신성을 범하지 말아야 할 의무를 진다.
의무론적 윤리학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모순, 간단히 말해서 작은 악을 행하여 더 큰 악을 미리 방지할 수 없다는 모순에 실망한 나머지 어떤 사람들은 그 반대 견해로 돌아선다. 의무론적 견해는 특정 행위를 그 자체로서 나쁜 것으로 보아 설령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라 하더라도 이를 실행에 옮겨서는 결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에 반대하는 견해에서는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을 오로지 그 행위의 결과에 비추어 판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결과주의론이라 일컫는다. 이름이 암시하듯이, 결과주의론은 도덕을 행위의 결과에 비추어 판단한다.
결과를 보기도 전에 어떤 행위가 불법하고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을 행위 자체로 미리 정해놓은 의무론과 달리, 결과주의론적 견해는 오직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만 한다면 그 행위는 정당화된다고 본다. 결과주의론적 견해에서 보면, 한 사람을 죽여서라도 열아홉 사람을 구출해야 할 일이다. 그것만이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이 이러한 견해를 잘 설명해준다. 나중에 이 두 가지 윤리이론의 차이를 자세히 검토하면서 공리주의(결과주의론)와 칸트 윤리(의무론)를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는 생명 신성론에 대한 마지막 비평으로 다음의 의문을 검토해보려 한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에 특별한 가치가 있다면 그 가치를 ‘신성하다’고 보는 것만으로 그것을 옳게 평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어떤 것이 신성하다면, 달리 더 좋은 그 무엇을 위해서라 하더라도, 그것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보호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