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 믿음도 의지의 행위로 간주했다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예로서 뼈(os)의 발음을 짧게 해야 할지 길게 해야 할지의 문제를 두고 발음을 짧게 하면 단수를 가리키는 뼈(ossa, a bone)가 되지만 길게 하면 단수를 가리키는 입(ora, a mouth)이 된다고 했다.
이런 경우 앞에 나타난 문장을 이해해야 해석이 가능한데 그리스인에게는 입(stoma)이 아닌 뼈(ostoun)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는 올바른 발음은 옆에 사용된 단어에 따라서 결정된다면서 다음의 구절을 예로 들었다.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라디아서 5:21)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이 만일 “내가 경계한 Praedico”이라고만 쓰고 “내가 전에 경계한 것 같이 as I warned (praedixi) you before”란 말을 쓰지 않았다면 앞에 말에 대한 참조 없이 중간에 있는 음절 경계(praedico)의 발음을 길게 해야 할 것인지 짧게 해야 할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는 바울이 “내가 전에 설교한 것 같이 as I preached (praedicavi) to you”라고 하지 않고 “내가 전에 경계한 것 같이”라고 적었으므로 중간에 있는 음절을 길게 발음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구두점과 발음 말고도 성경에는 모호한 구절들이 많은데 이런 경우 유사한 방법으로 해석할 것을 권유하며 다음의 구절을 예로 들었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데살로니가전서 3:7)


우리는 여러분을 알게 되어 위로를 받았습니다. (공동번역)
Consequently we have cheered, brethren, over you.


그는 위의 구절에서 “여러분 brethren”에서 교인들이 호격(vocative)으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대격(accusative, 직접 목적격)으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신앙과는 무관하므로 자유롭게 해석해도 좋다고 했다.
그리스인이 전적으로 호격으로 사용되었음을 지적하면서 만일 어떤 사람이 위의 구절을 “우리는 여러분을 알게 되어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Consequently we have been of good cheer, brethren, over you”라고 번역했다면 적절한 방법으로 해석한 것은 아니지만 적절하게 뜻을 나타낸 것이라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개념에 하나님이 세계의 창조주이며 지배자라는 개념을 융합시켰다.
신플라톤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악(malum)을 분석하고 정의한 후 악을 실재의 결여로 이해했으며 창조물을 합리적인 것과 불합리적인 것으로 구별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성경으로부터 죄악이란 사탄의 유혹에 대한 사람의 자발적인 굴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388-395년에 쓴 저서 『자유 의지론 De Libero Arbitrio』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영혼의 모든 기능을 다스리고 그것을 움직이며 활동하도록 하는 것은 사람의 의지이다.


그는 믿음도 의지의 행위로 간주했다. 신플라톤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단순히 심미적으로만 경험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가 의지를 가리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라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체험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의 구원론에서는 죄책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울에게서 발견되는 죄책감과 비교할 만하다.
그는 죄의식으로부터 경건함이 비롯된다고 믿었으며, 세례가 죄를 사면해 준다고 믿었고, 그리스도를 죄인들의 구주로 믿었다.
구원이란 하나님에 대한 화해이며 죄의식은 하나님을 유화시키고 만족하게 하는 행위였다.


결론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를 기억, 이해, 의지에 비유했으며 이 세 가지가 온전할 때 일체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성경에 대한 해석의 방법론을 제시해 성경에 대한 해석의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했다. 무엇보다도 특기할 만한 점은 가톨릭 교회의 절대권위를 주장한 데 있다.
그의 교회관은 413년부터 426년까지 13년 동안 걸려 쓴 『신의 도성 De civitate Dei』에 잘 나타나 있다.
최초의 역사 철학서로 알려진 이 저술은 모두 22권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와의 관계를 다루었다.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원리를 가진 두 나라가 끊임없이 서로 접촉하는데 이 두 나라의 기원은 악한 천사의 타락에서 비롯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나라의 역사적 발전은 카인의 후예와 아벨의 후예로 구별되며 마침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와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지상의 도성(civitas terrena huius mundi)으로 대립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왔다고 보았다.


구원받은 사람을 그는 하나님의 도성을 순례하는 순례자라고 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이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하며 외면적으로만 교회에 속한 교인과 진정한 의미로 교회에 속한 교인을 구별했다.
또한 교회를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부름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절대권위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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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론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삼위일체론은 수세기 동안 신학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삼위일체론은 예수가 진정으로 구속자라면 그가 하나님이어야 마땅하다는 견해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다신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밝혀 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많은 토론과 논쟁의 결과로 마침내 삼위일체의 교리가 만들어졌는데 한 분 하나님의 존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으로 구별되며, 그들은 동일한 신적 본질을 지녔고, 오직 기능에서만 다를 뿐이라는 견해가 유력했다.
이렇게 신성 문제는 매듭지어졌는데 그리스도가 신성을 지녔다는 데 이의를 제기한 감독은 없었기 때문이다.


남은 과제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처리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필요로 했는데 가현설이 많은 그리스도인을 사로잡았다.
가현설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이기도 해서 이에 대항하기 위해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육체성을 나타내는 언어를 구사하고 이 언어를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설명해야 했다.
그리스도론이 신학에서 쟁점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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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툴리아누스,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했다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론의 문제가 부상될 것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말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중의 품성을 본다.
그것은 서로 혼합되지 않고 하나님이며 인간인 예수의 한 인격 안에 결합되어 있다.


당시 신학자들은 지나치게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에 의존해서 그리스도론을 전개하려고 했는데 이런 시도에 저항한 신학자들 가운데 테르툴리아누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는 과격한 말로써 저항했다.


학문과 교회 사이에 무슨 일치가 있을 수 있을까?
스토아적이고, 플라톤적이며, 변증법적 방법으로 연합된 잡종의 그리스도교를 만들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집어쳐라.
우리는 믿음에 있어 그 이상의 신념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철학자들의 이론을 필요 없는 것으로 치부했으며 그리스도교를 이성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신학자들을 비난했다.
저서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하여 On the Flesh of Christ』에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내가 그 사실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십자가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반드시 믿어져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불합리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이 확실한 이유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며 처음으로 삼위일체를 주장했다.
전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에게 신성이 있다는 그의 주장은 논리적인 귀결이었다. 210년경 프락시아스(Praxeas)의 가르침에 대해 반박하는 가운데 그는 그리스도에게 인성 말고도 신성이 있음을 언급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이라는 신인동성론(神人同性論 anthropomorphism)을 제기했는데 이는 하나님을 사람(anthropos)의 이미지(morphe)로 만든 것이다.


유대인과 초기 그리스도인은 플라톤의 영원한 정신적 영역(eternal)의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비물질의 순수현존이란 개념을 신성에 대한 정의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존재자(being)란 말을 접속하여 하나님을 영원한 존재자(eternal being)인 인격적인 정신적 영역으로 묘사했다.


그리스인에게 신은 인격자가 아니었지만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정신세계의 영역을 차지하는 분으로 비물질의 순수현존자였다.
신학과 철학의 구별은 신성에 대한 인격화 때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하늘나라 kingdom of heaven”를 “하나님의 나라 kingdom of God”로 불러서 신성을 인격화했다.
그리고 유대인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꺼려한 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게 인성이 있다는 주장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해와 빛 또는 샘과 강물의 관계로 묘사해 둘을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다.
프락시아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한 사람으로 간주하면서도 그리스도는 예수이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라고 해서 한 실체로 인식하기보다는 둘로 분리했다.
즉 예수의 육신과 영을 분리하면 육신으로서의 예수는 그리스도이고 영으로서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란 말이 되는데 이는 결국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행위이므로 프락시아스의 일원론은 오히려 예수와 그리스도를 이원화한다고 비난받았다.


프락시아스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으로 묘사했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하나님을 이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하며 이런 명칭들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닌 속성에 속할 뿐이라고 역설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누가복음 1:35)


프락시아스는 위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태어난 육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테르툴리아누스는 육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육신에 내재한 영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다.
그는 마리아가 잉태한 것이 성령이었음을 상기시키며 마리아로부터 태어난 아기는 하나님의 육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라고 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3)


위의 구절은 예수의 육신이 하나님이란 뜻이 아니며 하나님이 예수의 육신 안에 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시편 87:5)

그러나 시온은 사람마다 어머니라 부르리라
모두 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공동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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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툴리아누스, 하나님의 형상은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성경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고 아버지의 뜻대로 성장했다”라고 했는데 흥미롭게도 그가 인용한 구절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다.
예수가 태어난 사건은 하나님의 뜻대로 영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태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가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육신 안에 그리스도가 내재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은 불변하는 분이므로 그분의 형상은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
그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변했다는 것은 그분 본래의 형상이 사라진 것을 뜻하며 하나님 본래의 형상이 변하지 않는 한 이런 일은 발생할 수 없다고 했다.
즉 예수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영원히) 서리라 하라 (이사야 40:8)


테르툴리아누스는 하나님이 예수의 몸으로 태어날 때 만일 하나님의 형상이 육신으로 변했다면 예수는 두 가지 물질인 육신과 영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라 추론했다.
그리고 이는 금과 은이 합금되었다는 말과도 같아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했는데 합금의 경우 금(또는 영)은 더 이상 금이 아니고, 은(또는 육신)도 더 이상 은이 아니며, 두 개의 실체가 어우러져서 제3의 실체를 형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도 합금의 경우와 같이 제3의 실체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육신으로 변했다는 주장은 결코 받아들일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했다.
그는 신약성경 저자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또는 인자)’로 부른 것은 예수에게 하나님과 사람의 실체가 각각 내재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의 실체가 예수에게 내재했음을 성경 속에서 지적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인성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거룩한 신성으로는)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서 1:3-4)


테르툴리아누스는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이중적 상황이 예수에게 나타난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실체가 예수로 하여금 기적과 놀라운 일, 표적을 나타낼 수 있도록 했던 반면, 사람의 실체는 사탄의 시험을 받을 때 굶주림을 느끼도록 했으며,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는 목마름을 느끼도록 했고, 나사로가 사망했을 때는 울도록 했으며,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 왔을 때 괴로워하며 사망하게 했다고 한다.
그는 예수가 만일 두 실체가 한데 어우러져 변화된 제3의 실체에 불과하다면 이상과 같이 언급한 하나님과 사람의 실체로서의 뚜렷한 사건들이 일어났을 리 만무하다고 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일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변화된 것이라면 육신은 불멸하고 그리스도는 멸하게 되어 그리스도가 사망했을 수도 있으며 육신은 사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즉 육신과 그리스도의 두 실체가 각기 작용한 때문에 육신과 그리스도는 각기 자신의 운명을 따랐다는 것이 그의 신학의 요지이다.
그는 요한의 말을 인용해 자신의 이론을 옹호하였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한복음 3:4-7)


테르툴리아누스는 육신이 그리스도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육신이 될 수도 없지만 둘이 일체로 공존할 수는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가 육신을 지닌 점에서는 사람이지만 그리스도인 점에서는 하나님임을 명확히 해 두면서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육신 안에 내재했다고 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디모데전서 2:5)


변증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종속되었다고 주장한 테르툴리아누스는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와 함께 일체를 이루지만 동시에 아들이 아버지와는 다른 점을 지적했다.
그는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보다 더욱 위대하신 이유는 생명을 부여한 아버지가 낳음을 받은 아들보다 낫기 때문이며, 보내신 분이 보내심을 받은 분보다 낫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한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된 것이 아니라 연합되었다고 했으며 두 본성은 각기 다르다고 했다.
그리스도가 숨을 거두기 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쳤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런 외침을 한 분은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인간 아들이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죽으셨고 하나님께서 못박히셨다 Deus mortuus and Deus crusifixus”라고 말한 적도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그에게 이 말은 모순이 아니었다.
그는 로고스가 육체 가운데 즉 진흙 속에 유형적 모습으로 나타났어도 그것이 육체로 변화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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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비우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창조물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는 중보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가이사랴의 감독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가 예수에 내재한 것을 하나님의 겸양으로 보고 예수의 인간적 면모가 그리스도의 외향적 면이라고 했다.
그는 신약성경 저자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그리스도,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힘, 통치자, 지도자, 왕, 하나님, 또는 주로 부른 이유는 그들이 예수와 하나님이 공존하는 분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를 ‘정의의 태양’ 또는 ‘참빛’으로 부른 이유는 예수가 무형의 존재들과 영적 주문을 교화시킨 까닭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의 협조자 또는 조물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그분을 도왔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창조물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는 중보 또는 중재자로서 창조물의 편에서 보면 사제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는데 그가 오리게네스의 신학을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리게네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그리스도의 기능이 하나님과 창조물 사이를 중재하는 것으로 인식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비해 열등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예수가 영원한 대사제이면서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불리었음을 지적한 데서는 당시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불렀는지를 알 수 있다.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가 천사들의 통치자 즉 하늘나라 군대의 통솔자가 된다고 했던 선지자들의 예언을 언급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주권이) 매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탁월한 분이라).
모사 (경륜가)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평화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5-6)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호수아 5:14-15)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류를 돕기 위해서 지상에 왔다고 하며 그리스도가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로 불리었음을 지적했다.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거룩한 영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이사야 63:11)


유세비우스는 예수가 구원의 약속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구세주 또는 의사라고 불렀으며 예수의 이름 또한 히브리어로는 그러한 뜻이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모습으로 와야 할 시기를 알고 지상으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예배를 가르쳐 주었으며 이를 통해 인류의 영혼을 치유하고 죽음으로부터 영혼을 구원하려고 했다.
유세비우스는 예수가 우리와 같은 몸으로 태어나 인성을 지녔지만 하나님의 신성도 지녔으며 섹스에 의해서 태어난 분이 아니라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인성은 그리스도의 외향적 면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기적과 놀라운 일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 보였고 생애의 마침은 그 시작과도 같았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자기의 목숨을 내어준 것이며 부활한 그리스도는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능력으로 사람들을 구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악마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브리서 2:14-15)


유세비우스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서 23:46)라고 말한 후 숨을 거두었음을 지적하면서 이것은 예수의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이라 했다.
그는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육신의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아주 오래된 사망의 어둠의 문을 부수고 살아나 잠든 옛 성도들 또는 성인들을 깨우고 그들을 하늘나라의 거룩한 도시로 인도하는 분이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옛 성인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마태복음 27:50-53)


위와 같은 사건을 그는 선지자의 말과 관련시켰으며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권능이 있다고 예고한 것을 언급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사야 25:8)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호세아 13:14)
내가 이스라엘을 스올의 (죽음의 신의) 손아귀에서 건져 내리라.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빼내리라.

“죽음아, 네가 퍼뜨린 염병은 어찌 되었느냐?” (공동번역)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린도전서 15:55-56)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공동번역)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의 첫 번째 가르침으로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라고 말했음을 꼽았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14:9)


그리고 그리스도의 두 번째 가르침으로는 예수가 율법의 저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몸소 저주받았음을 꼽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구원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의 세 번째 가르침으로는 십자가처형을 통해서 인류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에게 바친 것을 꼽았는데 이것은 예수가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룬 사건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네 번째 가르침으로 마귀들의 힘을 분쇄한 것을, 다섯 번째 가르침으로는 친구와 제자들에게 사망 후 인생에 희망을 가질 것을 단지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직접 보여 준 것을 꼽았다.
유세비우스는 그리스인과 이방인을 포함해 인류가 이제 유일신인 하나님의 참 지식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인류는 예수를 통해 무지의 죄에서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죄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최고의 지혜와 덕이 있는 인생으로서의 삶과 구원을 소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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