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는  아타나시우스가 본질과 실체를 유사한 말로 사용해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서방 신학에 명확한 방향과 독특한 특징을 부여한 사람은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지만 독특한 특징을 더욱 명확하게 하고 삼위일체론에 근거해서 교리를 완성한 사람은 가톨릭 신학의 왕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였다.
동방의 신학은 캅파도키아 학파에 의해서 어느 정도 완성단계에 도달했는데 서방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진전이 기대되었다.
부분적으로 동방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의 입장에서 신학을 완성했으므로 서방 신학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위상은 거의 절대적이다.
가톨릭의 교리 가운데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보수주의적이든지 진보주의적이든지 중세의 신비주의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톨릭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차지하는 권위는 거의 성경에 비길 만했으며 훗날 종교개혁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죄와 은혜에 관한 신학에서 은혜로만(sola gratia) 획득하는 구원에 대한 강조는 로마 가톨릭의 근본 원리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16세기 종교개혁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보수주의자들에게도 호감을 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름은 비단 교리사뿐만 아니라 문화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저서들은 신학 외에 철학, 문학, 교회정치, 그리고 법률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끼쳤다.
고대문화를 집대성하고 그 유산을 신학과 조화시키는 일에서 그는 어느 라틴 사람보다도 뛰어났는데 특히 철학과 신학 양 분야에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사라져 가는 로마 문화를 재활했으며 한 편으로는 향후 천 년의 신학 기초를 다졌다.
그가 타계한 후 수세기 동안 많은 신학자들이 그가 제기한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했고, 그의 신학을 가꾸었으며, 혹자들은 그의 저서를 참고원전으로 삼았다.
중세 스콜라 철학, 신비주의, 교황의 교회정치 및 개혁에는 모두 그의 영향이 미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타나시우스가 본질과 실체를 유사한 말로 사용해 세 인격의 관계를 한 본질로 이해한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였다.
저서 『삼위일체에 관하여 De Trinitate』에서 세 인격의 실체를 기억(memory), 지성(intelligence), 의지(will)에 비유하면서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의 당위성을 확보했다.
『삼위일체에 관하여』를 410년경에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이 호의를 나타냈는데 하나의 신적 본질에 기초해서 삼위일체적 관점을 진전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명료하게 밝히려고 한 것은 신적 통일성의 구조 안에 삼위가 내포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삼위성은 이 통일성 가운데 내포되었다는 점이다.
즉 삼위일체를 하나의 신적 본질 안의 세 단면들이 내부적으로 가지는 필연적인 관계로 묘사했다.
하지만 사람이 생전에 이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더구나 그것의 개념적인 용어를 제대로 설명하는 일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이면서 동일한 실재 안에 있는 세 가지 사물의 상관관계를 증명해 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가능한 유추적 해설방법들을 동원했다.
불완전했지만 삼위일체의 내적 실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일에는 사람의 영혼구조를 사용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그 대상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amans)과 사랑받는 사람(guod amatur) 그리고 사랑 자체(amor) 사이의 관계를 암시한 것이다.
이에 상응하는 관계를 그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에 적용했다.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학파에 속한 사람이다.
그의 생애와 사상의 진전과정은 저서 『참회록 Confessions』, 『취소 Retractions』, 그리고 제자 포시디우스(Posidius)가 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Vita Augustini』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는 알제리아 누미디아(Numidia)의 타가스테(Tagaste)에서 354년 11월 13일에 태어났고, 아버지 파트리시우스(Patricius)는 중산계급에 속했으며 이교도였는데 말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고 고백한 것을 통해 독실한 그리스도인 어머니 모니카(Monica)가 아들의 신앙에 영향을 주었음을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387년에 13편으로 쓴 『참회록』은 한 그리스도인의 진실을 반영한 맑은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참회록』에 의하면 그는 열여섯 살 때 돈이 없어 일 년 동안 휴학하면서 십대 패거리와 어울렸으며 어느 날 밤 이웃집 나무에 매달린 배를 훔쳤다.
그는 훗날 이 일을 통렬히 참회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소년시절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장난에 불과한 일에 관해 지나칠 정도로 여러 페이지에 걸쳐 고통을 토로한 것을 두고 심리적 행위라고 조롱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악한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 참회한 것이 아니라 죄를 짓기 위해서 사악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 참회한 것이다.
참회는 그때 굶주리지 않았고 또 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훔쳤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참된 쾌락은 그저 허락받지 않은 것을 행하는 데 있다.
죄악은 잘못된 것인데 나는 죄악을 사랑했다.
다시 말하면 나 자신을 파괴하는 일을 사랑한 것이며 죄악을 사랑한 것이다.
죄악을 지을 대상을 구한 것이 아니라 죄악 자체를 내가 사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수사학을 계속 공부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돌아왔을 때 배를 훔친 일보다 더욱 흥미로운 일을 발견했었음을 다음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카르타고로 돌아왔을 때 부정한 사랑이 주변에 들끓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아직 사랑에 빠지지 않았지만 사랑의 관념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숨겨진 욕망으로부터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 나 자신을 멸시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은 내게 달콤한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육체를 즐길 수 있을 때 그것은 더욱 달콤한 일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인과 15년 동안 동거했고, 아들을 낳았으며, 아들을 몹시 사랑했다.
당시 내연의 처를 가지는 것은 이교도에게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처자식을 데리고 타가스테로 가서 어머니를 방문해 처자에 대한 용납을 받은 것을 보면 처에게 진정한 마음을 가졌음을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17세 때 키케로(Cicero)의 『호르텐시우스 Hortensius』를 읽고 철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당시 북아프리카 교회는 테르툴리아누스로부터 영향을 받고 신학적인 문제들을 이성적으로 해결하기보다 감독의 권위로 해결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헌신하려고 결심한 젊은이들에게 신학은 비이성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때만 해도 그리스도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변적 천성에 만족을 주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그는 9년가량(373-384) 페르시아 사람 마니(Mani, 라틴어로는 Manichaeus, 210-75)의 교리에 심취했는데 마니교(Manichaeism)는 영지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제설혼합주의적 종교철학에 기초해 선과 악 또는 빛과 어둠의 이원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마니교는 빛과 어둠의 싸움을 나타내는 환상적인 신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사람들에게 빛을 어둠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어둠에 속한 모든 일을 떠나 금욕주의 생활을 연마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금욕주의 수련은 초보자(auditores)로부터 숙련자(electi)에 이르는 동안 얻게 되는 덕성의 정도에 따라 여러 단계로 구분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늘 초보자의 단계에 머물렀다.
마니교는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의 맞수가 되는 종교로 유럽과 중국에까지 교세를 떨쳤으며 마니교도는 예수를 마니와 마찬가지로 선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저서 『믿음의 이익 the Advantage of Believing』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가 미신에 떨며 이성에 앞서 믿음을 요구할 때 그들은 (마니교도들) 먼저 진리를 탐구해 자유로워질 수 있기까지는 누구에게도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약속에 미혹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특히 진리를 갈망하나 방자하고 대화에 있어서 논쟁을 즐기는 젊은이에게 어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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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 친구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382년경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의 환상적 우주론적 체계에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383년에 마니교 감독 파우스투스(Faustus)와 교리에 관해 대화했지만 만족을 구하지 못했다.
파우스투스는 그보다 교육을 덜 받은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지성적으로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마니교의 점성학은 사람의 행위를 별이 통제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사람은 자유의지를 결여한 채 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문들 중 하나였다.
점성학은 별을 탓하기보다는 사람의 욕망을 나무랬다.
그리고 그리스 철학자와 영지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마니교도는 순수하고 선한 영혼이 사악한 물질인 몸에 갇힌 것으로 보았다.
그는 참회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람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나의 자긍심에 마니교는 만족을 줄 수 있었다.
나는 변명하기를 좋아했으며 내 안에 있지만 진정으로 내가 아닌 것을 책망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재에 있어 내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나였다.


그는 배를 훔치고, 정부와 사랑을 나눈 것은 별이나 육체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그는 마니교 친구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384년에 로마로 이주한 후 그들의 도움으로 정부의 수사학 교사로 임명을 받고 이듬해 밀란(Milan)으로 갔다.
그가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한 것은 이때로 신플라톤주의자가 몇 마디만 고쳐서 말하면 능히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마니교가 주장하는 선의 신과 악의 신의 이원적 개념 대신 신을 참된 영원한 실재라고 믿었기 때문에 악이 유일한 실재인 선으로부터 고의적으로 떠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밀란에서 그는 감독 암브로즈(Ambrose, 374-97년 재직)의 설교를 듣고 감동했는데 설교의 내용보다는 웅변에 매료되었다.
암브로즈는 훗날 제롬과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가톨릭 교회의 삼 박사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30세 때 리구리아와 에밀리아의 지사가 된 암브로즈는 4년 후 정치에서 손을 떼고 시민들의 큰 환영 속에 밀라노의 감독에 올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든 소유물을 나누어 주었으며, 생명의 위협까지도 감수하면서 교회를 위한 봉사에 전력했다.
그는 엄격한 도덕주의자였는데 처녀성을 찬양하는 글을 한 편 썼고 과부의 재혼을 반대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삼 박사 가운데 암브로즈는 학자로서는 제롬보다 못했고 철학으로 말하면 아우구스티누스에 미치지 못했지만 정치가의 기질이 탁월해서 가톨릭의 교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밀란까지 와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결혼할 것을 권유하자 그는 어머니가 정해 준 여자와 약혼했다.
하지만 결혼식을 연기하는 동안 그는 딴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이런 그가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가진 것은 386년 8월 말 오후였는데 그때 그는 밀라노의 어느 정원에서 곁에 성경을 놓은 채 앉아 있었다.
그는 『참회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갑자기 근처에 있는 집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와서 나의 귓전을 때렸다.
노랫말 같은 소리가 반복해서 들렸다.
“성경을 읽도록 하여라. 성경을 읽도록 하여라.”
나는 하나님의 소리가 성경을 펴서 첫 구절을 읽으라고 명령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성경을 펴서 첫 구절을 묵묵히 읽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분쟁과)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3-14)


나는 더 이상 성경을 읽고 싶지 않았는데 그 이상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구절을 읽었을 때 내 가슴은 확신의 빛으로 가득 찼으며 회의의 그림자는 모두 사라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개종하기로 결심한 후 세례 받을 준비를 하면서 시편을 읽고 감동받았으며 암브로즈의 설교를 통해 차츰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순수 철학적 원리와 그리스도교의 원리를 조화시키려고 했는데 이것은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을 철학의 형식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신앙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387년 부활절 때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와 처와 함께 암브로즈로부터 세례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고향으로 향했다.
일행이 티베르 하류 오스티아(Ostia) 항구 여인숙에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가 타계했다.
『참회록』에 의하면 어머니와 창가에 앉아 석양의 태양이 바다와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것을 바라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말했다.
“아들아, 난 더 할 수 없이 만족하구나.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모두 이루어 주셨단다. 난 이제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했다.”
닷새 후 모니카는 타계했는데 아무런 고통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귀향길을 돌려서 로마를 경유해 아우구스티누스가 고향에 도착한 것은 388년 가을이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사망한 것도 그때였다. 수도원을 세울 결심으로 391년에 알제리아 보나(Bona) 근처 힙포(Hippo)로 갔다가 그해 힙포에서 안수를 받고 장로가 되었으며 4년 후 힙포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힙포에 아프리카의 첫 수도원을 세운 후 사제를 양성하는 일에 전념했다.
반달족(Vandals)이 힙포를 포위한 430년 8월 28일 그는 76살로 타계했다.
그는 삼위일체론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현재 연구의 목적은 하나님 삼위일체에 있으며 삼위일체는 진리이고, 최고이며, 유일한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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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사랑하는 자와 사랑을 받는 자, 사랑을 셋으로 구분한 후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69:32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를 인용한 후 하나님을 이미 안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을 경고하기 위해서 시편 105:4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 지어다”와 고린도전서 8:2-3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라는 말을 인용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분을 아는(has known him) 것이 아니라 그분에 의해서 알게 된(is known by him)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은 노력에 의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라 그분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은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했다.
그는 성부와 성자, 성령은 세 인격체이지만 우주를 창조하고 통치하는 분은 유일신이기 때문에 세 인격체는 상호 관련이 있으며 본질에서는 동등한 자격을 가진 한 개체라고 보았다.
이에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성경의 구절을 인용한 후 성부와 성자, 성령을 나 자신, 사랑하는 대상, 사랑 자체에 비유하며 삼위일체에 대해 언급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데 사랑을 받는 사람이 없다면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을 받는 자, 사랑을 셋으로 구분한 후 그는 사랑의 대상이 자신일 경우 셋으로 구분된 것은 사랑의 대상과 사랑 둘로 요약될 수 있다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므로 주체와 대상이 같아지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사랑이 참으로 존재한다면 사랑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므로 정신과 정신 스스로에 대한 사랑도 두 개의 영이 아닌 한 영이며, 둘이 아닌 한 본질이라고 했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즉 사랑과 사랑의 대상은 둘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며, 사랑하는 사람이 없이 사랑이란 행위는 존재하지 않고, 사랑이란 행위가 존재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사랑의 대상은 둘이 아닌 일체이다.
또한 그는 정신과 영은 상호무관하게 본질로 존재하며, 몸과 어울려 사람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몸이 사라지더라도 정신과 영은 멸하지 않고 늘 존재한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인조를 이루고 있는 정신과 정신의 사랑, 정신의 지식은 하나를 이루며 정신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완전히 알게 될 때 비로소 서로 동등해진다고 했다.
그러나 정신이 스스로를 알게 되어도 스스로를 아는 지식이 자아를 능가할 수 없는 이유는 자아가 주체이면서 동시에 지식의 대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정신이 자아에 관해 완전히 알게 될 때 지식은 정신에 상응하게 된다고 하며 자아에 관해 완전히 아는 자의식(self-knowledge)을 자아와 동등하게 취급했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삼인조 가운데 하나가 완전할 경우 셋 모두 동등해지고 완전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 개의 금반지를 예로 들어 삼위일체의 당위성을 설명했는데 세 개의 반지가 금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세 개의 반지를 녹여 한 덩이로 만들었을 때 삼위일체는 종지부를 고하게 되고 세 개의 반지는 본질에서 같다고 했다.
그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점은 구약성경의 무로부터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말이 그리스인에게는 생소했다는 것과 플라톤이 말한 창조는 근원이 되는 물질을 가상하고 신이 이에 대해 형상을 주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조물주라기보다는 기술자 또는 건축가로 이해했다.
질료는 영원한 것이므로 그것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신이 단지 그 형상만을 만든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같은 견해에 반대했다.
그리고 만물은 질료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은 질서와 정돈뿐만 아니라 물질까지도 창조한 분임을 역설했다.
금덩어리를 만든 분도 하나님이라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신이 자아를 알고 사랑하는 가운데 정신과 사랑, 지식의 삼위일체가 가능하다면서 정신은 지식과 관련해서 알고, 알았으며, 알 수 있고, 자아를 사랑하는 것과 관련해서 사랑하고, 사랑했으며,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랑하는 정신은 사랑 안에 있고,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지식 안에 있으며, 지식은 알고 있는 정신 안에 있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정신이 자아를 알고, 사랑하는 것은 사랑과 지식 안에서이며, 자아를 아는 지식과 사랑하는 정신은 정신과 사랑 안에서 가능하고, 정신은 자아를 알고 있으며, 자아를 사랑하는 것을 또한 안다고 했다.
그는 정신의 삼인조가 각기 온전할 때 정신은 자아의 모든 것을 알고, 사랑하며, 자아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자아에 관한 모든 지식을 사랑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그는 놀랍게도 삼인조는 상호관련이 있으나 서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각기 실체로 존재하며 동시에 하나의 실체 또는 본질이 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이 선임을 시편을 인용해 지적했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찬양하라 (시편 135:3)


또한 창세기를 인용하여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훌륭하게 창조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


그는 만물이 아름답게 창조되었음을 찬양하면서 그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 자신은 얼마나 선한 분이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은 선하시다”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고, 아름다운 만물은 보다 아름다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한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했지만 하나님 자신은 누구에 의해서도 창조되지 않았으며 본래부터 선하며 만물은 아름답기 위해서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는 논리를 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편 73: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마가복음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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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이 너무 높은 데 있고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해, 달, 별이 아름답고, 지상에 움직이는 모든 동물이 아름다우며, 공중을 나는 것들과 물에서 헤엄치는 모든 생물이 아름답고, 사람 또한 아름다운 것은 이들을 창조한 하나님의 인자함이 온 누리에 역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태복음 12:35)


또한 상호 비교되는 선한 것과 선한 것 자체를 구별했는데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선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선한 만물의 창조주가 되는 하나님이야말로 얼마나 선하겠느냐며 탄복했다.
그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는 주 하나님, 전능하고, 자비로우며, 공의롭다"고 말하지 않고 “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라고 한 것을 두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우며, 공의롭지만 스스로를 가리켜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스스로 있는 자’라 말했음을 강조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 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애굽기 3:14)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HE WHO IS has sent me to you”라는 말로 지칭한 것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은 존재의 의미가 없으며 오로지 자신만이 궁극적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그분이 선한 분임을 알기 때문이며 만일 불의한 분을 찬양한다면 우리가 불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은 공의로운 분을 찬양하는 이유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또한 그분을 찬양함으로써 공의를 우리가 함께 나누기를 바라기 때문이며 공의를 우리가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을 찬양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는 없더라도 그분이 창조한 만물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분이 찬양받을 만한 선한 분인 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너무 높은 데 있고 우리가 너무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달콤함(sweetness, 공동번역 성경은 상냥함이라고 번역했다)을 맛보기 어려워 그분이 중재자를 우리에게 보낸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이 보낸 중재자를 통해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중재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디모데전서 2:5)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가 단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를 따르더라도 결코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없으며, 예수가 단지 하나님일 뿐이라면 예수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 결코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으로 성육신되었으므로 예수를 따라 그분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보자 또는 중재자인 예수는 천사들의 양식보다 더욱 달콤하므로 그는 천사들의 양식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인 진리에 비유했다.


사람이 권세 있는 자의 떡을 먹음이여 하나님이 식물을 충족히 주셨도다 (시편 78:25)
천사들의 양식을 사람들에게 먹이셨으니
그들이 배불리 먹을 식량을 내려 주셨다. (공동번역)


그는 우리가 천사들보다 진리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했던 동일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라 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1-3)


또한 우리가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가 중재자로 지상으로 온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아우구스티누스는 천사들을 창조한 하나님이 몸소 사람의 형체로 지상에 와서 사람들에게도 천사들의 양식인 진리를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며 그 이유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찬양”하게 되었다고 했다.
(“달콤하신 분을 위해서 그 이름을 노래하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욱 문맥에 어울릴 것 같다.)
그는 달콤한 분의 좋은 맛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한 말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켰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이름이니라) (출애굽기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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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성경의 모호함이 신앙이나 문장 자체로 해석되지 않을 때는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말로 바꾸어 자신을 표현한 이유가 사람들이 “스스로 있는 자”란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달리 그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 있는 자”란 말은 하나님 자신이 진정으로 존재함을 강조한 것이며 자신에게는 시작과 끝이 없음을 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은 사람의 고뇌는 일시적일 뿐 영원하지 못함을 지적함과 동시에 유한한 인생을 영생으로 인도하기 위해 나타낸 말이다.
또한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란 말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영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 사람을 영원하게 만들기 위해 한 말인 즉 세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영원해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언어에 관한 충분한 지식과 성경의 기본이 되는 주제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중요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며 신학자들이 쓴 주석을 참고해서 도움 받을 것을 권유했다.
그래도 모호한 구절을 접하게 된다면 그것이 직접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인지 간접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인지를 먼저 살피고 직접적인 의미로 쓰여진 구절이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구절에 구두점을 잘못 찍은 것인지 아니면 의미를 제대로 판단한 것이 맞는지를 헤아리라고 했다.
두 가지 또는 그 이상 해석이 가능한 구절에 관해서는 교회의 책임자와 신학자들의 판단을 따를 것을 권유하면서 요한의 말을 예로 들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한복음 1:1-2)


위의 구절은 이설적 구두점을 찍은 구절인데 말씀이 하나님과 같음을 말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구절은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논쟁을 통해 삼위일체로 이해되어 오늘날까지 내려 왔으며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그 말씀이 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사도들의 글에서 구두점을 어디에다 찍을지 몰라 제대로 해석되지 않을 경우 구절의 범주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면서 다음의 구절을 예로 들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빌립보서 1:23-24)


아우구스티누스는 위의 구절이 “마음 같아서는 두 가지를 Of the two I have a desire” 모두 이루고 싶다는 뜻인지 아니면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살고 싶은) 욕망을 가진 I feel the strong pull of the two. I have a desire to depart and be with Christ” 다는 것인지 그 뜻이 분명치 않다고 했다.
그는 바울이 “이것이 더욱 좋으나 for that is far better”라고 한 것을 자신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바울이 둘 사이에 끼어 둘 가운데 하나를 바라면서도 다른 하나의 필요성을 경험한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지만 아직은 생존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문장의 모호함을 해결하는 것이 ‘위해서 for’라는 말인데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이 ‘위해서’를 잘못 사용하여 바울이 둘 사이에 끼어 있을 뿐만 아니라 둘 모두를 바라는 것처럼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구두점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에 어느 편을 택해야 할런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그 편이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서는 이 세상에 살아 있어야 하겠습니다.


Which I shall choose I cannot tell. I feel the strong pull of the two. I have a desire to depart and be with Christ. For that is far better. But to remain in the flesh is necessary on your account.”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의 모호함이 신앙이나 문장 자체로 해석되지 않을 때는 가능한 곳에 구두점을 찍어도 무방하다면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예로 들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고린도후서 7:1-2)


위의 구절에서도 구두점을 제대로 찍는 것이 필요함을 말하면서 그는 그리스도인 자신이 필요한 곳에 구두점을 찍어도 무방하다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구두점을 찍었다.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
(새 문장이 시작된다)
“그리고 심령 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며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 됩시다, 마음을 열어 우리를 받아 주기를 바랍니다 And in spirit making holiness perfect in the fear of God, be open to us."


또한 성경을 읽다가 구두점이 잘못 찍혀 구절을 이해할 수 없고 또 해석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면 교회 책임자에게 자문을 구하고 자문을 받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알아서 해석해도 나무랄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바울의 말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은 무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로부터 책망 받을 일이 없다고 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고소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로마서 8:33-34)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Who shall bring any charge against God's elect?”라는 질문에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God who justifies”라는 대답이 따르고, “누가 정죄하리요 Who is to condemn?”라는 질문에는 “죽으실 뿐 아니라 Christ Jesus who died for us”라는 대답이 따르는데 이는 대체적인 질문에 구체적인 대답이 따른 경우라고 했다.
과거 사람들은 대체적인 질문에는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구체적인 질문에는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울의 말을 인용하면서 질문과 대답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음을 지적했다.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로마서 9:30)


대체적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질문의 예는 다음과 같다.


나자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한복음 1:46)


그는 위의 질문은 대답을 필요로 하지만 불확실한 의미를 지닌 질문에 속한다면서 어떤 유형이라도 질문은 신앙에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발음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는 모호한 구절에는 발음을 유의하라고 했다.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서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뼈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었습니다) (시편 13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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