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 성경의 모호함이 신앙이나 문장 자체로 해석되지 않을 때는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말로 바꾸어 자신을 표현한 이유가 사람들이 “스스로 있는 자”란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달리 그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 있는 자”란 말은 하나님 자신이 진정으로 존재함을 강조한 것이며 자신에게는 시작과 끝이 없음을 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은 사람의 고뇌는 일시적일 뿐 영원하지 못함을 지적함과 동시에 유한한 인생을 영생으로 인도하기 위해 나타낸 말이다.
또한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란 말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영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 사람을 영원하게 만들기 위해 한 말인 즉 세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영원해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언어에 관한 충분한 지식과 성경의 기본이 되는 주제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중요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며 신학자들이 쓴 주석을 참고해서 도움 받을 것을 권유했다.
그래도 모호한 구절을 접하게 된다면 그것이 직접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인지 간접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인지를 먼저 살피고 직접적인 의미로 쓰여진 구절이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구절에 구두점을 잘못 찍은 것인지 아니면 의미를 제대로 판단한 것이 맞는지를 헤아리라고 했다.
두 가지 또는 그 이상 해석이 가능한 구절에 관해서는 교회의 책임자와 신학자들의 판단을 따를 것을 권유하면서 요한의 말을 예로 들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한복음 1:1-2)


위의 구절은 이설적 구두점을 찍은 구절인데 말씀이 하나님과 같음을 말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구절은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논쟁을 통해 삼위일체로 이해되어 오늘날까지 내려 왔으며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그 말씀이 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사도들의 글에서 구두점을 어디에다 찍을지 몰라 제대로 해석되지 않을 경우 구절의 범주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면서 다음의 구절을 예로 들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빌립보서 1:23-24)


아우구스티누스는 위의 구절이 “마음 같아서는 두 가지를 Of the two I have a desire” 모두 이루고 싶다는 뜻인지 아니면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살고 싶은) 욕망을 가진 I feel the strong pull of the two. I have a desire to depart and be with Christ” 다는 것인지 그 뜻이 분명치 않다고 했다.
그는 바울이 “이것이 더욱 좋으나 for that is far better”라고 한 것을 자신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바울이 둘 사이에 끼어 둘 가운데 하나를 바라면서도 다른 하나의 필요성을 경험한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지만 아직은 생존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문장의 모호함을 해결하는 것이 ‘위해서 for’라는 말인데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이 ‘위해서’를 잘못 사용하여 바울이 둘 사이에 끼어 있을 뿐만 아니라 둘 모두를 바라는 것처럼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구두점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에 어느 편을 택해야 할런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그 편이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서는 이 세상에 살아 있어야 하겠습니다.


Which I shall choose I cannot tell. I feel the strong pull of the two. I have a desire to depart and be with Christ. For that is far better. But to remain in the flesh is necessary on your account.”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의 모호함이 신앙이나 문장 자체로 해석되지 않을 때는 가능한 곳에 구두점을 찍어도 무방하다면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예로 들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고린도후서 7:1-2)


위의 구절에서도 구두점을 제대로 찍는 것이 필요함을 말하면서 그는 그리스도인 자신이 필요한 곳에 구두점을 찍어도 무방하다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구두점을 찍었다.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
(새 문장이 시작된다)
“그리고 심령 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며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 됩시다, 마음을 열어 우리를 받아 주기를 바랍니다 And in spirit making holiness perfect in the fear of God, be open to us."


또한 성경을 읽다가 구두점이 잘못 찍혀 구절을 이해할 수 없고 또 해석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면 교회 책임자에게 자문을 구하고 자문을 받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알아서 해석해도 나무랄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바울의 말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은 무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로부터 책망 받을 일이 없다고 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고소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로마서 8:33-34)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Who shall bring any charge against God's elect?”라는 질문에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God who justifies”라는 대답이 따르고, “누가 정죄하리요 Who is to condemn?”라는 질문에는 “죽으실 뿐 아니라 Christ Jesus who died for us”라는 대답이 따르는데 이는 대체적인 질문에 구체적인 대답이 따른 경우라고 했다.
과거 사람들은 대체적인 질문에는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구체적인 질문에는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울의 말을 인용하면서 질문과 대답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음을 지적했다.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로마서 9:30)


대체적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질문의 예는 다음과 같다.


나자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한복음 1:46)


그는 위의 질문은 대답을 필요로 하지만 불확실한 의미를 지닌 질문에 속한다면서 어떤 유형이라도 질문은 신앙에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발음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는 모호한 구절에는 발음을 유의하라고 했다.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서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뼈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었습니다) (시편 13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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