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 친구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382년경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의 환상적 우주론적 체계에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383년에 마니교 감독 파우스투스(Faustus)와 교리에 관해 대화했지만 만족을 구하지 못했다.
파우스투스는 그보다 교육을 덜 받은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지성적으로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마니교의 점성학은 사람의 행위를 별이 통제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사람은 자유의지를 결여한 채 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문들 중 하나였다.
점성학은 별을 탓하기보다는 사람의 욕망을 나무랬다.
그리고 그리스 철학자와 영지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마니교도는 순수하고 선한 영혼이 사악한 물질인 몸에 갇힌 것으로 보았다.
그는 참회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람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나의 자긍심에 마니교는 만족을 줄 수 있었다.
나는 변명하기를 좋아했으며 내 안에 있지만 진정으로 내가 아닌 것을 책망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재에 있어 내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나였다.
그는 배를 훔치고, 정부와 사랑을 나눈 것은 별이나 육체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그는 마니교 친구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384년에 로마로 이주한 후 그들의 도움으로 정부의 수사학 교사로 임명을 받고 이듬해 밀란(Milan)으로 갔다.
그가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한 것은 이때로 신플라톤주의자가 몇 마디만 고쳐서 말하면 능히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마니교가 주장하는 선의 신과 악의 신의 이원적 개념 대신 신을 참된 영원한 실재라고 믿었기 때문에 악이 유일한 실재인 선으로부터 고의적으로 떠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밀란에서 그는 감독 암브로즈(Ambrose, 374-97년 재직)의 설교를 듣고 감동했는데 설교의 내용보다는 웅변에 매료되었다.
암브로즈는 훗날 제롬과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가톨릭 교회의 삼 박사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30세 때 리구리아와 에밀리아의 지사가 된 암브로즈는 4년 후 정치에서 손을 떼고 시민들의 큰 환영 속에 밀라노의 감독에 올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든 소유물을 나누어 주었으며, 생명의 위협까지도 감수하면서 교회를 위한 봉사에 전력했다.
그는 엄격한 도덕주의자였는데 처녀성을 찬양하는 글을 한 편 썼고 과부의 재혼을 반대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삼 박사 가운데 암브로즈는 학자로서는 제롬보다 못했고 철학으로 말하면 아우구스티누스에 미치지 못했지만 정치가의 기질이 탁월해서 가톨릭의 교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밀란까지 와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결혼할 것을 권유하자 그는 어머니가 정해 준 여자와 약혼했다.
하지만 결혼식을 연기하는 동안 그는 딴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이런 그가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가진 것은 386년 8월 말 오후였는데 그때 그는 밀라노의 어느 정원에서 곁에 성경을 놓은 채 앉아 있었다.
그는 『참회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갑자기 근처에 있는 집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와서 나의 귓전을 때렸다.
노랫말 같은 소리가 반복해서 들렸다.
“성경을 읽도록 하여라. 성경을 읽도록 하여라.”
나는 하나님의 소리가 성경을 펴서 첫 구절을 읽으라고 명령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성경을 펴서 첫 구절을 묵묵히 읽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분쟁과)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3-14)
나는 더 이상 성경을 읽고 싶지 않았는데 그 이상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구절을 읽었을 때 내 가슴은 확신의 빛으로 가득 찼으며 회의의 그림자는 모두 사라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개종하기로 결심한 후 세례 받을 준비를 하면서 시편을 읽고 감동받았으며 암브로즈의 설교를 통해 차츰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순수 철학적 원리와 그리스도교의 원리를 조화시키려고 했는데 이것은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을 철학의 형식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신앙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387년 부활절 때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와 처와 함께 암브로즈로부터 세례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고향으로 향했다.
일행이 티베르 하류 오스티아(Ostia) 항구 여인숙에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가 타계했다.
『참회록』에 의하면 어머니와 창가에 앉아 석양의 태양이 바다와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것을 바라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말했다.
“아들아, 난 더 할 수 없이 만족하구나.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모두 이루어 주셨단다. 난 이제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했다.”
닷새 후 모니카는 타계했는데 아무런 고통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귀향길을 돌려서 로마를 경유해 아우구스티누스가 고향에 도착한 것은 388년 가을이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사망한 것도 그때였다. 수도원을 세울 결심으로 391년에 알제리아 보나(Bona) 근처 힙포(Hippo)로 갔다가 그해 힙포에서 안수를 받고 장로가 되었으며 4년 후 힙포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힙포에 아프리카의 첫 수도원을 세운 후 사제를 양성하는 일에 전념했다.
반달족(Vandals)이 힙포를 포위한 430년 8월 28일 그는 76살로 타계했다.
그는 삼위일체론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현재 연구의 목적은 하나님 삼위일체에 있으며 삼위일체는 진리이고, 최고이며, 유일한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