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는 아타나시우스가 본질과 실체를 유사한 말로 사용해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서방 신학에 명확한 방향과 독특한 특징을 부여한 사람은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지만 독특한 특징을 더욱 명확하게 하고 삼위일체론에 근거해서 교리를 완성한 사람은 가톨릭 신학의 왕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였다.
동방의 신학은 캅파도키아 학파에 의해서 어느 정도 완성단계에 도달했는데 서방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진전이 기대되었다.
부분적으로 동방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의 입장에서 신학을 완성했으므로 서방 신학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위상은 거의 절대적이다.
가톨릭의 교리 가운데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보수주의적이든지 진보주의적이든지 중세의 신비주의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톨릭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차지하는 권위는 거의 성경에 비길 만했으며 훗날 종교개혁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죄와 은혜에 관한 신학에서 은혜로만(sola gratia) 획득하는 구원에 대한 강조는 로마 가톨릭의 근본 원리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16세기 종교개혁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보수주의자들에게도 호감을 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름은 비단 교리사뿐만 아니라 문화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저서들은 신학 외에 철학, 문학, 교회정치, 그리고 법률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끼쳤다.
고대문화를 집대성하고 그 유산을 신학과 조화시키는 일에서 그는 어느 라틴 사람보다도 뛰어났는데 특히 철학과 신학 양 분야에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사라져 가는 로마 문화를 재활했으며 한 편으로는 향후 천 년의 신학 기초를 다졌다.
그가 타계한 후 수세기 동안 많은 신학자들이 그가 제기한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했고, 그의 신학을 가꾸었으며, 혹자들은 그의 저서를 참고원전으로 삼았다.
중세 스콜라 철학, 신비주의, 교황의 교회정치 및 개혁에는 모두 그의 영향이 미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타나시우스가 본질과 실체를 유사한 말로 사용해 세 인격의 관계를 한 본질로 이해한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였다.
저서 『삼위일체에 관하여 De Trinitate』에서 세 인격의 실체를 기억(memory), 지성(intelligence), 의지(will)에 비유하면서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의 당위성을 확보했다.
『삼위일체에 관하여』를 410년경에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이 호의를 나타냈는데 하나의 신적 본질에 기초해서 삼위일체적 관점을 진전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명료하게 밝히려고 한 것은 신적 통일성의 구조 안에 삼위가 내포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삼위성은 이 통일성 가운데 내포되었다는 점이다.
즉 삼위일체를 하나의 신적 본질 안의 세 단면들이 내부적으로 가지는 필연적인 관계로 묘사했다.
하지만 사람이 생전에 이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더구나 그것의 개념적인 용어를 제대로 설명하는 일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이면서 동일한 실재 안에 있는 세 가지 사물의 상관관계를 증명해 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가능한 유추적 해설방법들을 동원했다.
불완전했지만 삼위일체의 내적 실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일에는 사람의 영혼구조를 사용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그 대상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amans)과 사랑받는 사람(guod amatur) 그리고 사랑 자체(amor) 사이의 관계를 암시한 것이다.
이에 상응하는 관계를 그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에 적용했다.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학파에 속한 사람이다.
그의 생애와 사상의 진전과정은 저서 『참회록 Confessions』, 『취소 Retractions』, 그리고 제자 포시디우스(Posidius)가 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Vita Augustini』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는 알제리아 누미디아(Numidia)의 타가스테(Tagaste)에서 354년 11월 13일에 태어났고, 아버지 파트리시우스(Patricius)는 중산계급에 속했으며 이교도였는데 말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고 고백한 것을 통해 독실한 그리스도인 어머니 모니카(Monica)가 아들의 신앙에 영향을 주었음을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387년에 13편으로 쓴 『참회록』은 한 그리스도인의 진실을 반영한 맑은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참회록』에 의하면 그는 열여섯 살 때 돈이 없어 일 년 동안 휴학하면서 십대 패거리와 어울렸으며 어느 날 밤 이웃집 나무에 매달린 배를 훔쳤다.
그는 훗날 이 일을 통렬히 참회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소년시절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장난에 불과한 일에 관해 지나칠 정도로 여러 페이지에 걸쳐 고통을 토로한 것을 두고 심리적 행위라고 조롱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악한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 참회한 것이 아니라 죄를 짓기 위해서 사악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 참회한 것이다.
참회는 그때 굶주리지 않았고 또 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훔쳤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참된 쾌락은 그저 허락받지 않은 것을 행하는 데 있다.
죄악은 잘못된 것인데 나는 죄악을 사랑했다.
다시 말하면 나 자신을 파괴하는 일을 사랑한 것이며 죄악을 사랑한 것이다.
죄악을 지을 대상을 구한 것이 아니라 죄악 자체를 내가 사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수사학을 계속 공부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돌아왔을 때 배를 훔친 일보다 더욱 흥미로운 일을 발견했었음을 다음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카르타고로 돌아왔을 때 부정한 사랑이 주변에 들끓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아직 사랑에 빠지지 않았지만 사랑의 관념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숨겨진 욕망으로부터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 나 자신을 멸시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은 내게 달콤한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육체를 즐길 수 있을 때 그것은 더욱 달콤한 일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인과 15년 동안 동거했고, 아들을 낳았으며, 아들을 몹시 사랑했다.
당시 내연의 처를 가지는 것은 이교도에게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처자식을 데리고 타가스테로 가서 어머니를 방문해 처자에 대한 용납을 받은 것을 보면 처에게 진정한 마음을 가졌음을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17세 때 키케로(Cicero)의 『호르텐시우스 Hortensius』를 읽고 철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당시 북아프리카 교회는 테르툴리아누스로부터 영향을 받고 신학적인 문제들을 이성적으로 해결하기보다 감독의 권위로 해결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헌신하려고 결심한 젊은이들에게 신학은 비이성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때만 해도 그리스도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변적 천성에 만족을 주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그는 9년가량(373-384) 페르시아 사람 마니(Mani, 라틴어로는 Manichaeus, 210-75)의 교리에 심취했는데 마니교(Manichaeism)는 영지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제설혼합주의적 종교철학에 기초해 선과 악 또는 빛과 어둠의 이원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마니교는 빛과 어둠의 싸움을 나타내는 환상적인 신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사람들에게 빛을 어둠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어둠에 속한 모든 일을 떠나 금욕주의 생활을 연마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금욕주의 수련은 초보자(auditores)로부터 숙련자(electi)에 이르는 동안 얻게 되는 덕성의 정도에 따라 여러 단계로 구분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늘 초보자의 단계에 머물렀다.
마니교는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의 맞수가 되는 종교로 유럽과 중국에까지 교세를 떨쳤으며 마니교도는 예수를 마니와 마찬가지로 선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저서 『믿음의 이익 the Advantage of Believing』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가 미신에 떨며 이성에 앞서 믿음을 요구할 때 그들은 (마니교도들) 먼저 진리를 탐구해 자유로워질 수 있기까지는 누구에게도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약속에 미혹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특히 진리를 갈망하나 방자하고 대화에 있어서 논쟁을 즐기는 젊은이에게 어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