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론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성부, 성자, 성령이 각기 인격체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실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신약성경에는 삼위일체라고 지적해서 말할 만한 구절이 없다.
삼위일체론은 신학자들의 성과이다.
다만 신약성경에는 삼위일체와 관련해서 추론할 만한 구절이 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태복음 28: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 (고린도후서 13:13)


마태복음의 구절은 세례의식과 관련이 있고 바울의 말은 기도문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 두 구절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주장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신약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음을 의미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성부, 성자, 성령을 병기함으로써 삼위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삼위 모두가 작용했음을 기록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린도전서 12:4-6)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1:21-22)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4:6)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2:20-22)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13-1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디도서 3:4-6)


곧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베드로전서 1:2)


2세기 말엽 교회에서 단일신론(Monarchianism 군주신론이라고도 한다)이 주요 관심사로 부상했다.
군주신론적이란 개념은 테르툴리아누스가 신격의 통일성에 관해 언급한 대목에서 비롯했다.
단일신론은 삼위일체를 부정했으며 하나님이 성자와 성령의 모습으로 자기를 계시했다는 것도 부인했다.
단일신론자들이 삼위일체를 부정하게 된 것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이었다.
그리스인은 신이 세상에 출현했다던가 직접 활동했다는 신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일신론 논쟁은 3세기에 상당 기간에 걸쳐서 지속되었으며 신학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위적(Unitarian) 신학은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신학자들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단일신론은 역동적 단일신론(Dynamic Monarchianism)과 양태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으로 구분된다.


역동적 단일신론의 대표주자는 190년 그리스도인 박해 때 비잔티움(Byzantium)으로부터 로마로 피신한 데오도투스(Theodotus)였다.
데오도투스는 로고스-그리스도론을 반대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인성만을 주장했다.
그는 의로운 면에서 예수가 어느 누구보다도 우수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가 권능으로 예수에게 임한 후에는 계속해서 그리스도로서 활동했다고 보았다.
역동적이란 말은 그래서 붙여진 것으로 특정의 시간에 예수에게 신적 권능이 갖추어지기는 했지만 예수는 하나님이 된 적이 없으며 하나님과 연합된 것은 부활한 후라는 주장이다.


역동적 단일신론을 지지한 사람은 260년경 안디옥의 감독 사모사타(Samosata) 사람 바울(Paul)이었다.
바울은 로고스 개념을 부정하지 않고 이성과 지혜가 사람의 속성에 포함된다는 의미에서 이성과 지혜를 로고스와 동일하게 간주했다.
바울은 로고스는 독자적인 본질이나 위격이 아니며 하나님의 신성한 지혜가 예수에게 내재했더라도 오직 신성한 능력으로 존재했을 뿐 위격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268년에 소집된 안디옥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받았다.


양태적 단일신론(Modalism Monarchianism)은 소아시아에서 나타난 신학인데 노에투스(Noetus)와 제자들이 이 신학을 로마로 운반했다.
노에투스는 로고스-그리스도론과 그 안에 함축된 종속론적 경향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성부만을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는 신격을 삼위로 구분하는 것에 반대했다.
로마 양식론의 선두자 프락세스(Praxes)는 노에투스의 이론을 완화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성부의 고난으로 이해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같은 신학을 성부고난설(Patripassianism)이라 칭했다.


양태적 단일신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양식론자 사벨리우스(Sabellius)였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인 동시에 동일한 본질에 속하므로 명칭으로만 구별될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이 육체, 혼, 영으로 구성되었듯이 신의 본질 또한 삼위로 구성되었다 보고 하나님을 태양으로, 성령을 태양으로부터 오는 열로, 성자를 태양의 빛으로 비유했다.
성령과 성자는 성부가 세상에 나타날 때 취하는 형태로 하나님이 자기를 현현하는 세 가지 존재양식(modi)이라고 보았다.
신의 본질은 하나라는 것과 신격에 있어 삼위는 하나이자 동일하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양태적 단일신론은 사벨리안주의(Sabelliannism)로 불리었는데 사벨리우스가 261년에 이단으로 정죄받자 이 이론은 배격되었다.


역동적 단일신론은 테르툴리아누스와 알렉산드리아 학파 사람들의 신학과 달랐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신성을 성자의 성부에 대한 동질(consubstantiality)로 설명했고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는 로고스가 신성으로부터 유출되었기 때문에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라고 했다.
양태적 단일신론은 삼위의 위격들 간의 구별을 반대하면서 성자와 성부를 동일하게 그리고 성령을 성자 및 성부와 동일하게 취급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로고스-그리스도론으로 삼위일체론을 진전시켜 삼위를 계시의 형식일 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세 본질로 보았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문제는 3세기 신학자들이 풀어야 할 과제였다.
당시는 예수에게 신성과 인성 모두 있다는 신인양성론이 유력했지만 신인양성론은 신이 둘이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에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런지 몰라 혼란스러워 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사람처럼 보였을 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이며 그리스도는 수난을 당한 적이 없다는 가현설을 주장했다.
가현설(docetism)은 그리스어로 ‘처럼 보인다(to seem)’라는 뜻이다.
가현설은 예수의 생애를 일종의 마술이나 가현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의 그의 수난과 죽음이 자신들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예수가 가현으로 수난당하고 사망한 것이었다면 자신들이 소망한 구원도 마찬가지로 환상에 불과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낙담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예수를 아예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또는 그를 현인, 선지자, 훌륭한 교사, 신비주의자, 또는 천사들 중 하나쯤으로 여겼다.
예수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원해서였으므로 만일 예수가 인간에 불과하다면 구원에 대한 소망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감독들이 그리스도의 신성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자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분열의 심화가 제국의 분열로 파급될 것을 우려해서 325년 5월 감독들을 소아시아 북부 니케아로 소집했다.
그는 감독들에게 모든 교회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교리를 제정하라고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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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잘 흥분하는 테르툴리아누스는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전승에 권위를 부여하는 일에 서슴치 않았다.
라인홀드 제베르크(Reinhold Seeberg)는 테르툴리아누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잘 흥분하는 테르툴리아누스는 독을 품은 신랄한 재담을 즐겼으며 타고난 음울한 격정을 극복하지 못했다.
웅변가로서 그는 과장된 표현으로 저술했지만 그리스도교적 사상에 있어서는 독창성을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는 연설할 때 맹렬한 분노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이 같은 순간에도 정확하게 조리에 맞도록 연설의 끝부분을 여미어 나가곤 했다.
그는 실천적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심오하기보다는 해박하여 많은 논리를 채택했고, 그러면서도 잠시나마 자신의 정진하는 목표를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실천적 동기에서 저술하면서 신학적이든 철학적이든 지식 자체를 위해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어느 누구보다도 교회의 권위주의를 강조했다.


신앙의 표준과 상충되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 곧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했는데 그에게 있어서 믿음은 절대적 순종으로 찬동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는 믿는 바가 불합리하면 할수록 믿음이 발전되는 계기가 더욱 잦아지고 믿음의 대상을 파악하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명료해진다고 보았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성부와 성자, 성령을 한 데 묶어 처음으로 삼위일체(trinitas)란 말로 묘사했다.
그는 삼위의 위격이 본질에서 일체한다고 했는데 본질이란 존재의 힘(power of being)을 의미했다.
그는 삼위가 존재의 힘 안에서 스스로 현존하는 것이라 하고, 그리스 철학의 개념에 의해 하나님을 영원한 이성(ratio), 또는 로고스, 또는 정신적인 존재로 정의했다.
그는 삼위를 순위적으로 설명했는데 우주가 막 창조될 때 성부로부터 성자가 태어나 두 번째 분이 되었고 세 번째 분으로 태어난 것이 성령이라고 했다.
그는 신성한 본질 또는 존재의 힘을 세 사람(persona) 모두가 지녔다고 했는데 그가 말한 사람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람(person)이 아니라 그리스어 프로소폰(prosopon)을 의미한다.
프로소폰은 가면을 쓴 배우라는 뜻으로 그의 삼위일체론은 세 개의 가면을 쓰고 스스로 현존하는 한 분이 하나님임을 말하는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성부와 성자를 구별할 수 있지만 두 분이 분리될 수는 없다면서 이를 비유로 설명했다.


뿌리가 나무를 내고 태양이 광선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냈다.
뿌리와 나무는 분명히 다른 종류에 속하지만 상호 연합되어 있다.
이것은 물의 근원과 강이 두 형체를 띠지만 분리될 수 없는 것과 태양과 광선이 두 개의 형체를 띠지만 하나의 근본인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여타의 어떤 것으로부터 발원되어 나온 것은 그 발원지에서 나오는 이차적인 것이 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둘이 분리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 심지어 하나님과 영혼까지도 형체적이라고 했는데 형체가 없는 영적인 것이란 있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니브와 헤이크는 공저 『기독교 교리사』에 테르툴리아누스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 신학자들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과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 신학자였다.
그의 근본원리는 실재론이다.
자연과 세계의 현실성, 감각의 신빙성, 영의 형체적 실체의 중요성 이런 모든 것들이 사상의 기초를 이룬다.
그는 예민한 감각으로 창조물 가운데서 신적인 것을 간파했는데 즉 우주의 질서를 통해 비치는 신적 이성을 간파한 것이다.
그는 자연을 연구하면서 우주 안에 있는 창조주의 진리의 자취를 더듬어 보며 영혼을 분석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찾아내는 일을 즐겨했다.
그래서 이 같은 실재론은 테르툴리아누스 신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영지주의나 편벽된 유심론과의 투쟁에 있어서 무기가 되었다.
이 같은 실재론에서 출발해서 그는 하나님의 실체성, 인류와 역사의 단일성, 인간 영혼에 있어서의 죄의 기원, 계시의 역사성, 그리스도의 신인간으로서의 품격에 관한 진리, 그리고 구속과 육체적 부활의 사실 등을 논증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함에 있어서 그는 우주론적 논증과 자연적 목적론적 논증에 중점을 두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진리를 증명하기 위한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 그리스 철학에 의존한 변증가들과는 달리 철학의 개념을 병용하지 않았다.
그는 철학자들을 “이교의 족장들”이라고 불렀으며 플라톤을 족장들의 두목이라고 했다.
그는 죽음에 직면한 소크라테스의 평정을 가리켜서 “강제된 혹은 가장된 침착성”이라고 혹평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철학적 사고에 근거하고 있다.
특히 스토아 철학의 영향은 신학적 개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영혼을 형체라고 믿었으며 하나님의 영혼까지도 형체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영혼유전설(traducianism)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 같은 주장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의 신학에 양립하는 현상을 초래했다.
그는 세계의 현실성, 감각의 신빙성, 영혼의 형체적 실체를 강조하며 우주의 질서를 통해 하나님의 이성 즉 그리스도를 간파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실체성, 인류와 역사의 단일성, 영혼에 있어서 죄의 기원, 계시의 역사성, 그리스도의 신 인간으로서의 품격, 구원과 육체적 부활도 논증하려 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에 관한 논증은 우주론과 목적론으로 가시화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어떻게 보면 바울의 신학에 반발한 사람처럼 보이고 어떻게 보면 그의 신학을 받아들인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교인을 수퍼맨으로 여겼는데 성령이 교인에게 직접 역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성령이 교인에게 직접 역사한다는 생각은 교회에 대한 바울의 정의와 일치한다.
당시에는 성령을 체험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이 교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관건이었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성령을 체험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그것은 근본적인 신앙의 문제가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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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
Arius, 250-336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4세기 교회가 한창 신학적 논쟁에 휘말려 있을 때 단일신론은 한층 첨예화한 양상으로 다시 제기되었다.
이 신학은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오리게네스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테르툴리아누스와 유사한 방법으로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부속되었다는 종속설을 주장했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비유할 수 있는 태양으로부터 유출되는 광선에 불과하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종속설의 요지이다.
종속설은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에 의해서 더욱 부각되었다.
아리우스는 스스로 악역을 맡은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하지 못함을 명확하게 해 두려고 애썼다.
역사가 소크라테스는 440년에 아리우스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만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낳았다면 그리스도는 태어난 분이므로 그분이 존재한 시작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전에 시간이 존재했음은 틀림없는 일이다.
이 같은 논리에 의해 그리스도의 존재는 무로부터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리우스는 오리게네스가 사망하기 수년 전 리비아(Libya)에서 태어났고 안디옥 사람 루시안(Lucian)으로부터 수학했는데 루시안은 안디옥 교회의 장로(presbuteros)로서 학파를 결성하고 제자들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루시안은 그리스도인이 탄압받을 때 9년 동안 투옥되었다가 우상에 제물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참수당했다.
62살 때 알렉산드리아에서 감독으로부터 안수 받고 장로가 된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 대부분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였다.
그는 셀수스에 반박한 오리게네스의 논리 가운데서 “그리스도는 창조되지 않은 분의 본성과 창조된 만물의 성질 사이의 중보자”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아리우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령 모두 신성을 지닌 분이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성령에 비해 우월한 분이라고 주장한 오리게네스의 신학에 동조했다.
그러고 보면 아리우스의 신학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는 삼위의 신성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순위적 차별을 확대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비해 월등히 우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만이 진정한 신이라고 보았다.
또한 성령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아리우스는 오늘날의 정황에서 말하면 응용심리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널리 보급시키기 위해 시가의 형식으로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일할 때 자신의 이론을 노래로 외울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영지주의자들의 창조신(demiurge)과도 같은 신화적 표상인 반신 반인간으로 이해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신성을 지닌 분이지만 하나님과 동등한 분은 아니었다.
이런 가르침은 변증가들과 테르툴리아누스의 이론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하나님만이 홀로 진정한 신적 존재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태초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지만 창조되기 전에도 이미 시간이 존재했으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는 시작이 있지만 … 하나님에게는 시작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영원한 존재가 못 됨을 지적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우주 사이에 내재하는 신성한 힘으로 이해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올림퍼스의 많은 신들 중 하나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예수의 영혼이 되었고 그 예수가 의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란 명칭이 부여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영원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며 하나의 창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본질에서도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속성에서도 하나님의 참된 그리스도나 지혜도 아니며 실로 하나님의 창조물과 피조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는 아리우스의 신학에 단호하게 대처했으며 321년 알렉산드리아에 대규모 종교회의를 열어 그를 파문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20대 초반의 고집불통 알렉산더의 비서 아타나시우스 또한 아리우스 신학을 비난하는 일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는데 마치 아리우스를 비난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유별나게 검은 피부, 매부리코, 그리고 붉은 색 수염을 한 아타나시우스는 키가 작아 난쟁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그는 매사에 자신의 주장을 굽혀본 적이 없었으며 논쟁을 할 때는 반드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고야 말았다.
아리우스 신학에 대한 그의 반박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피조물은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는데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게 된다.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데 예수가 사람을 구원했으므로 그는 하나님이라는 논리를 폈다.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상반된 주장으로 교회가 분열될 조짐을 보이자 콘스탄티누스는 종교회의를 소집했다.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5월에 약 300명의 감독들을 니케아로 모이도록 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종교회의였다.
감독들은 수행원을 대동하고 니케아로 갔고 아타나시우스도 알렉산더의 수행원으로 니케아로 향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신앙의 규범이 되는 신조를 제정하라고 명령했으며 그 결과 『니케아 신조 Nicaea Creed』가 제정되었다.


결론으로 말하면 아리우스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다.
그리스도를 독립된 인격체로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교가 유일신교임을 보존하려고 한 것이다.
두 가지 목적을 통합하기 위해서 그는 종속론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독들은 그가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반신 반인간의 창조신(demiurge)으로 취급한다고 비난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는 진정한 본질의 차이가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또 다른 종속론을 주창한 것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만이 신적 존재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했지만 하나님으로까지 격상시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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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신조 2
Nicaea Creed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서방 교회 감독들은 그리스도의 본질이 하나님과 같다고 했지만 동방 교회 감독들은 본질이 같더라도 속성으로 보면 열등하다고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종교적인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에서도 서방과 동방의 첨예한 신학적 대립을 무마시켜야 할 필요를 느꼈다.
당시 그리스도인의 수는 제국 인구의 20퍼센트 미만에 불과했지만 그리스도인은 매사에 열심이며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이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의 분열이 정치적인 악재로 작용할 수 있음을 염려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어떤 이유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원래 태양을 숭배하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태양숭배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친숙했는데 그들은 태양의 운행이 그리스도가 탄 마차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태양숭배자는 일요일에 동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숭배를 표시하는 의식을 가졌으며 12월 25일을 태양의 날로 기념했다.
콘스탄티누스는 태양을 숭배하는 종교를 버린 적이 없으며 태양을 자신의 메달에 새겼다.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수도를 옮겼을 때도 그는 공회광장에 태양신 동상을 세웠다.
그는 일요일을 휴식의 날로 정했으며, 재판정을 닫았고, 농사짓는 일 외에는 노동을 금하도록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키가 크고 건장한 몸에 눈썹이 짙고 턱이 툭 튀어 나왔으며 성격이 사나워서 화를 내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포악성은 맏아들, 두 번째 아내, 사랑하는 여동생의 남편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을 처형한 데서 나타난다.
그는 늙어갈수록 포악성과 괴팍한 행위가 심해졌다.
목덜미는 황소의 목덜미처럼 늘어졌지만 그는 유행하는 옷을 즐겨 입었으며 팔을 보석으로 장식했는데 조카 줄리안의 말로는 꼴불견이었다고 한다.
유세비우스는 그의 옷차림이 군중에게 호감을 주었다고 비꼬며 자기는 황제의 옷차림을 보고 깔깔대며 웃었다고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주 미신적인 사람이었다.
당시 대부분 직업군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모든 종교에 존경심을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년에 병에 걸릴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는데 세례를 임종할 때까지 미루는 것은 당시 풍조였다.
세례를 죄에 대한 용서를 받는 의식으로 믿었으므로 사람들은 가능한 용서받기를 훗날로 미루었다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여생을 마치려고 했다.


그러나 정치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보여 준 전략은 빼어났다.
그는 그리스도교 국가를 건립해서 자기가 제사장 왕(Priest-King)이 되고 싶어 했다.
유세비우스는 어느날 감독들과 함께 있는 콘스탄티누스를 발견했는데 갑자기 콘스탄티누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자네들은 감독으로서 교회를 취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네. 하지만 나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감독으로서 교회 밖의 문제를 담당하고 있지.”


콘스탄티누스는 바울의 신학에 대해서 문외한이었지만 유세비우스의 말에 의하면 오리게네스의 신학에 관해서는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신성한 임무를 부여받고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가 죽은 후에 사도와 같은 반열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억되기를 바랐다.
결국 그의 관은 양쪽으로 사도들을 상징하는 동상들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열세 번째의 으뜸가는 사도와도 같은 모습으로 시신이 안치되었다.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aea)에 참석한 감독은 약 300명에 이르렀지만 서방 교회 감독은 6명에 불과했다.
회의는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우스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감독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첫째,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본질에서 동등하다고 주장한 감독들은 숫자에서 열세를 나타냈지만 강한 신념을 가진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주도되었다.
둘째, 아리우스파는 사회자 유세비우스에 의해 주도되었다.
셋째, 분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감독들은 화평을 원했는데 가이사랴의 감독 유세비우스가 이 그룹에 속하였다.


알렉산더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탄생이란 개념에 확고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은 곧 태양과도 같은 하나님의 영원함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빛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하며 그리스도의 아들됨은 사람의 아들됨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수준이라고 보았다.
그는 빛과 태양과의 관계에서처럼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존재에 진정으로 필요한 부분으로 인식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신학을 성토하였고 신조를 제정하는 데 그의 이론이 포함되지 못하도록 전력을 다해 저지했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시간이 존재했으므로 그리스도가 영원한 존재자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한 반면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분이라서 마땅히 영원한 존재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쟁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유한한 존재냐 아니면 태어난 영원한 존재냐 하는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가 그리스도에게 신성이 있다고 말하더라도 두 신적 존재를 믿는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것은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 한 분과 창조된 하나님인 또 다른 한분을 믿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로 비난했다. 아타나시우스는 말했다.


그들은(아리우스파) 그리스도가 피조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성경을 존중해서 그리스도를 계속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를 바라는데 그들에게 두 분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사회자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파의 신조를 회의에 제출했지만 부결되었다.
가이사랴의 감독 유세비우스는 가이사랴의 신조에서 그리스도를 ‘창조된 형상’이라고 했다.
이 신조는 아리우스파에게는 물론 대다수의 감독에게도 흡족한 내용이었지만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는 이 신조에 반대를 표명했다.
스페인의 코르도바 감독 호시우스의 제의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동질(homoousios)이라는 말을 삽입하기로 합의를 봄으로써 동질이란 말이 결의안에 추가로 삽입되었다.
니케아 신조에는 가이사랴의 신조가 포함되었고, 그리스도는 ‘창조되지 않고’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태어났으며’, ‘하나님과 동등한 본질’이란 문구가 삽입되었다.
니케아 신조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독생자(the only-begotten)이고, 하나님의 하나님이며,
빛의 빛이고,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며,
태어난 분이지 창조된 분이 아니고,
하나님과 더불어 한 실체(또는 동질, homoousios)가 되는 한 분인 주를 믿으며


신조에는 아리우스에 대한 저주의 문구도 적혀 있다.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도 있다고 말하는 자들,
아들이 탄생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들,
아들이 무에서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하는 자들, 성자가 성부와 다른 본질 또는 본체에 속한다고 말하는 자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 만들어졌거나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을 교회가 저주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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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신조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니케아 신조는 당시 가이사랴 지방에서 사용되던 문답형식의 신조를 많이 수용했다.
이 신조가 최종적인 형태를 갖춘 것은 4세기 말이었으며 콘스탄티노플 회의(381년)와 칼케돈 회의(451년)를 통해 비준되었다.
니케아 신조에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자이신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보이지 않는’이란 말은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를 의미하고, 하나님이 물질세계만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이데아 세계의 형상들도 창조했음을 뜻한다.


니케아 회의는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전에 시간이 이미 존재했다거나 무로부터 창조되었으며 속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을 파문하겠다고 선언했다.
니케아 회의는 종속론을 단호하게 배척했다.
니케아 신조에는 성령이 언급되지 않았는데 특기할 만하다.
니케아 회의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비해 열등하지 않고, 그리스도는 창조된 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분이며,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존재하는 분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실체의 문제를 난해하게 만들었으며, 성령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성령론을 차세대 신학자들의 과제로 남겨 놓았다.


니케아 신조적 견해를 지키는 일에 과도하게 열심을 보인 사람은 안키라(Ancyra)의 마르셀루스(Marcellus, 374년에 사망)였다.
마르셀루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더불어 동일한 본질에 속하므로 성육신 이후에만 성자로 불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아들됨(sonship)이 어느 시점에 가서는 중단될 것이며 그때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재연합될 것이라고 했다.
니케아 신조에 “그의 나라에는 끝이 없으리라”고 한 구절은 마르셀루스의 교훈을 상쇄시키려는 의도로 삽입된 것이다.
마르셀루스의 견해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의 비판의 대상이기도 했다.


8세기 그리스도인이 사용한 사도신경(Apostles’ Creed)은 이때 제정된 신조를 기초로 변화된 것이라고 믿어지는데 이 신경(신조)을 8세기 동방과 서방 교회의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신앙의 규범으로 삼았다.
신경은 열두 가지 조목으로 묶어져 있어서 열두 사도들의 말씀이라고도 알려졌지만 오늘날 이 같은 전설을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경 전문은 다음과 같다.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the heavens and earth;

2.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3.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and born of the Virgin Mary;

4.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5.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on the third day he was raised from the dead;

6.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he ascended into the heavens, and sits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7.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from where he will come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8. 성령을 믿사오며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9.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이는 나중에 추가된 구절이다)
in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10.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the forgiveness of sins;

11. 몸이 다시 사는 것과
the resurrection of the flesh;

12.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and eternal life.

아리우스의 신학에 호감을 가진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우스는 니케아 신조에 불만이 많았지만 콘스탄티누스의 주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서 직접 비난할 수가 없었다.
유세비우스는 아타나시우스로 하여금 파문당한 아리우스를 입교시키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328년에 감독이 된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입교를 끝내 거부했다.
이를 안 콘스탄티누스는 호시우스에게 친서를 주어 알렉산드리아로 특파하면서 무익한 논쟁을 중단하고 동방의 감독들과 화해하라고 아타나시우스에게 권유했다.
하지만 고집불통의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입교를 허락하지 않아 결국 황제의 미움을 사고 말았다.


동방 교회 감독들이 니케아 신조에 반발하기 시작했는데 오리게네스 제자들의 반발이 특히 거세었다.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인 신학자들은 다투어 이론들을 내 놓았다.
콘스탄티우스의 여동생 콘스탄티아(Constantia)가 아리우스의 신학에 동조했으며 유세비우스가 아리우스의 재입교를 끊임없이 주장해 오자 콘스탄티누스는 334년에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에 반대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유세비우스는 자기가 황제의 호의를 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335년 두로(Tyre)에서 개최된 종교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를 황제에게 고소했다.
그 결과 아타나시우스는 파면당했으며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의 이론을 옹호하는 일에 계속 주력했다.


니케아 신조에 대한 감독들의 찬반논쟁은 한동안 진행되었지만 첫 세계종교회의 결의사항이라는 점 때문에 신조를 지지하는 세력이 점점 늘었다.
4세기 후반 캅파도키아인들(Cappadocians, 캅파도키아는 오늘날 터키에 속해 있다)이 신조에 적극적인 지지를 나타냈는데 캅파도키아 학파의 주요 감독들은 바질(Basil), 그레고리(Gregory, 닛사의 감독), 그리고 그레고리(나지안주스의 감독)였다. 니케아 신조는 제2차 세계종교회의로 불리는 콘스탄티노플회의(381년)에서 인준을 받았으며 그때부터 가톨릭의 교리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결론으로 말하면 니케아 신조는 사도신경과 마찬가지로 신앙의 표준이었다.
그리고 동방의 여러 지방에서 발생해서 비록 상호간에 표현은 달랐지만 한결같이 동방 교회의 정신의 의해 형성된 신조들의 발전을 나타낸 것이었다.
니케아 신조는 로마의 신조와 마찬가지로 새로 입교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동방 교회의 신조들은 서방 교회의 것들과 달랐는데 서방 교회의 신조들은 간략하고, 실제적이며, 정적인 것이었던 반면 동방 교회의 신조들은 형이상학적이고, 논쟁적이며, 융통성이 있고, 이단과의 투쟁에서 교회의 신앙을 보전해야 할 긴급한 요청에 적응될 수 있는 것이었다.
동방 교회의 신조들이 지닌 이런 특징들은 니케아 신조에서 강조되었다.
사실 니케아 신조는 신학적이고 비의식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세례의식에서 사용될 수 없었으며 또 적합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니케아 신조는 주로 그리스도론적 신앙의 표준을 나타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궤변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서 동질(homoousios)이란 말이 신조에 삽입되었는데 이 말은 성경에서 유래된 것은 아니지만 그 의미가 본질적으로 성경적이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이 같은 신학적 논쟁적 형식이 필요했다.
니케아 신조는 실제로 교회의 여러 의식에서 사용되는 고백적 신조에 영향을 미쳤으며 니케아 신조 지지자들은 이 신조가 장엄한 세례의식과 예배의식에서도 낭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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