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 신조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니케아 신조는 당시 가이사랴 지방에서 사용되던 문답형식의 신조를 많이 수용했다.
이 신조가 최종적인 형태를 갖춘 것은 4세기 말이었으며 콘스탄티노플 회의(381년)와 칼케돈 회의(451년)를 통해 비준되었다.
니케아 신조에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자이신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보이지 않는’이란 말은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를 의미하고, 하나님이 물질세계만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이데아 세계의 형상들도 창조했음을 뜻한다.


니케아 회의는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전에 시간이 이미 존재했다거나 무로부터 창조되었으며 속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을 파문하겠다고 선언했다.
니케아 회의는 종속론을 단호하게 배척했다.
니케아 신조에는 성령이 언급되지 않았는데 특기할 만하다.
니케아 회의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비해 열등하지 않고, 그리스도는 창조된 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분이며,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존재하는 분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실체의 문제를 난해하게 만들었으며, 성령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성령론을 차세대 신학자들의 과제로 남겨 놓았다.


니케아 신조적 견해를 지키는 일에 과도하게 열심을 보인 사람은 안키라(Ancyra)의 마르셀루스(Marcellus, 374년에 사망)였다.
마르셀루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더불어 동일한 본질에 속하므로 성육신 이후에만 성자로 불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아들됨(sonship)이 어느 시점에 가서는 중단될 것이며 그때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재연합될 것이라고 했다.
니케아 신조에 “그의 나라에는 끝이 없으리라”고 한 구절은 마르셀루스의 교훈을 상쇄시키려는 의도로 삽입된 것이다.
마르셀루스의 견해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의 비판의 대상이기도 했다.


8세기 그리스도인이 사용한 사도신경(Apostles’ Creed)은 이때 제정된 신조를 기초로 변화된 것이라고 믿어지는데 이 신경(신조)을 8세기 동방과 서방 교회의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신앙의 규범으로 삼았다.
신경은 열두 가지 조목으로 묶어져 있어서 열두 사도들의 말씀이라고도 알려졌지만 오늘날 이 같은 전설을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경 전문은 다음과 같다.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the heavens and earth;

2.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3.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and born of the Virgin Mary;

4.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5.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on the third day he was raised from the dead;

6.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he ascended into the heavens, and sits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7.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from where he will come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8. 성령을 믿사오며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9.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이는 나중에 추가된 구절이다)
in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10.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the forgiveness of sins;

11. 몸이 다시 사는 것과
the resurrection of the flesh;

12.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and eternal life.

아리우스의 신학에 호감을 가진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우스는 니케아 신조에 불만이 많았지만 콘스탄티누스의 주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서 직접 비난할 수가 없었다.
유세비우스는 아타나시우스로 하여금 파문당한 아리우스를 입교시키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328년에 감독이 된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입교를 끝내 거부했다.
이를 안 콘스탄티누스는 호시우스에게 친서를 주어 알렉산드리아로 특파하면서 무익한 논쟁을 중단하고 동방의 감독들과 화해하라고 아타나시우스에게 권유했다.
하지만 고집불통의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입교를 허락하지 않아 결국 황제의 미움을 사고 말았다.


동방 교회 감독들이 니케아 신조에 반발하기 시작했는데 오리게네스 제자들의 반발이 특히 거세었다.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인 신학자들은 다투어 이론들을 내 놓았다.
콘스탄티우스의 여동생 콘스탄티아(Constantia)가 아리우스의 신학에 동조했으며 유세비우스가 아리우스의 재입교를 끊임없이 주장해 오자 콘스탄티누스는 334년에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에 반대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유세비우스는 자기가 황제의 호의를 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335년 두로(Tyre)에서 개최된 종교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를 황제에게 고소했다.
그 결과 아타나시우스는 파면당했으며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의 이론을 옹호하는 일에 계속 주력했다.


니케아 신조에 대한 감독들의 찬반논쟁은 한동안 진행되었지만 첫 세계종교회의 결의사항이라는 점 때문에 신조를 지지하는 세력이 점점 늘었다.
4세기 후반 캅파도키아인들(Cappadocians, 캅파도키아는 오늘날 터키에 속해 있다)이 신조에 적극적인 지지를 나타냈는데 캅파도키아 학파의 주요 감독들은 바질(Basil), 그레고리(Gregory, 닛사의 감독), 그리고 그레고리(나지안주스의 감독)였다. 니케아 신조는 제2차 세계종교회의로 불리는 콘스탄티노플회의(381년)에서 인준을 받았으며 그때부터 가톨릭의 교리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결론으로 말하면 니케아 신조는 사도신경과 마찬가지로 신앙의 표준이었다.
그리고 동방의 여러 지방에서 발생해서 비록 상호간에 표현은 달랐지만 한결같이 동방 교회의 정신의 의해 형성된 신조들의 발전을 나타낸 것이었다.
니케아 신조는 로마의 신조와 마찬가지로 새로 입교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동방 교회의 신조들은 서방 교회의 것들과 달랐는데 서방 교회의 신조들은 간략하고, 실제적이며, 정적인 것이었던 반면 동방 교회의 신조들은 형이상학적이고, 논쟁적이며, 융통성이 있고, 이단과의 투쟁에서 교회의 신앙을 보전해야 할 긴급한 요청에 적응될 수 있는 것이었다.
동방 교회의 신조들이 지닌 이런 특징들은 니케아 신조에서 강조되었다.
사실 니케아 신조는 신학적이고 비의식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세례의식에서 사용될 수 없었으며 또 적합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니케아 신조는 주로 그리스도론적 신앙의 표준을 나타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궤변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서 동질(homoousios)이란 말이 신조에 삽입되었는데 이 말은 성경에서 유래된 것은 아니지만 그 의미가 본질적으로 성경적이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이 같은 신학적 논쟁적 형식이 필요했다.
니케아 신조는 실제로 교회의 여러 의식에서 사용되는 고백적 신조에 영향을 미쳤으며 니케아 신조 지지자들은 이 신조가 장엄한 세례의식과 예배의식에서도 낭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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