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 학파
Nothern African school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오늘날 알제리 지역인 북서부 아프리카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지로 부상했었다.
이 지역은 고대 말기에 지중해의 주요 도시였으며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로마와 카르타고가 한때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가 알려진 당시 이 지역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북아프리카 학파의 중요한 신학자들로는 테르툴리아누스(225년 사망)와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258년 사망), 힙포의 아우구스티누스(430년 사망)가 있다.
이 학파는 현실주의를 표방했으며, 실천적인 문제에 보다 관심을 기울였고, 이상주의를 추구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심한 대조를 이루었다.
북아프리카 학파는 고전주의 학문과 철학을 신학에 오류를 범하게 하는 요소로 여기고 배격했으며, 사도적 전승의 순수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성결한 생활과 엄격한 금욕주의를 통해 영혼을 맑게 하는 데 전념했다.


초기 가톨릭시대의 특징으로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27권의 신약성경이 확정되었으며, 영지주의자 마르시온이 축출되었고, 묵시주의를 표방한 몬타누스가 배척되었으며, 감독제도가 발전해 감독직에 오르는 것이 의식으로 행해졌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교회는 계속해서 제국의 박해를 받았고 영지주의의 종교철학과 마르시온주의, 몬타누스의 위협적 요소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르낙은 『교의사』에서 영지주의에 대한 감독들의 비판을 요약했다.


1. 구약시대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인 동시에 구속의 하나님이다.

2. 영지주의자들의 이원론은 하나님의 전능함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개념 자체까지도 말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3. 하나님의 유일성은 보잘것없는 관념의 희롱에 불과한 영지주의자들의 유출설로 인해 위태로워졌다.

4. 신적 존재의 모든 상태에 대해 토론함은 무익하다.

5. 영지주의자들은 죄의 기원을 빛의 나라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6. 우주의 구성을 비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지혜와 선함을 판단하는 것이므로 외람된 일이다.

7. 그리스도에 대한 가현설은 하나님을 거짓으로 몰아넣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다.

8. 사람의 자유의지는 부정될 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 ‘신앙의 표준 regula veritatis, rules of faith’이 발전된 것이다.
신앙의 표준은 교회의 모든 가르침의 근본원리를 신조형식으로 요약한 것인데 관련 성경구절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디모데전서 6:12)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디모데전서 6:20)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후서 1:1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베드로전서 1:22)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골로새서 1:5)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로마서 6:17)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 (히브리서 6:2)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로마서 2:16)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고린도전서 15:1)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디모데후서 1:13)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디모데전서 4:6)


이상의 구절들은 고백, 위임된 일들, 신앙, 진리의 말씀, 교리의 형식, 복음, 온전한 교훈, 신앙의 말씀 등에 관한 것으로 대부분 바울의 신학인 것이 특징이다.
이것들은 복음과 신앙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교훈 전체를 대신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다음과 같이 바울의 말은 세례의식문처럼 들린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린도전서 15:3-4)


신학자 파이네(P. Feine)는 신약성경에 있는 신앙의 표준을 1925년에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만들었다.


나는 세계의 창조주요 아버지인 한 분 하나님 (또는 세계를 자기에게 속하게 하는 분, 또는 세계를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를 통해 자기를 위해서 있게 한 분, 또는 하늘과 땅을 지은 분, 또는 세상의 한 분 하나님이요 한 분 아버지인 분, 또는 만물 위에 존재하고 만물 안에 존재하는 분)을 믿노라.
또 다윗의 후손으로 난 하나님의 아들 (또는 독생자) 주 (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노라.
그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고 (또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 죄를 위해 죽었으며 장사한바 되어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또는 죽은 자들에게 내려 가고) 사흘 만에 부활했으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니라.
그는 모든 천사와 권세들을 복종케 하는 분이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분 (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올 분, 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도록 하나님에게로부터 임명을 받은 분)이니라.
그분을 통해 우리는 죄의 용서와 성령의 은사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 (또는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 또는 영생에 대한 소망)을 받느니라.


파이네가 재생한 삼위일체를 근거로 한 이 신조는 사도신경(Apostles’ Creed)을 낳게 한 모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세례의식에 사용된 신앙의 표준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동정녀에게서 나셨고,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으며,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심판을 행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분”으로 인식되었다.


니브는 이렇게 인식된 이유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이었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거듭 강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에게 본질적인 작업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세례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행해진 것은 사도가 아니라 교부들에 의해서였으므로 니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가 행해진 것을 130년과 140년 사이로 어림했다.


‘고대 로마 신조 Old Roman Creed’가 만들어진 연대는 100년과 3세기 초 사이로 보는데 신학자들마다 같지 않다.
그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과 흡사하며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노라.
또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그는 성신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되었으며,
사흘 만에 죽은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고,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또 성신을 믿으며,
죄의 용서를 믿으며,
몸(육)의 부활을 믿노라.


신조(또는 신경)로 번역되는 creed는 ‘나는 믿는다’라는 뜻의 라틴어 credo에서 유래했다.
로마인이 이 신조를 세례의 신앙고백으로 사용한 것은 니케아 신조(Nicea Creed)를 사용하기 전까지였다.
3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로마 교회는 세례와 예배에서 사도신조를 다시 사용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서부 고올(Western Gaul)에서 발전되었는데 이런 발전된 형식의 신조는 로마 밖의 모든 교회들이 본래의 신조에다 어떤 특정한 의미의 구절을 첨가한 것이다.
변전된 형식의 신조는 로마 교회에서 용납되었는데 그 정당성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첨가된 구절들은 대부분 초대교회의 여러 지방에서 사용된 것들이다.
서방 교회 전체가 이 신조를 용납했으며 루터의 교리문답과 하이델베르그의 교리문답에도 이 신조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신조는 신학적으로 두 가지 문제를 함유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서로 구별되면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점과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에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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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툴리아누스의 아버지는 카르타고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아프리카의 로마 통치지역 카르타고(Carthago)의 부유한 이교도 집안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였다.
카르타고는 오늘날 투니시아(Tunisia)인데 당시 문화적으로 교육적으로 서방에서 로마에 버금가는 도시였다.
그의 아버지는 카르타고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카르타고에서 문법, 수사학, 문학, 철학, 그리고 법을 공부한 후 로마로 가서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그리스도교에 관심이 생겨 195-6년에 개종하였으며 나중에 장로가 되었다.
그는 철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었다.


그가 저술활동을 한 것은 195년부터 220까지였다.
저술가로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독특했는데 과거의 저술가들과는 달리 논리전개에 있어서 엄격한 형식을 사용하고 해박한 지식과 예리한 통찰력을 시위했으며 수사학에서 빼어난 역량을 나타냈다.
원죄(original sin), 자유의지(free will), 공의(righteousness)에 대한 의무, 보상 등을 법률적인 관념으로 정의했는데 이것은 논리적이고, 역설적이었으며, 생동감과 해학이 넘쳤다.
막연했던 신학적 관념들이 그에 의해서 명확해졌으며 그가 정립한 개념들은 이후 천 년 동안 서방 신학에서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그리스어로 저술했지만 나중에 라틴어로 저술했으므로 그는 라틴 신학의 아버지로도 칭송받았다.


변증가들과 마찬가지로 테르툴리아누스도 이단에 대항했으며 이레네우스와 마찬가지로 영지주의를 주된 대적으로 삼았다.
그는 철학을 영지주의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저술에서 철학을 거부하는 사상이 발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철학자와 이단 사상가들은 동일한 주제를 논의하면서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가엾은 아리스토텔레스여! 그들에게 변증법을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논조를 만들고 파괴하는 일에 참피온이 되도록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구려.
그들의 이론은 교활하며, 추론하는 일에 진땀을 흘리고, 증거를 발견하여 확신으로 삼으며, 논쟁에서 주제넘게 행동했지만 결국은 논쟁을 통해 얻은 것이 없음을 볼 때 그들의 노력은 무상해지고 말았다오.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아카데미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단자들이 그리스도인들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우리의 교리는 솔로몬 성전의 기둥으로부터 비롯했고, 순결한 마음으로 주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사람이 원한다면 스토아주의 그리스도교, 플라톤주의 그리스도교, 그리고 변증법적 그리스도교가 가능하지만 우리에게 이미 복음이 전파된 이상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알 필요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을 초월하는 어떤 소망도 있을 수 없으며, 이것이 우리 믿음의 첫째 원칙이기에 믿음을 초월하는 그 어떠한 것도 우리에게는 믿을 만하지 않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믿음을 초월해서 어떤 것을 구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일로 인해서 참신앙의 빈곤함을 드러낼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은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 찾고 있는 바로 그것에 대해서만 믿음을 가진 자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영지주의자들도 그들의 지혜 가운데서 믿음의 경계를 넘어섰다고 보고 성경에 이미 계시되어 있는 사도적 전통이 보존된 단순한 신앙을 가질 것을 권했다.


그는 저서 『마르시온에 대적해서 Adversus Marcionem』에서 이원론주의에 근거한 그리스도론을 비판하면서 예수는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고대한 메시야의 구현이라고 했다.
그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배척하고 신약시대의 하나님만을 찬양한 마르시온의 신학에 반박하면서 마르시온의 하나님이 그토록 선하고 능력이 있는 분이라면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모든 시간에 기껏해야 한 그루 외로운 나무만을 창조했다”라는 말로 빈정거렸다.
마르시온의 신학을 비판한 글에서 삼위일체가 시사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는 성부와 성자, 성령은 세 분이지만 신성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한 분(una substantia)으로 간주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성부는 완전한 신성이며 성자는 신성으로부터 비롯한 완전한 신성의 일부분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가 신성을 지닌 점에서는 하나님과 일체이므로 완전한 신성의 부분이 된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과 동등한 수준이 될 수 없음을 시사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그리스도가 예수의 형체로 나타날 때 그리스도가 지닌 신성이 육체와 완전히 융합되지 않았으므로 신성을 지닌 예수는 동시에 인성을 지닌 분이기도 하다고 했다.
예수의 인성에 대한 강조는 신성만을 주장한 동방 교회 감독들과 불화의 원인이 되었다.
동방 교회 감독들이 예수의 생애를 그리스도가 사람이 된 사건으로 이해한 데 비해 서방 교회 감독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건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는 “예수는 새 율법과 새 계약을 주었다”라고 하면서 입교자는 참회하는 세례를 받아 “물의 성례로 모든 죄를 씻은 후 영생”으로 나아가야 마땅하다고 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바울이 죄의식에 근거한 신학을 전개한 이래 죄의식을 가장 강조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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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서를 읽고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서를 읽고 바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교회를 사도들의 가르침이 보관된 곳으로 정의하면서 역대 감독들을 가리켜 믿을 만한 전승의 관리자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런 그가 50대 초에 스스로 종파 분립주의자가 되어 묵시주의자 몬타누스의 신학을 옹호하는 데 가담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몬타누스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체험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말에 나타난다.


사람이 성령을 받았을 때 특히 하나님의 영광이나 말씀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힘에 사로잡혀서 이성을 잃게 되고, 성령이 가득한(pneumatici) 우리와 동물적(psychici) 사람들 사이에 주지해야 할 사항들을 지적해 준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과 동물적인 사람을 양분하는 방법은 영지주의자들의 방법과 일치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이 지성적인 면에서 구별한 데 비해 테르툴리아누스는 윤리적인 면에서 구별했다.
이러한 지성적인 면과 윤리적인 면의 차이는 영지주의와 몬타누스주의의 차이이기도 하며 나아가서는 그리스 교회와 로마 교회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는 로마 교회 장로들을 동물적인 사람들로 묘사하고 자신을 포함한 성령이 가득한 사람들을 그들과 구별해서 감독들로부터 비난받았다.
그는 엄격한 윤리를 주장했는데 재혼을 비윤리적인 행위로 간주했으며, 세례 받은 사람의 간음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규정했고, 이런 죄를 범한 죄인은 교회로부터 영원히 추방해야 마땅하다고 했다.
그는 교회를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신탁한 곳으로 정의했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파문당하는 것은 구원받을 수 없는 저주의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가 간음을 용서받지 못할 죄로 규정한 것은 요한의 말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요한 1서 5:16-17)


테르툴리아누스는 저서 『우상숭배에 관하여 On Idolatry』에서 유일신인 하나님을 숭배할 것을 역설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순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되었다”고 하며 황제숭배를 죽음을 무릅쓰고 거부해야 함을 시사했다.
또한 국가가 의식을 통해 황제를 신격화하므로 그리스도인은 황제를 신격화하는 그 의식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사랑과 평화에 헌신해야 하므로 군인이 되어서는 안 되고, 배심원이 되어 법정에 서서도 안 되며,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거나 사형에 처하는 일에 관여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이런 사항들이 예수가 유대의 왕이 되기를 거부한 것과 같은 것이라 했다.


이런 사실은 세상의 모든 권력이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이라는 점을 여러분으로 하여금 상기하도록 해준다.
한 영혼이 하나님과 황제 가이사를 두 주인으로 함께 섬길 수 없으며, 가이사의 형상은 동전 위에 새겨져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 위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돈은 가이사에게 돌려주고 하나님께는 여러분 자신을 바쳐야 한다.
그렇지 않고 모든 것이 가이사에게 속한다면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테르툴리아누스가 철학을 혹독하게 비판하기는 했지만 철학적 관념들과 체계적 진술을 저술에서 더러 사용했음을 볼 수 있다.
영지주의의 특징적 이론인 유심론(Spiritualism)을 반대하는 가운데 그는 스토아 철학으로부터 실재론(Realism)을 빌어 왔으며 신학은 모든 점에서 명백한 실재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종의 실재가 취하는 형체를 뜻한다.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비유형적(incorporal)일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이 같은 논리로 실재의 유형성을 하나님의 속성에까지 연결시켰으며 또한 영혼이 보이지 않는 형체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해서도 시사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영혼의 증언에 관하여 De Testimonio Animae』에서 영혼은 선천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혼이 육체와 전혀 다른 물질인 묽은 물질로 만들어졌으며 물질로 만들어진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므로 영혼도 창조물 가운데 하나라고 보았다.
그리고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에 임신되는 순간에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에 의해서 창조될 수는 없으며 물질로 태어나긴 하지만 육체와는 달리 사망하거나 멸하지 않는다고 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 심지어 하나님도 형체적이라고 했는데 이는 스토아 철학의 영향이다.
그는 형체가 없는 영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인식론적으로 믿음과 이성에 관한 기본적 구분방식을 알았고 믿는 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았다.
믿음의 지식과 이성의 지식이 같지 않음을 안 것이다.
그는 믿음의 지식이 이성적인 증거와 상관없이 나름대로 지혜를 가진다고 보았다.
이 같은 사고는 그가 예수의 부활에 관해 말한 데서 발견되는데 “이 일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확실한 사실이다”라고 했다.
부활하는 것이 모순이므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올바른 인생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인생이라며 창조물이 창조주에게 복종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했다.
그에게 있어서 계명은 하나님의 자존심의 표적이므로 창조물이 창조주의 뜻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창조주와 창조물의 관계를 법적 관념인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로 정의하고 통치자는 선량한 창조물에게는 상을 주지만 사악한 창조물은 징벌하며 그 중에 면죄 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구원을 베푼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창조주는 거저 구원을 베푸는 것이 아니며 자존심의 표적이 되는 자기의 계명을 따르려고 결심한 자의 회개와 세례를 통해서만 구원의 손길을 펼치므로 회개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용서라는 값을 치러야 가능한 것이라 했다.
이렇게 그는 바울의 가르침대로 구원을 창조주의 은혜로 이해했다.


2세기 초 감독들은 교회가 교인들에게 얼마나 엄격한 윤리를 요구해야 하느냐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는 테르툴리아누스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그는 세례를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로 정의했으며 세례 받은 후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존재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신생아를 세례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성인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한 번밖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존재하므로 회개와 병행되는 세례를 적절한 방법으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 번밖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란 우상숭배, 간음, 살인, 배교행위 등이다.
이런 죄는 참회를 통해서 한 번밖에 용서받을 수 없고 만일 다시 범할 경우 자신을 학대하는 방법으로 참회한다 할지라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구원에 대한 당시 교회의 역할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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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감독 칼리스투스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로마의 감독 칼리스투스(Callistus, 217-222 재위)는 구원에 대한 교회의 역할에 한계가 있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주장에 반박했다.
칼리스투스는 우상숭배와 간음의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참회하면 다시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다.
217년에 감독이 된 칼리스투스는 교회를 모든 짐승을 보호한 노아의 방주에 비유하면서 교회는 교인으로 하여금 더욱 향상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구원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교회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윤리적으로 최고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교인에게 교회가 계속 구원의 길을 열어주어야 하며 진심으로 회개하는 죄인은 늘 용서하고 받아 주어야 한다고 했다.
칼리스투스는 훗날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정의를 내린 창시자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회개의 규정을 조정하는 일은 감독회의에서 결정할 사항이라고 했다.
그는 로마 감독을 베드로에게 주어진 열쇠의 힘(potestas clavium)이라고 했는데 이는 로마 감독이 감독들 중 가장 권위가 있음을 시사한 말이다.
베드로가 로마 최초의 감독이라는 관념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이었으므로 이제 남은 일은 로마 감독을 교황(Roman Symbol)으로 옹립하는 일 뿐이었다.


구원에 대한 교회의 역할에 관한 테르툴리아누스와 칼리스투스의 대립된 주장은 세례에 대한 정의의 문제에서 클라이막스를 이루었다.
당시 감독들마다 세례에 관한 의견이 분분했는데 로마의 보수주의자 히폴리투스(Hippolytus)는 로마 감독이 지나치게 용서를 남용하고 있으며 칼리스투스가 그리스도교의 이상주의를 저버렸다고 비난했다.
히폴리투스는 칼리스투스와 결별하고 따로 교회를 세웠다.
테르툴리아누스는 히폴리투스를 지지했다. 칼리스투스의 주장에 동조한 감독들도 있었고 히폴리투스와 테르툴리아누스의 주장에 동조한 감독들도 있었지만 또 다른 주장을 편 감독들도 있었다.
어떤 감독은 결혼한 사람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결혼한 사람이 독신자에 비해 간음의 죄를 지을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었다.
세례 받을 적령기에 관한 문제도 논쟁거리가 되어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포함한 일부 감독은 임종할 즈음까지 세례를 미루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이런 주장을 한 이유는 남은 인생이 짧으면 죄를 지을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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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리아누스
Cyprian, 200-258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그렇지 못한 죄의 구별은 세례, 구원, 은혜에 대한 한계 설정의 문제가 되었고 또한 교회를 정의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
죄에 대한 구별의 논쟁은 결국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 사람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지적 후계자 키프리아누스였다.


키프리아누스는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고향 카르타고 사람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유능한 수사학 교사였으며, 테르툴리아누스의 신학에 정통했다.
그는 246년경에 개종하여 2년 후 카르타고의 감독이 되었는데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능한 감독이 되었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의 성직수임을 그리스도의 신부에 비유했다.
교회를 구원의 모형으로 인식하여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오로지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인은 감독을 선출하는 장소에 참석할 수 있지만 감독은 인근 교회 감독들에 의해서 선출되어야 하며, 감독이 없는 교회란 있을 수 없고, 교회 없는 구원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교회에는 계급이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정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감독에게는 교회 멤버를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므로 감독이 교인에게 구원의 자격을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키프리아누스는 감독에게는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 있으며 교인은 감독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했다.
그에 의해서 감독과 교회의 절대권위주의가 강조되었다.
바울은 교인에게 자율권을 허락했지만 키프리아누스는 이 자율권을 박탈했으며 바울이 성령은 각 교인에게 역사한다고 가르친 반면 그는 교회를 대표하는 감독에게만 성령이 역사한다고 했다.
키프리아누스에 의해서 감독은 군주처럼 행세하게 되었으며 성경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데 있어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키프리아누스는 모교회(Mother Church)로 예루살렘 교회를 꼽았지만 로마가 70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할 때 예루살렘 교회는 사라졌다.
그는 사도들이 직접 후계자를 지목한 감독들이 일반감독들보다도 더욱 권한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한 로마에서의 감독이 감독 중에 으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사실은 요한이 기록했으며(13:36, 21:18-19),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가 고린도 교회의 교인에게 보낸 편지와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1세기 말 안디옥으로부터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적혀 있다.
유세비우스와 고린도 감독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바울은 참수당했으며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되었다고 기록했다.
테르툴리아누스도 이 같은 사실을 전하면서 160년경 바티칸(Vatican) 언덕에는 베드로의 순교를 기념하는 탑이 건립되어 있었다고 했다.
바울의 순교를 기념하는 탑은 오스티아(Ostia) 거리에 세워졌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St-Paul’s-Without-the-Walls이다.
두 사도의 순교를 기념하는 탑은 아피안(Appian Way)에 세워졌으며 2세기부터 그리스도인은 6월 29일에 두 사도의 순교를 기념하는 의식을 가진다.


바울 학파의 유능한 신학자 마르시온이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해서 배척당했으므로 로마 교인들은 바울에게 별로 존경심을 나타내지 않았고 베드로에게만 존경심을 표했다.
복음서에서도 베드로가 제자들 중에 으뜸가는 제자로 묘사되어 있다.
그 중 마태는 예수가 베드로를 가리켜서 바위라고 말하며 바위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고 천국의 열쇠를 주었다고 기록했다.
로마의 첫 감독은 166-74년에 활약한 소테르(Soter)이지만 안디옥에 교회를 건립한 베드로가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건립한 마가와 함께 로마로 와서 활약했으므로 상징적으로는 베드로가 로마의 첫 감독이 된다.
그러므로 로마 감독이 감독들 중 으뜸 된다는 키프리아누스의 주장은 별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


키프리아누스는 251년에 저서 『가톨릭 교회의 통일 Unity of the Catholic Church』에서 교회의 단일성을 주창했는데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을 화합의 타당성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에베소서 4:4-6)


당시에는 교회에 대한 정의가 분명하지 않았는데 감독들이 교회의 단일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키프리아누스가 강조한 단일성은 교회의 첫 정의라는 의미를 남겼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은 한 분이며, 예수도 한 분이고, 교회도 하나이며, 주의 말씀으로 반석 위에 세운 감독도 하나이다.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을 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고 교회를 어머니로 두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교회는 감독들의 통합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감독은 교회 안에 있으며 교회는 감독 안에 있다.
감독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교회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감독단은 하나이다.
감독들은 한 데 어울려 일체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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