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발견된 <발레 메카닉>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야마구치가 『입체주의자 영화』를 소개한 것을 계기로 나는 벽장 안의 내용물에 흥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결국 그 책에 있는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끝으로 좀더 중요한 사실은 이 같은 영화를 구제하기 위해 전문가의 도움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해둔다.6


이상이 두 개의 필름을 발견하게 된 경위이다. 후에 조나스 메카스의 조사로 릴리안 키슬러에 의해 발견된 <발레 메카닉>은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새롭게 발견된 <발레 메카닉>은 1924년 비인에서 개최된 음악과 극장예술축제의 ‘새로운 극장기술 국제전’에서 상영된 4개의 필름 가운데 하나였다.
여기서 말하는 4개의 필름이란 키슬러 부인도 언급한 바와 같이 레제의 <발레 메카닉>, 루트만의 <엑셀시오 라이판>, 에겔링의 <대각선 교향곡>, 리히터의 <리듬 21>이다.


뿐만 아니라 새롭게 발견된 <발레 메카닉>은 최초에 편집된 것으로 빈에서의 상연이 초연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여기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여기에는 새로운 극장기술 국제전 당시(1924) 선보인 <공간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키슬러와 레제가 찍혀 있다.
이 사진을 보면서 필자는 레제가 필름을 들고 빈의 키슬러를 방문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발레 메카닉>을 보아왔는지 알아보자.
여기에 관해서 조나스 메카스는 키슬러 부인과의 라디오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같은 사실을 검토해보면 레제의 <발레 메카닉>은 파리에서 공개되기 전에 이미 상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발레 메카닉>은 파리에서 공개된 이후 화제에 오르게 되었지만 최초로 공개된 것은 빈이었다.
그런데 빈에서의 상영을 주선한 것은 키슬러였고, 이것을 계기로 그는 <발레 메카닉>의 프린트를 소장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발레 메카닉>의 오리지널은 빈에서 공개된 프린트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물론 이 프린트는 레제가 직접 편집한 것이다.
그것을 빈에서 상영한 후에 키슬러가 소장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또 다른 프린트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레제는 머피라는 사람과 함께 또 하나의 프린트를 제작한 것이다.
이것은 빈에서 상영된 것과 다소 차이가 있다. 7


이어서 메카스는 자신은 문화 보존에 관계하는 기록보관인(archivist)이므로 나머지는 역사가들의 임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좀더 조사해 보충해야 한다고 말했다.


키슬러가 뉴욕에 가지고 온 것은 최초의 <발레 메카닉>으로, 레제가 첫 공개를 위해 준비한 것이다.
그런데 이 프린트는 하나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수작업으로 세심하게 편집된 몇 백 개에 이르는 부분 부분을 다시 편집한 것이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재편집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누군가’는 당연히 레제여야 할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발레 메카닉>은 레제와 머피의 프린트 이전의 오리지널 버전으로 이 같은 발견은 예술사 상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8


또 한사람의 참가자인 월터 루트만은 애니메이션 기법을 이용해 추상영화를 만든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조나스 메카스도 필름 위에 직접 착색한 추상영화를 제작한 적이 있다.
이번에 키슬러 부인의 집에서 발견된 루트만의 작품은 메카스와는 다른 방법을 이용하고 있는데, 수작업에 의해 채색된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엑셀시오 타이어사(社)와 독일의 라이팬사(社)를 클라이언트로 하는 일종의 선전용 필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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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키슬러와 영화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가 빈에서 상영한 4개의 필름은 모두 1920년대를 대표하는 전위영화의 수작들이다.
이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키슬러가 영화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키슬러의 영화에 대한 관심을 키슬러 부인은 앤디 워홀의 작품을 예로 들면서 설명한 바 있다.
부인에 의하면 만년의 키슬러는 워홀의 영화를 보고 그가 대단히 정열적인 필름 제작자 중 한 사람이며 이른바 전문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종합예술가로서의 측면을 지닌 인물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당시는 워홀이 영화를 처음 만들기 시작하던 시기로 아직 누구도 워홀의 영화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던 때이다.
키슬러는 8시간에 걸친 워홀의 영화를 감상한 이유를 부인 이외의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건축가였으며 무대디자이너였던 키슬러와 영화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가 영화를 보는 환경 또는 영화와 연극의 융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사실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프로모터로서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두 개의 필름은 키슬러에 관한 새로운 연구방향을 제시해준다.


어쨌든 키슬러 자신이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가 몇 가지 더 있다.
금번(1978년 2월 20일) 미술출판사에서 출판된 필자의 『환경예술가 키슬러(環境藝術家キ-スラ-)』의 연보를 작성하기 위해 키슬러 부인으로부터 받은 자료 중에 들어 있는 계획안도 그 중 하나이다.


파리의 매그 화랑(Galerie Maeght)에서 열린 국제 초현실주의전의 <미신의 방>을 설계하기 위해 파리에 체제하고 있던 1947년에 키슬러는 자신의 각본에 의한 영화 <크리스마스 트리 Christmas Tree>의 제작을 검토했다고 한다.
그는 영화작가 루디 버그하트에게 이 영화에 사용될 많은 스틸 사진의 촬영을 부탁했다.
뉴욕에 돌아온 후에도 버그하트를 도와 영화의 몇 장면을 촬영했다.
필자는 아직 보지 못했으나 키슬러의 각본과 버그하트가 촬영한 장면은 현존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한편 『환경예술가 키슬러』를 위해 보내온 키슬러 부인의 우편물에는 그녀의 헌사와 키슬러가 적은 짧은 문장이 동봉되어 있었다.
그것은 1957년 키슬러와 바토스가 설계한 ‘월드 하우스’화랑을 위한 영화의 각본에 등장하는 시의 일부분이었다.3)
아마도 이 ‘월드 하우스’화랑을 테마로 영화를 제작할 계획이 있었던 듯하다.
키슬러와 영화의 관계는 앞으로 연구해야 할 중요테마 중 하나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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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각상(像) 조작용 기계장치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는 대상물의 기록수단으로 탄생한 사진기술, 사진이 움직이는 영상으로 발전된 과정, 그리고 오늘날의 텔레비전 등에 이르기까지를 연속된 기술적 진화로 파악하고 연구했다.
같은 무렵 실험예술가 모홀리-나기도 영화, 사진, 포토그램 등 영상매체를 중심으로 하는 조형적 실험을 행한 바 있다.
키슬러의 경우 장치의 구조에 좀더 주목했다는 데서 모홀리-나기와 구별되는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유명한 ‘광선소품(Light Prop)’<빛-공간조절기 Light-Space Modulator>(1921-30)의 경우를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모홀리-나기도 기계장치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진기, 영화용 카메라, 영사기 등의 원리에 관해서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에 반해 키슬러는 그것들을 기계기술의 연속적인 진화과정과 그 과정에서 발명된 기술적 성과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물론 그뿐이라면 단지 사진기술 또는 영화기술의 전문적인 범주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키슬러는 단지 특정 기계의 기술적 발전과정의 연구뿐만 아니라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 스크린에 이르기까지도 기술적 측면에서 취급했다.
여기서 우리는 독자적인 디자인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디자인 상호관련을 논리화했던 작가 키슬러다운 면모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연구 중 일부분이 1937년 그 밖의 논문과 함께 『아키텍추얼 레코드』지에 발표되었다.
이 논문은 두 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타이틀은 「디자인 상호관련;빛을 이용한 디자인(포토그라피)의 기원에 관한 명확한 자료」이다.9 4)
여기서 우리는 키슬러가 ‘사진술(Photography)’을 ‘빛을 이용한 디자인(Design by Light)’이라는 말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모홀리-나기도 ‘빛의 디자인’ 또는 ‘빛의 디스플레이’에 관한 실험을 행한 바 있다.
그들이 활동했던 1920년대는 지금처럼 용어가 다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다양한 장르에 걸친 실험을 통해 피력할 수 있었다.


이 논문에는 위와 같은 삽화가 실려 있다. 이것은 사진의 원리에 의한 이미지 기록수단의 발전과정을 도식화한 것인데, 우선 왼쪽에 그려져 있는 인간의 모습과 안구가 그려져 있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오른쪽에도 인간의 모습이 투명한 케이스에 들어가 있는 그림이 있다.
이 삽화의 제목은 ‘보다 고도로 이미지를 영속적으로 기록하기 위한 수단,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왼쪽에 그려진 인간의 눈을 통과한 이미지가 망막을 자극한다.
그리고 변환된 망막상의 그림(기록)은 두뇌에 기록된다.
이에 반해 사진으로 촬영된 대상물의 이미지는 인화지에 프린트되어 정착된다.
그리고 키슬러의 삽화에 의하면 인화지에 정착된 이미지는 튼튼한 선반 위에 잘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가장 오른쪽에 있는 그림은 예술의 영원한 기록방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미지가 예술작품으로 변환될 경우 보다 확실하게 보관하기 위한 방법을 나타내고자 했다고 생각된다.
필자에게는 이것이 홀로그래피(holography) 등의 3차원 사진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물론 이것이 타당한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키슬러가 여기서 제시하고자 했던 것은 이미지의 기록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예술의 영속적인 기록을 위해 홀로그래피와 같은 수단을 생각했으리라는 예측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삽화 밑에는 「사진-기록의 발전」이라는 도표가 실려 있다.
이것은 사진이라는 수단에 의해 상(像)이 기록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인데, 특히 수요가 많아진 경우를 고려하고 있다.


키슬러는 10페이지에 달하는 이 두 편의 논문을 통해 인간역사상 등장했던 사진, 영화, X선 사진, 텔레비전 등에 관한 데이터를 간단명료하게 체계화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는 ‘사진과 건축’이라는 소제목이 있다.
여기에는 시네마스코프 풍(風)의 멀티스크린과 같이 배치한 3장의 사진이 실려 있다.
하나는 19세기 말 벽면장식으로 사용된 사진의 예를, 가운데에는 20세기 초 사사분기의 예로 그 자신이 설계한 <필름 길드 시네마 Film Guild Cinema>(1927-29)를 싣고 있다.
세 번째 것은 20세기 중반을 지칭하는 것인데, 키슬러는 이 그림에 관해 ‘텔레비전을 이용한 이동장치가 생겨나고, 동시에 쉘터 구조와 결합된 빛의 통합이라는 새로운 방법의 탄생’을 나타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미 키슬러는 1920년대부터 텔레비전과 같은 영상의 원격전달장치에 주목하여 카렐 차페크의 (1923) 무대디자인에 거울을 이용한 영상이미지를 실험적으로 이용했고, 1928년 미국에서 의뢰받은 새로운 미술관 구상에서는 영상의 원격전달기능을 이용한 ‘가정(家庭) 미술관’을 제안했다.5) 뿐만 아니라 1929년을 전후해서 키슬러는 백화점을 필두로 하는 상업공간디자인을 다수 담당했는데, 이때 윈도 디스플레이 기법의 하나로 텔레비전을 이용한 뉴스 방영을 구상한 바 있다.


사진원리에 관한 키슬러의 관심과 영상매체의 장래 등에 관한 예상은 이후 그의 작업에 다양한 형태로 반영된다.
그 중에서도 여러 번에 걸쳐 대두되었던 테마가 있다.
키슬러의 독자적인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각적 환경의 연출을 위한 장치’가 그것이다.
이 장치의 원리에서 우리는 키슬러와 뒤샹의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이단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의외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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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키슬러와 <큰 유리>6)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와 뒤샹이 뉴욕에서 어떠한 교류를 가졌는지, 특히 언제부터 교류가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키슬러와 뒤샹의 연보를 대조해보면 두 사람 사이에 몇 가지 접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뒤샹이 캐서린 드레이어, 만 레이와 함께 창설한 무명사회 주식회사(Soci럗 Anonyme, Inc)는 1920년에서 1929년까지 각종 전람회, 출판활동, 모던아트 계열 작품의 컬렉션 등의 활동을 하면서 미국 현대미술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키슬러는 미국으로 이주한 1926년 무명사회주식회사의 의뢰를 받아 새로운 미술관을 디자인했었다.
그렇다면 키슬러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뒤샹, 드레이어 부인과 교류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뒤샹의 <큰 유리>(1915-1923)는 1915년 그가 뉴욕의 링컨 아케이드 빌딩(브로드웨이 1947번지)에 이사한 후 두 장의 유리를 구입한 것을 시작으로 구체적인 제작에 돌입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후 뒤샹은 거처를 여기저기 옮겨 다니게 된다.
이 사이에도 뒤샹은 <큰 유리> 제작을 계속했다.
<큰 유리>는 1923년까지 전년에 다시 이사 온 링컨 아케이드 빌딩의 아틀리에에 미완인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물론 이때까지 키슬러는 유럽에 머물러 있었다.


1926년 키슬러가 뉴욕에 도착한 해에 무명사회 주식회사가 주최하는 근대예술국제전(International Exhibition of Modern Art)에 출품되었던 <큰 유리>가 전람회가 끝나고 운반 도중 포장된 채 유리가 깨졌다.
그러나 수년 후 포장을 열어보기 전까지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1930년까지 방치되었다.
뒤샹의 연보를 보면 1936에 이르러서야 코네티컷 주 웨스트 레딩의 캐서린 드레이어 여사 집에서 <큰 유리>의 수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키슬러는 그 이듬해, 즉 1937년 『아키텍추얼 레코드』지 5월호에 발표한 디자인 상호관련논문에 이 <큰 유리>를 거론하면서 사진을 게재했다.
이 논문에 실린 사진은 베레니스 아돗트가 특별히 이것을 위해 그해 겨울 집필자인 키슬러와 함께 드레이어 여사의 집에서 촬영한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키슬러의 논문에 게제된 <큰 유리>의 사진은, 특히 정밀한 부분사진은 이 작품이 우연한 사고로 깨진 후 일반에게 공개된 최초의 사진이 되는 셈이다.


키슬러의 논문 첫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건축은 공간을 제어하는 것이다.
이젤 회화는 ‘공간-현실’의 일루전이다.
그런데 뒤샹의 유리는 공간에 존재하는 최초의 X선 회화이다.10
이 초(超)-정기(正氣)의 우상파괴자 마르셀 뒤샹의, 유리 위의 구조회화 11


대단히 짧지만 우리는 키슬러가 <큰 유리>의 본질을 적절하게 지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큰 유리>를 ‘공간에 존재하는 최초의 X선 회화’라고 명명하는데, 이것은 이 신비로운 작품 <큰 유리>가 담고 있는 관념을 이해하기에 급급한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한 번 이 작품이 지니는 공간적 존재로서의 의미에 주목하게 하는 언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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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유리>에 관한 논문에서 키슬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의 관심은 이 작품의 조형적 구조에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공간상에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느냐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캔버스에 그려져 있는 회화는 어디까지나 공간 또는 현실의 일루전인 데 반해 <큰유리>는 유리 위에 그림이 떠 있는 상태라는 점이 키슬러의 주의를 끌었다.
공간을 사고의 중심에 두고 건축이나 조형물의 상호관계에 주목했던 키슬러에게 <큰 유리>는 대단한 흥미로운 대상이었다.


키슬러는 이 <큰 유리>를 ‘X선 회화’라 불렀다.
그는 그 이유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빌헬름 콘라드 뢴트겐은 처음으로 인간이 제어하는 비가시광선을 X선이라고 명명했다.


1896년에는 비인의 요셉 마리아 에델이 최초의 X선 사진을 촬영했다.
카메라의 눈이 신체의 가시적 표면 안쪽에 침투해서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심부(深部)를 기록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사진건판에 사용하는 보통의 감광제로도 이 비가시광선을 정착시킬 수 있었고 그 결과 항구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비가시광선이 사진술(포토그래피)에 의해 비가시물체를 기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표면사진밖에 찍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X선 장치는 일반화되었고 오늘날에는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12


키슬러는 이 X선에 의해 인간의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물체, 다시 말하면 표면의 밑이 가시화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큰 유리>에 관한 논문에서 키슬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세기의 위대한 대가의 작품, 피카소, 미로, 달리, 그 밖의 X, Y, Z들은 모두가 추상, 구성주의, 현실, 초현실주의 등의 명패를 달고 있다.
그러나 이 <대형유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큰 유리>는 우생학적(優生學的) 결과물이다.
그것을 20세기 최초 4반세기의 최고 수작이라고 단언해도 무방하다. 결코 속단이 아니다.
그것은 건축이며, 조각이며, 회화이면서 동시에 독자적인 무엇이다.


공간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이 같은 ‘X선 회화’를 창조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초점이 맞고, 때묻지 않았으며, 카메라 옵스큐라 역할을 하는 인간의 의식을 넘어서는 존재. 그리고 감광력과 감광시간이 필요하다.
<큰 유리>는 그것들의 종합에 의한 빛나는 성과를 얻기 위해 깨진 것이다.13


키슬러가 자신의 논문에서 뒤샹의 <큰 유리>를 다루게 된 것은 이 작품의 포장을 풀자마자 이 작품이 평범한 것이 아님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수년 후 키슬러가 페기 구겐하임의 의뢰를 받고 ‘금세기 예술’화랑의 설계에 착수했다.
그는 이 화랑을 디자인하면서 회화에서 액자를 떼 내고 캔버스를 구부러진 벽면 앞에 버팀목으로 지지시켰다.


이 방법은 그가 1924년 빈에서 개최된 새로운 극장기술 국제전에서 시도한 ‘공간전시’기법과 이를 실천하기 위해 고안한 L&T(Leger und Tr둮er)시스템을 발전시킨 것이다.


나아가서 추상회화작품이 걸려있는 곳에는 조각과 회화의 전시를 위해 천장에서 바닥까지 밧줄을 늘어뜨리고 그것을 이용해 작품을 공중에 매다는 전시기법을 보여주었다.
뒤샹이 ‘회화에’ 공간적 구조 개념을 도입시켜 ‘공중에 매다는 방법’을 시도했다면, 키슬러는 ‘회화 그 자체’를 ‘공중에 매다는 방법’을 실천한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뒤샹과 키슬러의 공통되는 컨셉으로 ‘공중에 매달기’를 들고자 한다.


뒤샹의 오브제 중 몇 개인가는 이미 ‘공중에 매다는 방법’을 이용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주위에 있는 금속으로 된 물레방아가 달린 가늘고 긴 홈 Glissi뢳e contenant un Moulin ?Eau en m럗aux voisins>(1914),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u descendant un escalier>(1915), <잘 휘어지는…여행에 대해서, 은밀한 자를 위한 접는식 조각 Pliant… de voyage, ?bruit secret>(1916), 그리고 1919년 여동생 수잔느에게 <불행한 레디메이드 Readymade malheureux>의 아이디어를 제시하면서 그것을 아파트 발코니에 매달도록 지시했다는 등이 그것이다.
이상의 예는 어떤 물체를 단지 공중에 매다는 정도지만 그 밖에도 많은 경우에 ‘공중에 매다는 방법’을 적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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