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무대’개념과 맥락을 같이하는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공간무대’개념과 맥락을 같이하는 이상의 설명에서 <출구 없음>의 무대는 관객을 향하여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사각형 확성기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안에서 연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여기서 키슬러는 무대의 위치를 영화 스크린 높이만큼 높이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1피트를 높이는 정도에 머무르는 타협안이 채택되었다.
뿐만 아니라 개구부 주위는 검은 천으로 에워싸여 있어서 관객이 무대공간에 의식을 집중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었다.
이 같은 나팔형태의 무대는 1924년 유진 오닐작 <황제 존스>의 무대디자인에서 선보인 바 있다.
따라서 <황제 존스>에서 시도된 ‘공간무대’가 <출구 없음> 무대디자인의 원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출구 없음>에 관한 메모에서 키슬러는 커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보통 무대에서는 커튼의 개폐가 극 내용의 전개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커튼은 아무것도 연기하지 않는다.
키슬러는 커튼이 열리는 것과 닫히는 것을 단지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커튼은 연기자와 관객 사이를 중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키슬러는 커튼의 개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치 인간의 눈꺼풀과 같이 커튼-딱딱한 벽-이 좌우 양방향으로 갈라지고, 동시에 위쪽의 큰 부분과 아래쪽의 작은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위쪽 덮개는 위쪽으로 올라가 감추어지고 아래쪽의 그것은 오케스트라 피트(Orchestra Pit)의 전방으로 떨어져 사라진다.
결과적으로 프로세니엄 아치가 확대된 듯한 모양을 띠게 된다.
이 안(案)에는 두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우선 커튼의 개폐가 대단히 빨라져 무대는 거의 순간적으로 열리게 된다.
두 번째로 아래쪽에 위치한 덮개에 의해 공간이 확장됨으로써 관객과의 ‘접촉’이 용이하다.
주연 배우는 관객을 향해 무대 아래쪽의 통로 앞까지 접근할 수 있다.
또한 연기자와 관객의 경계를 객석 가운데까지 연장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접촉’이란 1920년대를 중심으로 전개된 러시아 구성주의 연극에서와 같이 연기자와 관객이 뒤섞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무대의 경우 연기자가 원할 경우에만 앞으로 나아간다.
배우가 연기상의 이유로 관객과의 물리적인 관련을 원할 경우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다.
러시아 구성주의 연극에서 볼 수 있는 원형무대에서는 연기자와 관객과의 구분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22

대본의 내용을 살펴보면 여기에서 언급된 공간의 확장 및 축소 가능성을 실천하는 데 <출구 없음>은 적절한 텍스트였음을 알 수 있다.
사르트르의 원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너희들의 눈꺼풀이 움직이고 있다. 눈을 깜박이고 있는 것이다.
철컥하고 검은 번개가 스쳐지나간다. 막이 내려지고 다시 오른다.
이것으로 단락이 구분된다. 눈앞이 흐려진다.
그리고 세상이 사라진다.…”23

키슬러가 이 구절을 읽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커튼에 대한 이같은 접근방법은 1923년 카렐 차페크의 의 무대장치에서 시도된 조리개 모양의 영사막이나, <필름 길드 시네마>에 설치된 <스크린 O 스코프>의 영사막 확대축소장치와 맥락을 같이한다.
키슬러는 인간이 어떤 사물을 본다는 사실, 특히 동공이나 눈꺼풀의 움직임을 극장이라는 장소에서 극을 감상하고 영화를 볼 때의 상황과 일치시켜 생각했다.
연극이나 영화를 감상하는 행위를 인간이 외계를 보는 행위와 관련시켜 파악하고, 감상한다는 행위 자체를 안구의 안쪽에 비쳐지는 영상을 보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개폐장치로서의 커튼이나 확대축소를 가능하게 하는 영사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극장’이란 단순히 건축적 축조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연극상연을 위한 장치를 소장하는 창고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무대와 객석 또는 연기자와 관객이라는 구분을 지니고 있으면서 각각이 항상 연속적인 관련을 지녀야 한다고 키슬러는 생각했다.
건축과 무대, 무대와 객석, 객석과 무대, 그리고 무대와 건축…. 그것들이 서로 간에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 숨 쉬는 공간. 그 안에서 인간이 극적 세계를 체험하는 것.
이것이 키슬러가 간절하게 소망했던 세계였다.
인간에게 극장이란 하나의 우주이며 기억의 중심에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 키슬러.
그에게는 주택도 미술관도 ‘극장’이라는 개념 속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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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슬러가 최초로 ‘공간전시’ 개념을 실천한 것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의 작업 중에는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거론된 적이 없는 것이 많다.
일정 공간상에 어떤 대상물을 전시하기 위한 개념인 ‘공간전시’도 그 중 하나이다.


키슬러의 전시공간연출로 유명한 것은 남아 있는 몇 장을 사진을 통해 알려져 있는‘금세기 예술’ 화랑에서 개최된 초현실주의자 전람회(1942)의 전시디자인을 들 수 있다.2)
그러나 그가 1920년대 말 뉴욕의 한 백화점 윈도 디스플레이에 관여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거론되더라도 기껏해야 건축가 키슬러의 ‘부업’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는 상업 공간 디스플레이에 대한 이론적 연구실적을 한 권의 책으로 펴낼 정도로 ‘진지했다’.
1929년에 출판된 『현대 쇼윈도와 상점 프론트좭 (Brentano’s)3)가 그것이다.


필자는 당시 백화점이나 상점 디스플레이에 관한 연구가 있는지를 조사한 적이 있으나, 키슬러의 저서처럼 이론적 기초를 갖춘 것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디스플레이에 관한 대부분의 서적이 그러하듯이 경험을 통해 얻어진 방법론을 기술한 정도의 것으로 일본의 카와키타 렌시로우가 가끔 눈에 띨 뿐이었다.



1. 새로운 전시의 시대


키슬러가 최초로 ‘공간전시’ 개념을 실천한 것은 1924년이다.
빈에서 개최된 ‘새로운 극장기술 국제전’의 자료전시를 위한 공간구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전시의 활성화는 1920년을 전후한 유럽의 축제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20세기 조형예술의 성격을 규정하는 갖가지 운동과 프로파간다, 그리고 데몬스트레이션으로 점철됐던 1920년대야말로 ‘전람회의 시대 20세기’4)를 여는 시발점이었다.


미래파, 입체파, 러시아 구성주의, 독일 표현주의, 다다이즘, 데 스틸 등 1920년대의 예술운동들이 유럽 곳곳의 도시에서 얼마나 많은 전람회를 열었던가.
또한 얼마나 많은 데몬스트레이션, 이벤트, 해프닝이 있었던가.
이들 운동에 참가한 멤버들은 유럽 각지에서 빈번한 교류를 가지면서 많은 전람회를 기획했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극화(劇化)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예술가의 의무이다. 새로운 형태의 연출가, 즉 일상생활의 연출가가 태어날 것임에 틀림없다”1라는 에브레이노프의 말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러시아 구성주의가 무대예술을 통해서 드라마의 가상세계와 실생활 사이의 벽을 허물었던 것과 같이, 어떤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서 마련된 장소라고 할 수 있는 전시장이나 박람회장도 과거와 같이 실내공간에 머무르지 않았다.
도로에 접한 벽면에 대형사진이나 몽타주패널이 설치된다거나 열차의 외벽 가득 혁명을 찬양하는 회화작품이나 그래픽 등으로 메워지기도 했으며, 선박의 선체도 프로파간다의 미디어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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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가 표현방법 상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일상생활에까지 확장시킨 새로운 전시방법의 모색과 더불어 실내공간의 전시방법에 있어서도 새로운 개념이 탄생되기에 이른다.
그 이전까지 실내공간에서의 전시는 유화를 액자 속에 넣어 벽에 걸어 놓거나 조각을 좌대 위에 올려놓는 정도의 방법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액자나 좌대는 예술작품이 건축의 부속물이라는 고정관념으로부터 탈피하여 스스로가 독립하기 위한 방편을 모색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회화나 조각작품을 건축이나 실내를 장식하는 다른 요소와 무관한 전혀 별개의 것,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로 취급하기 위해서 액자라는 틀과 좌대라는 장을 설정하고 그 밖의 사물과 구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미래파의 콜라주는 회화는 유화안료와 캔버스에 의해서만 성립된다는 고정관념을 무의미하게 했다.
회화가 표현방법 상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그러나 회화는 여전히 벽면에 걸린 2차원적 구성이어야 했으며, 따라서 액자라는 틀로부터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913년 타틀린은 파리의 한 전람회에서 피카소의 콜라주를 본 것이 계기로 회화라고도 조각이라고도 할 수 없는 구성물 <코너 릴리프>(1914-1915)를 제작했다.
이 실험적인 작품은 그 형식에 있어서 그들의 구성주의 운동에 붙여진 명칭인 ‘구성’이라는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었으며, 나아가서 공간 활용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벽과 벽 사이에 매달려 있다는 전시상황을 통해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흔히 이 작품을 계기로 조각이 어떤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물로서 자립하게 됐으며, 미술이 액자나 좌대라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 작품을 통해서 예술작품을 걸어두는 ‘실내’가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전환됐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천장, 벽면, 바닥 등의 기호화된 실내가 의미를 상실하고 공간 자체가 강조되기에 이른 것이다.


타틀린의 구성물은 회화작품처럼 벽면에 부속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조각작품과 같이 좌대에 올려져 있지도 않다.
좌우 양쪽 벽으로부터 지지되도록 계획된 이 작품은 결과적으로 공중에 떠 있는 양상을 띤다.
1915년 마르셀 뒤샹이 천장에 ‘눈 뿌리는 기계’를 설치한 예가 있으나, 타틀린의 경우 공간적 구성을 적극적으로 의식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가 있다.


이 같은 구성주의의 실험을 배경으로 ‘공간전시’라는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키슬러가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게 되는 1924년 이전에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큰 흐름이 있었다.
그 하나는 1919년에 시작되어 1922년에 『데 스틸』지에 발표된 엘 리시츠키의 유니크한 아이디어와 그것의 공간적 전개이다.
다른 하나는 데 스틸 운동의 사상과 실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구성의 원리.
다시 말하면 몬드리안, 반 뒤스브르크, 리트벨트 등에 의해 추구된 공간구성의 문제이다.
이것을 구체화한 예로 키슬러의 ‘공간전시’를 위치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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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리시츠키의 ‘프로운’5)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엘 리시츠키는 러시아 구성주의의 멤버 중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빈번하게 서구의 아방가르드들과 교류한 인물이다.
레이너 배넘은 그의 명저 『제1기계시대의 예술(1960)2에서 “서구의 건축가들에게 러시아 구성주의를 알리는 대리인 역할을 했던 리시츠키는, 데 스틸 그룹의 멤버들-특히 반 뒤스브르크-에게 그 자신이 얻은 것 이상의 영향을 끼쳤다”고 언급하고 있다.
밴함은 그 증거로 1922년 『데 스틸』지는 거의 대부분의 페이지를 리시츠키의 아이디어를 소개하는 데 할당했으며, 그 밖의 호에서도 그의 그래픽디자인 작업을 크게 게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것이 ‘프로운’이며 이 같은 교류를 통해서 리시츠키의 실험적인 작업과 사상이 데 스틸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리시츠키는 1890년생으로 키슬러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또한 리시츠키와 키슬러는 건축가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회화, 그래픽디자인, 타이포그래픽, 사진의 몽타주, 메이어홀트 극장 설계, 각종 전람회의 전시디자인, 박람회의 회장구성 등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영역에 걸쳐 활동했다는 공통점도 있다.6)
이것만으로도 리시츠키와 키슬러의 유사성 또는 관계를 비교 고찰할 수 있겠으나, 좀더 구체적으로 키슬러가 ‘프로운’이라는 개념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키슬러가 독자적으로 추구해온 개념인 ‘공간전시’의 발전과정을 추적해보기로 하자.


리시츠키가 ‘프로운’ 연구에 착수한 것은 1919년이다.
리시츠키의 부인 소피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비테브스크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는 물이 새는 작은 방이었습니다.
여기서 리시츠키는 일종의 ‘발견’에 열중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조형세계의 창조를 의미하는 3차원의 기하학적 개념을 표출하는 방법에 관한 탐구였는데, 그는 이 작은 방에서 결국 그것을 완성했습니다.
리시츠키는 이것을 ‘프로운’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프로운’은 한스 힐데브란트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 또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식의 추상적인 아이디어에 부여된 허풍덩어리의 명칭이 아닙니다.
리시츠는 이 용어를 ‘회화와 건축 사이에 존재하는 인터체인지’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리시츠키의 ‘프로운’중에는 “마을(The Town)”7)이라는 제목이 있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프로운’은 1922년에 베를린에서 개최된 최초의 러시아 전람회에서 공개됐으며 카탈로그에도 삽화와 함께 게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1919년경 말레비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바 있는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것입니다.3


리시츠키는 말레비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인생은 지금 새로운 코뮤니스트의 기초를 형성하는 와중에 있다. 그것은 견고한 콘크리트와도 같이 확고부동한 것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프로운’과 함께 확고부동한 코뮤니스트의 ‘마을’을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곳에서 이 세상의 주인이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4”라고 적고 있다.
그 후 ‘프로운’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다.
1924년 비인에서 개최된 국제음악연극제에서 키슬러가 감독한 ‘새로운 극장기술 국제전’에 <레닌-플랫폼>이 발표되어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기술적으로 보면 외팔보 구조8)로 된 탑으로 코뮤니즘의 심벌 또는 정치적 선전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리시츠키의 ‘프로운’이 전적으로 코뮤니스트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앞서 인용한 『제1기계시대의 예술』의 저자 레이너 배넘은 “러시아어인 ‘프로운’은 영어의 ‘오브젝트(object)’에 해당하는 것이나, 리시츠키에게 있어서 그것은 많은 부차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몬드리안이 ‘추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와 흡사하다.
‘프로운’은 창조적인 디자인 역사 상 특별한 위치에 있다.5”라고 했다.
리시츠키는 비대상적인 형식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구성물과 구성방식, 그리고 구성이념을 포괄하는 용어로 ‘프로운’을 선택한 것이다.
1919년에서부터 20년에 걸쳐 행해진 ‘프로운’은 어떤 경우에는 구체적인 대상의 재현이 아닌 형태의 조합 또는 그 같은 형태 사이의 관계에 관한 연구이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의사(疑似) 3차원 입체의 공간적 배치에 관한 실험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프로운’은 회화라고 보기에는 형태의 공간적 관련성을 사고하고 실험한다는 성격이 강하고, 도시계획 설계도의 이미지 스케치 정도로 취급하기에는 비대상회화9)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프로운’은 공간과 형태와 색채의 상호관련 속에서 조형의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 구조주의적 연구로 평가해야 한다.


1920년 리시츠키는 ‘프로운’개념에 입각한 전시공간의 구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시사했다.
‘프로운’은 (공간을 제어하는) 형태의 창조이다.
물질을 경제적으로 구성하는 방법 중 하나인 이것은 새로운 가치를 탄생시킨다.6
물질은 구성을 통해서 형태를 수용하게 된다.7


우선 2차원의 평면상에 구성된 공간을 검색한다.
그 다음 그것을 대지(大地)와도 같이 확실하게 저항력이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 위에 우리는 3차원의 공간을 구성할 때와 같은 방법으로 쌓아간다.
이때 각각의 부분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의 장력들 간의 평형을 유지시키는 것이 제일 먼저 필요하다.
여러 가지 힘이 파생시키는 효과를 결합해나가는 ‘프로운’을 통해 새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것으로 ‘프로운’은 더 이상 회화가 아니라 하나의 구성물이 된다.
우리는 이 구성물의 주위를 여러 방향에서 관찰할 수 있다.
위에서 내려다볼 수도, 밑으로 살펴볼 수도 있고, 움직이거나 돌아다니며 감상할 수 있다.
그 결과 수평과 수직을 기본으로 하는 회화의 축이 붕괴된다.
그 주위를 맴돌면서 우리 자신은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8


여기서 리시츠키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가시적인 구조를 통해 구체화한 것이 키슬러의 ‘공간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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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데 스틸과 키슬러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리시츠키가 ‘프로운’을 최초로 실험한 것은 평면상의 구성을 통해서였다.
데 스틸의 몬드리안도 같은 맥락의 조형관을 지니고 있었으나, 굳이 구분하자면 그는 주로 회화적 실험을 중심으로 실천했다는 점에서 리시츠키와 다르다.
리시츠키의 ‘프로운’은 물질의 경제적 활용을 전제하는 사회의식에 기초하고 있는 데 반해, 몬드리안은 보다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기반으로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고려했다.
몬드리안의 회화는 개별 부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호간의 역학적 균형을 규명하고자 했던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시각현상을 통해서 상호간의 장력이 어떠한 형태로 작용하는가를 파악하고자 했다.
여기서 추구된 균형 또는 장력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현실적인 요소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몬드리안이 1925년 데 스틸을 떠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반 뒤스브르크가 대각선 작업을 시작했다는 점을 드는 경우가 있으나, 데 스틸 운동은 시작부터 건축적 구조에 관한 관심이 지대해서 2차원 평면상에 전개되는 회화적인 실험으로는 완결될 수 없는 내용이 많았다.


데 스틸의 주요 멤버 중 한 사람인 게리트 리트벨트는 가구를 자신의 조형세계를 펼치기 위한 대상으로 삼아 공간과 구조에 관한 실험을 계속한다.
특히 1918년과 1919년에 각각 발표된 <적과 청의 의자>와 <싱크대>는 실용적 또는 기능적인 측면을 만족시키면서도 데 스틸의 조형이념에 충실한 것이었다.
수평과 수직을 기본으로 하는 3차원 구조의 사각봉으로 되어 있는 선반도 장력에 의해 힘을 분산하고 있어서 실질적으로도 건축적 규모로 확대 가능한 것이었다.


폴 오버리는 『데 스틸』(Studio Vista, Dutton Pictureback, London, 1969)에서 리트벨트의 <적과 청의 의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논했다.


리트벨트의 <적과 청의 의자>는 수평수직의 검은 색 부분이 의자 전체의 구조적 프레임을 형성하여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경사지게 놓여진 두 장의 판재에 앉은 사람의 중력이 이 지지대에 걸리게 된다.
또한 이 두 장의 판재는 의자가 비어 있을 때에는 그곳에 앉을 사람의 형태가 일종의 심벌처럼 추상적으로 암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대각선의 추상적인 형태는 결국 반 뒤스브르크의 ‘대항구도(counter composition)’이론을 거쳐 다시 한 번 데 스틸의 테마로 부각되게 된다.
이 같은 데 스틸의 새로운 테마는 리트벨트의 의자에서와 같이 각각의 요소가 힘의 균형을 유지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이나믹한 구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9


여기에서 말하는 ‘대항구도’ 작품이란 1923년 반 뒤스브르크가 코르넬리스 반 에스트렌과 공동으로 입안한 주택모형을 2차원 평면상에 표현한 아이소메트릭(isometric) 도면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된다.
앞의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건축물을 통해 반 뒤스브르크와 반 에스트렌은 리트벨트의 선반과 의자에서 볼 수 있는 3차원의 공간적 구조를 건축적 규모의 구조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같은 해에 두 사람은 암스테르담 대학 홀의 인테리어디자인을 하게 되는데, 연속되는 대각선이 창출하는 다이나미즘을 빌어 기존의 상자형 건축의 실내공간을 보다 대담하게 연출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후에 암스테르담 대학 홀의 디자인과 거의 같은 의도를 지니는 공간구성이 시도된다.
1927년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는 <아우베테 시네마-댄스 홀>(1926-27) 인테리어디자인이 그것이다.
여기서도 벽과 천장에 대담한 대각선으로 된 평면적인 패턴을 이용해 벽과 천장이라고 하는 기호화된 평면을 공간적 연속성 속에 위치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작업에 대해서 반 뒤스브르크는 “공간상에서 인간의 움직임과 그 흔적은 좌에서 우로, 앞에서 뒤로,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게 되는데, 이것은 건축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회화작품의 의미를 생각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이다.10”라고 했다.
공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데 주목하자.
이것은 ‘프로운’에 관한 리시츠키의 언급 중에 등장하는 “공간적 구조가 인간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리시츠키는 그것을 “인간이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 간다”는 식으로 표현한 바 있다.
리시츠키와 반 뒤스브르크는 ‘환경적인 공간’10)을 의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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