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간무대’의 구상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공간무대’라는 용어는 1923년 베를린에서 유진 오닐의 <황제 존스>의 상연을 기해서 발행된 프로그램에서 최초로 활자화된다.
키슬러는 지금까지 거론된 적이 없는 ‘공간무대’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해 자신의 무대를 형용하고 있다.
다음날 베를린에서 발행된 신문에는 “‘공간무대’라는 용어자체가 아이러니를 안고 있다.
‘공간(space)’은 ‘무대(stage)’에서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무대’는 ‘공간’에 의해 형용될 수 없다”4라는 기사가 게재된다.
이에 대해 키슬러는 “무대 위의 공간에서 연기하는 배우에게는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무대 앞에 마련된 객석에 앉아서, 프로세니엄 아치를 통해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종의 부조(relief)에 지나지 않는다.”5라고 반박한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무대는 배우를 위한 공간일지는 몰라도 관객을 위한 공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키슬러는 <황제 존스>의 무대장치에서 ‘공간무대’의 개념을 실천하기 위해 무대를 보통보다 높게 설치했으며, 무대를 가로막는 커튼 없이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보여주는 방법을 선택했다.
또한 무대바닥을 안쪽에서 전방을 향해 32°높게 했으며, 천장은 후방으로 20° 낮게 했다.
따라서 무대는 관객을 향해 열려진 사각 깔때기 모양을 띠게 되었다.
바닥은 적색, 벽은 흑색, 천장은 흑색과 녹색으로 칠하고, 극의 진행에 따라 조명에 의해 자연스럽게 색의 흐름이 형성된다.
또한 움직이는 소품받침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 ‘움직이는 공간조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공간무대’가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필자는 <황제 존스>의 무대장치를 키네틱 아트의 선구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경사면을 지니는 사각 깔때기 형태의 무대설계는 1946년 사르트르의 <비상구는 없다>의 무대장치에서 다시 시도되었다.6)


<황제 존스> 무대장치의 의의는 단지 무대디자인의 실험 이상의 것이다.
후에 키슬러는 <황제 존스>의 무대장치에 관하여 “나는 여기서의 실험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공간은 모든 부분이 중복되는 동적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결코 중단되는 일없이 변화한다.
이에 따라 여기서 나는 ‘연속되는 장력’을 의식하게 되었다”라고 회고한다.
키슬러가 말하는 ‘연속되는 장력’이란 단지 건축적 구조에 주목해서 유추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 공간의 여러 요소가 중복되는 동적 상황을 의식한 결과 탄생한 것이다.


<황제 존스>의 무대장치는 무대 공간 전체를 일종의 키네틱 아트로 의식한 데 반하여 카렐 차페크의 (1923)을 위한 무대장치는 일종의 움직이는 부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최초로 영화와 텔레비전 영상이 공간연출의 표현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화면의 후방으로부터 영사되는 이른바 프로젝션 기법을 사용하여, 그려진 배경막과 더불어 움직이는 영상이 배경으로 사용된 것이다.
또한 스크린은 일반적인 사각형이 아닌 원형이었으며, 그 주위에는 스틸카메라의 조리개와 같은 장치를 설치하여 화면의 축소 확대가 자유자재로 가능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화재를 우려해 베를린의 소방서가 무대상연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영사장면이 되면 스크린 위에 물을 뿌리기도 했다고 하는데, 물이 흘러내리는 화면효과가 예상외로 효과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사각형의 프레임 부분은 텔레비전 영상을 위하여 마련된 것인데, 실제로는 무대 뒤편에 설치된 거울을 이용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키슬러는 연극과 영화의 특성에 주목하여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서장 「아웃사이더, 키슬러」에서도 언급했었지만 미국의 영화작가이자 평론가 스텐디쉬 라우더는 저서 『입체주의자의 영화 Anthology Film Archives Series 1』(New York University Press, New York, 1975)에서 키슬러의 이 마르셀 레르비에의 영화 <무정한 여자>(1924)에서 보여준 페르낭 레제의 세트 디자인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것이 다시 프리츠 랭의 영화 <메트로폴리스>(1927)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같은 무렵 키슬러는 프랭크 베데킨트의 <프란체스카>(1923∼24) 무대디자인을 담당했을 때 무대 위에 커다란 경사로를 설치하여 입체적 공간연출을 시도했다.
이 같은 아이디어는 후에 모흘리-나기의 <베르린의 상인>(1930)에도 적용된다.
여기서도 1920년대의 유럽에서는 갖가지 혁신적인 표현방법들이 빈번하게 상호 교류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키슬러는 ‘공간무대’ 개념에 기초한 그의 아이디어를 1923년부터 1925에 이르는 3년간 쉴 새 없이 발전시켜왔다.
보다 본격적으로 ‘공간무대’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1924년 비인에서 개최된 ‘음악연극제’ 건축주임으로 임명된 키슬러는 비엔나 콘체르트하우스 내부에 실물크기의 <공간무대>를 제작한 것이다.
이것은 오케스트라 박스부터 시작되는 나선형의 경사로와 직경 약 6미터의 움직이는 원형무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주위에 객석이 있고 객석 뒤에는 흰색 천이 내려뜨려져 있었는데, 무대배경그림(Scenography) 대신에 영화가 영사되기도 했다고 한다.
<공간무대>에서 키슬러는 ‘무대란 극장건물의 안쪽 구석에 위치하고, 상하좌우와 후면을 폐쇄한 채 전면만을 개방한다’라는 종래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무대를 오디토리움7) 중앙에 발가벗긴 채 놓아둔 것이다.
당시는 <공간무대>를 ‘철도극장’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열차의 조작실에 있는 턴테이블을 연상시키는 무대와 그 위를 빙빙 돌면서 상연되는 모습을 빗댄 것이다.


어쨌든 같은 해 9월부터 10월까지 <공간무대>에서는 실내극이나 댄스 퍼포먼스가 상연되었다.
당시의 신문에는 <공간무대>를 ‘애들립(Adlib)8) 극장’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기사가 게재되기도 했다.
키슬러 자신도 후에 <공간무대>에서의 상연이 전후(戰後)에 유행한 해프닝과 맥을 같이 하는 최초의 예라고 자평했다.
앞서 의 무대장치가 레제의 세트디자인에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라우더의 주장을 소개한 바 있는데, 당시의 <공간무대>를 기록한 사진 중에 키슬러와 레제의 기념사진이 있다.9)


키슬러가 <공간무대>에서 행한 실험이 단지 프로세니엄 아치의 안쪽에 한정되어 왔던 무대개념을 3차원의 공간으로 확장시킨 정도라면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움직이는 무대의 실천 및 주위의 스크린을 영사막으로 이용한 점 등 이른바 원형무대에 대한 새로운 연출기법의 제안 등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같은 해 키슬러는 영화와 연극이 가까운 장래에 서로 경쟁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앞으로 전개될 연극과 영화사이의 알력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이상으로 심각한 것이다.
연극의 즉흥성은 메커니즘에 근거하는 영화적 표현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10)
이것은 귀족중심의 개인주의 시대에 대한 혁명적 커뮤니즘과도 흡사하다.
양자 간의 갈등은 어떤 개인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정도로 가벼운 문제가 아닌 듯하다.
아마 그 결말은 시대와 그 시대에 적합한 표현방법에 의해 내려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맞는 연극형태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목표를 정해보자.
우선 합리적인 제작방식을 택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최대한 경제적인 방법으로 풍부한 내용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의 풍요는 엄격한 수단인 경제적 방법을 고려하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명확해졌다.
쓸데없는 부분은 모두 제거하자. 장식은 필요 없다.
아무리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해도 그렇다.
그려진 속임수에 불과한 일루전도 조명도 필요 없다.
진실된 것.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집중력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물의 동향에 모든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6


키슬러는 연극과 영화의 특성에 주목하여 양자를 통합하는 표현가능성의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간무대>에서 행한 멀티 프로젝션과 카렐 차페크의 의 무대장치에서 보여준 무대와 영상의 결합 등 그 중 하나이다.
특히 <필름 길드 시네마>(1928-1930)의 설계를 보면 키슬러가 보여준 영상에 대한 관심은 당시의 영화제작자나 감독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진보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3. 그로피우스의 <전체극장>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가 1924년 비인에서 <공간무대>를 발표한 2년 후, 에르빈 피스카토르와 발터 그로피우스는 <전체극장 Total Theater>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그로피우스의 전체극장’으로 알려져 있는 극장건축안(案)으로 베를린에 건설될 예정으로 있던 <피스카토르 극장>을 위하여 계획된 것인데, 당연한 일이겠으나 작업에 앞서 그로피우스는 역사상 존재했던 극장형식들을 분석했다.
그 결과 <전체극장>은 원형극장이나 서커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무대주위에 객석을 갖춘 구심적(求心的) 구조로 전면 및 좌우에서 관람이 가능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그리스·로마의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반원형무대를 갖춘 것이다.
그러나 마치 창문을 통해 바깥 경치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현실과는 격리된 무대 위의 환영을 ‘엿보듯이’ 감상하는 프로세니엄 아치식 극장과 마찬가지로 관객은 여전히 무대로부터 분리된 채로 있다.


이것을 그로피우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에르빈 피스카토르는 나에게 새로운 극장의 설계를 의뢰하면서 그가 지니고 있는 불굴의 재능과 대범함과 명석함을 토대로 마치 유토피아처럼 이상적인 것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극장형식의 창출을 요구하는 그것은 고도의 기술적 성과를 필요로 했다.
이에 따라 나는 다양한 연출가들에 의해 요구되는 각양각색의 상황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고도의 표현가능성을 지닌 극장을 목표로 했다.
또한 이것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객을 능동적으로 참가시키고자 계획된 것이기도 하다.”7


“효과적인 기술적 설비를 토대로 하는 <전체극장>은 어떤 연출가에게도 충족될 수 있으며, 따라서 어떤 작품의 상연도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평면적인 무대와 에이프런 스테이지(Apron stage)11), 그리고 원형무대는 물론 동시에 몇 가지 패턴의 상연이 가능하다.”8


이같이 다양한 형태의 상연을 가능하게 하는 <전체극장>의 구조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그림 2-10의 가장 위의 도면 왼쪽의 검은 부분이 평면무대이다.
이것은 이 건물의 구조를 지탱하는 12개의 기둥 중에서 4개의 기둥사이로 3개의 공간을 형성하게 된다.
가운데 2개의 기둥 사이에 있는 것이 중앙무대이고 양쪽은 측면무대로 사용될 수 있다.
2열의 가동식(可動式) 왜건 스테이지(Wagon stage)12)의 수평 벨트 컨베이어 장치가 회전무대의 결점을 보완하면서 급격한 장면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나아가서 관객의 주위를 에워싸는 측면무대의 연장선에 경사진 통로가 놓여 있는데, 여기에는 평면무대로부터 연결된 왜건 스테이지가 설치되어 있어서 필요한 경우에는 객석 주위에서의 상연도 가능하게 계획되어 있다.


두 번째 도면에서 검게 칠해져 있는 동그란 부분은, 관객을 퇴장시킨 후에 사용 가능한 일종의 에이프런 스테이지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계획된 원형 스테이지를 포함해서 그것을 둘러싸는 또 하나의 원형객석을 180°회전시킨 것이 세 번째 도면인데, 이것은 <전체극장>이 극장 전체의 중앙에 구심적인 원형무대를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물론 이것은 기계적 조작에 의해 상연 중에도 가능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로피우스의 <전체극장>안은 화카스 몰나르의 <U 시어터>, 안드레아스 봐이닝거의 <구형극장 The Spherical Theater>안과 함께 바우하우스가 탄생시킨 극장건축의 대표적인 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공중도시>를 본 르 코르뷔제는 “글쎄!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는 그로피우스의 <전체극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는데, 천하의 그로피우스도 키슬러의 통찰력 앞에는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발터 그로피우스의 <전체극장>는 앙리 반 데 벨데의 극장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객석의 일부를 회전시켜 서커스 풍의 극장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다. 불행하게도 무대로 사용되어야 마땅한 오디토리움 중앙의 원형부분이 그로피우스의 극장에서는 객석이 되어 있는데, 내 생각에 그것은 배우들의 준비실이어야 했다.
또한 원형 플래폼은 바닥까지 내렸다가 다시 올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이때에 좌석을 떼어낼 수도 붙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연 중에는 불가능한 작업인 데다가, 이 같은 변화는 관객들에게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를 망설이게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닥에 내려진 상태에서의 오디토리움은 객석에서 보기에 너무 낮다.
따라서 오디토리움을 플로어의 높이까지 올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한다면 위쪽에 자리 잡은 관객은 공연을 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래쪽에 앉은 관객은 내려다보는 대신에 올려다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어느 경우에도 관객은 공간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관객은 무대 위의 퍼포먼스를 릴리프(relief) 상태로 감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프로세니엄 무대를 향한 시선은 원형무대의 회전으로 인해 방해받을 것이며, 따라서 프로세니엄 무대와 오디토리움은 동시에 사용될 수 없다.
좀더 심각한 문제는 - 이 같은 기능을 충족시키는 무대를 설계하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은 차치하더라도 - 이것은 결코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반 데 발데의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구식 무대와 서커스 링의 복합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극장>은 애초부터 정당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단지 기계적 구조에 집착한 결과 산출된 것으로, 도대체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인공적인 유니트로 구성된 오디토리움에 불과하다.


제1차 세계대전후 유럽이 누렸던 벨 에포크13)의 시대를 ‘과시’하는 박람회가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키슬러가 1923년부터 24년에 걸쳐 행한 무대기술분야의 공헌이 평가되어 그랑 팔레에서 개최된 국제장식미술과 현대산업박람회의 오스트리아관 극장부문 감독으로 지명된다.
여기에서 그는 극장부문의 감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도시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 <공중도시 City in Space>라는 대규모의 컨셉 모델을 출품한다.
이것은 그가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스틸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보다 확대함은 물론 보다 명확하게 시각화한 것이다.
데 스틸의 중심인물이었던 데오 반 뒤스부르크도 여기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반면 <공중도시>를 본 르 코르뷔제는 “글쎄! 어떻게 이것을 공중에 매단다는 거야. 제프린 비행기라도 사용한다는 건가?”라고 비꼬았다.
그러나 후에 코르뷔제는 공중에 매달린 건축이라 할 수 있는 <필로디>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굳이 따지자면 ‘최후의 승자’는 키슬러였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4. 영화관 <필름 길드 시네마>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1926년 겨울 키슬러는 뉴욕에 소재하는 스타인웨이 홀 개장기념으로 개최된 ‘국제극장박람회’의 디렉터로 내정되어 뉴욕에 도착한다.
그는 이 전람회를 위해 1924년 비인에서 개최된 ‘새로운 극장기술국제전’의 자료와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장식미술과 현대산업박람회’ 출품작 중에서 유럽의 전위연극과 관련된 것들을 선택했다.
그 중에는 키슬러 자신의 <엔드리스 극장> 안, 러시아 구성주의의 리시츠키와 메이어홀드의 작품, 이탈리아 미래파의 실험들, 피카소와 레제 등의 입체파 작품, 취리히와 베를린에서 활동했던 다다이스트의 작품들, 그리고 바우하우스 무대공방에서 활동했던 오스카 슐렘머의 작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로 무대모형, 마리오네트, 의상, 가면 등이 전시됐다.


키슬러는 1928년부터 1929년에 걸쳐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 언뜻 보더라도 혁명적인 시도임을 알 수 있는 영화관을 설계했다.
이것은 영화를 위해 설계된 세계 최초의 ‘토털 시어터’라고 할 수 있다.
1923년 카렐 차페크의 을 위한 무대디자인을 통해 텔레비전과 영화의 사용을 제안했던 것에 나아가 키슬러는 새로운 시각예술 미디어인 영화가 지니는 표현가능성에 주목한 극장건축을 설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건물은 <필름 길드 시네마>라고 불리게 되는데, 영화관으로서의 기능 외에도 음악이나 ‘시각적 투영’을 위한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키슬러는 자신이 설계한 이 건축물의 개장기념 포스터에 “영화와 음악의 상연은 물론, ‘빛, 색채, 침묵의 상연’이 가능하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미 1925년 파리 박람회의 오스트리아관에 <오프토폰 optophone>을 계획했었다.
이것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계적인 장치를 내장시켜 시각과 음향을 주된 표현소재로 하는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의 의욕적인 작업의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실제로는 실현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관한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시청각적 연극’, 다시 말하면 ‘키네틱 시어터’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는 정도의 예상은 가능하다.


이 전람회에서는 이탈리아 미래파의 멤버로 새로운 극장형식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엔리코 프람폴리니가 <마그네틱 시어터> 모형을 발표하여 극장부문의 그랑프리를 수상한다.10
이것은 움직이는 3차원적인 요소는 물론 빛과 소리에 의한 완전히 추상적으로 구성된 극장이었다.
또한 발라도 <불꽃놀이>(1917)라는 추상적인 무대모형을 제작한 바 있다.
빛과 색과 소리에 의한 이 같은 연극적 실험은 점점 영화와 키네틱아트 분야로 발전된다.


구성주의자이면서 바우하우스의 교수를 지낸 모홀리-나기도 <호프만 이야기>(1929)나 <나비부인>(1930) 등에서 구성주의적 무대를 실험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미에서 추상적 공간의 연출이 성공한 것은 H. G. 웰즈의 좬다가올 세계좭(1926)를 위한 영화세트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키슬러가 뉴욕에서 ‘공간무대’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키슬러는 1926년 ‘미래의 극장’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이것이 기록된 「뉴욕 시민클럽 회보」를 보면 자신의 혁명적인 극장 구상을 러시아의 타이로프나 이탈리아의 프람폴리니의 연장선상에 위치시키면서, 무대장치나 배우가 등장하지 않는 공간에서 색채, 광선, 음악, 음향에 의한 심포니를 연주하기 위한 구상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필름 시네마 길드>의 상연 플랜을 대표적인 예로 하는 새로운 상연형식에 대한 키슬러의 구상에는 개장기념 포스터에 명기된 ‘빛, 색채, 침묵의 상연’이 포함되어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의 구상에는 ‘침묵’이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이것은 작곡가 존 케이지가 유명한 <4분 33초>(1951)에서 시도한 ‘침묵의 음악’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키슬러의 아이디어는 케이지보다 20여 년 앞선 것으로 그가 얼마나 진보적인 아이디어의 소유자였는가를 절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필름 길드 시네마>는 물론 영화 상영을 주된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필름 길드 시네마>는 객석의 전방에 흰색 스크린이 내려져 있는 종래 영화관의 상식적인 형태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자 의도된 것이다.


그는 극장의 역사를 돌이켜 분석하면서 그리스의 원형극장은 ‘정치적 극장’이며, 프로세니엄 아치를 지닌 19세기 유럽의 극장은 ‘귀족주의적 극장’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프로세니엄 아치가 만들어내는 ‘틀’은 배우들을 2차원상에 전개되는 회화적 이미지 속에 귀착시킨다고 주장한다.
또한 브로드웨이의 대형영화관도 결국은 구조상 약간의 변화를 준 것에 불과하다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영화는 원래 ‘국제적’이며 그 밖의 어떤 예술보다도 ‘민주적’이다.
따라서 화려한 장식이나 귀족적인 가구를 배치하는 것은 그것이 본래 지니는 성격에 위배된다.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