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영화관 <필름 길드 시네마>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1926년 겨울 키슬러는 뉴욕에 소재하는 스타인웨이 홀 개장기념으로 개최된 ‘국제극장박람회’의 디렉터로 내정되어 뉴욕에 도착한다.
그는 이 전람회를 위해 1924년 비인에서 개최된 ‘새로운 극장기술국제전’의 자료와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장식미술과 현대산업박람회’ 출품작 중에서 유럽의 전위연극과 관련된 것들을 선택했다.
그 중에는 키슬러 자신의 <엔드리스 극장> 안, 러시아 구성주의의 리시츠키와 메이어홀드의 작품, 이탈리아 미래파의 실험들, 피카소와 레제 등의 입체파 작품, 취리히와 베를린에서 활동했던 다다이스트의 작품들, 그리고 바우하우스 무대공방에서 활동했던 오스카 슐렘머의 작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로 무대모형, 마리오네트, 의상, 가면 등이 전시됐다.


키슬러는 1928년부터 1929년에 걸쳐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 언뜻 보더라도 혁명적인 시도임을 알 수 있는 영화관을 설계했다.
이것은 영화를 위해 설계된 세계 최초의 ‘토털 시어터’라고 할 수 있다.
1923년 카렐 차페크의 을 위한 무대디자인을 통해 텔레비전과 영화의 사용을 제안했던 것에 나아가 키슬러는 새로운 시각예술 미디어인 영화가 지니는 표현가능성에 주목한 극장건축을 설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건물은 <필름 길드 시네마>라고 불리게 되는데, 영화관으로서의 기능 외에도 음악이나 ‘시각적 투영’을 위한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키슬러는 자신이 설계한 이 건축물의 개장기념 포스터에 “영화와 음악의 상연은 물론, ‘빛, 색채, 침묵의 상연’이 가능하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미 1925년 파리 박람회의 오스트리아관에 <오프토폰 optophone>을 계획했었다.
이것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계적인 장치를 내장시켜 시각과 음향을 주된 표현소재로 하는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의 의욕적인 작업의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실제로는 실현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관한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시청각적 연극’, 다시 말하면 ‘키네틱 시어터’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는 정도의 예상은 가능하다.


이 전람회에서는 이탈리아 미래파의 멤버로 새로운 극장형식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엔리코 프람폴리니가 <마그네틱 시어터> 모형을 발표하여 극장부문의 그랑프리를 수상한다.10
이것은 움직이는 3차원적인 요소는 물론 빛과 소리에 의한 완전히 추상적으로 구성된 극장이었다.
또한 발라도 <불꽃놀이>(1917)라는 추상적인 무대모형을 제작한 바 있다.
빛과 색과 소리에 의한 이 같은 연극적 실험은 점점 영화와 키네틱아트 분야로 발전된다.


구성주의자이면서 바우하우스의 교수를 지낸 모홀리-나기도 <호프만 이야기>(1929)나 <나비부인>(1930) 등에서 구성주의적 무대를 실험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미에서 추상적 공간의 연출이 성공한 것은 H. G. 웰즈의 좬다가올 세계좭(1926)를 위한 영화세트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키슬러가 뉴욕에서 ‘공간무대’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키슬러는 1926년 ‘미래의 극장’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이것이 기록된 「뉴욕 시민클럽 회보」를 보면 자신의 혁명적인 극장 구상을 러시아의 타이로프나 이탈리아의 프람폴리니의 연장선상에 위치시키면서, 무대장치나 배우가 등장하지 않는 공간에서 색채, 광선, 음악, 음향에 의한 심포니를 연주하기 위한 구상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필름 시네마 길드>의 상연 플랜을 대표적인 예로 하는 새로운 상연형식에 대한 키슬러의 구상에는 개장기념 포스터에 명기된 ‘빛, 색채, 침묵의 상연’이 포함되어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의 구상에는 ‘침묵’이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이것은 작곡가 존 케이지가 유명한 <4분 33초>(1951)에서 시도한 ‘침묵의 음악’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키슬러의 아이디어는 케이지보다 20여 년 앞선 것으로 그가 얼마나 진보적인 아이디어의 소유자였는가를 절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필름 길드 시네마>는 물론 영화 상영을 주된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필름 길드 시네마>는 객석의 전방에 흰색 스크린이 내려져 있는 종래 영화관의 상식적인 형태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자 의도된 것이다.


그는 극장의 역사를 돌이켜 분석하면서 그리스의 원형극장은 ‘정치적 극장’이며, 프로세니엄 아치를 지닌 19세기 유럽의 극장은 ‘귀족주의적 극장’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프로세니엄 아치가 만들어내는 ‘틀’은 배우들을 2차원상에 전개되는 회화적 이미지 속에 귀착시킨다고 주장한다.
또한 브로드웨이의 대형영화관도 결국은 구조상 약간의 변화를 준 것에 불과하다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영화는 원래 ‘국제적’이며 그 밖의 어떤 예술보다도 ‘민주적’이다.
따라서 화려한 장식이나 귀족적인 가구를 배치하는 것은 그것이 본래 지니는 성격에 위배된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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