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 수반 조기 개원을 요청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960년 8월 8일 제5대 민의원과 초대 참의원이 개원되었다. 신파와 구파는 민의원 의장에 신파의 곽상훈 의원을 추대하기로 했고, 부의장에는 구파의 이영준 의원을 밀기로 하여 두 사람 모두 무난히 당선되었다.
무소속에 넘겨줄 부의장 자리 하나를 놓고 구파는 서민호를, 신파는 이재형을 밀었는데, 표결 결과 서민호가 114표, 이재형이 99표로 구파가 이긴 셈이다.
참의원 의장에는 백낙준 의원이, 부의장에는 구파가 지원한 소선규 의원이 각각 당선되었다.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 의장단 선거는 구파의 승리로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국무총리 지명전으로, 이것이 바로 본 게임에 해당했다.
신파는 대통령 후보에 구파의 윤보선을 지지하고 장면을 국무총리로 지명하도록 노력하되, 이것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인준투표를 부결시키고 민의원에서 장면을 직접 국무총리로 선출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대통령 선거는 8월 12일에 있었다. 그날 아침 신파는 의원총회를 열고 대통령에 윤보선, 국무총리에 장면을 추대할 것을 재확인했다.
신파의 이런 전략은 자파에서 정부의 최고 직위를 모두 장악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에 기초했던 것이다.
따라서 신파는 구파의 윤보선을 대통령에 당선시켜 미리 국무총리 경쟁에서 배제시키는 것이 장면이 국무총리에 지명되고 자신들이 정권을 획득하는 데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정치적인 계산을 했던 것이다.


윤보선은 그날 국회 양원 합동회의에서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 양 파벌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초당적인 입장에서 국정을 처리하겠다는 당선 직후의 약속과는 달리 윤보선은 자파의 김도연을 국무총리에 지명하고 김도연을 당선시키기 위해 무소속 의원들의 포섭에 나섰다.
이에 대해 신파는 즉각적인 불만을 표시했으며, 민의원은 국무총리 인준 동의요청을 부결시켰다.
개표 결과 재적 227명 가운데 224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가결이 111표, 부결이 112표, 무효가 1표 나와 통과선인 114표에서 3표가 부족했다.
이에 윤보선은 마지못해 신파의 지도자인 장면을 국무총리에 지명하고 다시 표결에 부친 결과 가결이 117표, 부결이 107표로 국회의 동의를 얻었다.


민의원의 인준을 받은 장면 국무총리는 “어느 한 파에 치우치지 않도록 노력하여 신파와 구파 그리고 무소속의 균형 있는 내각을 만들겠다”는 신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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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속에 구파의 결속을 다져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의 집권 경쟁은 1960년 8월 19일 민의원에서 장면을 국무총리로 인준함으로써 결말이 나는 듯싶었지만, 구파는 이에 승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장면이 인준되던 이튿날 서울 종로 4가의 동원예식장에서 민의원과 참의원 의원들 90여 명이 모여 구파 민주당이란 이름으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것과 장면 내각에의 입각 거부를 결의하고 23인위원회에 대체되는 7인위원회를 구성했다.
7명의 위원들은 박해정, 서범석, 이충환, 윤제술, 최원호, 정순선, 박형근이었다.


이 같은 구파의 신속한 행동은 전라남도 신파에 대한 분패의 감정이 가시기 전에 그 울분의 분위기를 살려 구파의 결속을 다지고 신파에의 전향을 예방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었다.
이제 간판을 각각 내걸고 완전히 따로 살림을 차리자는 결의였다.
장면 정권의 앞날에 파탄이 예상되었다.
신파와 구파가 혼연일체 되어도 혁명과업인 반민주 인사와 부정축재자 처리 등 혁신세력 대두에 대한 대처와 분출하는 국민적 과제를 수행하기에 난관이 많았을 텐데 신파의 단독 내각으로 국정을 주도하기에는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면 국무총리는 집권의 기쁨 못지않게 앞날의 걱정스런 정국에 관해 중압감을 느꼈다.
이때 한 가닥 희망을 갖게 한 것이 곽상훈 민의원 의장이 주선한 이른바 청와대 4자회담이었다.
곽상훈은 분당을 막고 두 파가 모두 참여하는 내각을 구성케 함으로써 난국을 극복하려고 청와대 회담을 주재한 것이었다.


8월 21일 청와대에서 윤보선 대통령, 장면 국무총리, 곽상훈 민의원 의장 그리고 구파의 리더 유진산이 시국을 타개하기 위한 회담을 가졌다.
토의는 사뭇 진지했다.
장면은 새 정부 구성에 구파의 협조를 요청했다.
합의 결과 내각 구성에 신파에서 5명, 구파에서 5명, 무소속에서 2명을 참여시키되 구파의 입각 인선은 구파에게 맡기고 그 명단을 22일 밤 자정까지 장면에게 전달키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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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내각이냐, 연립내각이냐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그러나 불과 이틀 전에 장면 내각에 불참하기로 결의를 한 구파로서 다시 참여 쪽으로 선회하기란 의원들을 설득하는 데 있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또다시 동원예식장에서 구파 의원총회가 소집되었다.
유진산은 설득에 열을 올리면서 “우리와 당도 중요하지만 국가와 민족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가 비록 집권은 못했다고 하더라도 민심을 이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4·19정신을 계승함으로써 민의에 보답해야 한다.
현 단계에서는 신파와 구파를 막론하고 우선 정치적 공동책임을 의식해야 할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장장 7시간 동안 격론을 거듭한 끝에 연립내각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김도연과 유진산이 구파 측 입각자 명단을 가지고 조각의 산실인 반도호텔의 국무총리실로 향했다.
약속시간 3분 전에 도착했다.
장면 국무총리는 자기의 막료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김도연과 유진산이 내각구성에 협력하기로 결정을 보아 추천 명단을 가져온 뜻을 비치자 장면은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구파 별도의 교섭단체 등록을 보류하고, 둘째, 분당을 하지 않는 조건 하에서 거당 내각에 참여할 것을 동의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4·19혁명의 뒷처리를 해야 하는 초대 내각은 국무총리와 더불어 진퇴를 함께 할 정치적 연대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에는 신파와 구파 사이의 근본적 의견차이가 있었다.
신파는 거당 내각의 명분을 내세워 분당과 구파 별도의 교섭단체 구성을 막자는 것이고, 구파는 어디까지나 분당을 전제로 연립내각에 참여했던 것이다.
요컨대 민주당 간판 아래서 선거내각이냐, 분당을 전제한 연립내각이냐의 입장과 의견의 차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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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회담 결렬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양파 사이의 조각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김도연과 유진산이 돌아서서 나올 때 장면 국무총리는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 명단을 보여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상대에게 명단을 제시할 리 없었다.
김도연과 유진산은 그날 밤늦게 곽상훈을 방문했다. 회담 결과를 들은 곽상훈 민의원 의장은 양파 합동내각을 유산시킨 데 대해 몹시 흥분했고, 같은 보고를 받은 윤보선 대통령은 “그 사람 처음부터 우리를 기만한 게 아니냐”며 노한 반응을 보였다.


구파는 민의원과 참의원 합동의원총회를 열고 장면 국무총리의 약속위반을 신랄하게 규탄하며 도각 투쟁을 선언했다.
양파 사이에 애당초 조각협상이 없었던 것보다 더 악화되고 소원해진 결과를 초래했다.
장면 국무총리는 청와대에서 구파의 입각을 약속했으나, 조각 본부로 돌아가서는 신파 막료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약속을 이행할 수 없었다.
막료들은 “당으로부터 이미 떠난 사람들에 대해 더 신경을 쓸 것이 없다”고 주장하며 단독 내각을 역설했다.
그리고 신파 참모들은 구파와 연립내각을 구성하는 것보다 정부권력을 유인책으로 활용해서 서서히 무소속 의원들과 구파 인사들을 개별적으로 흡수하는 편이 의회 내 안전세력을 구축하는 데 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장면 국무총리는 그날 밤 오위영, 김영선, 조재천, 현석호, 이상철 등과 상의해서 조각을 완료했으며, 23일 새 내각 명단을 공표했다.


외무부 장관: 정일형

내무부 장관: 홍익표

재무부 장관: 김영선

법무부 장관: 조재천

국방부 장관: 현석호

문교부 장관: 오천석

부흥부 장관: 주요한

농림부 장관: 박제환

상공부 장관: 이태용

보사부 장관: 신현철

교통부 장관: 정헌주

체신부 장관: 이상철

무임소 장관: 김선태

국무원 사무처장: 오위영


각료들 가운데 문교부와 농림부, 무임소에는 원외 인사들이 기용되었으며, 교통부 장관에는 구파의 정헌주가 입각되었을 뿐 그 외는 신파 일색이었다.
정헌주는 구파출신이지만 국무총리 인준과정에서부터 신파 측에 동조하여 사실상 구파와는 결별 상태에 있었다.
문교부 장관 오천석만이 무소속이었을 뿐이었다. 신파 일색의 민주당 정부가 첫 선을 보이자 구파의 이탈로 원내의 안정 세력을 가질 수 없어 장면 내각은 각료들을 공표한 이래 약체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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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관료출신의 행정내각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장면 내각의 성격을 분석하면 한 마디로 전형적인 관료중심의 내각이었다. 이들의 전직은 대부분 공무원들로서 행정형이었다.
이한빈 교수가 지적했듯이 이들은 계획지향적 분자들이었다.
이런 성격에서 장면 내각의 지향성과 상황인식 및 사안의 대처방안 등을 읽을 만했다.
다분히 행정적 차원을 크게 넘어서지 못할 것이 예견되었다.
내각 명단이 발표되자 장면 국무총리는 구파의 규탄 못지않게 신파 소장의원 그룹의 거센 반발을 샀다.


이철승을 중심으로 한 소장그룹은 자기들의 기여야말로 장면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에서 완전히 소외되자 불만이 폭발했다.
이들은 내각 발표가 있던 날 하오 긴급 회합을 갖고 원내에 별도의 교섭단체 구성까지 고려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장면 정권의 원내 안정 세력 구축에 위협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소장파는 구파를 조직에서 배제함으로써 야기되는 분당 문제에서 명분을 찾아 구파의 소장의원들과 제휴하며 당의 혁신을 주장하고 나섰다.
구파와 신파 소장그룹의 협공을 받은 장면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동요되기 시작했다.


장면 국무총리는 내각을 구성한 이튿날 조만간 개각을 해야겠다고 언명한 후 불과 3일 후인 8월 26일 하오 6시 국무회의를 소집해서 당내 분규 수습을 위한 개각문제를 논의했다.
그때 국민은 구파를 포용하지 못하는 장면 국무총리의 협량에 아쉬움을 표했다.
조직협상에서 결별의 요건이 된 거당내각이냐 연립내각이냐의 문제를 초월하여 첫 내각만은 일단 신파와 구파가 다 함께 참여하는 내각을 구성했어야만 했다.


한편 구파는 8월 31일 86명 의원들로 구파 동지회를 구성한 후 민의원에 원내 교섭단체를 등록했으며, 9월 3일에는 원내총무에 양일동, 부총무에 이민우와 김영삼을 각각 선출했다.
분당준비가 한 단계씩 추진되어 가고 있었다.
이 같은 구파의 결별태세와 신파 소장그룹의 도각 위협으로 불안을 느낀 장면 국무총리는 다시 거국적인 내각을 구성하기 위해 9월 7일 홍익표 내무장관, 현석호 국방장관, 이태용 상공장관, 오위영 내각사무처 장관의 사임을 요구했다.
사임을 요구했다기보다는 이들이 스스로 장면 국무총리에게 내각 개편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퇴진을 결심했다.
이에 따라 장면의 내각은 구성된 지 2주일 만에 각료들의 사임을 받게 되었다.


장면 국무총리는 구파에게 협력을 구했다. 그는 지난번 조각협상 때의 정신을 살려 구파에게 각료 5석을 할애하고 연립내각 성격까지도 수락하겠다면서, 다만 지난번과 달리 구파에서 10명을 추천해 주면 자기가 그들 가운데 5명을 선택하겠다고 했다.
구파는 다시 의원총회를 열어 국무총리의 제안을 토의한 결과 장면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입각자들에 대한 인선은 백남훈, 김도연, 유진산 세 사람에게 일임되어 9월 9일 제1차 개각이 단행되었다.
구파에서 입각한 사람들은 권중돈 국방장관, 김우평 부흥장관, 나용균 보사장관, 박해정 교통장관, 조한백 체신장관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연립내각의 성격상 구파에서 소환하면 언제나 되돌아온다는 조건하에서 입각했다.
그리고 한 가지 유의할 점은 구파 내에서의 이들의 비중은 중간 수준급 인사였다는 것이다.
구파의 최고 지도급 인물들이 연립내각에 참여하지 않는 한 실질적인 협력은 어려웠다.
장면 국무총리의 측근인 한근조는 김도연, 유진산 등의 내각 참여 없이는 신파와 구파의 협력체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인식하고 이들의 입각을 권유하기 위해 장면 국무총리실 문을 노크했으나 유진산이 조각 회담을 마치고 돌아간 바로 뒤였다.
구파는 장면 내각이 단명할 것으로 전망하고 시간만 흐르면 자기들에게 정권이 돌아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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