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 속에 구파의 결속을 다져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의 집권 경쟁은 1960년 8월 19일 민의원에서 장면을 국무총리로 인준함으로써 결말이 나는 듯싶었지만, 구파는 이에 승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장면이 인준되던 이튿날 서울 종로 4가의 동원예식장에서 민의원과 참의원 의원들 90여 명이 모여 구파 민주당이란 이름으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것과 장면 내각에의 입각 거부를 결의하고 23인위원회에 대체되는 7인위원회를 구성했다.
7명의 위원들은 박해정, 서범석, 이충환, 윤제술, 최원호, 정순선, 박형근이었다.
이 같은 구파의 신속한 행동은 전라남도 신파에 대한 분패의 감정이 가시기 전에 그 울분의 분위기를 살려 구파의 결속을 다지고 신파에의 전향을 예방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었다.
이제 간판을 각각 내걸고 완전히 따로 살림을 차리자는 결의였다.
장면 정권의 앞날에 파탄이 예상되었다.
신파와 구파가 혼연일체 되어도 혁명과업인 반민주 인사와 부정축재자 처리 등 혁신세력 대두에 대한 대처와 분출하는 국민적 과제를 수행하기에 난관이 많았을 텐데 신파의 단독 내각으로 국정을 주도하기에는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면 국무총리는 집권의 기쁨 못지않게 앞날의 걱정스런 정국에 관해 중압감을 느꼈다.
이때 한 가닥 희망을 갖게 한 것이 곽상훈 민의원 의장이 주선한 이른바 청와대 4자회담이었다.
곽상훈은 분당을 막고 두 파가 모두 참여하는 내각을 구성케 함으로써 난국을 극복하려고 청와대 회담을 주재한 것이었다.
8월 21일 청와대에서 윤보선 대통령, 장면 국무총리, 곽상훈 민의원 의장 그리고 구파의 리더 유진산이 시국을 타개하기 위한 회담을 가졌다.
토의는 사뭇 진지했다.
장면은 새 정부 구성에 구파의 협조를 요청했다.
합의 결과 내각 구성에 신파에서 5명, 구파에서 5명, 무소속에서 2명을 참여시키되 구파의 입각 인선은 구파에게 맡기고 그 명단을 22일 밤 자정까지 장면에게 전달키로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