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치에서 태어난 사생아 레오나르도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지도

15세기경 이탈리아의 각 공화국 세력분포도

노란색, 밀라노 공화국 현재 롬바르디아 주

초록색, 베네치아 공화국 현재 베네토 주

빨강색, 피렌체 공화국 현재 토스카나 주

파란색, 볼로냐 공화국 현재 에밀리아 로마나 주



르네상스의 태동은 피렌체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제, 정치, 문화 발전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피렌체의 상공업 발달을 기반으로 한 메디치Medici 가문의 등장과 대외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으로 일구어진 베네치아의 인문주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토양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토스카나Toscana의 작은 마을에서 천재 화가이자 과학자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됩니다.


화가이면서 조각가, 건축가, 수학자, 공학가, 의학자, 음악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가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오후 10시 30분 이탈리아 중부지방 토스카나의 마을 빈치에서 태어났습니다. 빈치는 피렌체에서 약 32km 떨어진 마을로 우리나라의 읍에 해당합니다. 에트루리아에 속했다가 훗날 로마의 영토가 된 이 마을은 몬탈바노Montalbano와 아르노Arno 강 계곡 사이에 위치하며 구이디 공작의 중세 성과 산타 크로체 성당Chiesa di Santa Croce, 양로원과 몇 채의 집이 있었습니다. 13세기 중엽 피렌체의 영토가 된 빈치는 기능적이고 상징적인 요새 형상을 하고 있어 군사적, 종교적 힘의 타워를 돛대로 삼은 한 척의 배 안에 건설된 성처럼 보였습니다. 빈치Vinci는 빈치Vinchi라는 골풀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토스카나 사람들은 빈치오Vinchio라는 개울가에서 자라는 이 골풀을 엮어 다양하게 사용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성을 골풀과 동일시하여 <담비를 안은 여인>과 <모나리자>에서 골풀을 사용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할아버지 안토니오는 고조부의 공증기록부에 “1452년에 손자가 태어났는데 내 아들 세르 피에로의 아이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아이가 사생아일 경우 아이 어머니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세르 피에로는 레오나르도가 태어나던 해 피렌체 부르주아의 딸 열여섯 살의 알비에라 디 조반니 아마도리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때 피에로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고 직업이 공증인이어서 피사, 피스토이아, 피렌체 등지로 출장을 가곤 했습니다.


조르조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에 피에로를 레오나르도의 삼촌으로 적었는데, 레오나르도가 사생아임을 감추려는 의도였는지, 아니면 잘못 표기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중판에서는 이를 정정했습니다.


빈치에는 특별히 부자가 없었습니다. 피에로는 공증인이란 직업을 막 선택하고 물려받은 조그만 땅에 올리브, 밀, 메밀 농사를 지었으며, 수입은 생활하기 적당한 정도였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젖을 뗄 때까지 약 1년6개월가량 빈치로부터 수백 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어머니에게로 보내졌습니다.


어머니는 카테리나라는 여인으로 알려졌으며, 레오나르도를 출산할 때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소작농이었거나 여인숙의 머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레오나르도를 낳고 1년6개월 정도 보살핀 후 별명이 아카타브리가로 알려진, 걸핏하면 싸움질하는 안토니오 부티란 사람과 결혼하여 빈치에서 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캄포 제피에 살림을 차렸습니다. 아카타브리가는 마을 근처에서 도기 굽는 일을 했습니다. 카테리나는 곧 딸 피에라를 낳았고 딸을 셋 더 낳은 후 아들을 낳았습니다. 카테리나가 레오나르도를 낳고서도 서둘러 딴 남자와 결혼을 한 걸로 보아 피에로로부터 버림받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버지가 피렌체에서 주로 생활했기 때문에 레오나르도는 걸어서 반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어머니를 종종 찾아갔으며 레오나르도가 두세 살 때 태어난 의붓여동생 피에라와 어울려 놀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레오나르도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단지 세 개의 세금 보고서에 그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을 뿐입니다. 첫 번째 세금보고서는 1457년에 작성된 것으로 빈치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산 것으로 적혀 있으며, 피에로는 대부분의 시간을 피렌체에서 보내고 특별한 날에만 빈치로 왔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조부의 집에서 성장했고, 할아버지가 너무 늙어 함께 놀아주지 못하자 삼촌 프란체스코가 돌보았습니다. 방앗간을 운영한 그는 열여섯 살 아래인 조카를 무척 사랑했고, 어린 레오나르도도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으나 그가 결혼하자 다시금 이별을 맛보았습니다. 의붓어머니 알비에라가 1464년에 아이를 출산하다 죽었고 할아버지가 2년 후 세상을 떠났으며 얼마 후 할머니마저 타계하자 이별의 아픔은 레오나르도에게 더욱 컸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아버지의 보호 아래 피렌체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016-2

오늘날의 피렌체 모습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1799-1850)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 소설 2대 거장으로 평가되는 스탕달Stendhal(1783-1842, 본명 마리 앙리 벨Marie Henri Beyle)이 ‘중세의 런던’이라고 말한 것처럼 피렌체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상업이 발달하고 생동감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1470년 레오나르도가 그곳으로 갔을 때는 인구가 15만 명이 넘었고, 그 중 약 4분의 1이 산업노동자들이었습니다. 13세기에는 텍스타일이 발달하여 2백여 개의 공장에서 3만 명의 남녀가 일했습니다.


동전만

플로린 금화, 1331년

1플로린은 약 25달러

1크라운은 약 12달러 50센트

1두카트는 약 4달러

1굴덴은 약 1 달러


피렌체에는 부호들이 많았으며 막강한 재력을 가진 가문으로 바르디 가, 페루지 가, 스트로지 가, 피티 가, 그리고 메디치 가를 꼽을 수 있습니다. 플로린은 피렌체가 자랑하는 화폐로 매우 안정된 통화수단이었습니다. 피렌체는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명실공이 유럽의 재정적 수도였습니다. 유럽 통화에 대한 외환환율이 피렌체에서 이루어졌으며, 화물운송 보험도 이곳에서는 1300년부터 생겼습니다.


1400년의 피렌체 정부의 국고는 엘리자베스 여왕 전성기의 영국 국고보다 많았습니다. 부호들이 피렌체를 통치했고 길드의 장관prior이란 기관을 통해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이 기관은 공화국의 모든 정치기구와 행정기구를 총망라한 하나의 통치기구였습니다. 이 기관이 형식상 길드를 대표하는 기관이었던 만큼 피렌체는 길드의 도시였습니다.


정치권력은 전체 시민계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몇몇 부유한 가문에 의해서 행사되었고 또한 그들의 권력이 확고해졌습니다. 피렌체의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리치 가, 알비지 가, 메디치 가, 리돌피 가, 파지 가, 피티 가, 스트로지 가, 루첼라이 가, 발로리 가, 카포니 가, 소데리니 가가 각축전을 벌였으며, 1381년부터 1434년까지는 주로 알비지 가가 부자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메디치 가의 유래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인물은 1201년 코뮌회의 멤버 치아리시모 데 메디치입니다. 메디치란 이름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메디치 가가 한때 메디컬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음을 들어 조상이 의사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철학자 윌 뒤란트Will James Durant(1885-1981) 같은 이는 그것만으로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가문을 일으킨 장본인 아베라르도 데 메디치는 대담한 사업과 명민한 재정 관리로 큰돈을 벌었으며, 1314년에 도시장관에 기용되었습니다. 1378년에는 아베라르도의 손주조카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가 도시장관에 기용되어 가문을 빛냈으며, 살베스트로의 손주조카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1421년 도시장관에 기용되면서 메디치 가를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가문으로 만들었습니다. 조반니 디 비치Giovani di Vici(1360-1429)는 1428년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코시모Cosimo(1389-1464)에게 훌륭한 가문과 함께 179,221플로린(약 4,480,525 달러)의 재산을 남겨주었습니다. 코시모는 농장, 그리고 실크와 방모사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상속받아 생산한 제품을 러시아, 스페인, 스코틀랜드, 시리아 등 이슬람과 기독교 국가들에 수출했으며, 터키인이 제조한 제품들을 수입 판매했습니다. 동양에서 양념, 아몬드, 설탕 등을 헐값에 사들여 유럽에 비싸게 팔아 큰 이익을 챙겼습니다. 그는 사업에 전념하면서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피렌체가 루카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일조했으며, 전쟁 기간 중 거액을 정부에 빌려주었습니다. 시민계급 일부는 코시모의 영향력 하에서 적극적인 정치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고, 경제적 특권을 누리며 정부 권력의 주축을 형성해온 최소의 시민계급의 테두리 안에서는 어느 정도 사회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본법은 변동되는 일은 없었으며 오히려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악용되었습니다. 투표함은 조작되었고 관리들은 매수되거나 공갈 협박을 받아 지배계급의 로봇과도 같았습니다. 피렌체의 정체는 문벌회사의 우두머리에 의해 지배되는 비공식적 독재정치체제였습니다. 이 가문들의 우두머리는 외부적으로는 일개 시민으로 자처했으나 실제로는 형식뿐인 공화국 정치체제 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코시모는 인기 있는 사업가이면서 정치인이었지만 그를 시기한 정적에 의해 추방되어 망명의 길을 떠나야했습니다. 1433년 리날도 델리 알비지가 코시모를 몰아내고 공화국의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행정장관 베르나르도 구아다그니에게 코시모를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베르나르도는 코시모를 베키오 궁전에 구금시켰습니다. 시뇨리를 장악한 리날도가 코시모를 사형에 처할 것이 분명했지만, 코시모는 베르나르도를 1천 두카트(약 4천 달러)에 매수해 아들과 심복들을 데리고 피렌체를 떠나 그를 따르는 많은 친구들이 있던 베네치아로 망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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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직전과 직후의 차이는 무엇일까?


 

뉴욕 시의 헤이든 천문관Hayden Planetarium 관장인 천체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Neil deGrasse Tyson은 말했습니다.


코스모스의 역사를 폭로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미스터리 속 가장 깊숙이 숨겨진 부분이 기원과 관련된 것임을 발견했다.


우주와 은하 그리고 우리의 태양계에서 이 말은 사실입니다. 과학자들은 우주가 언제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정말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행방불명된 우리의 우주 96%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과학 이론은 계속 발달합니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발견을 참고하여 계속 이론을 수정합니다. 과학 이론을 추구하는 데는 이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고 그 이론을 부정할 수도 있는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믿음도 필요합니다. 개념들을 꾸준히 수정해나가는 동안 종교는 좀처럼 관여하지 않습니다.


20세기 동안 우리의 창조와 우주에 대한 과학 이론이 평행우주에 대한 주장과 팽창, 행방불명 물질과 행방불명 에너지 등으로 혼란스러워보이게 되었습니다. 20년 이상 입자 물리학자로 활약한 존 폴킹혼 경Sir John Polkinghorne(1930-)은 1979년에 영국 성공회의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종교와 과학의 공존 가능성에 관한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수백만 개의 우주들 가운데 생명에 이바지하게 된 이 하나의 우주에 사는 우리의 행운을 논하기보다 오히려 우리의 우주가 “단지 ‘하나의 낡은 세계’가 아니라, 생명을 위해 특별하고 정교하게 조율된 세계인 까닭은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의지를 가진 창조주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5세기 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지식이 과학자들로 하여금 다투어 이론들을 수정하여 보다 단순하고 설득력 있는 이론을 만들게 했습니다. 지구의 상태에 관한 부정확한 이론의 많은 문제들이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 발생했습니다. 대립은 아직 미결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세계의 창조를 지지하는 많은 증거가 21세기 과학 이론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복잡하게 변했습니다.


『신을 보여주는 21세기 과학』(도서출판 知와 사랑)의 저자 레오킴은 이러한 이론들이 보다 단순한 이론들로 진화되어 과학과 영성의 불화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영적 종교적 가르침을 과학적 신념들과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심론과 종교가 믿음에 바탕을 둔 개념을 가르치는 데 반해, 우리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개념들은 공상적으로 보인다면서 그는 더욱 심원한 학술조사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인지했습니다.


레오킴은 우선 빅뱅의 원인이 무엇이며 빅뱅에 앞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는 20세기의 위대한 물리학자 존 휠러John Wheeler(1911-2008)가 우주는 그것을 실재하게 하는 의도적 관측자 손에 달려 있다고 말한 것을 상기했습니다. 이는 우리 세계를 설명하는 많은 정신적 내용 중 그가 발견한 최초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누가 관측자였을까? 혹은 무엇이 있었을까? 하고 생각한 레오킴은 “바로 그때”란 없음을 알았다고 저서에 적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우주에서 우리 세계의 사건들 사이에 간격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레오킴은 빅뱅의 원인이 무엇일까? “저편에out there” 있는 것의 4%가 진정 우리의 실재를 만든 걸까? 하고 생각했으며, 빅뱅과 팽창의 거의 불가능한 가능성들을 이론적으로 예증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현재 무한우주infinite universe와 평행우주 개념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는 이것과 우리의 존재를 어떻게 융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우리는 무엇이며 그리고 실제 우주의 매개변수들이 무엇인지 규명하기 위해 우리는 실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 세계는 에너지의 형태인 유픽셀들로 만들어졌지만 이것들이 어떻게 생명이 되었을까?

“생명” 이란 무엇일까? 죽은 유기체나 무생물과는 반대로, 성장하고 재생하며 신진대사(진행 중인 화학적 반응)를 하는 유기체라는 것이 생명의 정의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살아 있다고 여기는 일부 요소들이 무의식적으로 배제되어 있습니다. 수년 동안 동면중인 씨앗은 살아 있는 걸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이 “살아나게” 되는 그 순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씨앗이 이미 살아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 그렇게 만든 걸까? 화학적 반응, 즉 생명의 표시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그리고 영양소를 소모시키는 소위 그램-양성gram-positive 박테리아는 어떤가? 그것들은 계속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 자신의 생물학적 에너지를 생식세포들에 쏟아 붓습니다. 거친 환경 속에서 그램-양성 박테리아는 생식세포를 창조한 뒤 존재를 멈춥니다. 박테리아 생식세포들은 살아 있는 걸까? 씨앗과 마찬가지로 생식세포는 화학적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가운데 수십 년 동안 발육 정지 상태로 있을 수 있습니다. 영양분과 적절한 환경조건, 습기를 공급하는 환경이 되면 그것들은 갑자기 활발하게 활동하는 박테리아가 됩니다. 이런 박테리아들은 유전적으로 생식세포를 생산하는 박테리아와 꼭 닮았습니다. 생식세포가 살아 있지 않다면, 그것이 활동하는 박테리아가 되도록 생명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레오킴은 생명에 관한 이 모든 의문이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궁극적인 의문으로 이어진다는 걸 알았습니다. 죽음 직전과 직후의 차이는 무엇일까? 죽음과 질병을 연구하는 데서 생명에 관한 가치 있는 정보가 나옵니다. 그는 개인적 경험들 때문에 암과 질병을 죽음과 연결시킵니다.


동물의 생명은 적절한 세포 증식이나 중지에 의한 정확한 양의 세포 성장과 분열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하나의 세포에서 태아, 어린이, 성인으로 성장한 뒤 성장이 멈춥니다. 병균이 모든 형태의 생명을 감염시키고 죽음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박테리아와 모든 생명에게 감염체에 대항하는 방어체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골수에서 이루어지는 백혈구 생산은 감염과 질병에 대한 인간의 수많은 방어체 중 하나입니다. 백혈구가 질병과 싸우는 항체를 생산하고, 항체들은 박테리아를 감싸고 삼켜버려 감염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백혈병의 경우 백혈구가 비정상이 되고 지나치게 많이 생산됩니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백혈구가 몸의 자원들을 탈취해 죽음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백혈병과 모든 암이 비정상적인 세포와 통제되지 않은 세포 확산에서 비롯됩니다. 1980년대의 전형적인 암 치료는 세포를 죽이는 일종의 독물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골수이식과 다른 암 치료들에 사용되는 방사선도 세포에 치명적인 영향을 줍니다. 암 세포가 정상 세포보다 빠르게 성장하기 때문에 환자를 죽이기 전에 암을 죽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후보 약품은 그것이 유발시킬 수 있는 독성 때문에 우선 임상 실험에서 안전 테스트를 받아야 합니다.


말기 암 환자만이 많은 암 임상 실험들에 참여할 수 있으며 환자들은 필히 위험을 감수한다는 서류에 서명을 해야 합니다.


암 환자들은 종종 통증으로 괴로워하며 몸이 쇠해져서 다양한 건강 문제를 겪게 됩니다. 레오킴이 만난 환자들의 고통이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암 환자들은 중년이거나 더 위 연배였지만, 백혈병과 같은 몇몇 종류의 암은 젊은이들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레오킴의 회사는 생명공학을 선도하며 항암제를 개발했고, 그는 신약의 임상 실험을 관찰하기 위해 많은 암센터를 방문했습니다. 백 개 이상의 질병들이 암으로 분류됩니다. 생명공학으로부터 놀라운 신약의 약속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지만 하나의 특정한 방식이 이런 다양한 질병에 마법약이 된다고는 믿기 힘듭니다.


우주의 유픽셀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더 복잡한 실체가 되는지는 과학자들도 모르지만, 유픽셀은 원자와 분자로 변형되었습니다. 초기의 지구는 어떻게든 해서 적당한 모든 화학물질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화학물질들이 어떻게 생명을 형성하게 되었을까? 단순한 단세포 박테리아는 그것의 생명과정이 기호화된 유전구조 속에 수백 개의 복합 단백질과 수백만 정보조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을 이루는 단 하나의 단백질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합니다.


과학자들은 초기 지구의 시뮬레이션에서 단순한 화학성분들을 이런 복합분자로 전환시키는 데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천체물리학자이며 수학자인 프레드 호일 경Sir Fred Hoyle(1915-2001)은 단세포 생명체의 출현 가능성을 폐품처리장에서 토네이도 소용돌이로 보잉 747을 조립할 확률에 비유했습니다.



레오킴은 우주 창조와 마찬가지로 생명 창조 역시 과학과 종교의 초점이지 갈등의 원천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널리 받아들여진 과학 이론으로 우주 창조가 설명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과 달리, 생명 창조에 대해서는 지배적인 과학 이론이 없습니다. 어느 것도 증거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어떤 제안도 이론으로조차 불리지 못합니다. 이런 견해들 중 어느 것도 창조주를 인정하거나 반대하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믿음faith이라는 말은 보통 영성과 종교에 한정됩니다. 그렇지만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나 견고한 이론조차 없으므로 생명 창조에 관한 과학적 견해 또한 일종의 믿음을 요구합니다. 이 경우 과학과 종교 모두 믿음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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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발코니 Le Balcon>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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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발코니 Le Balcon>, 1868, 유화, 170-125cm.

마네는 산보하다가 발코니에 사람들이 나와 있는 걸 보고 착상하여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이 좋아하는 고야의 <발코니의 마하들 Majas al Balcon>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고야의 작품에는 주제의 연결이 있지만, 마네의 것은 모델들이 제 각각 포즈를 취한 것이 다릅니다. 이 작품은 1869년 살롱을 통해 소개되었고, 사람들은 그때 마네의 회화 경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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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발코니의 마하들 Majas al Bal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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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화실에서의 오찬 Luncheon in the Studio>, 1868, 유화, 120-153cm.

<발코니>에서처럼 이 작품에서도 세 사람은 각자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물들의 구성 못지않게 흥미를 끄는 건 투구와 칼 그리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화분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매우 정성들여 묘사되었습니다. 마네는 검은 고양이만도 열여섯 차례에 걸쳐 습작했습니다. 노란색, 검정색, 흰색 그리고 엷은 푸른색이 조화를 이뤘으며, 부드러운 음영이 작품을 매우 깊이 있게 해줍니다.



마네가 1868년에 그린 <발코니 Le Balcon>는 고야의 <발코니의 마하들 Majas al Balcon>의 개정판과도 같은 그림으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작품은 <화실에서의 오찬 Luncheon in the Studio>과 함께 이듬해 국전에서 소개되었는데 평론가들의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꾸밈없이 투박한 녹색 발코니와 부자연스러운 세 모델의 포즈를 꼬집은 사람도 있었고 전혀 무관한 괴이한 것들의 조합에 불과하다고 혹평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발코니>의 세 모델들은 마네와 절친한 예술가들입니다. 우수에 찬 그렇지만 개성이 강하고 미모가 강렬하게 표현된 베르테 모리소는 루브르에 갔을 때 팡탱-라투르가 소개한 여인입니다. 베르테는 발코니 가까이 앉아 오른팔을 발코니를 가로막는 창살 위에 얹은 채 무심히 앞을 바라보는데, 그녀의 커다란 눈과 강한 시선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녀 옆에 파라솔을 든 여인은 수잔과 협연한 바 있는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 파니 클라우스이고, 뒤에 서 있는 남자는 풍경화가 안토냉 기유메입니다. 클라우스는 나중에 마네의 친구 화가 피에르 프린스와 결혼했습니다. 배경에 어렴풋이 보이는 커피를 나르는 소년은 레옹입니다.


기유메에 의하면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마네는 포즈가 마음에 들 때까지 15차례 이상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는 모델을 각각 독립된 포즈로 습작한 후 캔버스에 구성했는데 클라우스는 사랑스러우면서도 희극적인 멍청이처럼, 기유메는 자신감이 넘치는 멋쟁이 신사로, 베르테는 체홉이나 입센의 연극 여주인공처럼 묘사하면서 각 모델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묘사했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한 클라우스의 포즈는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살롱에 걸린 이 작품을 보고 베르테는 만족해하면서 언니 에드마에게 말했습니다.


마네의 그림은 늘 야생 열매나 아직 덜 익은 과일 냄새를 풍기는데 난 그게 마음에 들어. … 그림에서의 내 모습은 추하다기보다는 낯설어. 호기심 많은 관람자들은 내가 창녀라고 수군대는 것 같아.


마네는 1872년에 부채 위에 놓인 <바이올렛 다발>을 그려서 베르테에게 선사했습니다.

<화실에서의 오찬>에 관해서는 굴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오찬 자리인데 어째서 의자 위에 철모와 총이 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진부한 화가들이 애용하는 무기들이 왜 그곳에 있을까? 고티에는 이렇게 풍자했습니다. “저 무기는 뭐지? 결투를 마치고 식사를 했다는 건가, 아니면 식사를 마친 후에 결투를 벌이겠다는 것인가?” 중앙 앞에 서 있는 소년은 마네의 아들 레옹이고, 왼쪽에 주전자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은 하녀이며, 오른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은 쿠튀르의 화실에 재학할 때 만난 친구 화가 오귀스트 루슬랭입니다. 오른쪽의 자연스러운 정물화는 샤르댕의 화법을 답습한 것이고 커피주전자를 들고 있는 하녀의 모습은 더욱 샤르댕의 모델과 흡사합니다. 세 사람은 그림에서 수수께끼와도 같은 관계로 나타났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있는데다가 다들 모자를 썼습니다. <올랭피아>에 등장한 고양이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고양이는 앞발로 얼굴을 닦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모델이 개성 있게 묘사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점을 마네는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모델들에게 일반적인 포즈를 취할 것을 요구하고는 한 사람씩 스케치했고 이들을 한데 묶어 구성했는데, 모델들의 포즈와 주변의 사물들에 대한 배치는 그가 훌륭한 연출자였음을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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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에밀 졸라의 초상>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마네의 <에밀 졸라의 초상 Portrait d'Emile Zola>, 1868, 유화, 146.5-114cm.

그림을 자세히 보면 벽에 걸려 있는 씨름선수, 올랭피아, 벨라스케스의 <바쿠스 Bacchus>의 시선이 모두 졸라에게 향하고 있음을 봅니다. 바쿠스란 어머니가 둘인 자란 뜻입니다. 씨름선수 판화는 쿠니아키의 것으로 <아와 지방의 씨름선수 오나루 토 나다에만>입니다. 졸라는 그것들에 무관심한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졸라를 위한 그림이라면 의당 주위에 널려 있는 사물들을 졸라가 누구인지 설명하기 위한 것들로 장식되었어야 한 터인데 오히려 마네의 관심거리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마네가 일일이 배치한 것들입니다. 졸라가 마네의 화실에 일고여덟 차례 와서 포즈를 취했는데, 마치 졸라의 서재에서 그린 것처럼 보입니다. 이 작품은 1868년 살롱을 통해 선보였으며,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에밀 졸라는 1866년 2월에 바티뇰 지역으로 이주해왔으므로 카페 게르부아의 새 손님이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마네 그룹의 새 멤버가 되었습니다. 마네는 졸라에 대 한 감사의 표시로 그의 초상을 그렸습니다. 마네는 1867년 11월부터 졸라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화실에서, 다음에는 졸라의 서재에서 여러 차례의 포즈를 시도하면서 정성껏 그렸습니다. 마네는 이 그림을 살롱에 출품할 계획이었으므로 시간을 넉넉히 갖고 걸작을 만들 야심이었습니다.


졸라는 『나의 살롱』(1868. 5. 23)에서 마네가 자신의 초상을 그릴 때를 회상했습니다.


오랫동안 포즈를 취한 것으로 기억된다. 사지가 저려오고 밝은 곳에서 한동안 눈을 부릅뜨고 있는 바람에 눈시울이 쓰라릴 때, 잔잔하고도 깊은 소음 속에서 나는 줄곧 한 가지 생각에 잠겼다. 거리를 가득 채운 욕지거리, 한 사람의 거짓말과 다른 사람의 아첨, 이런 쓸데없는 것들이 내게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 가끔씩 나는 반쯤 잠긴 눈을 들어 그림 앞에 서 있는 화가를 보았다. 긴장된 표정과 날카로운 눈빛을 작품 속에 퍼붓고 있던 그는 나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바보 같은 한 인간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서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예술혼으로 나를 복사해내고 있었다. … 나를 에워싼 벽에는 그를 대표하는 힘찬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대중이 외면하려고 애쓴 작품들이었다.


<에밀 졸라의 초상 Portrait d'Emile Zola>은 1868년 살롱을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이 작품이 소개되자 사람들은 졸라의 얼굴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와 마네와의 관계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림 속에 두 사람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주는 여러 장치들이 있는데, 책상 위에는 졸라가 마네를 위해 쓴 책자가 있고 벽에는 일본 판화와 함께 <올랭피아>가 걸려 있습니다.


이러한 마네의 의도를 파악한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1840-1916)은 『라 지롱드 La Gironde』(1868. 6. 9)에 살롱에 관한 글을 기고하면서 “그 그림은 인간에 관한 표현이라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정물화에나 속한다”고 했습니다. 르동은 마네가 사실주의 화법을 사용했을 뿐 그림의 내용은 정물화와 마찬가지로 사물들을 의도에 합당하게 연출하여 그린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입니다.


보수주의를 옹호한 후퀴에르는 잡지 『르 나시오날 Le National』에서 전통적인 사실주의 회화를 두둔하면서 조형주의를 창조한 마네의 지나친 자유를 비난했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관망적이 아니며, 졸라가 입고 있는 바지는 천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마네가 이 작품을 졸라에게 주었을 때 졸라는 그다지 흡족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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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의 <에밀 졸라에게 책을 읽어주는 폴 알렉시스 Paul Alexis lisant a Emile Zola>, 1869-70, 유화, 130-160cm.


이 작품은 졸라의 절친한 고향 친구 폴 세잔이 그린 졸라의 모습과 비교할 만합니다. 졸라의 제자였고 또 비서로 지낸 폴 알렉시스Paul Alexis(1847-1901)가 졸라에게 책을 읽어주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간단한 스케치만 되어 있는 졸라의 모습은 화면 전체와 어울리지 않게 대조를 이룹니다. 세잔, 졸라, 알렉시스 세 사람 모두 엑상프로방스 출신입니다. 이 작품은 졸라가 타계하고 여러 해 후에야 졸라의 다락방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세잔은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들을 파기했는데 미완성의 이 작품이 남아 있는 게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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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자차리 아스트뤽의 초상 Portrait de Zacharie Astruc>, 1864, 유화, 90-116cm.

이 작품은 <올랭피아>와 함께 베네치아 화풍이 두드러진 것으로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비슷한 구성입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화면 오른편에 서 있는 부인이 이 작품에서는 왼편에 있는 거울에 비친 아스트뤽 부인의 뒷모습으로 변모되었습니다. 이처럼 마네는 거울이 주는 효과를 십분 활용할 줄 알았는데, 거울을 등장시켜 전통의 그림 내용을 차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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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The Venus of Urbino>, 1538년경, 유화, 119-165cm.


이 작품 또한 마네가 그린 <자차리 아스트뤽의 초상 Portrait de Zacharie Astruc>과 비교되는데, 졸라의 초상화에 비하면 아스트뤽의 초상화에는 화가의 이기심이 덜 나타나 있습니다. 별명이 ‘잘생긴 신사’인 오랜 친구 아스트뤽은 시인, 작가, 작곡가로 평론을 썼고 나중에는 조각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졸라가 등장하기 3년 전 1863년부터 마네의 우군으로서 변론에 앞장섰습니다. 마네가 마드리드로 여행을 떠난 것도 그의 충고에 의해서였으며, 일본 문화에 박식한 그가 마네에게 일본 판화를 소개했습니다. 아스트뤽은 마네의 성실한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아스트뤽 부부가 이 박품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오랫동안 마네의 화실에 방치된 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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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치료사는 아이의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미술재료의 선택 양상만큼이나 작업 과정 또한 아이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밝혀줍니다.

따라서 미술치료사는 아이가 작업하는 태도와, 전반적인 작업방식, 그리고 시간에 따른 변화를 면밀히 관찰해야 합니다.

시간에 따른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아이만의 주기, 속도, 에너지 수준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미술치료 시간 내내 일관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대부분 미술치료 시간 동안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보통은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을 풀고 편안한 태도를 보이는 편입니다.

그래서 대다수는 신체적으로나, 상징적, 그리고 언어적으로 내면의 생각이나 감정을 드러냅니다.

이는 감정이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해도 된다는 치료사의 암묵적 허락과 미술 재료를 통한 긴장 완화 덕분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공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감정에 압도되어 겁을 먹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유동성이 강해 촉각적으로 강한 자극을 주는 손가락 그림물감이나 점토를 가지고 작업하던 도중 갑작스러운 퇴행이나 분열 징후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사람의 신체 모양과 유사한 작품은 유아기의 기억이나 감정, 억압된 충동을 이끌어내는 방아쇠 역할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15세 해나는 ‘다정한 오리’를 점토로 만든 후 오리로 치료사를 툭툭 치고 뽀뽀하는 흉내를 내며 장난쳤습니다.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작품을 상징적으로 이용하는 대신 자신의 충동과 욕구를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때로는 미술치료 도중 감정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면서 작품의 형태가 눈에 띄게 퇴행하기도 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이의 작업방식이 어떻게 변화하든, 즉 점차 긴장을 풀든 더욱 긴장하든, 점차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든 마음을 열든, 두서없어지든 체계를 갖추어가든, 작업을 부드럽게 이어가든 단절된 모습을 보이든 상관없이 치료사가 할 일은 그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 변화에 내재한 역동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치료사는 미술 검사를 통해 아이의 내면을 동시에 다양한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미술 재료를 가지고 장난스럽게 혹은 계획적으로 작업하면서 자신의 실제적인 고민이나 상상 속 고민을 자유롭게 털어놓습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재료를 가지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작업하지만 최종 결과물을 내놓지 않기도 합니다.

도널드란 소년은 점토를 결에 따라 잘 정돈한 후, 매끄럽게 매만지고는, 얇게 자르더니 나중에 그것을 ‘괴물’이라고 했습니다.


의식적인 에너지를 치료사와의 대화에 모두 쏟느라 자신이 미술 재료를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셰리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셰리는 자신의 형제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반쯤 완성시켜놓은 점토 인형을 자신도 모르게 짓이겼습니다.

또 신디라는 아이는 어머니와의 불화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 이야기할 때마다, 불상과 유사한 인형에 임신한 듯 부풀어 오른 배와 가슴을 만들었다가 없애기를 반복했습니다.


미술을 통해 아이들의 내면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론들은 아이들이 만든 최종 작품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동 미술치료』의 저가 주디스 아론 루빈은 아이들이 남긴 영구적인 기록에는 그 아이에 대한 많은 정보가 담긴 것이 사실이지만, 작업 과정과 관련된 요소들 또한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선이나 구도 같은 미술작품의 형태적 요소들은 아동의 인지 체계와 내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주요 실마리를 제공해줍니다.

사실 형태 요소들은 아동의 발달 단계를 보여주는 가장 신뢰도 높은 지표입니다.


그러나 특정한 형태 요소에 특정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일반적인 생각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예컨대 지나치게 많은 그림자가 불안감과 관련 있다는 보편적 상징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자가 항상 불안감을 나타내는 건 아니며, 작은 그림이 반드시 심리적 위축을 상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일반화는 엄청난 신수를 자아낼 수 있습니다.


성인이 그린 그림 속 가 형태의 의미를 하나하나 밝히고자 한 시도는 지금까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아직 발달이 오나성되지 않은 아이들이 그린 그림 속 형태의 의미를 밝히기란 더욱 까다로울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접근법은 그러한 일반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필요한 경우 그 상관관계를 이용해 가설을 세우되 다른 가능성도 있음을 늘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미술치료사는 아이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앞서 설명했던 비언어적 신호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의미 있게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의 형태적 특징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전반적인 구도, 형태의 명확함, 완성도, 좌우 대칭성, 동세, 색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은 아이의 상태를 평가하고, 파악하며, 때로는 진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형태적 특성을 지표로 삼을 때도 마찬가지로 신중해야 합니다.

형태적 특성에 불변의 의미가 있다는 일반화를 경계하면서, 아이가 미술 활동을 하는 동안 나타나는 실제적인 맥락에 의지해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문헌에서 각 색상에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여겨왔습니다.

예컨대 검정색은 우울증과, 노란색은 기쁨과 관련시켜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흑인종 아이들에게 검정색은 자부심을, 노란색은 두려움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색상 선택의 의미를 평가할 때는 항상 미술 작업 과정 전체의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한 연구에서 미취학 아동의 경우 색상을 팔레트에 놓인 순서대로, 즉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색상 선택과 관련해 매우 흥미롭고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늘 갈색만을 사용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교양 넘치는 어머니는 딸에게 심리적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어, 딸의 손을 잡고 심리 상담소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검사를 담당한 임상심리학자는 아이에게서 어떤 문제의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시종일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자가 아이에게 왜 늘 갈색만을 사용했는지 툭 터놓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바로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교실 뒷줄에 앉는데, 크레용 상자가 제게 건네질 때쯤이면 갈색밖에 안 남아 있거든요.


아이가 깊이 생각한 후 의도적으로 색상을 고르는 경우 대개 중요한 의미가 담긴 것이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이의 발달 수준에 따라 그림의 정교성에도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그림의 형태적 특성에 담긴 의미를 덮어놓고 일반화시키는 것 또한 미술치료사로서 지양해야 할 태도입니다.

모든 아이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기준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자칫하다가는 교육자, 임상의, 일반인의 오용이나 남용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창조 과정’과 ‘최종 결과물’을 떨어뜨려 생각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이가 도화지에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화지를 어떤 식으로 색칠하는지 과정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미술작품의 내용만큼이나 형태도 중요하지만, 미술작품을 어떤 순서에 따라 완성했는지도 최종 결과물의 특징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아동이 창조한 미술작품의 형태적 요소를 관찰할 때는 무엇을 그리는지보다는 그 내용이 어떤 식으로 전달되는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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