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치료사는 아이의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미술재료의 선택 양상만큼이나 작업 과정 또한 아이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밝혀줍니다.
따라서 미술치료사는 아이가 작업하는 태도와, 전반적인 작업방식, 그리고 시간에 따른 변화를 면밀히 관찰해야 합니다.
시간에 따른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아이만의 주기, 속도, 에너지 수준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미술치료 시간 내내 일관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대부분 미술치료 시간 동안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보통은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을 풀고 편안한 태도를 보이는 편입니다.
그래서 대다수는 신체적으로나, 상징적, 그리고 언어적으로 내면의 생각이나 감정을 드러냅니다.
이는 감정이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해도 된다는 치료사의 암묵적 허락과 미술 재료를 통한 긴장 완화 덕분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공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감정에 압도되어 겁을 먹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유동성이 강해 촉각적으로 강한 자극을 주는 손가락 그림물감이나 점토를 가지고 작업하던 도중 갑작스러운 퇴행이나 분열 징후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사람의 신체 모양과 유사한 작품은 유아기의 기억이나 감정, 억압된 충동을 이끌어내는 방아쇠 역할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15세 해나는 ‘다정한 오리’를 점토로 만든 후 오리로 치료사를 툭툭 치고 뽀뽀하는 흉내를 내며 장난쳤습니다.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작품을 상징적으로 이용하는 대신 자신의 충동과 욕구를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때로는 미술치료 도중 감정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면서 작품의 형태가 눈에 띄게 퇴행하기도 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이의 작업방식이 어떻게 변화하든, 즉 점차 긴장을 풀든 더욱 긴장하든, 점차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든 마음을 열든, 두서없어지든 체계를 갖추어가든, 작업을 부드럽게 이어가든 단절된 모습을 보이든 상관없이 치료사가 할 일은 그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 변화에 내재한 역동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치료사는 미술 검사를 통해 아이의 내면을 동시에 다양한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미술 재료를 가지고 장난스럽게 혹은 계획적으로 작업하면서 자신의 실제적인 고민이나 상상 속 고민을 자유롭게 털어놓습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재료를 가지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작업하지만 최종 결과물을 내놓지 않기도 합니다.
도널드란 소년은 점토를 결에 따라 잘 정돈한 후, 매끄럽게 매만지고는, 얇게 자르더니 나중에 그것을 ‘괴물’이라고 했습니다.
의식적인 에너지를 치료사와의 대화에 모두 쏟느라 자신이 미술 재료를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셰리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셰리는 자신의 형제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반쯤 완성시켜놓은 점토 인형을 자신도 모르게 짓이겼습니다.
또 신디라는 아이는 어머니와의 불화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 이야기할 때마다, 불상과 유사한 인형에 임신한 듯 부풀어 오른 배와 가슴을 만들었다가 없애기를 반복했습니다.
미술을 통해 아이들의 내면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론들은 아이들이 만든 최종 작품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동 미술치료』의 저가 주디스 아론 루빈은 아이들이 남긴 영구적인 기록에는 그 아이에 대한 많은 정보가 담긴 것이 사실이지만, 작업 과정과 관련된 요소들 또한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선이나 구도 같은 미술작품의 형태적 요소들은 아동의 인지 체계와 내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주요 실마리를 제공해줍니다.
사실 형태 요소들은 아동의 발달 단계를 보여주는 가장 신뢰도 높은 지표입니다.
그러나 특정한 형태 요소에 특정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일반적인 생각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예컨대 지나치게 많은 그림자가 불안감과 관련 있다는 보편적 상징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자가 항상 불안감을 나타내는 건 아니며, 작은 그림이 반드시 심리적 위축을 상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일반화는 엄청난 신수를 자아낼 수 있습니다.
성인이 그린 그림 속 가 형태의 의미를 하나하나 밝히고자 한 시도는 지금까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아직 발달이 오나성되지 않은 아이들이 그린 그림 속 형태의 의미를 밝히기란 더욱 까다로울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접근법은 그러한 일반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필요한 경우 그 상관관계를 이용해 가설을 세우되 다른 가능성도 있음을 늘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미술치료사는 아이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앞서 설명했던 비언어적 신호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의미 있게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의 형태적 특징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전반적인 구도, 형태의 명확함, 완성도, 좌우 대칭성, 동세, 색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은 아이의 상태를 평가하고, 파악하며, 때로는 진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형태적 특성을 지표로 삼을 때도 마찬가지로 신중해야 합니다.
형태적 특성에 불변의 의미가 있다는 일반화를 경계하면서, 아이가 미술 활동을 하는 동안 나타나는 실제적인 맥락에 의지해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문헌에서 각 색상에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여겨왔습니다.
예컨대 검정색은 우울증과, 노란색은 기쁨과 관련시켜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흑인종 아이들에게 검정색은 자부심을, 노란색은 두려움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색상 선택의 의미를 평가할 때는 항상 미술 작업 과정 전체의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한 연구에서 미취학 아동의 경우 색상을 팔레트에 놓인 순서대로, 즉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색상 선택과 관련해 매우 흥미롭고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늘 갈색만을 사용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교양 넘치는 어머니는 딸에게 심리적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어, 딸의 손을 잡고 심리 상담소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검사를 담당한 임상심리학자는 아이에게서 어떤 문제의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시종일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자가 아이에게 왜 늘 갈색만을 사용했는지 툭 터놓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바로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교실 뒷줄에 앉는데, 크레용 상자가 제게 건네질 때쯤이면 갈색밖에 안 남아 있거든요.”
아이가 깊이 생각한 후 의도적으로 색상을 고르는 경우 대개 중요한 의미가 담긴 것이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이의 발달 수준에 따라 그림의 정교성에도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그림의 형태적 특성에 담긴 의미를 덮어놓고 일반화시키는 것 또한 미술치료사로서 지양해야 할 태도입니다.
모든 아이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기준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자칫하다가는 교육자, 임상의, 일반인의 오용이나 남용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창조 과정’과 ‘최종 결과물’을 떨어뜨려 생각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이가 도화지에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화지를 어떤 식으로 색칠하는지 과정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미술작품의 내용만큼이나 형태도 중요하지만, 미술작품을 어떤 순서에 따라 완성했는지도 최종 결과물의 특징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아동이 창조한 미술작품의 형태적 요소를 관찰할 때는 무엇을 그리는지보다는 그 내용이 어떤 식으로 전달되는지에 주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