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의 <에밀 졸라의 초상>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마네의 <에밀 졸라의 초상 Portrait d'Emile Zola>, 1868, 유화, 146.5-114cm.

그림을 자세히 보면 벽에 걸려 있는 씨름선수, 올랭피아, 벨라스케스의 <바쿠스 Bacchus>의 시선이 모두 졸라에게 향하고 있음을 봅니다. 바쿠스란 어머니가 둘인 자란 뜻입니다. 씨름선수 판화는 쿠니아키의 것으로 <아와 지방의 씨름선수 오나루 토 나다에만>입니다. 졸라는 그것들에 무관심한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졸라를 위한 그림이라면 의당 주위에 널려 있는 사물들을 졸라가 누구인지 설명하기 위한 것들로 장식되었어야 한 터인데 오히려 마네의 관심거리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마네가 일일이 배치한 것들입니다. 졸라가 마네의 화실에 일고여덟 차례 와서 포즈를 취했는데, 마치 졸라의 서재에서 그린 것처럼 보입니다. 이 작품은 1868년 살롱을 통해 선보였으며,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에밀 졸라는 1866년 2월에 바티뇰 지역으로 이주해왔으므로 카페 게르부아의 새 손님이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마네 그룹의 새 멤버가 되었습니다. 마네는 졸라에 대 한 감사의 표시로 그의 초상을 그렸습니다. 마네는 1867년 11월부터 졸라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화실에서, 다음에는 졸라의 서재에서 여러 차례의 포즈를 시도하면서 정성껏 그렸습니다. 마네는 이 그림을 살롱에 출품할 계획이었으므로 시간을 넉넉히 갖고 걸작을 만들 야심이었습니다.


졸라는 『나의 살롱』(1868. 5. 23)에서 마네가 자신의 초상을 그릴 때를 회상했습니다.


오랫동안 포즈를 취한 것으로 기억된다. 사지가 저려오고 밝은 곳에서 한동안 눈을 부릅뜨고 있는 바람에 눈시울이 쓰라릴 때, 잔잔하고도 깊은 소음 속에서 나는 줄곧 한 가지 생각에 잠겼다. 거리를 가득 채운 욕지거리, 한 사람의 거짓말과 다른 사람의 아첨, 이런 쓸데없는 것들이 내게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 가끔씩 나는 반쯤 잠긴 눈을 들어 그림 앞에 서 있는 화가를 보았다. 긴장된 표정과 날카로운 눈빛을 작품 속에 퍼붓고 있던 그는 나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바보 같은 한 인간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서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예술혼으로 나를 복사해내고 있었다. … 나를 에워싼 벽에는 그를 대표하는 힘찬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대중이 외면하려고 애쓴 작품들이었다.


<에밀 졸라의 초상 Portrait d'Emile Zola>은 1868년 살롱을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이 작품이 소개되자 사람들은 졸라의 얼굴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와 마네와의 관계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림 속에 두 사람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주는 여러 장치들이 있는데, 책상 위에는 졸라가 마네를 위해 쓴 책자가 있고 벽에는 일본 판화와 함께 <올랭피아>가 걸려 있습니다.


이러한 마네의 의도를 파악한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1840-1916)은 『라 지롱드 La Gironde』(1868. 6. 9)에 살롱에 관한 글을 기고하면서 “그 그림은 인간에 관한 표현이라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정물화에나 속한다”고 했습니다. 르동은 마네가 사실주의 화법을 사용했을 뿐 그림의 내용은 정물화와 마찬가지로 사물들을 의도에 합당하게 연출하여 그린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입니다.


보수주의를 옹호한 후퀴에르는 잡지 『르 나시오날 Le National』에서 전통적인 사실주의 회화를 두둔하면서 조형주의를 창조한 마네의 지나친 자유를 비난했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관망적이 아니며, 졸라가 입고 있는 바지는 천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마네가 이 작품을 졸라에게 주었을 때 졸라는 그다지 흡족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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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의 <에밀 졸라에게 책을 읽어주는 폴 알렉시스 Paul Alexis lisant a Emile Zola>, 1869-70, 유화, 130-160cm.


이 작품은 졸라의 절친한 고향 친구 폴 세잔이 그린 졸라의 모습과 비교할 만합니다. 졸라의 제자였고 또 비서로 지낸 폴 알렉시스Paul Alexis(1847-1901)가 졸라에게 책을 읽어주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간단한 스케치만 되어 있는 졸라의 모습은 화면 전체와 어울리지 않게 대조를 이룹니다. 세잔, 졸라, 알렉시스 세 사람 모두 엑상프로방스 출신입니다. 이 작품은 졸라가 타계하고 여러 해 후에야 졸라의 다락방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세잔은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들을 파기했는데 미완성의 이 작품이 남아 있는 게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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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자차리 아스트뤽의 초상 Portrait de Zacharie Astruc>, 1864, 유화, 90-116cm.

이 작품은 <올랭피아>와 함께 베네치아 화풍이 두드러진 것으로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비슷한 구성입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화면 오른편에 서 있는 부인이 이 작품에서는 왼편에 있는 거울에 비친 아스트뤽 부인의 뒷모습으로 변모되었습니다. 이처럼 마네는 거울이 주는 효과를 십분 활용할 줄 알았는데, 거울을 등장시켜 전통의 그림 내용을 차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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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The Venus of Urbino>, 1538년경, 유화, 119-165cm.


이 작품 또한 마네가 그린 <자차리 아스트뤽의 초상 Portrait de Zacharie Astruc>과 비교되는데, 졸라의 초상화에 비하면 아스트뤽의 초상화에는 화가의 이기심이 덜 나타나 있습니다. 별명이 ‘잘생긴 신사’인 오랜 친구 아스트뤽은 시인, 작가, 작곡가로 평론을 썼고 나중에는 조각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졸라가 등장하기 3년 전 1863년부터 마네의 우군으로서 변론에 앞장섰습니다. 마네가 마드리드로 여행을 떠난 것도 그의 충고에 의해서였으며, 일본 문화에 박식한 그가 마네에게 일본 판화를 소개했습니다. 아스트뤽은 마네의 성실한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아스트뤽 부부가 이 박품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오랫동안 마네의 화실에 방치된 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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