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치에서 태어난 사생아 레오나르도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지도

15세기경 이탈리아의 각 공화국 세력분포도

노란색, 밀라노 공화국 현재 롬바르디아 주

초록색, 베네치아 공화국 현재 베네토 주

빨강색, 피렌체 공화국 현재 토스카나 주

파란색, 볼로냐 공화국 현재 에밀리아 로마나 주



르네상스의 태동은 피렌체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제, 정치, 문화 발전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피렌체의 상공업 발달을 기반으로 한 메디치Medici 가문의 등장과 대외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으로 일구어진 베네치아의 인문주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토양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토스카나Toscana의 작은 마을에서 천재 화가이자 과학자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됩니다.


화가이면서 조각가, 건축가, 수학자, 공학가, 의학자, 음악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가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오후 10시 30분 이탈리아 중부지방 토스카나의 마을 빈치에서 태어났습니다. 빈치는 피렌체에서 약 32km 떨어진 마을로 우리나라의 읍에 해당합니다. 에트루리아에 속했다가 훗날 로마의 영토가 된 이 마을은 몬탈바노Montalbano와 아르노Arno 강 계곡 사이에 위치하며 구이디 공작의 중세 성과 산타 크로체 성당Chiesa di Santa Croce, 양로원과 몇 채의 집이 있었습니다. 13세기 중엽 피렌체의 영토가 된 빈치는 기능적이고 상징적인 요새 형상을 하고 있어 군사적, 종교적 힘의 타워를 돛대로 삼은 한 척의 배 안에 건설된 성처럼 보였습니다. 빈치Vinci는 빈치Vinchi라는 골풀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토스카나 사람들은 빈치오Vinchio라는 개울가에서 자라는 이 골풀을 엮어 다양하게 사용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성을 골풀과 동일시하여 <담비를 안은 여인>과 <모나리자>에서 골풀을 사용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할아버지 안토니오는 고조부의 공증기록부에 “1452년에 손자가 태어났는데 내 아들 세르 피에로의 아이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아이가 사생아일 경우 아이 어머니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세르 피에로는 레오나르도가 태어나던 해 피렌체 부르주아의 딸 열여섯 살의 알비에라 디 조반니 아마도리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때 피에로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고 직업이 공증인이어서 피사, 피스토이아, 피렌체 등지로 출장을 가곤 했습니다.


조르조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에 피에로를 레오나르도의 삼촌으로 적었는데, 레오나르도가 사생아임을 감추려는 의도였는지, 아니면 잘못 표기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중판에서는 이를 정정했습니다.


빈치에는 특별히 부자가 없었습니다. 피에로는 공증인이란 직업을 막 선택하고 물려받은 조그만 땅에 올리브, 밀, 메밀 농사를 지었으며, 수입은 생활하기 적당한 정도였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젖을 뗄 때까지 약 1년6개월가량 빈치로부터 수백 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어머니에게로 보내졌습니다.


어머니는 카테리나라는 여인으로 알려졌으며, 레오나르도를 출산할 때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소작농이었거나 여인숙의 머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레오나르도를 낳고 1년6개월 정도 보살핀 후 별명이 아카타브리가로 알려진, 걸핏하면 싸움질하는 안토니오 부티란 사람과 결혼하여 빈치에서 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캄포 제피에 살림을 차렸습니다. 아카타브리가는 마을 근처에서 도기 굽는 일을 했습니다. 카테리나는 곧 딸 피에라를 낳았고 딸을 셋 더 낳은 후 아들을 낳았습니다. 카테리나가 레오나르도를 낳고서도 서둘러 딴 남자와 결혼을 한 걸로 보아 피에로로부터 버림받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버지가 피렌체에서 주로 생활했기 때문에 레오나르도는 걸어서 반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어머니를 종종 찾아갔으며 레오나르도가 두세 살 때 태어난 의붓여동생 피에라와 어울려 놀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레오나르도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단지 세 개의 세금 보고서에 그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을 뿐입니다. 첫 번째 세금보고서는 1457년에 작성된 것으로 빈치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산 것으로 적혀 있으며, 피에로는 대부분의 시간을 피렌체에서 보내고 특별한 날에만 빈치로 왔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조부의 집에서 성장했고, 할아버지가 너무 늙어 함께 놀아주지 못하자 삼촌 프란체스코가 돌보았습니다. 방앗간을 운영한 그는 열여섯 살 아래인 조카를 무척 사랑했고, 어린 레오나르도도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으나 그가 결혼하자 다시금 이별을 맛보았습니다. 의붓어머니 알비에라가 1464년에 아이를 출산하다 죽었고 할아버지가 2년 후 세상을 떠났으며 얼마 후 할머니마저 타계하자 이별의 아픔은 레오나르도에게 더욱 컸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아버지의 보호 아래 피렌체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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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피렌체 모습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1799-1850)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 소설 2대 거장으로 평가되는 스탕달Stendhal(1783-1842, 본명 마리 앙리 벨Marie Henri Beyle)이 ‘중세의 런던’이라고 말한 것처럼 피렌체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상업이 발달하고 생동감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1470년 레오나르도가 그곳으로 갔을 때는 인구가 15만 명이 넘었고, 그 중 약 4분의 1이 산업노동자들이었습니다. 13세기에는 텍스타일이 발달하여 2백여 개의 공장에서 3만 명의 남녀가 일했습니다.


동전만

플로린 금화, 1331년

1플로린은 약 25달러

1크라운은 약 12달러 50센트

1두카트는 약 4달러

1굴덴은 약 1 달러


피렌체에는 부호들이 많았으며 막강한 재력을 가진 가문으로 바르디 가, 페루지 가, 스트로지 가, 피티 가, 그리고 메디치 가를 꼽을 수 있습니다. 플로린은 피렌체가 자랑하는 화폐로 매우 안정된 통화수단이었습니다. 피렌체는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명실공이 유럽의 재정적 수도였습니다. 유럽 통화에 대한 외환환율이 피렌체에서 이루어졌으며, 화물운송 보험도 이곳에서는 1300년부터 생겼습니다.


1400년의 피렌체 정부의 국고는 엘리자베스 여왕 전성기의 영국 국고보다 많았습니다. 부호들이 피렌체를 통치했고 길드의 장관prior이란 기관을 통해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이 기관은 공화국의 모든 정치기구와 행정기구를 총망라한 하나의 통치기구였습니다. 이 기관이 형식상 길드를 대표하는 기관이었던 만큼 피렌체는 길드의 도시였습니다.


정치권력은 전체 시민계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몇몇 부유한 가문에 의해서 행사되었고 또한 그들의 권력이 확고해졌습니다. 피렌체의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리치 가, 알비지 가, 메디치 가, 리돌피 가, 파지 가, 피티 가, 스트로지 가, 루첼라이 가, 발로리 가, 카포니 가, 소데리니 가가 각축전을 벌였으며, 1381년부터 1434년까지는 주로 알비지 가가 부자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메디치 가의 유래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인물은 1201년 코뮌회의 멤버 치아리시모 데 메디치입니다. 메디치란 이름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메디치 가가 한때 메디컬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음을 들어 조상이 의사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철학자 윌 뒤란트Will James Durant(1885-1981) 같은 이는 그것만으로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가문을 일으킨 장본인 아베라르도 데 메디치는 대담한 사업과 명민한 재정 관리로 큰돈을 벌었으며, 1314년에 도시장관에 기용되었습니다. 1378년에는 아베라르도의 손주조카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가 도시장관에 기용되어 가문을 빛냈으며, 살베스트로의 손주조카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1421년 도시장관에 기용되면서 메디치 가를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가문으로 만들었습니다. 조반니 디 비치Giovani di Vici(1360-1429)는 1428년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코시모Cosimo(1389-1464)에게 훌륭한 가문과 함께 179,221플로린(약 4,480,525 달러)의 재산을 남겨주었습니다. 코시모는 농장, 그리고 실크와 방모사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상속받아 생산한 제품을 러시아, 스페인, 스코틀랜드, 시리아 등 이슬람과 기독교 국가들에 수출했으며, 터키인이 제조한 제품들을 수입 판매했습니다. 동양에서 양념, 아몬드, 설탕 등을 헐값에 사들여 유럽에 비싸게 팔아 큰 이익을 챙겼습니다. 그는 사업에 전념하면서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피렌체가 루카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일조했으며, 전쟁 기간 중 거액을 정부에 빌려주었습니다. 시민계급 일부는 코시모의 영향력 하에서 적극적인 정치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고, 경제적 특권을 누리며 정부 권력의 주축을 형성해온 최소의 시민계급의 테두리 안에서는 어느 정도 사회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본법은 변동되는 일은 없었으며 오히려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악용되었습니다. 투표함은 조작되었고 관리들은 매수되거나 공갈 협박을 받아 지배계급의 로봇과도 같았습니다. 피렌체의 정체는 문벌회사의 우두머리에 의해 지배되는 비공식적 독재정치체제였습니다. 이 가문들의 우두머리는 외부적으로는 일개 시민으로 자처했으나 실제로는 형식뿐인 공화국 정치체제 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코시모는 인기 있는 사업가이면서 정치인이었지만 그를 시기한 정적에 의해 추방되어 망명의 길을 떠나야했습니다. 1433년 리날도 델리 알비지가 코시모를 몰아내고 공화국의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행정장관 베르나르도 구아다그니에게 코시모를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베르나르도는 코시모를 베키오 궁전에 구금시켰습니다. 시뇨리를 장악한 리날도가 코시모를 사형에 처할 것이 분명했지만, 코시모는 베르나르도를 1천 두카트(약 4천 달러)에 매수해 아들과 심복들을 데리고 피렌체를 떠나 그를 따르는 많은 친구들이 있던 베네치아로 망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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